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어봐.”한밤중에 심심해서 차를 몰고 달려와 길을 막은 건 아닐 테니.강일구는 도어를 내리고 이리로 걸어오는 노동명에게 물었다.“노 대표님,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태윤이 차에 있죠? 태윤아! 나 한동안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캐리어도 가지고 왔어. 하지만 박 집사 아저씨께서 이건 너하고 상의해야 한다면서 날 들여보내주지 않아. 그래서 여기서 내내 널 기다리고 있었어.”전태윤은 듣자마자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만약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가 아니었다면, 운전기사에게 앞에서 길을 막고 있는 차를 날려버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똑같이 그 말에 많이 놀란 하예정은, 남편의 얼굴이 어둡게 변한 것을 보고 대신 노동명에게 물었다.“동명 씨, 혹시 무슨 일로 우리 집에...”“끈질기게 따라붙는 여자를 만났어요. 내 명의로 된 집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 내가 어디로 가든 계속 찾아오네요. 너무 짜증 나서 어쩔 수 없이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온 거예요.”노동명이 말하고 있는 여자는 바로 손은경이었다.손은경은 윤미라가 마음속으로 찜한 최고의 며느릿감이다. 그리고 모처럼 아들의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여자다. 그래서 윤미라는 최선을 다해 아들과 손은경을 이어 주기로 결심했다.아들이 본가로 돌아오지 않으려 하자 윤미라는 손은경을 데리고 아들 소유의 별장으로 찾아갔다.그녀는 아들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 어느 곳에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더는 피할 수 없자 노동명은 전태윤을 방패로 삼아 옷 몇 벌을 대충 챙기고는 캐리어를 끌고 이리고 찾아왔다.평소 너무 세심한 스타일이 아닌 노동명도 자신이 이렇게 찾아오면 친구의 부부생활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지금 전태윤만이 그를 도와 손은경을 막아줄 수 있다. 소정남마저도 그럴 능력이 없다.만약 소정남이 대신 막아줄 수 있다면... 노동명은 진작에 찾아갔을 것이다.소정남이 그의 생각을 알아챘다면 참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하예정
전태윤은 비록 몇몇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들 부부가 자주 사는 집은 바로 이 별장과 발렌시아 아파트이다.하필이면 이 두 집이 회사에서 가장 가까워서 출퇴근이 편리하다.길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노동명은 염치없이 이곳으로 찾아와서 전태윤과 함께 한동안 살 생각을 했다.“태윤아, 이 로맨틱한 배치들은 다 네 아이디어야?”노동명은 어두운 얼굴의 전태윤을 보며 말을 이었다.“정말 예쁘게 꾸몄는데? 프러포즈 현장 같아. 아니 결혼 현장 같아. 앞으로 예정 씨와 결혼식 올릴 때도 이렇게 꾸미면 다른 여자들이 막 질투할 거야.”전태윤은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아이디어가 아니면 네 아이디어겠냐?”“난 이 방면엔 신경이 무뎌 이런 방법을 생각해 여자를 즐겁게 할 재간이 없어.”“네가 무딘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넌 돈밖에 받을 줄 모르잖아.”“어? 내가 무슨 돈을 받았다고 그래?”전태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노동명이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 있을 때 하예정이 두 남자에게 물 한 잔씩 따라주고는 과일을 준비하러 가려 했다.전태윤은 마누라를 못 가게 막더니 자기 옆에 앉혔다.“여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동명인 여기 자주 와 당신보다 이 별장에 더 익숙해. 먹고 싶은 게 있거든 자기 절로 가지러 갈 거야.”“네, 네, 맞아요. 그러니 예정 씨도 그만 않아 쉬어요.”그는 자신을 봤을 때부터 줄곧 어두운 표정인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감히 하예정에게 이것저것 가져오라고 할 엄두가 안 났다.“어떻게 된 거야? 그 아가씨 아직 떠나지 않았어?”전태윤이 차가운 얼굴로 친구에게 물었다.“응. 그리고 또 얼마나 더 머물지 몰라. 우리 엄마 이번엔 정말 마음에 드나 봐. 계속 전화 와서 같이 쇼핑하라지, 밥 사주라지... 일이 바쁘다고 둘러댔는데 엄마가 그 아가씨를 데리고 내 별장에 찾아올 줄이야. 그렇다고 엄마를 쫓아낼 수도 없고. 떠날 생각이 없어 보여 그냥 내가 먼저 떠났어.”노동명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그는 아마도 자
“미안하다.”“미안하면 호텔에 묵던가.”“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내가 네 집에 처음 묵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도 나랑 정남이가 술을 많이 마셨거나 밤이 너무 깊으면 모두 너희 집에 묵었잖아. ”“...”전태윤은 와이프를 일으키며 차갑게 말했다.“넌 안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객실에 가서 쉬기나 해.”그리고 하예정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안방으로 돌아온 전태윤은 찌뿌둥해서 말했다.“언제부터 우리 집이 동명이 녀석의 피난처가 된 거지?”하예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타일렀다. “동명 씨도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며칠 묵으러 온 걸 거예요. 당신들은 오랜 친구잖아요.”“그게 아니라 일부러 날 방패막이로 삼은 것 같아. 그 여자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똑똑히 알면서 어쩜 우빈에게 옷 몇 벌 사주고 처형한테 옷 산 돈을 돌려받을 수 있지?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도통 모르겠네.”하예정은 남편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녀의 적극적인 포옹에 전태윤의 불평하는 목소리도 점차 줄어들었다.“아마도 동명 씨는 정말 우빈이가 좋은 거지 언니에게는 다른 뜻이 없을지도 몰라요.”그들은 모두 노동명과 하예진 사이에 남녀 간의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예정아, 한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여자에게 잘해주지는 않거든. 그런 행동엔 분명 다른 의도가 숨어있을 거야.”“동명 씨가 우빈이에게 아주 잘해주긴 해요.”전태윤은 그저 웃기만 했다.할머니는 진작 노동명을 떠보셨다.노동명은 아직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건데, 전태윤은 전자가 맞을 거로 생각했다.그는 자신이 하예진에게 잘해주는 이유가 우빈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우빈을 정말 좋아하니까.“노씨 사모님은 분명 문벌이 맞는 집안의 아가씨를 며느릿감으로 고르려 할 거예요. 설사 노 대표가 우리 언니에게 마음이 있다 해도... 난 동명 씨가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니도 지금 재혼할 마음이 없고요, 설령 재혼한대도 그 상대가 동명
“그렇게 생각하지 마. 처형은 점점 더 행복해질 거야.”전태윤은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하긴요, 아직 결정된 일도 아니고... 당신 말대로 동명 씨는 매우 주견이 있는 사람이니 자기 인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우리 언니에게 마음이 움직이면, 우리 언니 행복하게 해주겠죠?”“응, 우린 그저 천천히 지켜보기만 하면 돼. 당신은 지금 생각이 너무 많아.”전태윤은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여보, 얼른 씻어.”옷을 건네받은 하예정은 남편의 잘생긴 얼굴에 뽀뽀하고 샤워를 하러 갔다.30분 후.부부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여보, 언제쯤 나랑 같이 연회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아?”전태윤이 물었다.“같이 참석해야 할 연회가 있나요?”이모를 따라 몇 차례 연회에 참석한 후, 그녀는 자신감이 커졌다. 주로 전태윤이 든든한 뒷배가 돼주었다.이제 남편이랑 연회에 참석해도 주눅 들지 않을 거다. 적어도 킬힐을 신고도 여성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됐다.이모는 그녀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 숨기는 거 하나 없이 모조리 다 가르쳐줬다.성소현은 줄곧 이 방면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배우려 하는 조카딸이 나타나자, 이모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험을 모두 전수해 주려 한다.성씨네 사모님은 두 조카딸이 우수하면서도 강한 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자기 딸은 출신이 좋고, 아버지와 형도 지켜주고 있어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도 감히 괴롭히지 못하지만, 두 조카딸은 다르다. 열심히 배우고 강해져야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존중을 받을 수 있다.“낮에는 회사 일로 바빠, 당신도 바쁠 테니 당신의 낮 시간을 뺏지 않을게. 만약 저녁에 가야 할 연회가 있으면 같이 가줘.”남자들끼리 비즈니스 얘기할 때 아내를 데리고 가기 적합하지 않은 장소도 있다. 그는 그런 장소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네, 알겠어요. 필요할 때 언제든지 말해줘요. 인제 전씨 가문의 미래 안방마님이 등장할 때도 됐죠.
“마누라가 있는 남자는 당연히 다르지. 네가 조리한 스테이크는 너 혼자 먹지만, 내가 조리한 스테이크는 우리 부부가 함께 나눠 먹으며 향수할 수 있어. 사랑하는 마누라가 내가 조리한 스테이크를 먹는 걸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일이거든. 물론 이런 행복을 너 같은 싱글은 못 느끼겠지만. 너 혼자 산해진미를 먹은들 맛있을 것 같아? 하지만 부부가 같이 먹으면 맨밥에 김치라도 맛있는 거야.”“너 참 잘도 말한다. 마치 우리처럼 요리할 줄 모르는 남자는 나중에 행복을 얻지 못할 것처럼 말이야. 나는 너처럼 요리 솜씨는 없지만, 요리 솜씨가 아주 좋은 아내를 찾아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으면 돼.”“그러면 마누라 말고 밥하는 도우미를 찾아.”말문이 막힌 노동명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스테이크 나도 하나 줘.”“저절로 만들어 먹어. 이참에 배울 겸 경험도 쌓고 좋잖아. 나중에 네 마누라에게 스테이크를 조리해 주면 아주 즐겁고 맛있게 먹을 거야.”노동명은 입을 삐죽거렸다.“손님에게 그게 할 소리냐?”“요청받지도 않고 불쑥 찾아온 방해꾼이지 손님은 아니지. 직접 만들어 먹기 싫으면 요리사에게 부탁해. 일단 내가 다 조리하고 나서 부엌을 비우면 그때 다시 요리사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해 달라면 돼.”전태윤이 부엌을 차지하고 있을 때 요리사는 한창 마당에서 원예사와 허풍을 떨고 있었다.“그래, 그래, 나절로 할게. 내가 먹을 거 하나 못 만들 줄 알았어? 나 칼 좀 굴린 사람이야. 예전에, 밖에서 빈둥거릴 때 뭘 안 배웠겠어?”예전에 노동명은 조직의 선배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경험이 있다.전태윤은 사랑하는 마누라에게 영양가 있는 아침 식사를 차려준 후, 또 마당에 가서 왕성하게 핀 장미꽃들을 잘라 아름다운 꽃다발을 묶었다.그는 꽃다발을 마누라가 앉을 자리에 가져다 놓은 후 위층으로 올라가 마누라를 깨웠다.노동명은 전태윤이 하예정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며 몰래 사진을 찍어 절친 소정남에게 보냈다.「정남아, 너도 보고 좀 배워.」「네가 배워야 하는 거
아침 8시, 하예진의 토스트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서성이던 노동명은 결국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가다가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차 뒷좌석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그 박스 안에는 블록 세트가 들어 있었다.우빈을 좋아하는 노동명은 많은 장난감을 사서 차에 놓아두었다. 가게에 들어가 우빈을 볼 때마다 장난감을 선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게에 찾아가는 것은 하예진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빈을 좋아해서 간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그는 우빈이가 선물한 바람개비를 싫증 내는 바람에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노동명은 그 블록 박스를 들고 가게로 들어갔다.“노 대표님, 좋은 아침이에요.”하예진이 노동명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이전 메뉴 그대로 드실래요?”“응, 그대로 줘.”친구 집에서 아침을 먹었지만, 오전에 많은 일을 하려면 좀 지나 배가 고플 것 같아서 하예진네 가게에서 좀 더 먹어두어야 한다.“우빈아.”노동명은 우빈이가 카운터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그 블록을 건네주었다.“우빈아, 이건 아저씨가 오늘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동명 아저씨한테서 선물을 받는 것에 익숙한 우빈이는 블록을 받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열어 봐, 아저씨가 같이 놀아줄게.”우빈이가 박스를 열고 안에 있는 블록 부품을 쏟아냈는데 로봇이었다. 현재 우빈의 나이에 이런 블록을 가지고 노는 것은 매우 어려운 편이었다.하지만 블록을 좋아하는 우빈은 하루 종일 놀아도 싫증 내지 않을지도.사실 노동명이 고난도 블록을 우빈에게 선물한 것은 자기 나름의 타산이 있었다. 우빈의 현재 나이로는 스스로 조립을 완성할 수 없으니 함께 놀 핑곗거리가 생긴 거다. 우빈을 도와 블록을 맞추면서 감정도 키울 수 있고. 그러면 우빈이도 동명 아저씨가 점점 더 좋아져 아저씨에게 고분고분 안길지도 모른다.“노 대표님, 우빈에게 장난감이 많은데 자꾸 사주지 마세요. 장난감 가게를 열어도 되겠어요.”하예진은 손님에게 주
“오늘 늦게 일어났어.”노동명이 거짓말을 하였다. 이미 친구 집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배가 부르지 않아서 또 가게에 온 거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사랑스러운 친구 부부네 집에서 식사할 때는 배가 부른 것 같았지만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또 배가 고파 났다.노동명이 식사하면서 우빈이가 블록을 조립하는 걸 도와주자 하예진이 다가와 아들 옆에 앉았다.“우빈아, 엄마가 도와줄게.”공예품을 잘 짜고 손재주가 좋은 하예정은 블록 조립을 잘하지만 하예진은 블록 조립을 잘 못한다.도면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아들이 지저분하게 널어놓은 블록 부품들을 보고 막 머리가 아파 난 하예진은 손님이 가게에 들어오자 마침 잘됐다 싶어 도면을 내려놓았다.“우빈아, 천천히 해 봐, 엄마가 일 끝나면 같이 해 줄게.”“엄만 할 줄 모르니 동명 아저씨랑 같이하면 돼요 .”우빈은 블록을 맞출 때만 동명 아저씨를 따르며 아저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우빈아, 아저씨 회사에 가서 천천히 블록을 조립하며 놀지 않을래? 모르는 건 아저씨가 잘 가르쳐줄게.”잠깐 생각하던 주우빈이 물었다.“엄마도 같이 가나요?”“우빈의 엄마는 바쁘셔서 아저씨 회사에 갈 수 없어.”그러자 우빈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엄마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노동명이 사랑스러운 우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예진에게 말했다.“우빈이가 경계심이 심하네.”잠시 후, 마침내 배불리 먹고 난 노동명은 이곳에 남아 우빈이가 블록 조립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꽉 찬 일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매일 하예진의 가게에서 잠시 머물며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노동명은 비서에게 뒤의 일정을 좀 더 빽빽하게 배정하게 하였다.노동명은 카드로 식사비를 지불한 후 우빈에게 말했다.“우빈아, 아저씨가 퇴근하면 같이 놀아줄게.”“동명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노동명한테서 블록을 선물 받고 기분이 좋아진 우빈이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하였다.이런 꼬마 녀석이 너무 귀여운 그는 아이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노동명의 어머니는 손은경 앞에서 하예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전씨 가문 사모님인 하예정과 친분을 쌓으려고 애를 쓰는 손은경이 분명 하예정의 언니인 하예진도 눈여겨봤을 것이다.“저 가게는 내가 전세로 준 가게예요.”노동명은 손은경이 자기가 가게주인을 도와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한 마디 덧붙였다.“어쩐지 동명 오빠가 그 가게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고 했는데, 오빠 가게였네요.”“난 이미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요, 고마워요.”노동명은 손은경을 데리고 회사로 가고 싶지 않았다.“좀 있다 다시 가져갈게요. 지금은 동명 오빠 회사에 가보고 싶어요. 제가 이번에 관성에 온 건 내 일을 보는 것 외에, 오빠네 회사 같은 대기업과 협력하고 싶어서예요.”손씨 가문의 사업 규모도 매우 크다.노동명의 어머니 윤미라는 손씨 집안과 사돈이 되기를 바랐고, 손은경은 관성의 시장을 개척하려고 하고 있다. 노씨 그룹과 같은 큰 그룹과 협력하면 손씨 가문에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를 통해 노동명과의 거리를 좁히고, 감정을 키울 수 있다.보기엔 거칠어 보이지만 섬세한 면도 있는 노동명을 정복하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비즈니스 업계에 여러 해 동안 몸 담근 손은경은 도전적인 일을 가장 좋아했다. 노동명을 정복하는 것은 지금의 손은경에게 가장 흥미롭고 도전적인 일이 되었다.손은경이 노씨 그룹을 방문하겠다는 말에 노동명도 강경하게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어머니의 절친 딸이니까.그는 할 수 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그녀가 그의 뒤를 따랐다.가게에 있은 하예진은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노동명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씨 식구들이 호호탕탕하게 몰려왔다.김은희가 주서인 부부와 임정한까지 동물원에 같이 놀러 가자고 모두 불러들인 것이다.원래 유치원에 가려던 임정한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에서 떠난 후로부터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지금 또 감기에 걸리자, 주서인은 아예 이틀 휴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