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명은 어머니가 함부로 부추기는 것을 싫어했지만 손은경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얘기해 보니 저랑 동명 오빠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네요. 동명 오빠도 제가 싫지 않다면 한번 사귀어보지 않을래요? 얼마간 사귀다가 도저히 절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게요.”그녀도 다른 연모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설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아니요.”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노동명의 머릿속에는 처음에는 뚱뚱했지만, 점차 살이 빠져가는 그녀 뒷모습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그는 전태윤을 포함한 사람들의 앞에서는 자신이 하예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극구 부인했다.‘왜 하예진이 떠오르는 거지?’그가 좋아하는 것은 주우빈이지 꼬마의 엄마가 아니다.노동명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하예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고 애썼다.손은경은 웃으며 말했다.“없다면 한번 해보자고요. 만약 동명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말해줘요.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한번 쟁취해 보려고요. 만약 그래도 실패하게 된다면 저도 쿨하게 인정할게요.”그녀는 무슨 일에서든 일단 열심히 노력한다. 노력한 후에도 지게 되면 패배를 시원하게 인정한다.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창피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놓아주는 것과 같으니까.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 집요하게 매달리다 보면 오히려 본인이 상처받게 된다. 이건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저는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어요.”“시간 얼마 안 걸려요. 그저 같이 밥을 먹고, 쇼핑하고 주말에 여행 가는 게 다예요. 시간이 있으면 영화도 보고요.”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동명 오빠의 반응을 보니 싫은 듯하네요. 그럼, 잠시 제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걸로 해요.”손은경은 노동명에게 정식으로 구애하겠다고 말했다.노동명은 손은경의 대범한 말을 들으며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자기 취향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사귀
하예진은 절대 억지로 상류층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다.이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면 그때엔 따로 애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전태윤은 하예진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본인의 자리에 대해 잘 알면서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마음가짐이 좋았다..“이 드레스를 입어요? 별로 예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그가 골라준 드레스를 받아 든 하예정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무슨 문제인지는 몰랐다.“예뻐, 아주 예뻐. 당신은 몸매도 좋고, 외모도 이쁜 데다가 기품도 좋으니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예뻐.”그녀는 드레스를 품에 안고 말했다.“제가 직접 고를게요.”옷장 안에 있는 옷들은 모두 전태윤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옷이다. 각 종류의 드레스가 다 있어 드레스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가 스스로 고를 때는 이쁜지 안 이쁜지만을 고려하면 되었기에 너무 보수적인 디자인은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고른 드레스는 모두 전태윤에게 리젝당했다.“여보, 그냥 내가 골라준 이 드레스 입어. 나 믿지? 정말 고급스러워.”‘어깨랑 등이 드러나지도 않고.’뒷말은 감히 하지 못했다.하예정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여보, 내 눈을 믿어. 이 드레스를 입으면 분명히 모든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거야.”그가 옆에 있기만 하면 수수한 옷차림을 하여도 연회의 중심이 될 테니까.하예정은 한 손으로 옷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이마를 쿡 찔렀다.“참 못됐어요.”그가 골라준 드레스를 입지 않으니 그녀가 직접 고른 옷에 대해 온갖 트집을 잡는 이런 못된 마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방안 가득한 옷은 모두 당신이 사준 것이니 어차피 다 같잖아요. 어느 옷을 입든 차이가 없는걸요.”그녀가 직접 산 옷과 고모가 사 준 옷은 모두 발렌시아 아파트에 두었다.전태윤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뭘 입어도 다 마찬가지로 이뻐.”
“여보, 내가 화장 도와줄게.”하예정은 그의 뜻대로 가장 보수적인 이브닝드레스를 입었고 전태윤은 또 그녈 위해 자진해서 화장까지 해주겠다고 한다.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거절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요.”전태윤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그의 반응에 하예정은 또 까르르 웃었다.“화장할 줄 알아요? 누가 그 꼼수를 모를까 봐. 날 처녀 귀신처럼 만들 생각이죠? 그럼 아무도 날 눈여겨보지 않을 테니까.”“여자에게 화장해 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처녀 귀신까진 아니야.”“됐네요. 나 당신 못 믿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태윤 씨도 얼른 가서 준비해요. 시간이 얼마 없다고요.”전태윤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난 딱히 준비할 거 없어. 집 옷차림에서 정장으로 갈아입으면 되고 슬리퍼를 구두로 바꾸면 돼. 넥타이는 당신이 매줄 테고. 그럼 오케이야.”그는 화장할 필요가 없다.태생이 잘생긴 외모라 화장하면 오히려 더 못나 보인다.전태윤 도련님은 화장한 적이 아예 없다.“급하게 서두를 거 없어. 천천히 가도 돼. 얼굴만 내비치면 되니까.”왕년에 공세호 어르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전태윤은 아주 늦게 도착하거나 가서 잠깐 머무르다가 자리를 떠났다.전태윤 도련님이라 그런지 늦게 등장하고 빨리 떠나가는 것에 적응됐다.하예정은 방에 돌아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 이젠 늦게 등장하고 빨리 자리를 뜨는 데 적응했나 봐요.”“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싫어.”“그러게 누가 전태윤 도련님 하래요?”전태윤이 말했다.“도련님 신분이 아니면 너랑 결혼하지도 못했어.”그가 맏이였기에 할머니는 그에게 하예정을 소개해 줬다.“똑똑.”이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가서 문 열어요.”하예정이 그를 내쫓았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종일 재잘거렸으니까. 진중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전태윤 도련님이 그녀의 머리가 깨질 때까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릴 줄 누가 알았을까.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 지금 하예정 앞에 벌어지고 있다.전태윤은 그녀에게 바짝
하예정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전태윤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투덜거렸다.“여보 나 혼내네. 나 미워하는 거야?”하예정은 그를 발로 뻥 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계속 안 내려가면 나 오늘 밤에 손님방에서 자요.”전태윤은 곧장 몸을 돌리더니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여보 나 미워해. 여보 나 싫어졌대...”“...”하예정은 그런 그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몸과 마음이 전부 다 전태윤인데 뭘 더 걱정하는 걸까?2분 후.전태윤이 부모님 맞은편에 앉았다.흰색 정장 차림의 아빠를 보며 그가 먼저 말했다.“아빠, 지금 연세가 얼마인데 아직도 흰색 정장을 입고 다녀요. 기어코 이 아들 기세를 짓누르셔야겠어요?”전현림이 말했다.“너무 날 세우는 거 아니야? 아빠가 그렇게 늙었어? 자기관리 엄청 잘하는데. 너희 엄마가 그랬어. 너랑 나랑 함께 서 있으면 부자가 아니라 형제 같다고. 흰색 정장 입으니 마치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오는 백마 왕자 같다고 했는데.”장소민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래. 너희 아빠 흰색 정장 입으니 얼마나 멋져. 너희 아빠는 엄마 마음속에 영원한 백마 왕자야.”장소민도 보수적이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었다.그녀의 고고한 자태는 타고난 기질이라 무슨 옷을 입어도 귀티가 가려지지 않는다.“태윤아, 예정이랑 싸웠니?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우리가 오자마자 아빠부터 겨냥하고. 혹시 우리가 온 타이밍이 별로였니? 너희 부부 애틋한 분위기를 망쳤어?”장소민은 남편이 은퇴한 이후로 더는 남편 따라 각종 연회나 자선 바자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하여 이들 부부도 연회에 얼굴을 드러낸 지가 꽤 됐다.오늘 밤 부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장소민도 이 기회에 하예정과의 고부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는 걸 모두에게 알릴 생각이었다.그 밖에 며느리를 위해 전씨 일가와 가깝게 지내는 몇몇 사모님들도 소개해줄 계획이다.앞으론 하예정이 안방마님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전태윤과 각종 연회, 자선
“그거야 내가 잘 가르쳐서 그렇죠.”전현림은 입을 열었지만 딱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아내 바보’가 된 아들은 이미 그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부자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관성에서 가장 우아하고 기품이 차 넘치는 고부가 위층에서 내려왔다.하예정이 착용한 액세서리는 전태윤이 한눈에 봐도 짐작 가능했다. 그가 선물한 게 아니니 영락없이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거겠지.장소민은 위층에 올라가 며느리가 화장하는 걸 지켜보겠다고 하더니 가방에 몰래 챙겨온 액세서리 세트를 며느리에게 주기 위해서였다.이 세트가 너무 화려하여 장소민의 나이대와 어울리지 않으니 하예정이 착용하면 너무 예쁠 것 같았다.장소민은 재벌가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재벌 가문에서 자랐다. 그녀는 수많은 액세서리를 보고 자랐고 전씨 일가에 시집온 이후에도 남편의 총애를 받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액세서리를 선물 받았다. 전태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도 그녀에게 고가의 주얼리 세트를 선물해 주셨다.장소민은 슬하에 딸이 없어 아끼던 주얼리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있다. 아직은 며느리가 하예정 한 명뿐이고 게다가 또 맏며느리라 그해 전태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주얼리 세트 중 하나를 며느리에게 선사했다.하예정은 이모 이경혜를 따라 수차례 연회에 참석하며 많은 걸 배웠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마친 후 시어머니가 주신 액세서리까지 착장하니 우아하고 고고한 자태가 전태윤을 그 자리에서 넋 놓게 했다.전현림은 속으로 한심한 아들 녀석이라고 야유했다. 이번 생은 며느리에게 단단히 잡혀 살 듯싶다.‘아버님, 저야말로 태윤 씨한테 단단히 잡혀 살고 있어요.’“여보, 어머님이 선물하신 액세서리 어때요? 이쁘죠?”전태윤이 머리를 끄덕였다.“예뻐. 근데 내가 준 거 착용했으면 더 이뻤을 거야.”장소민이 웃으며 아들을 나무랐다.“이젠 하다 하다 네 엄마까지 시샘하는 거야? 너 그거 중독이다! 예정아, 하도 너니까 저런 속 좁은 인간 다 참고 사는 거야.”하예정이 남
관성 호텔은 오후에 아예 영업을 접었다.연회장 배치를 일찌감치 마쳤고 날이 어둑해지자 일부 중소기업 사장들이 호텔에 도착했다.그들은 아직 레벨이 낮은지라 일찍 오면 공씨 일가 사람들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눌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공세호 어르신도 뵐 수 있다.만약 늦게 오면 사람들도 많을뿐더러 다들 거물급 인사라 그들과 같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축에 끼지 못한다.전태윤은 전에 늘 아주 늦게 등장했다.그가 얼굴을 비칠 때면 성기현은 참석하지 않았다.오늘 밤도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에 나섰다. 관성에서 가장 우수한 두 그룹 총수가 함께 모습을 드러낼지 말이다.전씨 그룹 사모님은 과연 전태윤 대표와 함께 연회에 참석할까?최근 사모님이 상류층 모임에서 맹활약하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건 늘 이모 이경혜였다.이 때문에 전씨 그룹 사모님이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단 한 번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일일이 가르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이모인 성씨 사모님을 따라다닌다고 추측이 난무했다.장소민도 이런 소문을 듣고 한때 하예정과 함께 쇼핑하며 고부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뒤에서 쉬쉬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하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전씨 일가는 셋째 전호영 도련님과 할머니가 강성에 있고 또 몇몇 어린아이들은 외부에 얼굴을 알리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전태윤네 가족 네 명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둘씩 연회장에 들어섰다.전이진도 부모님과 함께 왔다.공씨 일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한 사람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전이진은 무심코 호텔 문 앞을 빈둥거리며 여운초가 오길 기다렸다.여운초는 오기 싫었으나 추미자가 점심시간이 지난 후 경호팀을 거느리고 꽃가게로 가서 무작정 그녀를 저택으로 끌고 갔다.이브닝드레스를 내던지며 당장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혼자 안 갈아입으면 경호원에게 시켜 강제로 갈아입히겠다고 협박까지 해댔다.여운초는 아직 연애 한
“똑똑.”노크 소리가 울리고 여태웅이 문밖에서 물었다.“여보, 다들 준비됐어? 빨리하고 나와. 우리 곧 지각이란 말이야.”추미자는 더 이상 여운초를 후려잡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밤의 계획은 여운초를 팔아치우는 거니까. 너무 처참하게 후려잡았다가 사람들이 싫어하면 제값에 팔리지도 않는다.“네, 금방 나가요.”추미자는 남편에게 대답하고는 여운초에게 쏘아붙였다.“빨리 나가!”여운초가 맹인 지팡이를 짚고 나가려 하는데 문득 손이 텅 비었다. 추미자가 그녀의 지팡이를 뺏어서 한쪽 옆에 내던졌다.“연회 참석하는데 지팡이를 왜 챙겨? 나 따라오면 돼.”그녀는 딸아이가 말소리와 걸음 소리만 들으면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여운초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묵히 추미자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여태웅은 문 앞에서 기다리다 짜증 날 뻔했는데 두 모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의붓딸을 한참 쳐다보더니 추미자에게 말했다.“운초 점점 더 예뻐지네. 당신도 닮고 얘네 아빠도 닮았어.”여운초를 볼 때마다 여태웅은 남동생이 떠오른다.다행히 여운초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지는 않았다. 안 그랬다면 여태웅은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추미자는 머리를 홱 돌리고 여운초를 한참 쳐다보다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운별이 보다 못해요.”그리곤 앞으로 두어 걸음 나아가 남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가요. 연회 곧 시작하겠네요.”“이 시간대면 연회가 곧 시작할 거야. 하지만 서두를 거 없어. 전태윤 씨가 등장해야 연회의 하이라이트잖아. 지금 가봤자 태윤 씨 안 왔을 거야.”전태윤을 언급하자 추미자는 하예정이 바로 떠올랐다. 그녀를 생각하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개를 홱 돌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리는 여운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장님이 돼서 빨리빨리 못 걸어? 뭘 해도 우물쭈물하지. 너 같은 년은 돈 벌고 배 채우기 위해 지나가는 개도 훔치겠어, 쯧쯧.”여운초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계단 손잡이를 꼭 잡고서 천천히 걸어
또한 그녀도 인간하고만 대화한다. 이런 인간도 아닌 것들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다.여태웅이 아내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와 화려한 거실을 지나서 문밖을 나섰다.부부가 함께 탈 차가 이미 도착했고 경호원 차량도 한 대 있었다.“여보, 태윤 씨가 만약 하예정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다면 당신 일단 응어리를 내려놓고 하예정과의 관계를 잘 다져야 해. 일단 머리 숙이고 하예정이 너그럽게 선처해 줄지 지켜봐 봐.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다시 운초를 이용하는 거야.”“더 이상 어떻게 머리 숙여요? 맨 처음 원한을 맺었을 때부터 우린 먼저 고개 숙이고 갖은 방식으로 사과했는데 결과는 어땠어요? 전태윤 씨야 태생이 차갑고 무자비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제일 가증스러운 게 바로 하예정이에요.”“툭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나, 법원에 고소하지 않나, 인정머리라곤 전혀 없어요. 운별이는 아직 애인데 한참 어린 애랑도 따지고 들어야겠어요? 본인은 뭐 평생 우리 같은 사모님들과 교류할 일이 없을까 봐서? 어쩌면 내 체면도 안 봐주고 바로 운별이를 가둬 넣냐고요?”“이런 무자비한 인간은 우리 모임에서도 분명 함께 어울리지 못할 거예요. 두고 봐요. 태윤 씨는 틀림없이 하예정 때문에 지칠 때가 올 거예요. 태윤 씨라고 뭐 평생 하예정을 위해서 뒷수습 해주겠어요?”“여자 보는 눈이 왜 그 모양인지. 어떻게 촌뜨기와 결혼해? 아무나 한 명 잡아서 결혼해도 그 촌뜨기보단 나을 거잖아요! 우리 모임에 있는 사모님들은 누구 한 명 재벌 출신이 아닌 게 없는데 촌뜨기와 어울려야 하니, 어휴, 우리 레벨까지 내려가게 생겼어요.”추미자는 하예정에게 불만이 아주 컸고 거의 불만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마음 같아선 그녀를 아작내고 싶었다. 하예정 때문에 보배 딸 운별이가 잡혀갔으니까.“전태윤 씨가 지금 신선감 때문에 잘해주는 걸 믿고 감히 운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예요. 태윤 씨가 없으면 누가 하예정 얼굴이나 쳐다보겠어요?”추미자는 감히 전태윤을 미워할 엄두는 없나 보다.그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