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구, 아까 뭐 봤어?”침묵하고 있던 전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강일구는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김 비서가 대표님 손바닥을 스치는 것을 봤습니다.”이렇게 말한 후, 그는 뭔가 떠오른 듯 얼른 말을 바꾸었다.“아니요, 대표님.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대표님께서 이렇게 훌륭하시니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대표님은 오랫동안 그들을 곁에 두셨고, 그들의 주요 직책은 젊은 여성들이 대표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김 비서가 대표님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주 뻔했다.“앞으로, 3m 이내에 가족 이외의 젊은 여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전태윤은 예전처럼 가족 이외의 젊은 여성을 3미터 이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결혼 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 다시는 그에게 흥미를 갖는 여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유부남이라는 신분을 무시하고 그를 유혹하려는 이가 존재했다.만약 그런 수작에 넘어간다면 그는 전태윤이 아니었다. 그를 유혹할 수 있는 여자는 하예정 뿐이었다.“예.” 강일구는 빠르게 대답한 후,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담보했다.“사모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전태윤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벙어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야겠지.”강일구는 두피가 저렸다. 벙어리가 되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사모님 앞에서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말한다 해도 대표님이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했다.대표님은 사모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단언컨대, 돌아가자마자 대표님은 가장 먼저 사모님께 이 일을 알려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으니 잘 단속해달라고 말이다.20분 후, 전태윤의 전용차가 별장으로 들어섰다. 2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자, 전태윤은 아내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집사가 그를
“집사님, 저도 아무것도 못 들었고, 더구나 본 것도 없어요. 전 쉬러 가볼게요.” 강일구는 결국 고객 딸이 대표님에게 반해 유혹 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신속히 물러났다. “저놈이...”집사는 강일구를 향해 낮게 욕설을 퍼부은 후, 기사를 보았다.“집사님, 저도 진짜로 아무것도 못 봤어요. 대표님께서 하신 말도 못 들었고 그냥 운전만 했어요.”“시간이 늦었으니까 저도 이만 가볼게요.”기사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떠났다. 다른 경호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대표님과 같은 차를 탄 사람은 강일구뿐이었고, 그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몰랐다. 집사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전태윤은 1층에 머물지 않고 올라갔다. 그는 서재에 도착한 다음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일에 집중하느라 하예정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전태윤이 돌아왔다는 사실도 몰랐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집사가 그녀에게 휴식하라고 타이르러 왔다고 생각했다. “집사님, 이제 쉴 거예요.”이때 서재 문이 열리면서 전태윤이 들어왔다. 익숙한 발소리에 하예정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이 전태윤인 것을 발견하자,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컴퓨터를 끈 후 몸을 일으켜 남편에게 다가갔다.“왔어요?”전태윤은 하예정 앞에 걸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남편과 눈을 마주치자, 하예정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남편이 그녀를 이런 시선으로 본지 꽤 되었다. 금방 결혼했을 때, 서로 서먹하다 보니 그는 이렇게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었다.“여보, 왜 이렇게 날 봐요?”하예정이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전태윤의 넓은 품에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를 고 그의 심장 소리도 들으니 남편이 그녀에 대한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최근에 그를 이렇게 두렵게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전태윤이 러브레터를 원하자, 그녀는 인터넷에서 많은 시를 검색해서 편지에 적어넣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업상의 일이 아니네.하예정은 눈을 반짝이며 계속 물었다.“그럼 무슨 일인데요? 말 좀 해봐요. 부부 사이에 감출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당신도 그랬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감추지 않겠다고.”“여보.”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누가 날 유혹했어.”“...”하예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누가 감히 이 전태윤 씨를 유혹한단 말이야...’그는 밖에서 온종일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가까이 오기만 해봐’ 하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며 경호원들과 동행하면서 낯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데 어떻게 유혹을 당한단 말인가.남자라면 모를까.이렇게 생각한 하예정이 물었다.“설마 남자가 그랬어요? 당신이 좋대요?”동성이라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고, 그러니 상대방이 남편을 유혹했다고 생각했다.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여자야. 오늘 밤 바이어랑 미팅을 하는데 김 대표가, 그러니까 김 대표 여비서가 그분 딸이었어. 나랑 악수할 때 내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는 거 있지.”말을 하면서 그는 그녀의 손을 놓은 후, 김이현이 스치고 지나간 오른손의 손바닥을 들며 아내에게 고자질했다.“여보, 이 손이야. 그 여자가 스치고 지나간 손.”억울하면서도 싫어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하예정은 웃음이 나왔다.부부가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어도 이미 대외에 공식적으로 알린 상태였다. 누가 그들이 합법적인 부부라는 것을 모를까. 그런데도 그에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전태윤의 비인간적인 외모에다 성공한 기업인 이미지는 고귀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니, 자석처럼 어디 가서든 초점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누군가 그녀처럼 전태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인간은 본래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그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사람들의 눈길을 듬뿍 받았다.하예정은 그의 오른손을 잡은 후, 손바닥을 보며 웃었다.“내가 씻겨줄까요?”전태윤
하예정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주형인과 서현주를 봐요. 물론 서현주 탓만 할 수는 없지만 주형임이 가장 많이 잘못했어요.”그래서 지금 서현주는 벌을 받고 있었다.주형인은 아직이지만.전태윤은 가엾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여보, 난 당신 거니까 앞으로 날 감싸줘. 다른 여자가 나한테 어쩔 수 없게, 응?”“좋아요. 내가 당신을 감싸줄게요. 앞으로 미팅 있을 때, 나도 모든 사람에게 ‘전태윤은 오직 하예정 것이다’라고 소유권 알릴게요. 누가 감히 우리 하예정 남자를 빼앗는다면 그들을 때려눕힐 거예요.”“여보, 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지?”“그럼 나 어떻게 말해요?”전태윤은 또 말을 하지 않았다.하예정은 그의 얼굴에 뽀뽀한 후, 그를 껴안고 상반신을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부드럽게 말했다.“여보, 화내지 마요. 나 꼭 약속 지킬게요. 미팅도 같이하고 응?”“사실 나도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은 거 알아요? 당신은 이렇게 훌륭하고, 난 또 당신과의 거리가 너무 멀잖아요. 커리어 여성 눈에는 난 당신과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날 무시하고 항상 내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죠.”“우리가 결혼한 후, 비록 연적은 만나지 못했지만, 진짜 생겼다면 난 분명 혼신의 힘을 다해야 당신을 지킬 수 있을 거예요.”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혹시 못 지키면 날 내줄 생각이야?”역시 부부답게 전태윤은 아내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하예정은 속으로 한마디 했다.‘독심술 같은 게 있나?’“그럴 리가요. 내 남자를 어찌 순순히 내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달라요. 편히 헤어져야 이혼해도 친구로 지낼 수 있거든요.”한때 행복했던 사이었는데 이혼 후 원수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주형인처럼 밖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헤어질 생각이었다.그녀는 남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떠나서도 여전히 행복
적어도 그녀의 가장 진지한 감정이었다.그녀가 베껴온 아름다운 시보다 훨씬 나았다,편지지 뒤에는 또 글자가 있었다.“밖에서 조깅하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아침 같이 먹어요.”전태윤은 기분 좋게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은 후 서랍에 넣었다.그는 창가로 가서 두꺼운 커튼을 열었는데, 햇빛이 순식간에 비쳐왔다.여름에는 아침 해가 유독 눈부시게 느껴졌다.무더운 여름이 지난 후, 시원한 가을엔 그와 하예정의 결혼식이 있었다.전태윤은 그들 부부 사이 사랑의 결실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대사님은 그들의 아이가 가을에 올 거라고 아주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때가 아니면 부부 사이 아무리 금슬이 좋아도 아이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예진 그룹의 예준성이 아들딸을 낳게 된 후, 전태윤은 제법 부러웠다.아이의 백일잔치에 그는 하예정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물론 돌잔치에도 갈 것이다.전태윤은 예준성에게 그가 두 아이를 양아버지로 삼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운을 따라서 하예정도 쌍둥이를 낳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쌍둥이가 힘들다면 딸이라도 좋았다. 이건 전씨 가문 전체의 소원이었다. 하예정이 딸을 낳는 것.물론 전태윤은 하예정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매번 아이를 언급할 때마다, 심지어 다른 집의 아이를 언급할 때도, 하예정은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어쩌면 아이는 한 명도 없나 하고 생각했다.특히 심효진이 신혼여행 중에 임신했다는 점에서 더욱 스트레스받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감히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자칫하다가 안 좋은 생각을 할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에 전태윤은 아내가 사업하는 것을 지지해 주었다. 바빠지면 아이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전태윤은 밖에서 운동하는 아내를 발견했다.운동복에 운동화를 신고 마당을 뛰어다녔는데 묶은 그녀의 긴 달릴 때마다 좌우로 흩날렸다.전태윤의 시선은 하예정의 그림자를 따라갔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창가를 떠났다.얼마 후 그도 운동복으로 갈아입
하예정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좋아요. 언니가 지금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에 가서 노 대표를 돌보고 있어요. 노 여사님께서 부탁하셨거든요.”전태윤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노 여사는 노동명이 지금 이렇게 된 게 너무 후회되었다. 아들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설령 하예진에게 무릎을 꿇고 빌라고 해도 기꺼이 할 것이다. “동명이 처형을 만나줄까?”전태윤이 물었다.“물어보진 않았지만, 언니가 노 대표를 돌보기로 했니까 병실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떼써서라도 들어갔을 거예요...’역시 친자매답다니까. 하예정은 자기 언니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전태윤은 말했다.“동명이 더 이상 안 좋은 생각은 그만하고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어.”예전의 노동명과 지금의 그를 생각해 보면 전태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였어도 자신감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다 잘될 거예요.”하예정은 그에게 말했다. “우리 두 바퀴 더 뛰어요. 이따가 우빈이가 깬 다음에 함께 아침을 먹고 학교에 데려줘요. 곧 여름 방학이 되면 서점도 두 달 동안 문을 닫을 거예요.”“여보, 여름방학 때 뭐 할래요?”그녀는 왕년 여름 방학 때 여행을 가서 조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맛보곤 했다.“여름방학은 학생들을 위한 거야. 직장인인 난 방학이 없어.”조깅하며 전태윤은 웃었다.“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봐. 지금부터 야근하면서 여름방학 때 시간 비워둘게.”“나도 요즘 바빠요. 예전 같지가 않아요. 휴, 학생들이 방학하면 쉴 수도 없네요.” 하예정은 몇 바퀴를 뛰었더니 조금 힘들어져 걷는 것으로 바꾸었다.“그때 가서 다시 얘기 해요. 우빈이는 지금 세 살이니까 난 우빈이를 데리고 나가서 시야를 넓혀주고 싶어요. 여름 방학이 지나면 유치원 중반의 어린이잖아요.”“응, 잘 생각한 다음 시간을 정하자. 그리고 예 대표 두 아이가 백일잔치를 열 때 한 번 가야 해. 함께 축하해 줘야지.”전태윤은 자신이 예준성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준성이 쌍둥이
우빈이는 눈만 깜빡일 뿐 어느 곳이 어떻게 불편한지는 말하기 어려웠다.“평소에는 큰 소리로 외치던데 오늘은 나른한 걸 봐서 어딘가 불편한 거야, 여보 체온계 좀 가져와 체온을 재봐.”전태윤이 말하는 사이에 하예정은 이미 체온계를 가지고 와서 우빈이의 체온을 재기 시작했다.몇 분 후.전태윤은 꼬마의 겨드랑이에서 체온계를 꺼내 하예정에게 건넸다.하예정은 체온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38점 3도, 정말 열이 나네요. 이마를 만질 때는 체온이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았는데... 체온계로 재보니 이렇게 높네요. 위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요. 그리고... 무관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휴가도 내야하고...”하예정은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무관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빈이를 도와 휴가를 신청했다.이때 전태윤이 위로했다.“너무 당황하지 말고 우선 찬물로 열부터 좀 내리고 봐. 그다음 가정의에게 와서 봐달라고 하자.”“그 방법도 좋은 것 같네요.”하예정은 몸을 돌려 조카에게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우빈아, 자, 물 좀 마실래? 열이 나면 미지근한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해.”전태윤의 품에 안겨있는 우빈이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하예정은 물컵을 들고 앉아서 우빈이에게 물을 먹여줬고, 반쯤 마시자 우빈이는 더는 마시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우빈아, 그럼 우리 죽 좀 먹을까?”우빈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일어나서 타월을 찬물에 적셔 가져와 우빈이의 이마에 놓아주었고 죽 한 그릇을 떠 와서 먹여주기 시작했다.꼬마는 몸이 불편한지 반 그릇도 채 먹지 않고 더는 먹기 싫다고 했다.하예정은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달래보았지만 실패했다.우빈이를 자기 아이처럼 보살펴온 하예정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둘 사이의 감정은 진짜 모자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초조해하며 아이에게 미지근한 물을 먹여주기도 하고, 또 위층으로 올라가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다.그리고 30분 간격으로
가정의가 이어 말했다.“사모님, 제가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찬물찜질로 체온이 완전히 떨어지거든 약은 먹이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만약 체온이 반복하여 38. 5도를 넘으면 그때 다시 약을 먹이도록 해요. 저는 내일 다시 와서 볼게요.”“지금 약을 먹이지 않아도 괜찮은가요?”하예정이 이렇게 묻자 전태윤이 대신하여 대답했다.“모든 약에는 독성이 있는 법이야. 약을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먹지 말아야지.”작은 병에도 약을 먹고 수액을 맞으면 저항력이 내려가기 쉽다.하예정도 가능한 한 약을 먹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우빈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나 언니나 모두 매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아이가 곧 좋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기만 하면 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약을 먹일 생각부터 한다.그녀는 몇 분 후 체온계를 꺼내 들여다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은 37. 8도까지 떨어졌어요.”“이모, 만두 먹고 싶어요.”온도가 조금 내려가자 꼬마는 다시 입맛이 돌았고, 이모의 품에서 벗어나며 만두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좋아, 그럼 만두 먹자.”하예정은 또 가정의에게 물었다.“이렇게 물리적으로 열이 내리기만 하면 당분간 약을 먹지 않아도 되죠?”“네, 당분간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우빈이의 몸은 큰 문제가 없었다. 아마 밤에 이불을 걷어차서 감기에 걸려 열이 난 것으로 추측됐다.하예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가정의는 꼬마가 하루 먹을 약을 처방해 준 후 몇 마디 당부하고서야 떠났다.우빈이에게 만두를 먹일 때에야 하예정은 비로소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하예진은 이미 병원에 있었다.노동명은 여전히 경호원에게 하예진을 문밖에 막아두라고 분부했다.하예진은 여전히 윤미라의 도움을 받아 당당하게 노동명의 병실에 들어갔다.그녀가 사 온 꽃다발을 머리맡에 놓자, 노동명은 꽃다발을 집어 들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하예진은 아무 말 없이 노동명을 위해 끓여온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