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여동생이 예준하와 나름 잘 어울리고 있다.“저는 우리 예진 그룹의 관성 쪽 사업을 책임지고 있어 관성에 장기적으로 머물러요. 여기 정착하는 거나 다름없죠. 가끔 예진 리조트에 돌아가면 손님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요. 엄마는 제가 예진 리조트를 호텔로 여기고 두 밤 자면 바로 가버린다고 자주 말씀하시더라고요.”성소현은 손을 테이블 밑에 내리고 큰오빠를 툭툭 찌르더니 오빠 곁에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오빠, 준하 씨한테 왜 자꾸 사적인 질문만 해? 너무 뜬금없잖아, 두 사람 친한 것도 아니면서.”그녀와 예준하도 자주 만나다 보니 조금 익숙해졌을 뿐이다.성기현은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얘가 정말 예준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나? 내가 지금 미리 염탐해 주는 거잖아.’성소현이 전태윤에게 적극 구애하다가 결국 상처만 남은 채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만 생각하면 성기현은 가슴이 아팠다. 동생이 예준하에게 딴생각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괜히 또 짝사랑이 될까 봐 그러겠지.예준하도 딱히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무래도 성기현이 너무 앞서간 듯싶었다.생각을 마친 성기현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두 남자 모두 대기업 대표이긴 하지만 예준하가 전씨 그룹과 깊이 협력하고 있어서 성기현은 그와 일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경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떠난 것도 아니다.성기현은 동생이 주스와 디저트를 다 먹을 때까지 줄곧 옆에 있었다.“소현아, 오늘은 예정이랑 함께 투자건 의논하지 않아?”성기현은 동생에게 이젠 갈 때가 되었다고 눈치를 줬다.성소현은 시계를 보더니 오빠에게 대답했다.“오늘 안 가. 내일 다시 예정이랑 효진 씨 찾아갈 거야. 오빠 회사 안 바빠?”“바빠.”‘다 널 지켜주기 위해서잖아.’“오빠 바쁘면 먼저 가서 일 봐. 난 준하 씨 데려다줘야 해.”“네가 데려다준다고?”성기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이때 예준하가 겸연쩍게 웃으며 한마디 끼어들었다.“제가 소현 씨 차 타고 왔거든요.”
관성중학교 교문 앞.세단 몇 대가 바깥의 큰 도로에서 교문 앞 골목길로 굽어 들어오더니 학교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선두의 경호차에서 경호원 한 명이 내려와 뒷좌석 차 문을 열어주며 차갑게 말했다.“아가씨, 관성중학교에 도착했습니다.”여운초는 말없이 옆에 놓인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집어 들고 옆자리에 놓인 몇 가지 선물까지 어루만졌다.선물은 여씨 사모님이 준비한 거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여운초는 잘 모른다.여씨 사모님이 꽃가게에서 그녀를 데려왔다.두 번째 차는 여씨 사모님 전용차였다. 그녀는 도어를 내리고 방금 그 경호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운초한테 말해. 차에서 내려 앞으로 3백 미터 가면 왼쪽 첫 번째 가게가 하예정 서점이라고.”경호원은 알겠다며 공손히 말한 후 다시 경호차 앞으로 걸어갔다. 여운초는 이미 몇 가지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지만 제자리에 서서 방향을 잡지 못했다.그녀는 중학교1, 2학년, 그리고 3학년 첫 학기까지 관성중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을 앞두고 특수 학교로 전학 갔다. 바로 그때 실명했으니까.전학한 이후로 그녀는 십 년 동안 관성중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를 증축하여 새로운 강의동, 기숙사동 등 건물을 많이 지었고 현재는 관성의 특목중학교 중 하나로 꼽힌다.예전에도 교문 앞에 상가가 꽤 많았는데 학교 앞에서 가게를 열 수 있는 사람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고 했다. 배후에 후원자 없이는 아무나 교문 앞에 가게를 열지 못한다.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서점을 연 것도 전씨 일가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아가씨, 여기서부터 서점까지 300미터 떨어져 있어요. 서점은 왼쪽 첫 번째 가게에요.”경호원은 여씨 사모님의 말을 그대로 여운초에게 전달했다.“여운초, 내 말대로 동생 대신 가서 싹싹 빌어. 운별이가 무슨 잘못을 했든 걔는 영원히 네 친여동생이야!”여씨 사모님이 싸늘한 말투로 여운초에게 말했다.그들 부부는 전씨 그룹에 찾아가 전태윤을 만나고 싶었지만 매정하게 거절당
그렇게 겨우 여운초를 살려뒀지만 엄마의 책임을 다하진 못했다. 분명 제가 낳은 아이이면서도 이 딸에게 사랑의 감정이라곤 생겨나지 않았다. 전남편이 죽은 후 여운초는 아직 철도 안 든 어린애라 한창 엄마한테 애착할 때지만 아이가 울면서 안아달라고 해도 듣는 척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짜증 나면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그 광경에 가정부도 식겁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아무리 싫어하고 때리고 욕해도 어린 여운초는 끝까지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엄마, 안아줘요.”전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 여운초를 안아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가정부에게 시켜 여운초를 안아가라고, 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큰딸 얼굴만 보면 짜증이 밀려왔으니까.여운초는 부모님의 장점만 쏙 빼닮았다. 친아빠 같기도 하고 여씨 사모님도 많이 닮았지만 사모님은 끝까지 이 아이를 싫어했다.가정부는 여운초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 이 아이에게 감정이 생겨났다. 여씨 사모님이 갑자기 화내고 또 여운초를 발로 차버릴까 봐 그 후론 사모님만 집에 계시면 가정부가 갖은 방법으로 운초를 달래 밖에서 놀게 했다. 어떻게든 사모님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안 그러면 여운초는 또 울면서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응석을 부릴 테니까.그렇게 서서히 여운초는 엄마의 품을 갈망하지 않고 종일 함께 있는 가정부와 더 가깝게 지냈다.다만 여씨 사모님은 여운초와 가정부가 모녀처럼 가까워진 걸 보더니 가정부를 바로 해고했다. 여운초는 울며불며 가정부를 해고하지 말라고 빌었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여씨 사모님은 그토록 여운초를 미워했다.왜냐하면 그녀는 여운초의 친아빠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줄곧 현재 남편이지만 부모님이 유독 그녀의 전남편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으니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여운초에게도 애정이 생기지 않기 마련이다.여운초는 엄마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 원한과 사악함이
여운초는 예전에 점원에게 부탁해 자신의 보폭을 재어달라고 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보폭이 작아서 1미터를 네 걸음 걸어야 하니 300미터 거리면 정확한 숫자는 몰라도 최소한 1200보는 걸어야 한다.여운초는 속으로 묵묵히 걸음 수를 세며 아주 느리게 걸어갔다.여씨 사모님은 그녀가 빨리 걷든 늦게 걷든 신경 쓰지 않았다.도어를 올린 후 여씨 사모님은 남편에게 전화했다.“여보, 나 지금 운초 시켜서 예정의 가게로 보냈어요.”여 대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운초한테 잘 말해야 운별이를 위해 사정해 줄 거야.”“내가 하라는 일 감히 안 할 리가 있겠어요?”여 대표는 말문이 막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여보, 사람 좀 더 찾아봐서 운별이 일단 꺼낼 수 있을지 알아봐 봐요. 걔가 어릴 때부터 예쁘게 자라서 그 안에서 어떻게 그 고생을 겪겠어요? 안에서 고생할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고요. 이게 다 여운초 때문이에요. 그년이 운별이를 해쳐서 하예정과 갈등을 빚게 한 거라고요. 운별이도 억울함을 당해서 하예정 그년에게 복수하려 했는데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다 보니 그년한테 약점 잡힌 거예요. 여운초 이년 진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대체 왜 안 죽는 거예요? 이 빌어먹을 년은!”“여보.”여 대표가 전화기 너머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지금은 화풀이할 때가 아니야. 당신이 속상하고 딸 걱정하는 거 나도 이해해. 마음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일단 운초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 하예정 그년이 끝까지 기소하겠다고 나오면 그때 다시 방법을 연구해 봐.”여씨 사모님은 마음속 원한을 꾹 짓누르고 알겠다며 대답했다.“일 봐요, 그냥 당신한테 얘기하느라고 전화했어요.”말을 마친 여씨 사모님은 전화를 끊었다.하예정은 여운초가 온 걸 몰랐지만 그녀를 따라다니던 두 명의 경호원은 서점 문 앞에 의자를 두 개 옮겨와 앉아있다가 곧바로 여운초를 발견했다.그리고 암지에서 사모님을 지키고 있던 동료들도 곧장 문자를 보내 여운초의 신분을 확
곧이어 누군가가 재빨리 이리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인 듯싶었다.“운초 씨.”목소리가 조금 익숙한 게 하예정인 것 같았다.“운초 씨.”하예정이 황급히 달려와 허리 숙여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운초 씨?”“네, 괜찮아요.”진짜 하예정이었다.‘경호원 한 말이 틀렸네. 만약 300미터 거리라면 예정 씨가 이렇게 빨리 올 수 없어.’하예정의 서점은 아마 이 근처인 듯싶었다.심효진은 얼른 여운초의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줍고 영양보조제 두 박스와 화장품 기초세트 두 개가 들어있는 선물 봉투까지 챙겨 들었다.하예정은 그녀에게 왜 여기 왔는지 묻지 않고 일단 심효진과 함께 부축해서 서점으로 돌아갔다. 여운초를 의자에 앉힌 후 그녀는 선물 봉투를 보면서 질문을 건넸다.“여 사모님이 오라고 했어요?”“네.”여운초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심효진은 그녀에게 온수 한 잔 따라서 손에 쥐여줬다. 여운초는 심효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여긴 심효진이고 제 절친이에요.”하예정이 그녀에게 심효진을 소개해줬다.여운초는 심효진이 물을 건넨 방향으로 고개 돌려 활짝 웃었다.“반가워요, 효진 씨.”심효진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예쁜 소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게 참 안타까웠다.여운초가 물을 다 마신 후 하예정이 담담하게 물었다.“사모님이 운초 씨더러 운별 씨 대신 와서 사정하라던가요?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대요?”“전태윤 씨가 저희 부모님을 예정 씨 가게로 못 오게 하셨어요. 전씨 그룹으로 찾아갔는데 만나주지 않으셨고요.”여운초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비록 가족이라 해도 굳이 그들 부부를 위해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이 일은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반드시 내가 나서서 수습해야 한대요. 예정 씨, 이번 일은 확실히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내가 예정 씨를 번거롭게 했어요. 이 사건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여운초는 하예정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줄곧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보니 하예정은
하예정은 이미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해 경찰서에서 알아 처리하도록 했다. 절대 사적으로 여씨 일가에 손해배상금을 받을 일이 없다.무너져버린 차는 여씨 일가에서 새 차로 배상하면 받겠지만 반드시 같은 브랜드의 새 차여야 한다.그 차는 작년 가을에 사서 이제 고작 반년밖에 운전하지 못했다.여운초는 묵묵히 은행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하예정도 잠시 침묵하다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운초 씨, 내가 끝까지 여운별을 기소하면 운초 씨는 집에서 잘 지낼 수 있어요?”“조금 힘들긴 하겠죠. 하지만 난 그 집에서 늘 그렇게 지내왔어요. 예정 씨가 운별이를 기소하든 안 하든 다들 나한테 항상 같은 태도였어요.”여운초가 차분하게 대답했다.“예정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 신경 안 써도 돼요. 이번 일은 어쨌거나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예정 씨는 날 도와주고 구해주기 위해 운별이를 건드렸고 운별이는 또 돈을 써가면서 사람을 불러 예정 씨 차를 가로막고 다치게 했죠. 그건 엄연히 운별의 잘못이에요.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죠. 내가 운별이 대신 사정하면 예정 씨가 날 도와준 은혜를 배신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모 이외에 이렇게 날 도와준 사람은 십 년 만이에요.”그녀는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 여운별과 싸우더라도 절대 여운별을 위해 하예정에게 기소를 포기해 달라고 사정하고 싶진 않았다.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하예정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여운초는 재벌가에 태어났지만 전혀 누리지 못했다. 친아빠는 일찍 죽고 친엄마는 웬만한 새엄마보다 악독해 모성애라곤 전혀 없다.하예정은 여운초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운초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옛 친구처럼 친근감이 들었고 빨리 친구 맺고 싶었어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무조건 도울게요. 도울 수 없으면 사람을 불러서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도울게요.”전이진은 참을성이 대단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꿈쩍하지 않았으니 말이다.하예정이 남자였다면 일찌감치 여운초를
고모는 신의가 최근 A시에 자주 나타난다고 들어서 신의에게 조카의 눈을 보일 생각이다. 신의가 아니라 그 신의의 제자라 해도 제발 한 번만 조카의 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신의 사제는 고모의 마지막 동아줄이다.오랜 시간 치료를 받으며 그녀는 사실 아주 조금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고 병 치료에 임할 자신이 생긴다.다만 이 일은 고모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감히 알릴 수 없다.어찌 됐든 그녀는 지금 여전히 시각장애인처럼 앞이 잘 안 보이고 아예 안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앞이 안 보이는데 가게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여운초가 웃으며 답했다.“아까 들어올 때 그분들 발소리를 들었어요. 발걸음이 묵직한 게 남자 같아서 예정 씨 경호원일 거로 예상했어요.”하예정과 심효진은 서로를 마주 봤다.시각장애인은 청력이 뛰어난다더니 정말 그랬다.하예정은 경호원 두 명을 불러와 여운초의 말대로 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너무 과격해서 여운초를 다치게 할까 봐 친히 당부했다.“겉보기만 거칠게 하면 돼요. 꼭 자제해요, 운초 씨 다칠라.”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귀엽고 작은 얼굴이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하예정은 도련님 대신 그녀를 잘 보살피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저희 힘 조절 잘하겠습니다.”두 경호원은 여운초를 서점 밖으로 ‘몰아냈고’ 그녀가 챙겨 온 선물 봉투도 전부 들고 나왔다.곧이어 그녀를 여씨 사모님 차 앞에 끌고 가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한 경호원이 선물 봉투를 그녀에게 내던졌고 다른 한 경호원은 ‘꺼져’라고 괴성을 질렀다!그 경호원은 쓸데없는 말이 많은 편인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우리 사모님이 아무리 잘해주면 뭐해. 당신 때문에 사모님 차까지 망가졌어!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 파렴치한 것, 당장 꺼져!”두 경호원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여씨 사모님은 두 경호원이 떠난 후에야
“빼액...”자동차 경적에 여운초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이제 곧 하교 시간이라 그런지 경적이 끊기지 않았다.그녀는 아예 무턱대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는데 경적이 또 울렸다.잘못 들어선 걸까?흠칫 머뭇거리던 여운초는 몸을 돌려 오던 방향대로 돌아갔다.전이진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운초는 본능적으로 두어 번 몸부림쳤지만 전이진의 몸에서 나는 산뜻한 향수 냄새를 맡자 금세 동작을 멈췄다.전이진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선물 봉투와 지팡이도 모조리 주워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떡하니 앉았다.“띠리링...”이때 전이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일단 차를 길옆으로 몰고 나갔다. 하굣길의 학생들과 학부모를 가로막으면 안 되니까.그는 차를 세운 후에야 형수님의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저 금방 왔어요.”“네? 금방 왔다고요 도련님? 저기... 내가 이미 문제 다 해결해서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돌아가세요.”“문제를 해결했다고요?”“네, 그러니까 가서 볼일 보세요.”전이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형수님이 불쑥 전화 와서 아주 성급한 말투로 지금 당장 서점으로 오라고 했는데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형에게 말했더니 형도 오직 그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 빨리 가보라고 부추겼다.전이진은 결국 퇴근 시간도 채 되기 전에 급히 달려왔다.오자마자 형수님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다.전이진은 왠지 형수님에게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생각은 이렇게 해도 감히 입밖에 내뱉을 순 없으니 그는 얌전히 대답했다.“그래요, 이미 다 해결됐다니 저 그럼 갈게요.”“네, 헛걸음하셨네요 저 때문에. 저녁에 태윤 씨랑 말해서 내일 도련님 반차 쓰게 해 줄게요. 푹 쉬어요.”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형수님, 주실 거면 통쾌하게 하루 휴가 주시던가요. 형한테 반차만 받다니 그게 뭐예요.”하예정도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요. 그럼 하루 휴가 줄게요. 저녁에
“할머니, 어디 가시려고요?”소정남은 전씨 할머니가 나가려는 것을 보면서 묻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하셨다.“너무 오래 나가 놀았는데 산기슭에 있는 옛 친구들을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고 카드놀이도 해야지.”전씨 할머니는 귀부인티를 내지 않고 산기슭에 있는 노동자들의 부모님들과 잘 어울려 다니셨다.그 할머니들도 전씨 할머니와 이런저런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이야기들 나누렴. 난 나가야겠어. 좀 이따가 밥 먹을 때 날 부를 필요 없어. 사람을 시켜 산기슭에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해. 옛친구들과 함께 먹게. 어묵 같은 거 있으면 더 좋고.”“할머니,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 음식은 적게 드세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 안 먹을게.”“제가 할머니께 드시지 말라고 하면 할머니께서는 저를 욕하시더니 왜 예정이가 드시지 말라고 하면 바로 수긍하세요?”전태윤이 일부러 투덜거렸다.그는 전씨 할머니가 손자며느리가 생겼다고 손자를 안중에 두지도 않으신다고 불평했다.전씨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나셨다.할머니는 하예정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듯했다.그러나 손자는 너무 많아서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떠들썩한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저녁 6시가 넘으니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전씨 가문의 세 사모님은 여운초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하러 집을 나섰다.전이진은 리조트 입구까지 배웅하며 끊임없이 명해은에게 당부했다.“엄마, 우리 운초 씨를 잘 돌봐주세요. 남들이 괴롭힘당하게 하지 말고요.”“알았어. 누가 감히 우리 며느리를 건드리면 내가 가장 먼저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명해은은 전이진의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었다.전이진은 또다시 들이밀었다.“아니면 제가 따라갈래요.”“네 아버지랑 다 집에 있는데 네가 따라가서 뭐 하게?”명해은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몰아라고 지시했고 창문을 눌러 아들에게 고개를 내밀어 말을 건넸다.“날도 어두워지고
전창빈은 할머니께 말씀드렸다.“할머니께서 조금 전에 저 보고 할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집에 방금 돌아오셨는데 물도 아직 한 모금 마시지 않으시고 바로 내려가셔서 카드놀이도 이야기도 나누시겠다고 하시다니.”하예정도 말했다.“할머니, 그 할머니들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께서도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그 할머니들의 돈을 전부 따버리면 안 돼요.”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돈 내기하는 거 아니야. 카드놀이에서 지는 사람의 얼굴에 낙서하면서 노는 거지. 누가 얼굴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지 지켜보면서 노는 거야.”현장의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노인네의 세계를 그들은 아직 잘 모른다.어르신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재치다.곧, 소정남과 심효진 부부, 그리고 소정남 부모님도 함께 들어왔다.집안이 더 시끌벅적해졌다.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의 아버지 소균혁을 보더니 물었다.“셋째야, 당신 집 맏이가 사돈집에 갔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안 왔어?”소정남의 아버지는 형제 중 셋째였다.전씨 할머니는 예전부터 줄곧 소균혁을 셋째라고 불렀다.“설전에야 돌아온다고 하셨어요.”소지훈은 정윤하에게 고백했고 정윤하도 소지훈에게도 약간의 관심이 가진 듯 했다.소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정윤하는 수차례의 고민 끝에 결국 소지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며칠 만에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소균성 부부는 연성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듯했다.하마터면 홀아비가 될 뻔한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소균성 부부의 마음에 걸려 있던 큰 돌도 마침내 땅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하여 너무 기뻐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비록 관성이 매우 춥고 가끔 눈이 온다고 해도 소균성 부부는 따뜻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정씨 가문에 틀어박혀 불을 쬐고 싶어 했다.세 식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이 정윤하와 소
“여보, 오늘 밤은 내가 선물한 보석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가.”“보석 반지만 이진 씨가 선물한 걸 착용하면 되잖아.”전이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래, 그럼. 이것만은 우리 엄마에게 양보할게.”여운초는 웃긴다는 듯 그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참, 당신과 형수님께서 용씨 사모님도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던데.”전이진은 문득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목소리와 몸매가 여운별과 닮은 그 젊은 사모님을 언급하자 여운초의 웃고 있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마침 잘 지켜볼 수 있게 됐네.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지켜보면 허점을 잡히기 마련이야.”“내가 시간 날 때 사람 시켜서 알아봤거든. 근데 그 사모님이 정말로 용씨 사모님이더라고. 남편이 정말로 용씨였어.”“응.”여운초는 용씨 사모님이 여운별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지만, 증거는 없었다.만약 용씨 사모님과 여운별이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 음모일 것이다. 만약 음모라면 배후에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상황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여운초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면서 인간성을 꿰뚫어 보게 되어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지금 여운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그녀의 친어머니마저도 그녀가 죽기를 원했기에 그녀는 정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나와 여운별은 20년 동안 자매로 지내면서 많은 일이 있었거든. 남들이 모르는 여운별의 사소한 습관들도 난 전부 잘 알고 있어. 아마 여운별 본인도 모를 수도 있어. 내가 몇 번만 더 만나고 접촉해 보면 분명 허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용씨 사모님도 우리 앞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만약 정말로 여운별이 가장한 거라면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생활 습관은 고칠 수 없을 거야.”전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동일 인물이 옳든 아니든 용씨 사모님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해.”“나도 알아. 아주버님과 형수님이 곧 돌아오실 거야.
그랬다. 전태윤도 하예정과 딸을 낳고 싶었다.특히 그가 매일 예지연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늘 딸이 갖고 싶었다.예준성의 그 보배 딸은 점점 더 귀여워지고 있었다. 옥같이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에 눈도 어찌나 동그란지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려서 볼 때면 앞으로 분명 똑똑한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예준성도 매일 SNS에 그의 보물단지 예지연의 사진을 몇 번이고 올린다.물론, 매일 예씨 가문의 대표 SNS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예준성은 소중한 딸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아까워했다. 심지어 A시 사람들은 예씨 가문의 손자 세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예지연이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보호를 잘 받고 있었기에 언론에 아이의 정면 거의 찍히지 못했다.전태윤도 예준성의 SNS를 볼 수 있는 것도 하예정과 모연정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 때문이지, 그와 예준성의 친분으로는 볼 수 없었다.그는 예준성이 전씨 가문이 딸을 낳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의 소중한 딸을 자랑한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때때로 예준성이 영상을 보내면 전태윤은 예준성이 보낸 영상을 반복해서 보곤 한다. 심지어 영상 속으로 들어가 예지연을 집으로 데려가 그의 딸로 삼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고 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할머니 일행이 돌아오면 모두 서원 리조트로 출발하려고 했다.어젯밤에 리조트로 돌아온 전이진 부부는 지금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다.여운초가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고 전이 진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가끔 여운초가 남편에게 물었다.“이진 씨, 이 드레스를 입으면 어때?”“좋은데.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도 너무 예쁘고 너무 어울려.”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일어나서 여운초의 등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여보,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우리 엄마와 함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당신을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처음으로 당신 아내의 신분으로 어머님을 따라
하예정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전태윤에게 말했다. “태윤 씨, 우리도 리조트에 이틀 정도 지내러 갈까요? 주말에 출근도 안 하고 서점도 주말에는 문을 안 열잖아요.” 예전에는 서점만 운영할 때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사업이 커지면서 서점은 그냥 하예정과 심효진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태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친구인 소정남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그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리조트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 “어머님, 아버님, 할머니도 오늘 가시니까 소정남 씨와 효진이도 불러서 점심 같이 먹어요. 샤부샤부 어때요? 오랜만에 샤부샤부 먹고 싶어요.” 하예정이 자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것에 전현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예정이 자신의 어머니와 꽤 닮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것 같았다. 예전에 전씨 할머니가 일부러 하예정을 자신의 은인으로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하예정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전씨 할머니는 장남인 전태윤에게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했다. 전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법은 정말 대단해. 손자들도 어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다행히 전태윤과 하예정은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예정을 아끼는 전태윤은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답장을 보냈다. “예정아, 우리 아침 먹고 리조트로 가자. 소정남이랑 효진 씨도 리조트에서 만나자. 샤부샤부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맛있잖아. 예준하 씨랑 소현 누나도 불러야겠다.” 전태윤이 제안했다.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성소현은 사양했다. 그녀는 예준하와 A 시로 날아가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지낼 예정이었다. 예준하를 계속 관
전태윤은 그를 속인 거였다. 하예정은 주우빈에게 답장을 보냈다. [눈이 왔구나. 우빈이 운이 좋네, 갔는데 바로 눈이 와서 진짜 눈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눈사람도 만들 수 있네. 이모는 지금까지 눈사람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옷 많이 입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희 셋째 작은 아버지는 여행 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올 거야. 네가 따라가면 유치원에 못 가잖아.] 다행히 전호영은 빨리 도망친 덕분에 주우빈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하예정의 답장을 받은 주우빈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예정과 주우빈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우빈이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네. 당신이랑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다니.”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는 앞으로 수다쟁이가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따뜻한 남자가 될 거예요.” 따뜻한 남자에다 수다쟁이라니... “9시가 넘었네요. 부모님과 할머니도 일어나셨을 거예요. 우리도 얼른 서둘러야죠. 창빈 도련님은 오늘 원림성의 A 시로 가는 거예요?” 전태윤은 먼저 그녀의 옷을 가져오며 말했다. “월요일에 갈 거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려고.” 10여 분 후, 부부는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는 전현림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전씨 할머니와 장소민, 그리고 어제 형의 집에서 잔 전창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님.” 부부는 전현림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전현림은 부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 식사 준비해 뒀어. 아직 따뜻할 거야. 먹으러 가.” “엄마랑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전태윤이 물었다. “창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창빈이도 같이 갔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산책하러 나가시다니.” 전태윤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예진아, 늦었어. 얼른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아침 같이 먹자.” 노동명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하예진은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동명 씨, 잘 자요.” “잘자.” 하예진은 그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직접 휠체어를 조종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달콤한 미소였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지나갔다. 주말 아침,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평소 일찍 일어나던 전태윤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아내의 따뜻한 핫팩이 되어 주었다. 관성의 기온이 떨어져 정말 추웠지만 사실 기온은 아직 10도 정도였다. 낮에는 최대로 10도 중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관성 사람들은 너무 추웠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인터넷으로 두꺼운 옷을 주문했다. 관성 사람들이 옷을 주문하면 판매자들은 재빨리 발송했다. 며칠 후 주문이 취소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관성의 추위는 찬 공기가 남하할 때 며칠 동안 추워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발송이 늦으면 날씨가 풀리고 나서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방에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가장 추운 며칠 동안 전태윤은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를 켜면 하예정이 더워서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봐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가 하예정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건 절대 예정이에게 들키면 안 돼. 아니면 또 교활하다고 할 거야.’ ‘카톡!’ 하예정의 카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전태윤에게 말했다. “여보,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좀 봐줘요. 너무 시끄러워요.” 전태윤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빈일 거야.” “우빈이는 엄마랑 있어서 이렇게 일찍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직 꿈나라에 있을지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줬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하예진은 그가 챙겨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됐네요. 야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예요. 또 산책하면서 소화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노동명이 일어나자 하예진과 보디가드가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를 밀면서 호텔까지 걸어가. 산책하면서 소화 시키는 거지.” 하예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그런데 걸어가면 길을 못 찾을지도 몰라요. 길을 잘못 들면 우리 둘 다 강성의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돌아다녀야 할 거예요. 저 원망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밤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관을 나오니 거리의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천천히 밀며 걸었다. 보디가드들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보호했다. 걷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명 씨, 눈이 오네요. 빨리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가요.” 어느 정도 걷자 하예진은 더 이상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되었다. “그래.” 노동명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내 그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주우빈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일구는 주우빈과 함께 있었다. 하예진이 돌아오자 강일구는 방으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고 있어?” 노동명은 방에 들어와 주우빈을 보았다.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말했다. “보일러 온도는 적당하면 돼, 너무 높일 필요 없어. 우빈이가 땀을 흘리고 있잖아.” 아이는 더우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다. 하예진은 온도를 조금 낮췄다. 노동명은 주우빈의 땀을 닦아주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 더 덥지 않게 했다. 노동명의 행동을 보며 하예진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는 주
노동명은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한 번, 손바닥에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뺐다.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화관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동명 씨, 진지하게 좀 굴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노동명은 늘 거칠고 대범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쳤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그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변했다. 하예정은 언니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명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진지해질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예진아, 앞으로 네가 휴식을 원할 때,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다면 나에게 말만 해줘. 아무리 바빠도 내 손에 있는 일을 내려놓고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이 더 중요해. 나는 돈도 충분히 있어. 예전에 번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어. 지금 일을 하는 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야. 나에게는 너와 우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 하예진은 그를 꾸짖듯 말했다. “동명 씨가 말하는 약간의 용돈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버는 금액이에요. 동명 씨,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예진이 식당을 운영하며 매출이 좋아 월 순이익이 꽤 높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그녀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비교하니까 열 받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온 힘을 다해야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노동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 고생하며 노력한 결과다. 노동명은 업계에서 십여 년을 뛰어다니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