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아저씨 싸움 실력이 너무 좋기 때문에 경호원이 필요 없다고 봐요. 그날 밤은 제가 너무 빨리 움직였어요. 제가 그날 밤 아저씨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아저씨 실력으로도 충분히 그 나쁜 사람들은 해결하셨을 거예요. 제가 너무 빨리 참견해서 오히려 아저씨 실력이 드러날 기회가 없어진 거죠. 저도 아저씨의 실력을 볼 기회가 줄어든 거죠.”그러자 소지훈은 재빨리 말했다.“제가 무술 할 줄 아는 건 맞지만 윤하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그날 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저 혼자서는 분명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거에요. 제가 윤하 씨만큼 대단하지 않아요.”“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지만 저는 거의 데리고 다니지 않아요. 가끔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외출하는 편이죠. 하지만 제가 고용한 경호원들은 몸집이 커서 다른 사람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정도뿐이지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아요. 단지 몇몇 건달들을 상대할 수 있을 실력이에요.”“만약 전업적인 사람들을 만난다면 전혀 상대되지 않을걸요. 게다가 지난번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는 윤하 씨와 같은 진정한 고수가 필요해요.”소지훈은 자기 경호원들이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정말 애를 쓰고 있었다.어차피 소지훈의 부하들이 곁에 없기 때문에 그가 뭐라고 해도 부하들이 변명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그들이 모두 소지훈의 눈앞에 있다고 해도 감히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소지훈은 운명적인 여신에게 구애하기 위해 그의 경호원들을 정윤하에게 매를 맞고 경찰서까지 끌려가게 했다.그들은 지금은 회복해서 퇴원했지만, 앞으로는 정윤하가 알아볼까 봐 그녀를 피해 다녀야 했다.정윤하가 말했다.“관성의 안전 상황은 이미 매우 좋다고 봐요. 지난번처럼 사고는 조사해 보셨어요? 누군가 일부러 아저씨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노린 것 같아요.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평소에 경호원이 필요 없는데 경호원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소지훈이 웃으면서 말했다.“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참, 제가 두 박스의 물건을 배송했는데 받으셨나요? 제가 배송 기록을 확인해보니 오늘 받아보실 수 있다고 하던데.”소지훈은 관성의 특산품을 많이 샀다. 그중 정수호 부부의 영양제도 들어있었다.물론 수신자는 정윤하의 이름으로 적어놓았다.정윤하는 그의 운명적인 여신이기 때문에 정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그리고 먼 곳에서 왔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정윤하가 대답했다.“그건 잘 모르겠어요. 오후에 공항으로 왔기 때문에 택배가 있으면 아마 집에 배송될 거에요. 우리 엄마가 종일 집에 있으니까 택배를 받으실 거예요. 지훈 씨, 무슨 물건을 보냈어요? 너무 돈을 낭비하지 마세요.”“관성의 특산품들이에요. 지난번에 너무 급하게 가서 준비한 특산품이 많지 않았어요. 이번에 제가 좀 더 사서 이틀 전에 택배로 보냈거든요. 그럼 오늘 제가 도착하면 택배도 도착할 수 있잖아요.”“저의 부모님은 윤하 씨가 제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고도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고 저를 호되게 꾸지람하셨어요. 감사할 줄 모른다면서요. 은혜는 항상 몇 배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제가 감사할 줄 모르는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요.”정윤하도 웃으며 말을 건넸다.“지훈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이미 저에게 보답했는걸요. 지난번에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시합에 갔을 때 제가 돈 한 푼도 낼 필요 없이 우리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나가서 재미있는 것도 놀게 해줬잖아요. 그리고 특별히 저를 전 대표님 결혼식에 데려간 것도 모두 저에 대한 보답이세요.”“그래도 부족하죠. 보답은 많이 해야 해요.”몸으로 보답을 허락해 주면 더 좋지만 말이다.“지훈 씨 부모님들 너무 놓은 분들이시네요.”정윤하는 소균성 부부를 만났는데 너무 열정적이고 자상한 느낌을 받아 그들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소균성 부부의 소질은 매우 좋고 말씨도 매우 부드러웠다. 최민주가 자신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본 정윤하는 최민주가 그녀를
정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안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정씨 가문 식구들은 모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차 소리가 나자 정윤하의 큰오빠 정혁주가 여동생의 차인 것을 확인하더니 웃으면서 마중 나갔다. 그리고 소지훈을 도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소 대표님.”“형, 저는 소지훈이에요.”소지훈은 정혁주보다 나이가 많지만, 정윤하를 따라 형님이라고 불렀다. 정혁주는 노동명처럼 성격이 털털한 사람이라 소지훈이 뭐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았다.“다들 두 사람이 도착하여 밥 먹기를 기다려요.”정혁주는 차 뒤로 가더니 트렁크를 열어 안에서 소지훈의 캐리어를 꺼냈다.정윤하가 말했다.“오빠, 지훈 씨가 호텔 예약했어요. 이따가 밥 먹고 제가 호텔까지 데려다줄 거에요. 캐리어를 꺼낼 필요 없어요.”“그래? 혹은 호텔 예약을 취소하시겠어요? 우리 집에 빈방이 많은데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에서 묵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연성으로 출장을 오실 때마다 우리 집에서 묵으세요.”정혁주는 소지훈과 여동생이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친구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소지훈이 연성으로 출장을 온 이상 소지훈을 잘 대접해 주고 싶었다.“그럴 리가요. 예약한 호텔을 취소해도 돼요. 그럼 저는 지금 호텔을 취소하고 여기에 묵도록 할게요. 여러분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가 일이 바빠서 매일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데 여러분의 정상적인 휴식을 방해할 것만 같아 걱정이네요.”소지훈의 출장은 핑계였지만 또 핑계가 아니었다.소지훈은 정말로 연성에서 사업을 발전하고 투자를 늘리고 싶어 했다.이렇게 하면 그는 자주 와서 정윤하를 볼 수 있었고 또 정윤하가 앞으로 친정집에 가서 며칠 더 묵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들 소씨 가문이 연성에 세력이 없으면 안 되었다.앞으로 그는 연성에 자주 오려고 계획했다. 만약 연성에 세력이 없다면 소지훈의 개인 안전은 물론, 소지훈 때문에 정씨 가문 식구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걱정했다. 그는 그런 일들을 허용하지 않았다.하여 소지
정윤하는 정혁주를 꾸지람했다.“또 술을 마시면 엄마가 우리 집안의 좋은 술을 다 팔아버릴걸요.”그녀도 술을 좋아하지만, 술에 아주 약했다.정윤하의 어머니 윤미연도 계집애가 주량이 약한데도 술을 마시면 사고 치기 쉽다고 정윤하를 술을 못 마시게 했다.정혁주가 멋쩍게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소 대표님을 우리 집에 있게 해야지. 소 대표님은 우리 집의 손님이니까 우리 집에 야식을 포장해 오시면 우리가 술을 내놓고 마시면 얼마나 좋아. 술을 적게 마시면 이튿날 출근하는 데 지장도 주지 않아서 엄마도 아무 말 안 하실 거야.”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과 다름없었다.그때 정혁주는 소지훈이 생각났다.지난번에 소지훈이 왔을 때, 정윤하만 빼고 모두 술을 마셨다.정혁주는 소지훈을 이용해서 술을 마시려고 했다. 누가 그들 정씨 성을 가진 부자가 정씨 성을 가지지 않은 윤미연의 손에 꽉 잡혀 살게 했는지...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소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여기 있는 동안 형이 드시고 싶은 야식이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포장해 올게요.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시고 한 잔만 하시죠. 이모도 형님 건강을 고려하셔서 그러는 거예요.”그는 미래의 처남에게 잘 보이고 싶지만 그렇다고 또 장모님의 미움을 살 수는 없었다.장모님과 처남 사이에서 소지훈은 분명 장모님의 편을 들 것이다.정혁주가 말을 건넸다.“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마시고 싶을 때만 조금씩 마시는 편이에요. 우리 어머니께서 나오셨으니까 그만 말해요.”어머니의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들은 정혁주는 정윤하와 소지훈에게 술에 관한 주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었다. 윤미연이 들으면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소지훈은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정씨네 남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밖으로 마중 나온 윤미연을 보면서 예의 갖춰 인사했다.“이모, 제가 또 폐를 끼치러 왔어요.”윤미연은 소지훈을 반갑게 맞아주며 인사
윤미연은 늘 정수호에게 딸을 잘못 가르쳤다고 잔소리했다. 24살의 처녀가 연애해본 적이 없고 중매 아주머니가 남자친구를 소개해도 사귀지 못한다면서, 정윤하가 남자를 형제로 생각하게 했다고 늘 불평했다.친구는 무슨... 정녕 애인으로 될 수는 없단 말인가!정수호는 윤미연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윤미연을 놀렸다. 두 사람 함께 몸조리 잘해서 딸 하나 더 낳아 막내딸을 숙녀로 키우면 어떻겠냐면서 말이다. 결국, 윤미연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정수호를 한 대 때렸다.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될 나이인데 어찌 또 낳을 수 있겠는가!낳고 싶었으면 젊었을 때 벌써 낳았을 텐데.“식사하세요. 밤에 수면에 영향이 갈 텐데 지훈 씨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어떡해요? 당신도 참, 밤에 잘 주무시지 못하면 어떡해요...”윤미연이 부엌에서 요리들을 들고나오면서 남편에게 몇 마디 했다.정수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훈 씨가 멀리서 오신 손님인데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하는 게 도리 아니야? 지훈 씨, 식사하러 가요. 윤하야, 가서 좋은 술 한 병 가져와. 내가 지훈 씨랑 말도 잘 통하니 오늘 저녁에 한 잔 마셔야겠어.”정윤하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엄마, 나도 마셔도 돼?”윤미연은 정윤하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두 모금만 마셔. 너의 주량으로 더 마시면 망신당할 수 있으니까.”두 모금 마시는 것이 술 못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윤하는 기뻐하며 가서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좋은 술 한 병을 가져왔다.정혁주는 일찍이 술잔을 준비해 두었다.소지훈이 있었기에 술을 좋아하는 정씨 가문의 식구들은 술을 맛볼 수 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윤미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많이 마시지는 못했다.“엄마, 지훈 씨가 출장하러 와 있는 동안 큰오빠가 지훈 씨를 우리 집에 머물게 하시라면서 예약한 호텔을 취소하라고 했어요.”정윤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윤미연과 정수호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윤미연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빈방이 있는데... 지훈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지훈은 부모의 행동을 막을 능력이 없다고 하여 정씨 가문 식구들은 허탈해했다.소지훈의 부모님이 정말 오신다면 그들이 잘 대접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따르릉...윤미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쳐다보지도 않고 이내 전화를 받았다.“박씨 아줌마시군요.”전화기 너머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윤하 남매는 귀가 솔깃해져 윤미연과 박선주의 전화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우리 윤하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시려고요? 상대방은 무슨 직업을 가진 남자예요? 우리 윤하 상황을 아시죠? 예전처럼 윤하가 또 폭행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겠죠? 박씨 아줌마, 제가 먼저 말하는데 만약 남자가 우리 윤하가 가정폭력을 휘두를까 봐 걱정하는 남자라면 이 일을 주선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라면 우리 윤하가 평생 혼자 살게 할지언정 시집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런 가정폭력 성향의 남자와 저의 딸을 결혼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박선주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이번에는 그런 남자 아니에요. 저도 그 남자와 분명히 말했어요. 윤하가 좋은 아가씨라고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소탈해서 저도 윤하를 너무 좋아하는걸요. 우리 아들이 성년이라면 윤하를 저의 아들과 맞세웠을 거예요.”“이번에 윤하에게 소개한 사람은 제 동료의 아들이에요. 제 동료의 집안 형편이 좋아서, 당신 집안의 형편과도 겨룰 수 있다니까요. 그 집 아들은 큰 회사에서 일하는데 평소에 일이 너무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요. 하여 저를 찾아왔는데 제가 윤하가 생각났던 거에요. 저의 동료가 내일 두 사람을 만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는데 윤하가 시간이 있을까요?”박선주가 물었다.“박씨 아줌마 동료의 아들은 사람 됨됨이가 어때요? 인품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 딸을 함정에 빠뜨리면 안 돼요. 호호호...”윤미연은 정윤하가 스물네 살에 아직 연애를 못 해 봐서 좀 조급한 마음은 있지만 그렇다고
정윤하는 담담하게 반찬을 집어 먹다가 윤미연이 눈치채지 못할 때 몰래 술을 조금 따라서 급히 마셨다. 그리고 윤미연이 고개를 올려 정윤하를 보았을 때 정윤하는 이미 술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밥을 먹을 때였다. 하여 방금 딸이 술을 훔쳐 마신 것을 윤미연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소지훈은 그 장면이 너무 웃겼다.소지훈은 감히 정윤하의 술잔에 술을 채우지 못했다. 미래의 장모님이 엄격히 단속하여 집안의 남자들도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집에 손님이 와도 술 두 잔 정도만 마시게 할 뿐 더는 못 마시게 했다. 하여 그는 장모님의 규칙을 깨뜨리지 않고 장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려 했다.“네, 박씨 아줌마의 직장 동료의 아들이래요. 우리 윤하와 내일 만나게 하기로 약속했어요. 우리 집 도장 근처에 있는 근사한 밀크티 가게에서 만나게 하겠대요.”윤미연은 휴대전화를 정수호에게 보여주면서 조용하게 물었다.“이 남자가 이렇게 생겼는데 만나게 할까요? 살이 좀 찐 것으로 보면 딱 봐도 운동이 부족한 모양인데.”정수호가 휴대전화를 건네받자 정혁주도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보더니 싫은 티를 냈다.“돼지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제 동생과 어울리겠어요? 엄마, 박씨 아줌마가 어떻게 이런 남자를 제 여동생에게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좀 좋은 남자를 소개해 달라고 하세요. 적어도 좀 멋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못생겼는데 앞으로 내 조카가 이 남자의 모습을 닮으면 정말 못생기면 어떡해요? 조카가 외삼촌을 닮는다고 하던데, 저를 닮아야 예쁠 텐데.”윤미연이 꾸지람했다.“너도 좋은 남자인데 왜 너에게 소개해 주는 여자마다 다 싫어해? 정말 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좀만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야 할걸.”정혁주가 고개를 돌려 소지훈에게 물었다.“소 대표님도 저보다 두 살 위인데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하시죠?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부모님께 결혼 재촉을 당하시죠? 그리고 여기저기 전화해서 하루에 800번 소개팅을 주선해 주
게다가 정윤하는 소지훈을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소지훈은 지난번에 왔을 때 이미 정씨 집안의 예비 사윗감 선정에서 탈락하였다. 순간 말문이 막힌 윤미연은 내밀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만약 내일 박씨 아줌마한테서 약속 취소한다는 연락이 오지 않으면 계획대로 출발해. 어차피 약속 장소도 우리 도장과 멀지 않으니.”“넌 내일 출근할 때, 아예 긴 치마와 하이힐을 챙겨서 가. 상대방이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면 넌 긴 치마에 하이힐을 바쳐 신고 약속 장소에 나가. 그래야 숙녀답지. 매일 보디가드같은 차림새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네 지금 차림새를 보면 한 대 얻어맞을까 봐 겁 안 나겠어?”“엄마, 지금 무슨 계절인데 나보고 치마를 입어라고 해? 나 감기 걸리는 거 보고 싶어?”정윤하는 소지훈의 술잔을 흘끔 훔쳐보았다. 대신 좀 마셔주고 싶었다.“누가 너보고 여름 치마 입으라고 했어? 겨울 치마 입으면 되지.”“엄마, 내 옷장에는 치마라곤 없어. 나는 커서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어.”정윤하는 치마 입기를 딱 질색했다. 왜냐하면, 치마를 입고 무술을 연습하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난 하이힐도 못 신어. 하이힐을 신으면 걸음도 제대로 못 걷겠어.”“혹시 누구랑 싸울 일이라도 생기면, 하이힐을 신고 어디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그러자 소지훈이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왜 제대로 못 싸워요? 하이힐을 신은 발로 상대방을 걷어차면 아파서 곧 기절할걸요. 또 상대방이 도망치려고 하면 하이힐을 벗어서 힘껏 던져요. 적중이라도 하게 되면 그놈은 아마도 아파서 한동안 끙끙거릴걸요.”그 말에 정씨 집안 식구들은 일제히 시선을 소지훈에게 던졌다.소지훈은 계면쩍은 듯이 말했다.“저도 TV에서 이런 장면을 봤어요. 이모님,
전태윤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얼굴만 비추고 대략 30분 정도 머물렀다가 바로 자리를 뜨자. 당신은 술 마시지 말고 그 여자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좋은 건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그럼 태윤 씨 말대로 30분만 머물러요. 하지만 당신 옆에 딱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있는 곳엔 사람들이 알아서 몇 미터씩 떨어지니까요.”모두가 그녀가 전태윤이 애지중지하는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겨우 임신에 성공한 그녀의 아이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실수로 넘어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연루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예정은 이 상황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관성 상류층 사람들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아기를 낳고 나서야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전태윤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현명한 거야.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아.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데 간접흡연을 많이 하면 좋을 게 없잖아.”하예정이 임신한 후, 전태윤은 그녀를 사교 모임에 데려가지 않았다. 간접흡연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서였다.“그럼 그냥 안 갈게요. 아기를 낳고 나서 당신이랑 모임에 나가죠 뭐. 사실 그 여자가 누군지 저랑은 아무 관계도 없잖아요. 낯익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만난 적이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 거겠죠.”전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도 서로 모르는 걸 보면 전에도 잘 안 맞았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친구가 되었겠지.”하예정은 많은 귀부인들과 잘 맞지 않았고 그들과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다. 그녀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사실 전태윤도 아내가 사교 모임에 가지 않는 것을 더 바랐다. 만약 그녀가 참석하면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낼 동안 옆에서 지켜야 했다. 그러
“그놈이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분명 내가 친누나인데 이복누나인 여운초를 믿다니!”여운별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한편, 하예정은 방금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젊은 주부가 정교한 인피 가면을 쓴 여운별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실 하예정은 여운별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다. 변장한 여운별의 체형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하예정의 친한 지인 범위에는 여운별이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익숙하고도 차분한 발소리가 들리자 하예정은 서점 밖으로 나갔다.“태윤 씨!”하예정은 환한 미소를 띠며 남편을 향해 걸어갔다. 전태윤은 눈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보고 싶었어.”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예정이 작게 말했다.“다들 보고 있잖아요.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그래요.”전태윤과 함께 온 경호원 한 명이 봉투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서점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건넸다.전태윤이 직접 아내를 데리러 왔기 때문에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에 남아 가게를 봐주기로 했고 음식을 준비한 것도 직원들이 서점에서 식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전태윤은 아내의 손을 잡고 차로 향하며 물었다.“피곤하지 않아?”“안 피곤해요. 저 그렇게 약하고 여리지 않아요.”하예정은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답게 단호히 말했다.전태윤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우리 아내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데.”“말만 번지르르하네요.”전태윤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하예정이 올라타자 그도 따라 탔고 문을 닫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레 말했다.“그럼 벌로 뽀뽀 한 번 해줘야겠네.”하예정이 그를 살짝 밀어내며 작게 말했다.“사람들이 웃어요.”“아참. 방금 당신 오기 10분 전
용태호는 여운별에게 약속했다.만약 예씨 가문 사모님의 양자가 자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임이 확인되어 그 아이를 데려오게 되면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여운별에게 넘기겠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의 큰 며느리도 여운별에게 맡기겠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용태호는 자신이 뱉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이 끝난 후 여운별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지만 그녀는 용태호가 자신을 위해 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 허황한 꿈을 꾸고 있었다.경호원들 또한 용태호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운별을 감시하고 돕는 역할만 맡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꿈을 꿀 수 있도록 놔두는 것이 그들한테는 최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용 사장을 위해 일할 동기를 잃을 게 뻔했다.여운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왜 저한테 이렇게 냉정하고 무정하게 대하는 거죠? 사람들 앞에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거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치 관리인처럼 그녀를 철저히 통제했다. 그들은 싸움에도 능했고 여운별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한 번은 그녀가 용태호에게 그들에 대해 고자질했지만 용태호는 그녀에게 경호원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만 조언했다.“그들은 무식하고 자비를 모르는 자들이야. 손에 피를 묻혀본 경험도 많지.”이 말에 겁이 난 여운별은 다시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경호원 중 한 명이 냉정하게 말했다.“오늘 당신은 새로운 얼굴로 하예정 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운별의 신분으로 돌아가 언니를 다시 한번 도발하세요. 그들이 여운별의 소식을 놓치면 곧바로 사장님의 부인 신분을 의심할 겁니다.”여운별이 실종된 상태에서 낯선 용씨 가문의 사모님이 갑작스레 나타난다면 두 사람을 연결 지으려는 의심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여운별은 경호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
전태윤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자 여운별은 급히 좌석에 몸을 낮추어 바깥에서 그녀를 볼 수 없도록 했다.사실 전태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지만 여운별은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볼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들통날까 걱정했다.하예정이 그녀를 감옥에 보낸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방심해 하예정의 무술 실력을 몰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예정 뒤에 전태윤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여운별 역시 용 사장을 등에 업었지만 전태윤의 전용 차량을 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숨고 싶어 했다.전태윤의 차량이 지나가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운별을 발견했다. 바깥에서 보면 마치 뒷좌석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경호원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여운별은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몰래 살폈다. 전태윤의 차량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도하며 자세를 바로 세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급히 몸을 숨기느라 옷이 약간 구겨졌는데 모두 명품 옷이라 그녀는 저절로 조심스럽게 다뤘다.“방금 지나간 차들, 누구 차인지 아세요? 그 롤스로이스는 전태윤이 자주 사용하는 차량이에요. 뒤따라온 차량들은 그의 경호팀 차량이고요. 그의 경호팀은 항상 그를 따라다녀요.”여운별은 긴장한 얼굴로 설명했다.전태윤이 경호팀을 대동하는 이유는 과거 그의 열렬한 팬들이 과도하게 따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경호팀을 유지했는데 이는 젊은 여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아내의 오해를 사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특히 과거 도차연 사건은 전태윤과 하예정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전태윤과 도 대표가 사업을 논의하면서 도차연에게 접근할 기회를 줬고 하예정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도차연은 전태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를 찾아 애정 행각이 담긴 사진을 찍어 하예정에게 보냈다.경호원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자신의 얼굴을 만져
“사장님께서는 아가씨에게 더 많이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성격도 고치고 온화하며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귀부인의 태도를 갖추라고 하셨죠. 예전처럼 오만하고 거칠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경호원의 말에 여운별은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당신들은 그 귀부인들이 오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여자들도 꽤 오만한 점이 있어요. 당신들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을 뿐이죠.”“우리 여씨 가문도 명문가라고요. 나는 단지 나이가 어리고 성격이 좀 강해서 그렇지 품위가 없는 건 아니에요. 나도 품위를 지킬 줄 알아요. 예전 내 사교계에도 다 명문가의 딸들과 부잣집 아가씨들뿐이었죠.”비록 여운별의 어머니가 형부와 재혼하며 사교계에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가문의 둘째 딸로서 그녀가 관성의 상류층에서 차지한 지위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여운별은 자신이 성소현 같은 이들과는 비교될 수 없더라도, 많은 부잣집 딸들보다 훨씬 낫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의 기품과 교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지금은 스무 살로 한창 꽃다운 시기였다. 조금 오만하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큰 문제냐는 태도를 유지했다.“아가씨, 지금은 관성에 있으니 더 이상 여씨 가문의 부잣집 아가씨 행실을 하면 안 됩니다. 이를 꼭 명심하세요. 만약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정체가 드러난다면 매우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사장님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으시거든요.”경호원의 경고는 이어졌다.“게다가 사모님의 수완도 뛰어나십니다. 사장님이 직접 나서지 않고 사모님께 아가씨를 넘기시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겁니다. 사모님은 당신이 어느 명문의 딸인지 개의치 않으십니다. 당신의 목숨은 사모님의 한마디에 달려 있죠.”이 말을 들은 여운별의 얼굴이 굳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