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명은 어머니가 함부로 부추기는 것을 싫어했지만 손은경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얘기해 보니 저랑 동명 오빠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네요. 동명 오빠도 제가 싫지 않다면 한번 사귀어보지 않을래요? 얼마간 사귀다가 도저히 절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게요.”그녀도 다른 연모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설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아니요.”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노동명의 머릿속에는 처음에는 뚱뚱했지만, 점차 살이 빠져가는 그녀 뒷모습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그는 전태윤을 포함한 사람들의 앞에서는 자신이 하예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극구 부인했다.‘왜 하예진이 떠오르는 거지?’그가 좋아하는 것은 주우빈이지 꼬마의 엄마가 아니다.노동명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하예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고 애썼다.손은경은 웃으며 말했다.“없다면 한번 해보자고요. 만약 동명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말해줘요.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한번 쟁취해 보려고요. 만약 그래도 실패하게 된다면 저도 쿨하게 인정할게요.”그녀는 무슨 일에서든 일단 열심히 노력한다. 노력한 후에도 지게 되면 패배를 시원하게 인정한다.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창피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놓아주는 것과 같으니까.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 집요하게 매달리다 보면 오히려 본인이 상처받게 된다. 이건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저는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어요.”“시간 얼마 안 걸려요. 그저 같이 밥을 먹고, 쇼핑하고 주말에 여행 가는 게 다예요. 시간이 있으면 영화도 보고요.”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동명 오빠의 반응을 보니 싫은 듯하네요. 그럼, 잠시 제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걸로 해요.”손은경은 노동명에게 정식으로 구애하겠다고 말했다.노동명은 손은경의 대범한 말을 들으며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자기 취향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사귀
하예진은 절대 억지로 상류층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다.이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면 그때엔 따로 애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전태윤은 하예진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본인의 자리에 대해 잘 알면서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마음가짐이 좋았다..“이 드레스를 입어요? 별로 예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그가 골라준 드레스를 받아 든 하예정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무슨 문제인지는 몰랐다.“예뻐, 아주 예뻐. 당신은 몸매도 좋고, 외모도 이쁜 데다가 기품도 좋으니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예뻐.”그녀는 드레스를 품에 안고 말했다.“제가 직접 고를게요.”옷장 안에 있는 옷들은 모두 전태윤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옷이다. 각 종류의 드레스가 다 있어 드레스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가 스스로 고를 때는 이쁜지 안 이쁜지만을 고려하면 되었기에 너무 보수적인 디자인은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고른 드레스는 모두 전태윤에게 리젝당했다.“여보, 그냥 내가 골라준 이 드레스 입어. 나 믿지? 정말 고급스러워.”‘어깨랑 등이 드러나지도 않고.’뒷말은 감히 하지 못했다.하예정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여보, 내 눈을 믿어. 이 드레스를 입으면 분명히 모든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거야.”그가 옆에 있기만 하면 수수한 옷차림을 하여도 연회의 중심이 될 테니까.하예정은 한 손으로 옷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이마를 쿡 찔렀다.“참 못됐어요.”그가 골라준 드레스를 입지 않으니 그녀가 직접 고른 옷에 대해 온갖 트집을 잡는 이런 못된 마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방안 가득한 옷은 모두 당신이 사준 것이니 어차피 다 같잖아요. 어느 옷을 입든 차이가 없는걸요.”그녀가 직접 산 옷과 고모가 사 준 옷은 모두 발렌시아 아파트에 두었다.전태윤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뭘 입어도 다 마찬가지로 이뻐.”
“여보, 내가 화장 도와줄게.”하예정은 그의 뜻대로 가장 보수적인 이브닝드레스를 입었고 전태윤은 또 그녈 위해 자진해서 화장까지 해주겠다고 한다.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거절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요.”전태윤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그의 반응에 하예정은 또 까르르 웃었다.“화장할 줄 알아요? 누가 그 꼼수를 모를까 봐. 날 처녀 귀신처럼 만들 생각이죠? 그럼 아무도 날 눈여겨보지 않을 테니까.”“여자에게 화장해 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처녀 귀신까진 아니야.”“됐네요. 나 당신 못 믿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태윤 씨도 얼른 가서 준비해요. 시간이 얼마 없다고요.”전태윤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난 딱히 준비할 거 없어. 집 옷차림에서 정장으로 갈아입으면 되고 슬리퍼를 구두로 바꾸면 돼. 넥타이는 당신이 매줄 테고. 그럼 오케이야.”그는 화장할 필요가 없다.태생이 잘생긴 외모라 화장하면 오히려 더 못나 보인다.전태윤 도련님은 화장한 적이 아예 없다.“급하게 서두를 거 없어. 천천히 가도 돼. 얼굴만 내비치면 되니까.”왕년에 공세호 어르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전태윤은 아주 늦게 도착하거나 가서 잠깐 머무르다가 자리를 떠났다.전태윤 도련님이라 그런지 늦게 등장하고 빨리 떠나가는 것에 적응됐다.하예정은 방에 돌아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 이젠 늦게 등장하고 빨리 자리를 뜨는 데 적응했나 봐요.”“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싫어.”“그러게 누가 전태윤 도련님 하래요?”전태윤이 말했다.“도련님 신분이 아니면 너랑 결혼하지도 못했어.”그가 맏이였기에 할머니는 그에게 하예정을 소개해 줬다.“똑똑.”이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가서 문 열어요.”하예정이 그를 내쫓았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종일 재잘거렸으니까. 진중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전태윤 도련님이 그녀의 머리가 깨질 때까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릴 줄 누가 알았을까.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 지금 하예정 앞에 벌어지고 있다.전태윤은 그녀에게 바짝
하예정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전태윤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투덜거렸다.“여보 나 혼내네. 나 미워하는 거야?”하예정은 그를 발로 뻥 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계속 안 내려가면 나 오늘 밤에 손님방에서 자요.”전태윤은 곧장 몸을 돌리더니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여보 나 미워해. 여보 나 싫어졌대...”“...”하예정은 그런 그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몸과 마음이 전부 다 전태윤인데 뭘 더 걱정하는 걸까?2분 후.전태윤이 부모님 맞은편에 앉았다.흰색 정장 차림의 아빠를 보며 그가 먼저 말했다.“아빠, 지금 연세가 얼마인데 아직도 흰색 정장을 입고 다녀요. 기어코 이 아들 기세를 짓누르셔야겠어요?”전현림이 말했다.“너무 날 세우는 거 아니야? 아빠가 그렇게 늙었어? 자기관리 엄청 잘하는데. 너희 엄마가 그랬어. 너랑 나랑 함께 서 있으면 부자가 아니라 형제 같다고. 흰색 정장 입으니 마치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오는 백마 왕자 같다고 했는데.”장소민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래. 너희 아빠 흰색 정장 입으니 얼마나 멋져. 너희 아빠는 엄마 마음속에 영원한 백마 왕자야.”장소민도 보수적이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었다.그녀의 고고한 자태는 타고난 기질이라 무슨 옷을 입어도 귀티가 가려지지 않는다.“태윤아, 예정이랑 싸웠니?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우리가 오자마자 아빠부터 겨냥하고. 혹시 우리가 온 타이밍이 별로였니? 너희 부부 애틋한 분위기를 망쳤어?”장소민은 남편이 은퇴한 이후로 더는 남편 따라 각종 연회나 자선 바자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하여 이들 부부도 연회에 얼굴을 드러낸 지가 꽤 됐다.오늘 밤 부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장소민도 이 기회에 하예정과의 고부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는 걸 모두에게 알릴 생각이었다.그 밖에 며느리를 위해 전씨 일가와 가깝게 지내는 몇몇 사모님들도 소개해줄 계획이다.앞으론 하예정이 안방마님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전태윤과 각종 연회, 자선
“그거야 내가 잘 가르쳐서 그렇죠.”전현림은 입을 열었지만 딱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아내 바보’가 된 아들은 이미 그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부자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관성에서 가장 우아하고 기품이 차 넘치는 고부가 위층에서 내려왔다.하예정이 착용한 액세서리는 전태윤이 한눈에 봐도 짐작 가능했다. 그가 선물한 게 아니니 영락없이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거겠지.장소민은 위층에 올라가 며느리가 화장하는 걸 지켜보겠다고 하더니 가방에 몰래 챙겨온 액세서리 세트를 며느리에게 주기 위해서였다.이 세트가 너무 화려하여 장소민의 나이대와 어울리지 않으니 하예정이 착용하면 너무 예쁠 것 같았다.장소민은 재벌가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재벌 가문에서 자랐다. 그녀는 수많은 액세서리를 보고 자랐고 전씨 일가에 시집온 이후에도 남편의 총애를 받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액세서리를 선물 받았다. 전태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도 그녀에게 고가의 주얼리 세트를 선물해 주셨다.장소민은 슬하에 딸이 없어 아끼던 주얼리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있다. 아직은 며느리가 하예정 한 명뿐이고 게다가 또 맏며느리라 그해 전태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주얼리 세트 중 하나를 며느리에게 선사했다.하예정은 이모 이경혜를 따라 수차례 연회에 참석하며 많은 걸 배웠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마친 후 시어머니가 주신 액세서리까지 착장하니 우아하고 고고한 자태가 전태윤을 그 자리에서 넋 놓게 했다.전현림은 속으로 한심한 아들 녀석이라고 야유했다. 이번 생은 며느리에게 단단히 잡혀 살 듯싶다.‘아버님, 저야말로 태윤 씨한테 단단히 잡혀 살고 있어요.’“여보, 어머님이 선물하신 액세서리 어때요? 이쁘죠?”전태윤이 머리를 끄덕였다.“예뻐. 근데 내가 준 거 착용했으면 더 이뻤을 거야.”장소민이 웃으며 아들을 나무랐다.“이젠 하다 하다 네 엄마까지 시샘하는 거야? 너 그거 중독이다! 예정아, 하도 너니까 저런 속 좁은 인간 다 참고 사는 거야.”하예정이 남
관성 호텔은 오후에 아예 영업을 접었다.연회장 배치를 일찌감치 마쳤고 날이 어둑해지자 일부 중소기업 사장들이 호텔에 도착했다.그들은 아직 레벨이 낮은지라 일찍 오면 공씨 일가 사람들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눌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공세호 어르신도 뵐 수 있다.만약 늦게 오면 사람들도 많을뿐더러 다들 거물급 인사라 그들과 같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축에 끼지 못한다.전태윤은 전에 늘 아주 늦게 등장했다.그가 얼굴을 비칠 때면 성기현은 참석하지 않았다.오늘 밤도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에 나섰다. 관성에서 가장 우수한 두 그룹 총수가 함께 모습을 드러낼지 말이다.전씨 그룹 사모님은 과연 전태윤 대표와 함께 연회에 참석할까?최근 사모님이 상류층 모임에서 맹활약하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건 늘 이모 이경혜였다.이 때문에 전씨 그룹 사모님이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단 한 번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일일이 가르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이모인 성씨 사모님을 따라다닌다고 추측이 난무했다.장소민도 이런 소문을 듣고 한때 하예정과 함께 쇼핑하며 고부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뒤에서 쉬쉬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하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전씨 일가는 셋째 전호영 도련님과 할머니가 강성에 있고 또 몇몇 어린아이들은 외부에 얼굴을 알리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전태윤네 가족 네 명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둘씩 연회장에 들어섰다.전이진도 부모님과 함께 왔다.공씨 일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한 사람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전이진은 무심코 호텔 문 앞을 빈둥거리며 여운초가 오길 기다렸다.여운초는 오기 싫었으나 추미자가 점심시간이 지난 후 경호팀을 거느리고 꽃가게로 가서 무작정 그녀를 저택으로 끌고 갔다.이브닝드레스를 내던지며 당장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혼자 안 갈아입으면 경호원에게 시켜 강제로 갈아입히겠다고 협박까지 해댔다.여운초는 아직 연애 한
“똑똑.”노크 소리가 울리고 여태웅이 문밖에서 물었다.“여보, 다들 준비됐어? 빨리하고 나와. 우리 곧 지각이란 말이야.”추미자는 더 이상 여운초를 후려잡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밤의 계획은 여운초를 팔아치우는 거니까. 너무 처참하게 후려잡았다가 사람들이 싫어하면 제값에 팔리지도 않는다.“네, 금방 나가요.”추미자는 남편에게 대답하고는 여운초에게 쏘아붙였다.“빨리 나가!”여운초가 맹인 지팡이를 짚고 나가려 하는데 문득 손이 텅 비었다. 추미자가 그녀의 지팡이를 뺏어서 한쪽 옆에 내던졌다.“연회 참석하는데 지팡이를 왜 챙겨? 나 따라오면 돼.”그녀는 딸아이가 말소리와 걸음 소리만 들으면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여운초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묵히 추미자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여태웅은 문 앞에서 기다리다 짜증 날 뻔했는데 두 모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의붓딸을 한참 쳐다보더니 추미자에게 말했다.“운초 점점 더 예뻐지네. 당신도 닮고 얘네 아빠도 닮았어.”여운초를 볼 때마다 여태웅은 남동생이 떠오른다.다행히 여운초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지는 않았다. 안 그랬다면 여태웅은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추미자는 머리를 홱 돌리고 여운초를 한참 쳐다보다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운별이 보다 못해요.”그리곤 앞으로 두어 걸음 나아가 남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가요. 연회 곧 시작하겠네요.”“이 시간대면 연회가 곧 시작할 거야. 하지만 서두를 거 없어. 전태윤 씨가 등장해야 연회의 하이라이트잖아. 지금 가봤자 태윤 씨 안 왔을 거야.”전태윤을 언급하자 추미자는 하예정이 바로 떠올랐다. 그녀를 생각하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개를 홱 돌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리는 여운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장님이 돼서 빨리빨리 못 걸어? 뭘 해도 우물쭈물하지. 너 같은 년은 돈 벌고 배 채우기 위해 지나가는 개도 훔치겠어, 쯧쯧.”여운초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계단 손잡이를 꼭 잡고서 천천히 걸어
또한 그녀도 인간하고만 대화한다. 이런 인간도 아닌 것들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다.여태웅이 아내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와 화려한 거실을 지나서 문밖을 나섰다.부부가 함께 탈 차가 이미 도착했고 경호원 차량도 한 대 있었다.“여보, 태윤 씨가 만약 하예정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다면 당신 일단 응어리를 내려놓고 하예정과의 관계를 잘 다져야 해. 일단 머리 숙이고 하예정이 너그럽게 선처해 줄지 지켜봐 봐.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다시 운초를 이용하는 거야.”“더 이상 어떻게 머리 숙여요? 맨 처음 원한을 맺었을 때부터 우린 먼저 고개 숙이고 갖은 방식으로 사과했는데 결과는 어땠어요? 전태윤 씨야 태생이 차갑고 무자비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제일 가증스러운 게 바로 하예정이에요.”“툭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나, 법원에 고소하지 않나, 인정머리라곤 전혀 없어요. 운별이는 아직 애인데 한참 어린 애랑도 따지고 들어야겠어요? 본인은 뭐 평생 우리 같은 사모님들과 교류할 일이 없을까 봐서? 어쩌면 내 체면도 안 봐주고 바로 운별이를 가둬 넣냐고요?”“이런 무자비한 인간은 우리 모임에서도 분명 함께 어울리지 못할 거예요. 두고 봐요. 태윤 씨는 틀림없이 하예정 때문에 지칠 때가 올 거예요. 태윤 씨라고 뭐 평생 하예정을 위해서 뒷수습 해주겠어요?”“여자 보는 눈이 왜 그 모양인지. 어떻게 촌뜨기와 결혼해? 아무나 한 명 잡아서 결혼해도 그 촌뜨기보단 나을 거잖아요! 우리 모임에 있는 사모님들은 누구 한 명 재벌 출신이 아닌 게 없는데 촌뜨기와 어울려야 하니, 어휴, 우리 레벨까지 내려가게 생겼어요.”추미자는 하예정에게 불만이 아주 컸고 거의 불만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마음 같아선 그녀를 아작내고 싶었다. 하예정 때문에 보배 딸 운별이가 잡혀갔으니까.“전태윤 씨가 지금 신선감 때문에 잘해주는 걸 믿고 감히 운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예요. 태윤 씨가 없으면 누가 하예정 얼굴이나 쳐다보겠어요?”추미자는 감히 전태윤을 미워할 엄두는 없나 보다.그저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