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 호텔은 오후에 아예 영업을 접었다.연회장 배치를 일찌감치 마쳤고 날이 어둑해지자 일부 중소기업 사장들이 호텔에 도착했다.그들은 아직 레벨이 낮은지라 일찍 오면 공씨 일가 사람들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눌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공세호 어르신도 뵐 수 있다.만약 늦게 오면 사람들도 많을뿐더러 다들 거물급 인사라 그들과 같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축에 끼지 못한다.전태윤은 전에 늘 아주 늦게 등장했다.그가 얼굴을 비칠 때면 성기현은 참석하지 않았다.오늘 밤도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에 나섰다. 관성에서 가장 우수한 두 그룹 총수가 함께 모습을 드러낼지 말이다.전씨 그룹 사모님은 과연 전태윤 대표와 함께 연회에 참석할까?최근 사모님이 상류층 모임에서 맹활약하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건 늘 이모 이경혜였다.이 때문에 전씨 그룹 사모님이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단 한 번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일일이 가르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이모인 성씨 사모님을 따라다닌다고 추측이 난무했다.장소민도 이런 소문을 듣고 한때 하예정과 함께 쇼핑하며 고부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뒤에서 쉬쉬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하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전씨 일가는 셋째 전호영 도련님과 할머니가 강성에 있고 또 몇몇 어린아이들은 외부에 얼굴을 알리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전태윤네 가족 네 명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둘씩 연회장에 들어섰다.전이진도 부모님과 함께 왔다.공씨 일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한 사람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전이진은 무심코 호텔 문 앞을 빈둥거리며 여운초가 오길 기다렸다.여운초는 오기 싫었으나 추미자가 점심시간이 지난 후 경호팀을 거느리고 꽃가게로 가서 무작정 그녀를 저택으로 끌고 갔다.이브닝드레스를 내던지며 당장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혼자 안 갈아입으면 경호원에게 시켜 강제로 갈아입히겠다고 협박까지 해댔다.여운초는 아직 연애 한
“똑똑.”노크 소리가 울리고 여태웅이 문밖에서 물었다.“여보, 다들 준비됐어? 빨리하고 나와. 우리 곧 지각이란 말이야.”추미자는 더 이상 여운초를 후려잡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밤의 계획은 여운초를 팔아치우는 거니까. 너무 처참하게 후려잡았다가 사람들이 싫어하면 제값에 팔리지도 않는다.“네, 금방 나가요.”추미자는 남편에게 대답하고는 여운초에게 쏘아붙였다.“빨리 나가!”여운초가 맹인 지팡이를 짚고 나가려 하는데 문득 손이 텅 비었다. 추미자가 그녀의 지팡이를 뺏어서 한쪽 옆에 내던졌다.“연회 참석하는데 지팡이를 왜 챙겨? 나 따라오면 돼.”그녀는 딸아이가 말소리와 걸음 소리만 들으면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여운초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묵히 추미자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여태웅은 문 앞에서 기다리다 짜증 날 뻔했는데 두 모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의붓딸을 한참 쳐다보더니 추미자에게 말했다.“운초 점점 더 예뻐지네. 당신도 닮고 얘네 아빠도 닮았어.”여운초를 볼 때마다 여태웅은 남동생이 떠오른다.다행히 여운초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지는 않았다. 안 그랬다면 여태웅은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추미자는 머리를 홱 돌리고 여운초를 한참 쳐다보다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운별이 보다 못해요.”그리곤 앞으로 두어 걸음 나아가 남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가요. 연회 곧 시작하겠네요.”“이 시간대면 연회가 곧 시작할 거야. 하지만 서두를 거 없어. 전태윤 씨가 등장해야 연회의 하이라이트잖아. 지금 가봤자 태윤 씨 안 왔을 거야.”전태윤을 언급하자 추미자는 하예정이 바로 떠올랐다. 그녀를 생각하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개를 홱 돌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리는 여운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장님이 돼서 빨리빨리 못 걸어? 뭘 해도 우물쭈물하지. 너 같은 년은 돈 벌고 배 채우기 위해 지나가는 개도 훔치겠어, 쯧쯧.”여운초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계단 손잡이를 꼭 잡고서 천천히 걸어
또한 그녀도 인간하고만 대화한다. 이런 인간도 아닌 것들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다.여태웅이 아내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와 화려한 거실을 지나서 문밖을 나섰다.부부가 함께 탈 차가 이미 도착했고 경호원 차량도 한 대 있었다.“여보, 태윤 씨가 만약 하예정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다면 당신 일단 응어리를 내려놓고 하예정과의 관계를 잘 다져야 해. 일단 머리 숙이고 하예정이 너그럽게 선처해 줄지 지켜봐 봐.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다시 운초를 이용하는 거야.”“더 이상 어떻게 머리 숙여요? 맨 처음 원한을 맺었을 때부터 우린 먼저 고개 숙이고 갖은 방식으로 사과했는데 결과는 어땠어요? 전태윤 씨야 태생이 차갑고 무자비한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제일 가증스러운 게 바로 하예정이에요.”“툭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나, 법원에 고소하지 않나, 인정머리라곤 전혀 없어요. 운별이는 아직 애인데 한참 어린 애랑도 따지고 들어야겠어요? 본인은 뭐 평생 우리 같은 사모님들과 교류할 일이 없을까 봐서? 어쩌면 내 체면도 안 봐주고 바로 운별이를 가둬 넣냐고요?”“이런 무자비한 인간은 우리 모임에서도 분명 함께 어울리지 못할 거예요. 두고 봐요. 태윤 씨는 틀림없이 하예정 때문에 지칠 때가 올 거예요. 태윤 씨라고 뭐 평생 하예정을 위해서 뒷수습 해주겠어요?”“여자 보는 눈이 왜 그 모양인지. 어떻게 촌뜨기와 결혼해? 아무나 한 명 잡아서 결혼해도 그 촌뜨기보단 나을 거잖아요! 우리 모임에 있는 사모님들은 누구 한 명 재벌 출신이 아닌 게 없는데 촌뜨기와 어울려야 하니, 어휴, 우리 레벨까지 내려가게 생겼어요.”추미자는 하예정에게 불만이 아주 컸고 거의 불만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마음 같아선 그녀를 아작내고 싶었다. 하예정 때문에 보배 딸 운별이가 잡혀갔으니까.“전태윤 씨가 지금 신선감 때문에 잘해주는 걸 믿고 감히 운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예요. 태윤 씨가 없으면 누가 하예정 얼굴이나 쳐다보겠어요?”추미자는 감히 전태윤을 미워할 엄두는 없나 보다.그저
여태웅은 전씨 일가와 사돈을 맺기 싫은 게 아니라 그럴만한 복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하예정은 본인도 모를 사이에 어리둥절하게 안방마님의 자리를 꿰찼지만,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비집고 전력 질주해도 서원 리조트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이래서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하는 법.“그럼 성씨 일가 둘째 도련님은요?”여태웅이 아내를 힐긋 쳐다봤다.“당신은 운별이한테 신경 쓰면 쓸수록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아. 그저 우리 운별이를 손꼽히는 재벌가에 시집보낼 생각밖에 없지? 하예정 씨 이모가 성씨 일가 사모님이란 건 새까맣게 잊었지? 운별이가 이경혜 씨 며느리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맞네, 내가 이걸 깜빡했네.’“운별이는 아직 어려서 서두를 것 없어. 천천히 고르면 돼. 우리 급선무는 일단 아이를 건져내야 해. 전씨 일가에서 깍듯이 모시는 사람을 찾아 직접 중재에 내세우면 하예정도 운별이 고소하는 거 포기할 거야.”여태웅은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운별이는 절대 관성의 재벌가에 시집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다른 도시의 우수한 젊은이들에게 슬슬 시선을 돌렸다.부부가 대화를 나눌 때 여운초가 드디어 나왔다.추미자는 큰딸을 그들과 같은 차에 태우기 싫었고 이에 여태웅이 말했다.“우리의 오늘 밤 계획을 잊지 마. 사소한 일로 계획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해. 운초가 처음 연회에 참석하고 또 당신 친딸이기도 한데 경호원 차에 태우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당신 엄청 삿대질할 거라고.”“좀 예쁘게 가꿔서 좋은 값에 팔아치우는 것뿐이에요. 운초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 관성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추미자는 입으론 구시렁댔지만 하는 행동은 결국 여운초를 차에 실었다.그렇게 한 가족 세 식구가 관성 호텔로 출발했다.호텔에 도착하니 문 앞 주차장에 차들이 꽉 차 있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전부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몰고 갔다.여태웅 가족은 호텔 문 앞에 차를 세우고 기사더러 지하 주차장에
대부분 드레스가 다 이런 스타일이어도 그들이 한사코 싫어한다.제 여자는 돌돌 감싸서 팔도 드러내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으니까.지금 이 순간 여운초는 한입에 깨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운초 오늘 밤 너무 예쁘네.”전이진은 그녀를 칭찬한 후 여 대표 부부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사모님, 제가 아는 분을 봐서 먼저 인사하러 가볼게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회장님들 꽤 많이 오셨어요.”“네, 가보세요, 이진 씨.”여태웅이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그는 방금 전이진이 여운초를 바라보는 시선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처음에 깜짝 놀라더니 두어 번 더 쳐다보고 예쁘다고 칭찬할 뿐 더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운초에게 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여태웅은 본인만의 꿍꿍이에 빠져있었다. 여운초가 전이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녀를 전이진에게 주고 전이진이 나서서 여운별을 거들어준다면 하예정은 도련님 체면을 봐서 여운별을 용서해 줄 거라고 믿었다.아쉽게도 오늘 밤 눈부시게 화려한 여운초도 전이진의 마음을 흔들진 못했다.이젠 어쩔 수 없이 원계획대로 운초를 오늘 연회를 주최한 공씨 일가의 여느 남자에게 팔아치워야 한다. 공씨 일가에서 위엄이 있는 사람이면 된다.공씨 일가와 전씨 일가는 대대로 친분을 쌓아왔다.공씨 일가의 연회에 전씨 일가의 도련님들이 전부 참석한 걸 보면 두 집안이 상상 그 이상으로 사이가 좋다는 걸 설명한다.여 대표 부부는 공씨 일가의 사람을 중재에 내세울 작정이다.전이진이 떠난 후 여 대표네 가족은 호텔 종업원의 안내하에 안으로 들어갔다.전이진은 대충 핑계를 둘러대려 했는데 뜻밖에도 정말 친한 사람이 와버렸다.소정남이 약혼녀 심효진과 함께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둘이 먼저 차에서 내리고 기사가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소정남은 전에 항상 직접 운전했지만 오늘은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되니까 기사를 데려왔다.그는 여전히 훤칠한 모습이고 심효진도 예쁘게 치장했다. 작년에 하예정과 함께 이곳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 오늘은
관성 호텔은 전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다. 비서실장 소정남이 매일 이 호텔을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이끌려갈 필요가 있을까?“아직 급하게 들어갈 거 없어요. 효진 씨 친구분들도 아직 안 왔잖아요. 문 앞 주차장에 차도 안 보인다고요. 태윤이는 제쳐두고 성씨 일가도 아직이에요. 다들 나처럼 시간 철저하게 지키지 않네요.”그녀는 살짝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다들 지하 주차장에 차 세웠나 보죠.”“못 믿겠으면 로비 매니저에게 가서 물어봐요.”심효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손을 놓고 다시 팔짱을 꼈다.“가요 우리.”소정남은 그제야 흡족한 듯 그녀와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오랜 절친 전이진은 결국 그들과 한마디 얘기도 못 나눈 채 문 앞에 덩그러니 내팽개쳐졌다.“...”솔로의 서러움이란.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짝을 맞춰 오니 그에게 눈길조차 안 줬다.다행히 그도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여운초에게 안 반한 게 아니라 여 대표 부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이 여운초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말이다.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추미자가 여운초를 데리고 온갖 사모님들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그녀가 큰딸을 데리고 등장하니 많은 이가 의아했지만, 머리 좋은 사람은 그 연유를 바로 알아챘다.여운초는 올해 26살, 결혼적령기에 들어섰다. 추미자가 갑자기 큰딸을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 건 아마도 딸에게 적당한 시댁을 골라주기 위해서겠지.여운초는 꽤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여씨 일가에서 투명인 취급을 받고 있고 또 시각장애인이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홀로 꽃가게를 꾸려 돈을 벌고 있다.그녀의 조건은 사모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도 그녀와 사돈을 맺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시각장애인이니까.전이진은 인파들 속에서 어머니를 찾고 나지막이 몇 마디 속삭였다. 둘째 큰 사모님은 추미자에게 끌려다니는 여운초를 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넌 네 볼일 봐. 내 예비 며느리는 내가 알아서 지켜.”여운초가 시각장애인이라고 꺼리는 사모님들이 만약
또한 뼛속부터 하예정의 출신을 깔보고 있다.촌뜨기가 전씨 일가의 어르신을 구해줬다고 전세 역전하다니.전씨 일가의 그 많은 어르신들도 참 무던하시지. 왜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촌뜨기가 사모님이 되도록 내버려뒀을까? 앞으론 안방마님의 자리를 꿰찰 텐데. 하예정이 만에 하나 안방마님의 자리를 제대로 승임하지 못하고 전씨 일가에 먹칠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할까 봐 두렵지도 않나 보다.하예정이 만약 전씨 일가의 다른 도련님에게 시집갔다면 이렇게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을 것이다.“맞는 말이에요. 내 생각도 그래요. 하예정 씨는 시야가 좁아 만사에 깊이 고려하지 못할 거예요. 일하는 것도 마냥 서툰데 전태윤 씨 신분, 지위만 믿고 안하무인 격에 제멋대로 남 일에 간섭해서 태윤 씨만 원한을 맺게 생겼어요.”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추미자였다.“그러게 말이에요, 하예정 씨는 정말 오지랖이 넓다니까요. 그쪽은 여씨 사모님이죠? 지난번 동씨 가문 연회에서 뵈었어요. 하예정 씨가 오지랖을 피우는 바람에 두 모녀와 원한을 맺게 됐잖아요. 내가 좋은 마음으로 전씨 큰 사모님께 전화 드려서 며느리를 잘 관리하라고 말했더니 아니 글쎄 큰 사모님이 된통 혼내고 날 차단했지 뭐에요.”하예정에게 갖은 악의를 품고 핀잔을 두는 사람은 바로 그때 함부로 입을 떠벌렸던 온씨 사모님이다. 그 당시 장소민에게 한바탕 야단맞은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본인은 좋은 마음으로 다가간 건데 장소민이 벌컥 화내니 온씨 사모님은 기가 막힐 따름이다.하예정이 만약 온씨 사모님의 며느리였다면 밖에서 감히 오지랖 피우다가 사람들과 시비 붙어 제 아들까지 피해를 보면 당장 아들과 이혼시키고 말 잘 듣는 며느리를 들일 것이다.장소민이 아무리 제 가족을 편들려 해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그런 사고뭉치 며느리는 지켜주면 줄수록 더 큰 화를 초래할 것이다.전씨 일가는 조만간 하예정의 손에 놀아나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전씨 일가의 명성도 분명 하예정 때문에 훼손될 테고!“전씨 가문의 큰 사
전태윤의 경호팀은 프로패셔널하게 그들 부부를 위해 길을 내주었다. 아무도 함부로 두 사람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부부는 부모님을 뒤따라 자신들을 마중 오는 공씨 일가 사람들에게 걸어갔다.다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공씨 일가 사람들의 시선은 결국 하예정에게 돌아갔다.영롱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우아한 기품이 차 넘쳐 어린 신부 같은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전태윤과 하예정은 부부 사이란 걸 진작 공개했지만 함께 상류층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다. 하예정은 평소에 이모 이경혜를 따라 각종 연회에 참석했고 공씨 사모님은 또 그다지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다. 하여 공씨 일가의 많은 사람들도 이제야 전씨 일가 사모님을 뵙게 됐다.관성에서 최근 반년 동안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른 전씨 일가 사모님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었다.되레 전태윤과 나란히 서 있으니 여러모로 참 잘 어울렸고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하예정이 볼품없고 전태윤에게 가당치도 않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시기, 질투에 눈이 멀어 배 아파서 하는 소리가 틀림없다.“이분은 제 아내 하예정입니다.”전태윤이 그녀를 공씨 일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이어서 공씨 일가 사람들도 일일이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예정은 온화하게 웃으며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공씨 사모님 안시연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장소민에게 말했다.“난 참 소민 씨가 부러워요. 며느님이 딱 봐도 복스럽고 착하고 효심 가득할 것 같아요. 소민 씨 이젠 편하게 누릴 일만 남았네요.”장소민이 웃으며 답했다.“맞아요, 우리 예정이가 마음에 쏙 들어요. 이번 생에 딸아이가 없어 며느리를 딸처럼 예뻐해 주고 싶거든요.”안시연이 웃으며 말했다.“그런 것 같았어요. 며느님 정말 예뻐하시는 게 눈에 다 보여요.”어르신은 그해 장소민에게 값비싼 주얼리 세트를 몇 개 선물해 주셨다. 장소민은 이미 많은 액세서리를 갖고 있지만 시어머니가 주신 주얼리 몇 세트를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성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