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도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태윤 씨는 저에게 정말 잘해줘요.”할머니의 말은 언니가 늘 하던 잔소리와 같았다.전화기 너머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전태윤은 할머니에게 물었다.“언제 돌아오세요?”“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빨리는 못 돌아갈 거야.”전태윤과 하예정은 동시에 걱정되어 물었다.“어디 아프신가요?”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했는데도 할머니는 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고 알리지 않았다. 웃으며 말하시는 것만 듣고는 컨디션이 좋은 줄만 알았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현의 차에 놀라 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조금 아플 뿐이야. 고현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족에게도 알렸어. 다만 강성에야 호영이밖에 없으니 그 녀석에게만 알린 거야.”전태윤은 말이 안나왔다.“...할머니, 꼭 그 작전을 써야 했어요?”‘나이가 적지도 않으신데 그렇게 주저앉다니, 잘못해서 뼈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시는지.’할머니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정말 잘못하여 넘어진 거야.”전태윤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기까지 들은 하예정은 그녀가 할머니를 구하게 된 것도 할머니께서 연기하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명의 은인으로서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전태윤과 그녀를 결혼시킬 목적이었다.지금은 또 전호영을 상대로 이 수법을 쓰고 있다.수법은 같지만 유용하면 되었다. 고현이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할머니의 목적이었다.“할머니, 고현 씨는 잘생겼나요?”“잘생겼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잘났어.”하예정은 호기심에 물었다.“호영 도련님은 마음에 들어 해요?”“호영이보다 고현이가 더 잘났어.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하든 안 하든 난 고현이가 좋아. 말수도 적고... 태윤이랑 많이 닮은 것 같아.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젊은 여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데, 그건 남장을 한 것을 들킬까 봐 두려워서 그래. 고현처럼 말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호영이 같은 남자가 남편감으로 제일일 거야. 호영이는 말을 잘해서 누구와도
고현은 곧게 뻗은 수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목구비도 뚜렷했고 몸매도 늘씬하여 보기 좋았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남장을 해왔고 일부러 가짜 목젖까지 만들었다.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씨 가문은 아이에 대한 보호도 철통같아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의 자료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고현은 처음으로 얼굴을 알릴 때 남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씨 사모님이 쌍둥이를 낳은 줄 알고 고현을 큰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그녀는 양손에 많은 보양식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보양식을 침대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병실에 할머니밖에 없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머니, 손자분은요?”“금방 깨서 호영이가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자는 걸 보고 물건 사러 나갔나 봐요. 고현 씨, 어서 앉아요.”할머니는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고현은 얼른 제지하며 말했다.“할머니, 아직 앉으시면 안 돼요. 의사가 많이 누워 있어야 빨리 회복할 수 있다고 했어요.”사실 할머니는 별일 없었다.고현은 어르신이 나이가 꽤 있는 것을 보고, 일이 생길까 봐 끝까지 병원에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비록 무사하다고 결과가 나왔지만 계속 아프다고 해서 의사는 며칠 입원해 관찰하라고 권했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사기 치는 게 아닌지 의심할 법도 했지만 전씨 일가의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전호영의 신분을 알고 있다.그의 친할머니라는 건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관성의 갑부 전씨 가문의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할머니의 명성은 이미 아주 멀리 퍼졌다.고현의 말을 듣고 할머니는 다시 누웠다.“할머니, 오늘은 어때요? 아직도 아프세요?”고현은 할머니의 침대 옆에 앉았다.“이젠 아프지 않아요. 그저 그때 좀 심하게 놀란 것 같아요. 요 며칠간 계속 중간에 놀라서 깨어나 잠을 설쳤어요.”그녀는 그 말을 듣고 침묵에 잠겼다가 잠시 후 다시금 미안하다는 듯
고현은 계속하여 말했다.“할머니는 관성에서 자유자재로 어디 다니시던지 누구도 아무 말 못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수법을 하예정에게 쓸 때는 아주 잘 먹혔다.고현한테 쓰니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그녀는 어르신과 함께 여기저기 놀러 다니겠다고 먼저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이때 전호영이 돌아왔다.그는 할머니가 깨어나지 않은 틈을 타 먼저 자기 일을 처리하러 갔다.점심때가 가까워지자, 그는 비로소 호텔에서 할머니에게 드릴 점심을 포장해 왔다.멀리서 할머니의 병실 입구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고현이 할머니를 문병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할머니께서 손자들이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렇게나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택해주신 것에 대해 전호영은 허탈함을 느꼈다.고현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그녀를 볼 때면 잘생긴 남자를 보는 것 같아 만약 마음이 움직이게 되면 자신이 게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고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전호영이 밥을 가져다주러 온 것을 보고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전 대표님.”전호영은 전씨 그룹 아래의 모든 호텔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어 전태윤과 같은 자리에 있을 때 빼고는 모두 그를 전 대표라 불렀다.만약 전태윤도 현장에 있었다면 모두 그를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그는 경호원의 인사에 응답한 후,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고현이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사과를 먹으며 뭐라고 계속 말했지만 고현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한시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전호영은 당장 돌아서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호영아.”할머니는 몰래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이름을 불렀다.전호영은 다가와 할머니를 부른 후 고현과 인사를 나누었다.“전 대표님.”고현은 일어나서 전호영과 인사만 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호영아, 너도 기회를 봐서 밥을 사든지 해. 우리 집 호텔에 가서 말이야.”“...할머니, 제가 무슨 이유로 밥을 사요?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요?”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포기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네가 이렇게 똑똑한데 어떻게든 이유가 생각날 거야.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 고현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너랑 딱 맞아. 넌 하루 종일 입을 다물 새도 없지, 고현은 말이 적지. 너희 둘이 같이 있게 되면 심심하지 않을 거야.”“할머니, 전 고현 씨를 볼 때면 진짜 남자나 다름없이 보여요. 고현 씨도 자신이 여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잖아요. 자꾸 저와 짝을 지어주려고 하시는데, 아내를 찾는 게 아니라 형제를 찾는 것처럼 느껴져요. 게이로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남자처럼 꾸민 건 정말 잘 꾸몄지. 그래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구분할 수 있을 거야. 고의로 낮춘 목소리는 너희들의 자연스러운 저음과는 다르거든. 고현의 목소리에는 항상 약간의 청아함이 담겨있어 너희들의 목소리와는 달라. 물론 밖에서는 남자처럼 하고 다니지만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거야. 여자인 걸 인정하지 않아도 옷을 벗기면 분명히 알리는걸.”전호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할머니, 저 할머니 친손자 맞아요? 만약 눈에 거슬려 이러시는 거면 지팡이로 나를 한 대 때리던가요. 한 대 때려서 화가 풀리지 않으면. 두 대, 그래도 안 되면 세 대 때려도 돼요. 이렇게 나를 괴롭힐 필요 없잖아요. 게다가 제가 감히 옷을 벗길 담이 있겠어요? 고현 씨에게 맞아 죽을라. 여기는 강성이지 관성이 아니에요. 강성은 고씨 가문의 구역이라고요.”전호영은 할머니가 그를 괴롭힌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포장해 온 음식을 그릇에 담아 할머니에게 먹여주려 했는데 거절당했다.혼자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서 굳이 손자가 먹여줄
“내가 이 정도인 걸 만족해. 나는 비록 너희들의 혼사를 걱정하지만 동명의 할머니처럼 집착하지는 않아. 단지 너희의 성격에 따라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줄 뿐이야. 너희들이 어떻게 감정을 키우는지에 대해선 별로 간섭하지 않잖아. 이래도 너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희 부모들도 참 무책임하지, 입으로만 몇 마디 잔소리할 뿐 실제 행동은 아무것도 없잖아. 나 같은 늙은이가 직접 나서야 한다니. 또 너희들한테서 난폭하다는 둥 비난까지 들어야 하고 말이야.”그러자 전호영은 바로 손을 저으며 해석했다.“할머니, 우리는 할머니를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할머니도 난폭하지 않고요. 우리 가족 중에 할머니의 안목이 제일 높은걸요. 우리 모두 할머니를 가장 좋아해요.”그들의 부모들이 말로만 결혼을 재촉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할머니에게 맡기는 것은 전씨네 도련님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할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어떻게 행동하시든 그들은 절대 화를 내지 않을 테니까.그토록 성격이 강한 전태윤도 결국 할머니에게 굴복했다.게다가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자신이 나서기만 하면 손주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아첨해도 쓸모없어, 내가 지금 원하는 건 아첨이 아니라 손자며느리와 증손녀야. 너희들 중 누가 나에게 증손녀를 낳아주기만 하면 큰 상을 받게 될 거야.”전호영은 듣더니 입을 열었다.“증손녀는 태윤 형에게 가서 재촉해요. 이미 결혼한 건 태윤 형밖에 없어요.”그와 고현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네 형수 앞에서 몇 번 말했으니 이제 더 언급하면 안 돼. 아니면 스트레스 받아. 두 사람 지금 한창 달콤한 때인데, 어찌 아무런 기척도 없는지.”할머니는 더 이상 재촉하면 안 된다고는 했지만, 마음은 급했다.“얼마 안 됐어요. 아직 결혼식도 안 올린걸요. 급해하실 것 없어요. 재촉할 필요도 없고요. 둘째 형이 나중에 더 빨리 될지도 몰라요.”할머니도 그저 손자 앞에서
손은경은 식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윤미라는 노동명을 바라보았다.그는 자기 세 형과 최근의 주식 시세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그래서 어머니와 손은경의 대화를 듣지 못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둘째 형이 발견한 후 그를 툭툭 건드리고는 작은 소리로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엄마가 너를 보고 있어. 너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윤미라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은경이 데리고 같이 산책하러 나가.”윤미라는 아들이 자기 고뇌를 알아주리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으로 손은경과 함께 산책하러 가라고 했다.노동명은 손은경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은경 씨,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환경에 꽤 익숙해졌죠? 얼마 크지도 않은 곳이라 혼자 걸어도 길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윤미라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 아무 물건이나 집어 들어 한대 내리치고만 싶은 기분이었다.손은경은 미소를 띠고 답했다.“혼자 걸어도 길을 잃지는 않아요. 그저 혼자 걷는 게 지루해서 누군가와 함께 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래요. 동명 오빠, 같이 산책 가주겠어요?”형들과 엄마, 아빠의 시선에 그는 거의 입 밖으로 나오려던 거절의 말을 도로 삼켰다.“지금은 햇빛이 너무 세서 더워요.”‘저녁때도 아니고.’관성은 3, 4월이 되면 더위가 시작되어 5월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티셔츠로 갈아입고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오늘은 바람이 세서 안 더워. 은경이는 손님이잖아. 어서 같이 산책하러 나가.”노동명은 형들을 보며 자기 대신 말을 해주기를 바랐지만, 모두 그의 눈길을 피하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손은경에게 말을 건넸다.“은경 씨, 가시죠. 바람 쐬러.”손은경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동명 오빠 시간 좀 빌릴게요.”두 사람이 함께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미라는 남편에게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저 두 사
노동명의 세 형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또 동생 대신 말을 해주다간 어머니로부터 동생의 편을 너무 들어준 탓에 서른여섯 살이 돼서도 솔로라고 원망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겁이 났다.노동명은 손은경을 따라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가로수 길을 따라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노동명의 발걸음은 아주 빨랐다.하이힐을 신은 손은경은 그의 걸음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동명 오빠.”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그저 참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노동명을 붙잡았다.“왜 그래요?”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태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는 손은경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집안 사람들이 멋대로 여자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도 싫었다.“동명 오빠, 저랑 달리기 시합을 하려는 거예요?”노동명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산책하는 것 아니었어요? 달리기 시합을 하려 해도 밥 먹은 후에 뛰면 안 되죠. 그러면 배 아프기 쉽거든요.”“...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마요. 저기 의자가 있으니까 앉아서 얘기 좀 해요.”노동명은 그녀와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비즈니스에 대해 말하려 해도 두 회사는 아직 협력 전이라 따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를 따라 긴 돌의자 앞으로 가서 앉으려 했다. 손은경은 앉으려는 그를 제지하고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휴지를 꺼내더니 휴지로 돌의자를 두 번 닦은 후에야 앉으라고 권했다.그녀의 세심한 성격이 보이는 행동이었다.노동명은 털털하게 앉으며 말했다.“우리 집 청소부들은 매일 뒤뜰의 돌의자, 돌 탁자를 깨끗이 닦아서 괜찮아요.”“요즘은 바람이 세고 먼지가 많아 매일 닦아도 먼지가 계속 나오거든요. 아까 닦을 때도 휴지에 먼지가 가득했어요.”노동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은경 씨, 결벽증 있어요?”“아뇨.”“그럼, 시름 놓았어요. 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저처럼 별로 청결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결벽증이 있는 사람과 잘
손은경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나도 마찬가지예요. 일할 때는 일 얘기만 하고 쉴 때는 쉬고 일에 관한 얘기는 절대 안 해요. 동명 씨,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물어봐요.”“우리 양가 부모님 모두 우리를 커플로 엮어주고 싶어 해요. 저도 동명 오빠가 마음에 들어요. 아직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동명 오빠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요.”그녀의 눈에 노동명은 타깃이었다.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 반을 차지했다. 지금 사랑한다고 해도 노동명이 믿지 않을 게 분명하고, 그녀 자신도 믿지 않는다.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스토리는 두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다.“절 자꾸 피하시는데, 제가 어딘가 부족하나요? 아니면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여자라도 있는 거예요?”노동명은 그녀가 이렇게 단도직입으로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숨기지도 않고 빙빙 돌려서 말하지도 않고 직접 그에게 물어보다니. 이 성격을 봐서는 친구로 지내는 것이 더욱 어울릴 것 같았다.그는 손은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는 확실히 예뻤고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 윤미라처럼 까다로운 사람조차 그녀에 대해 매우 만족해하는 것을 보면 가지고 있는 조건이 아주 우월했다.두 집안은 모두 명문가이다. 비록 같은 도시는 아니지만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 두 집안이 혼인 관계를 맺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A시의 여씨 집안이 바로 관성의 남씨 집안과 사돈이 되었다. 그 두 집안 사이의 거리는 보통 먼 것이 아니었다.“은경 씨는 아주 우수해요. 젊고 예쁜 데다가 똑똑해서 우리 엄마 마음속의 이상적인 며느리예요.”손은경은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며느리가 무슨 소용이에요. 동명 오빠의 눈에 제가 이상적인 아내감인지 알고 싶어요.”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저는 일이 아주 바빠요. 제 아내까지 일이 바쁘면 둘 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게 될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