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좋아하는 물건과 동물은 내가 최대한 당신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게. 고맙다는 말 할 필요 없어, 고맙다는 말 듣기 싫어. 정말 고마워하고 싶으면, 행동으로 보여줘.”“당신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잖아요, 내 몸과 마음이 다 당신 건데 또 뭘 더 줄 수 있어요?”전태윤은 이 말이 듣기 좋았다.띠리링!이때,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보더니 지체 없이 받았다.전태윤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걸려 온 전화길래 아내가 이렇게 지체 없이 받는지 궁금했다.‘평소 내가 전화를 걸어도 예정이는 지금과 같이 지체 없이 받는 걸까?’그는 질투하는 것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과 겨루길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할머니.”할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그녀는 자기 남편이 자신이 전화를 너무 빨리 받아서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그는 아내가 할머니를 부르는 것을 듣고 속으로 얼른 투항했다.할머니를 당해낼 사람이 없으니까.“예정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 이 할미가 보고 싶지 않았어?”전화 너머로 허허 웃으시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하나도요. 할머니께서 말도 없이 강성으로 가셨는데 제가 왜 보고 싶겠어요? 미리 말도 안 하시고... 나도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싶단 말이에요.”“아직 구경거리가 없다. 이제 구경거리가 생기면 할머니가 널 부르지 않아도 태윤이랑 구경하게 될걸. 참, 오늘 주말인데 태윤이 출근 안 하지? 너 태윤이랑 나가서 바람 좀 쐬지 않겠느냐? 드라이브도 좋잖아, 집에만 있지 말고. 집에만 있으면 얼마나 답답해.”“저녁에 연회가 있어서 낮에는 놀러 가지 않으려고요. 관성의 명승지는 거의 다 보아서 당분간 가고 싶은 곳이 없네요. ”그녀는 관성에서 오랫동안 살며 놀만한 곳은 시집가기 전에 다 다녀왔다.“무슨 연회냐? 어느 집에서 또 연회를 열어? 이번에도 이모를 따라갈 거냐?”할머니가 다정하게 묻고 있다.“공씨 어르신이 연 연
하예정도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태윤 씨는 저에게 정말 잘해줘요.”할머니의 말은 언니가 늘 하던 잔소리와 같았다.전화기 너머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전태윤은 할머니에게 물었다.“언제 돌아오세요?”“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빨리는 못 돌아갈 거야.”전태윤과 하예정은 동시에 걱정되어 물었다.“어디 아프신가요?”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했는데도 할머니는 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고 알리지 않았다. 웃으며 말하시는 것만 듣고는 컨디션이 좋은 줄만 알았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현의 차에 놀라 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조금 아플 뿐이야. 고현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족에게도 알렸어. 다만 강성에야 호영이밖에 없으니 그 녀석에게만 알린 거야.”전태윤은 말이 안나왔다.“...할머니, 꼭 그 작전을 써야 했어요?”‘나이가 적지도 않으신데 그렇게 주저앉다니, 잘못해서 뼈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시는지.’할머니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정말 잘못하여 넘어진 거야.”전태윤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기까지 들은 하예정은 그녀가 할머니를 구하게 된 것도 할머니께서 연기하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명의 은인으로서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전태윤과 그녀를 결혼시킬 목적이었다.지금은 또 전호영을 상대로 이 수법을 쓰고 있다.수법은 같지만 유용하면 되었다. 고현이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할머니의 목적이었다.“할머니, 고현 씨는 잘생겼나요?”“잘생겼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잘났어.”하예정은 호기심에 물었다.“호영 도련님은 마음에 들어 해요?”“호영이보다 고현이가 더 잘났어.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하든 안 하든 난 고현이가 좋아. 말수도 적고... 태윤이랑 많이 닮은 것 같아.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젊은 여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데, 그건 남장을 한 것을 들킬까 봐 두려워서 그래. 고현처럼 말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호영이 같은 남자가 남편감으로 제일일 거야. 호영이는 말을 잘해서 누구와도
고현은 곧게 뻗은 수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목구비도 뚜렷했고 몸매도 늘씬하여 보기 좋았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남장을 해왔고 일부러 가짜 목젖까지 만들었다.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씨 가문은 아이에 대한 보호도 철통같아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의 자료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고현은 처음으로 얼굴을 알릴 때 남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씨 사모님이 쌍둥이를 낳은 줄 알고 고현을 큰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그녀는 양손에 많은 보양식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보양식을 침대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병실에 할머니밖에 없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머니, 손자분은요?”“금방 깨서 호영이가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자는 걸 보고 물건 사러 나갔나 봐요. 고현 씨, 어서 앉아요.”할머니는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고현은 얼른 제지하며 말했다.“할머니, 아직 앉으시면 안 돼요. 의사가 많이 누워 있어야 빨리 회복할 수 있다고 했어요.”사실 할머니는 별일 없었다.고현은 어르신이 나이가 꽤 있는 것을 보고, 일이 생길까 봐 끝까지 병원에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비록 무사하다고 결과가 나왔지만 계속 아프다고 해서 의사는 며칠 입원해 관찰하라고 권했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사기 치는 게 아닌지 의심할 법도 했지만 전씨 일가의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전호영의 신분을 알고 있다.그의 친할머니라는 건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관성의 갑부 전씨 가문의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할머니의 명성은 이미 아주 멀리 퍼졌다.고현의 말을 듣고 할머니는 다시 누웠다.“할머니, 오늘은 어때요? 아직도 아프세요?”고현은 할머니의 침대 옆에 앉았다.“이젠 아프지 않아요. 그저 그때 좀 심하게 놀란 것 같아요. 요 며칠간 계속 중간에 놀라서 깨어나 잠을 설쳤어요.”그녀는 그 말을 듣고 침묵에 잠겼다가 잠시 후 다시금 미안하다는 듯
고현은 계속하여 말했다.“할머니는 관성에서 자유자재로 어디 다니시던지 누구도 아무 말 못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수법을 하예정에게 쓸 때는 아주 잘 먹혔다.고현한테 쓰니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그녀는 어르신과 함께 여기저기 놀러 다니겠다고 먼저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이때 전호영이 돌아왔다.그는 할머니가 깨어나지 않은 틈을 타 먼저 자기 일을 처리하러 갔다.점심때가 가까워지자, 그는 비로소 호텔에서 할머니에게 드릴 점심을 포장해 왔다.멀리서 할머니의 병실 입구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고현이 할머니를 문병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할머니께서 손자들이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렇게나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택해주신 것에 대해 전호영은 허탈함을 느꼈다.고현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그녀를 볼 때면 잘생긴 남자를 보는 것 같아 만약 마음이 움직이게 되면 자신이 게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고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전호영이 밥을 가져다주러 온 것을 보고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전 대표님.”전호영은 전씨 그룹 아래의 모든 호텔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어 전태윤과 같은 자리에 있을 때 빼고는 모두 그를 전 대표라 불렀다.만약 전태윤도 현장에 있었다면 모두 그를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그는 경호원의 인사에 응답한 후,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고현이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사과를 먹으며 뭐라고 계속 말했지만 고현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한시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전호영은 당장 돌아서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호영아.”할머니는 몰래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이름을 불렀다.전호영은 다가와 할머니를 부른 후 고현과 인사를 나누었다.“전 대표님.”고현은 일어나서 전호영과 인사만 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호영아, 너도 기회를 봐서 밥을 사든지 해. 우리 집 호텔에 가서 말이야.”“...할머니, 제가 무슨 이유로 밥을 사요?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요?”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포기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네가 이렇게 똑똑한데 어떻게든 이유가 생각날 거야.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 고현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너랑 딱 맞아. 넌 하루 종일 입을 다물 새도 없지, 고현은 말이 적지. 너희 둘이 같이 있게 되면 심심하지 않을 거야.”“할머니, 전 고현 씨를 볼 때면 진짜 남자나 다름없이 보여요. 고현 씨도 자신이 여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잖아요. 자꾸 저와 짝을 지어주려고 하시는데, 아내를 찾는 게 아니라 형제를 찾는 것처럼 느껴져요. 게이로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남자처럼 꾸민 건 정말 잘 꾸몄지. 그래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구분할 수 있을 거야. 고의로 낮춘 목소리는 너희들의 자연스러운 저음과는 다르거든. 고현의 목소리에는 항상 약간의 청아함이 담겨있어 너희들의 목소리와는 달라. 물론 밖에서는 남자처럼 하고 다니지만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거야. 여자인 걸 인정하지 않아도 옷을 벗기면 분명히 알리는걸.”전호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할머니, 저 할머니 친손자 맞아요? 만약 눈에 거슬려 이러시는 거면 지팡이로 나를 한 대 때리던가요. 한 대 때려서 화가 풀리지 않으면. 두 대, 그래도 안 되면 세 대 때려도 돼요. 이렇게 나를 괴롭힐 필요 없잖아요. 게다가 제가 감히 옷을 벗길 담이 있겠어요? 고현 씨에게 맞아 죽을라. 여기는 강성이지 관성이 아니에요. 강성은 고씨 가문의 구역이라고요.”전호영은 할머니가 그를 괴롭힌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포장해 온 음식을 그릇에 담아 할머니에게 먹여주려 했는데 거절당했다.혼자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서 굳이 손자가 먹여줄
“내가 이 정도인 걸 만족해. 나는 비록 너희들의 혼사를 걱정하지만 동명의 할머니처럼 집착하지는 않아. 단지 너희의 성격에 따라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줄 뿐이야. 너희들이 어떻게 감정을 키우는지에 대해선 별로 간섭하지 않잖아. 이래도 너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희 부모들도 참 무책임하지, 입으로만 몇 마디 잔소리할 뿐 실제 행동은 아무것도 없잖아. 나 같은 늙은이가 직접 나서야 한다니. 또 너희들한테서 난폭하다는 둥 비난까지 들어야 하고 말이야.”그러자 전호영은 바로 손을 저으며 해석했다.“할머니, 우리는 할머니를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할머니도 난폭하지 않고요. 우리 가족 중에 할머니의 안목이 제일 높은걸요. 우리 모두 할머니를 가장 좋아해요.”그들의 부모들이 말로만 결혼을 재촉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할머니에게 맡기는 것은 전씨네 도련님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할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어떻게 행동하시든 그들은 절대 화를 내지 않을 테니까.그토록 성격이 강한 전태윤도 결국 할머니에게 굴복했다.게다가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자신이 나서기만 하면 손주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아첨해도 쓸모없어, 내가 지금 원하는 건 아첨이 아니라 손자며느리와 증손녀야. 너희들 중 누가 나에게 증손녀를 낳아주기만 하면 큰 상을 받게 될 거야.”전호영은 듣더니 입을 열었다.“증손녀는 태윤 형에게 가서 재촉해요. 이미 결혼한 건 태윤 형밖에 없어요.”그와 고현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네 형수 앞에서 몇 번 말했으니 이제 더 언급하면 안 돼. 아니면 스트레스 받아. 두 사람 지금 한창 달콤한 때인데, 어찌 아무런 기척도 없는지.”할머니는 더 이상 재촉하면 안 된다고는 했지만, 마음은 급했다.“얼마 안 됐어요. 아직 결혼식도 안 올린걸요. 급해하실 것 없어요. 재촉할 필요도 없고요. 둘째 형이 나중에 더 빨리 될지도 몰라요.”할머니도 그저 손자 앞에서
손은경은 식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윤미라는 노동명을 바라보았다.그는 자기 세 형과 최근의 주식 시세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그래서 어머니와 손은경의 대화를 듣지 못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둘째 형이 발견한 후 그를 툭툭 건드리고는 작은 소리로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엄마가 너를 보고 있어. 너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윤미라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은경이 데리고 같이 산책하러 나가.”윤미라는 아들이 자기 고뇌를 알아주리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으로 손은경과 함께 산책하러 가라고 했다.노동명은 손은경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은경 씨,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환경에 꽤 익숙해졌죠? 얼마 크지도 않은 곳이라 혼자 걸어도 길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윤미라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 아무 물건이나 집어 들어 한대 내리치고만 싶은 기분이었다.손은경은 미소를 띠고 답했다.“혼자 걸어도 길을 잃지는 않아요. 그저 혼자 걷는 게 지루해서 누군가와 함께 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래요. 동명 오빠, 같이 산책 가주겠어요?”형들과 엄마, 아빠의 시선에 그는 거의 입 밖으로 나오려던 거절의 말을 도로 삼켰다.“지금은 햇빛이 너무 세서 더워요.”‘저녁때도 아니고.’관성은 3, 4월이 되면 더위가 시작되어 5월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티셔츠로 갈아입고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오늘은 바람이 세서 안 더워. 은경이는 손님이잖아. 어서 같이 산책하러 나가.”노동명은 형들을 보며 자기 대신 말을 해주기를 바랐지만, 모두 그의 눈길을 피하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손은경에게 말을 건넸다.“은경 씨, 가시죠. 바람 쐬러.”손은경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동명 오빠 시간 좀 빌릴게요.”두 사람이 함께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미라는 남편에게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저 두 사
노동명의 세 형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또 동생 대신 말을 해주다간 어머니로부터 동생의 편을 너무 들어준 탓에 서른여섯 살이 돼서도 솔로라고 원망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겁이 났다.노동명은 손은경을 따라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가로수 길을 따라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노동명의 발걸음은 아주 빨랐다.하이힐을 신은 손은경은 그의 걸음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동명 오빠.”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그저 참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노동명을 붙잡았다.“왜 그래요?”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태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는 손은경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집안 사람들이 멋대로 여자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도 싫었다.“동명 오빠, 저랑 달리기 시합을 하려는 거예요?”노동명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산책하는 것 아니었어요? 달리기 시합을 하려 해도 밥 먹은 후에 뛰면 안 되죠. 그러면 배 아프기 쉽거든요.”“...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마요. 저기 의자가 있으니까 앉아서 얘기 좀 해요.”노동명은 그녀와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비즈니스에 대해 말하려 해도 두 회사는 아직 협력 전이라 따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를 따라 긴 돌의자 앞으로 가서 앉으려 했다. 손은경은 앉으려는 그를 제지하고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휴지를 꺼내더니 휴지로 돌의자를 두 번 닦은 후에야 앉으라고 권했다.그녀의 세심한 성격이 보이는 행동이었다.노동명은 털털하게 앉으며 말했다.“우리 집 청소부들은 매일 뒤뜰의 돌의자, 돌 탁자를 깨끗이 닦아서 괜찮아요.”“요즘은 바람이 세고 먼지가 많아 매일 닦아도 먼지가 계속 나오거든요. 아까 닦을 때도 휴지에 먼지가 가득했어요.”노동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은경 씨, 결벽증 있어요?”“아뇨.”“그럼, 시름 놓았어요. 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저처럼 별로 청결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결벽증이 있는 사람과 잘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