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모님은 다른 몇 명의 사모님들과 함께 강씨 가문의 별장 입구에 서서 두 사람이 탄 롤스로이스 차량이 멀어져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성 사모님, 전 대표님께서 사모님의 조카딸을 정말 아끼시나 봅니다. 이보다 더 잘해 줄 수가 없겠는걸요. 연회가 겨우 반 정도 진행되었는데, 벌써 사모님의 조카딸을 모셔갔네요.”그 말을 들은 성 사모님이 웃으며 말했다.“전 대표가 예정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잘 대해주던지, 내가 다 부러워할 정도라니까요.”옆에 있던 다른 사모님이 떠보는 듯 물었다.“전 대표님과 조카딸은 언제 결혼식을 올리나요? 우리는 모두 두 사람이 올릴 세기의 결혼식을 고대하고 있어요.”성 사모님이 웃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의논하려고 며칠 전에 우리 부부는 조카딸을 데리고 서원 리조트에 다녀왔답니다. 다음 가을 중에 가장 좋은 날을 골랐으니, 다들 반년 정도 더 기다려야겠는걸요. 결혼식에 꼭 초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축의금은 두둑이 내실 거죠?”사람들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전씨 가문의 결혼식에 초대받는다면, 그 자체로도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자리에 있던 이 사람들도 전씨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예정과 장소민, 두 사람이 고부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몇몇 사람들은 하예정이 매번 성 사모님을 따라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혹여나 고부간의 불화 때문은 아닌지 싶었다. 하지만 입방정을 떨었다가 자칫 온씨 사모님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까 두려웠기에 호기심이 샘솟아도 꾹 참고 감히 묻지 못했다.성 사모님으로부터 전태윤과 하예정의 결혼식이 가을쯤에 거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자, 사람들은 전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앞으로도 하예정의 것이고, 그녀가 곧 전씨 가문 미래의 안주인일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딸이 있는 사모님들은 집에 가서 딸에게 나중에 파티 같은 행사에서 하예정을 만나면 친구가 될 수 없더라
물론 하예정이 정신을 놓고 사랑에 빠져 연애에 목숨 거는 여자였다면, 전태윤도 그녀를 지금처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전태윤은 문득 숙희 아주머니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그래,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하예정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변했다면, 더는 내가 사랑하는 그 하예정이 아니겠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성격이지...’“난 연적이 없잖아요. 만약 어떤 여자가 호시탐탐 태윤 씨를 노린다면 나도 질투할 거예요. 나도 태윤 씨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늘 걱정하고 있어요, 어쨌든 난 아직 모자란 구석이 많으니까요.”하예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현재로서는 견제될 만한 연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전태윤을 사모하는 여자들이 적지 않을 테지만, 그 여자들은 고백 한 번조차 못 했다. 그 때문에 하예정은 견제될 만한 대상인 여자를 만나본 적도, 싸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위기감도 느낄 필요 없이 전태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남들은 모를 전태윤의 부드럽고 애틋한 모습은 오직 하예정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하예정은 자신이 정말 행복한 여자라고 느꼈다. 이런 애인이 생기다니, 훌륭한 남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면서도 웃음이 절로 날 것 같았다.이때, 전태윤이 하예정을 끌어안으며 농담조로 말했다.“그럼 나도 당신을 긴장하게 할 여자를 구해볼까?”“감히? 만약 누가 찾아와서 전태윤은 내 남자니까 포기하라고 하면서 얼마를 줘야 전태윤을 양보할 수 있냐고 한다면 난 가차 없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받고 당신을 팔아넘길 거예요. 그리고 남편 판 돈으로 멋진 나날을 보낼 거예요, 하하하!”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사와 강일구는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험한 대화네...’운전기사는 당장이라도 차를 세우고 이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강일구도 차라리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몸을 숨길 재간이 없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잠시 티격태격 사랑싸움하고 나서, 하예정은 창밖을 보고 문득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피크 별장으로 가고 있어.”하예정이 대답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이자, 전태윤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크 별장이 하예정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신분이 알려지고 나서 전태윤은 그녀를 잃게 될까 봐 피크 별장에 이틀간 가둬두었다가 모두의 설득 끝에 그녀를 놓아주고 떠나게 했다.그렇게 피크 별장을 떠난 후, 하예정은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예정아, 만약 네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기사님에게 핸들을 돌리라고 할게,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갈까?”전태윤은 흠칫하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할머니께선 발렌시아 아파트에 계셔...”“피크 별장으로 가요. 방향 바꿀 필요 없어요.”‘뭐야, 할머니가 발렌시아 아파트에 사시는 게 신경 쓰이는 거야? 소란스럽게 굴어 할머니를 놀라게 할까 봐?’하예정도 어르신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피크 별장은 하예정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았지만, 하예정은 그 별장에 들어서면 자기도 모르게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됐다.다행히 다 지나간 일이 되었고 그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고 직면해야 했다. 그의 광기와 집착을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자.”전태윤은 그녀가 피크 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리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피크 별장에서 사는 것에 더 익숙했다. 어쨌든 그곳에서 몇 년을 살았고, 발렌시아 아파트에서는 몇 달밖에 살지 않았으니 말이다.“오늘 낮에 여씨 사모님이 찾아왔었어?”전태윤이 불쑥 물었다.여운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여 대표는 부랴부랴 관성으로 돌아왔고, 아내에게 사건의 경위를 파악한 후 그런 멍청한 수단을 쓴 것에 대해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서 딸을 꾸짖었다. 그는 하예정을 상대하려면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 하며, 성공하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여씨 사모님은 진작에 상황을 평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전씨 가문의 사모님이니, 여씨 사모님은 불평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찾아온 적 없는데요? 여 대표님이 당신을 찾아갔어요?”“응. 또 사과하러 왔더라고. 직접 만나주지는 않았고 이진이한테 나서라고 했어.”전태윤은 전이진이 앞으로 자주 여씨 가문을 협업하게 될 것이니, 미리 연습 삼아 여씨 가문을 상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여씨 사모님이 직접 나를 찾아온다고 해도 절대로 마음 약해져서 여운별을 가만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뿐이니까요. 여운별에 대한 미움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리 없어요.”여운별과 여운초가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하예정은 이번에도 여운초의 편에 서서 여운별과 날카롭게 대립할 것을 다짐했다.“당신 마음이 그렇다면 화해할 필요 없어. 여운별은 교활하고 난폭한 성격이 이미 몸에 밴 것 같아. 항상 모두가 자기의 시중을 들고, 자기의 비위를 맞추고, 자기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네가 용서하더라도 여운별은 여전히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기회를 잡으면 복수하려고 할 거야.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화해할 필요 없어.”전태윤의 패기가 대단했다.“예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난 내 마누라가 억울함을 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게 누가 됐든 간에 두려워할 필요 없어. 더군다나 굽실거릴 필요는 더더욱 없어.”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아내, 전씨 사모님이 아니었더라도 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잘못이 없는데 왜 내가 고개를 숙이겠어요. 여운별에게 당한 상대가 이번엔 나였지만, 다음번 피해자가 누가 될지 어떻게 알겠어요? 법적인 책임이라도 물으면 못돼먹은 인성을 단번에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 사람의 목숨을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는 교훈은 남겨줄 수 있지 않겠어요?”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친 하예정이 마침내 웃음을 거두며
전태윤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이 아이디어 괜찮네. DNA 검사가 가장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긴 하지. 내일 데려와서 DNA 검사할 수 있도록 할게. 소송 걸 때 증거를 던져주면 그 사람들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하지철이 그 집 손자가 아닌 이상.”하예정이 말했다.“...그러면 만약 하지철이 그 집 손자가 아니라면...”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 둘 부부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전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러면 직접 할아버지와 DNA 검사할 수밖에. 영감님이 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철을 이용해 할아버지 머리카락 열 몇 가닥을 뽑아달라고 하면 돼. 머리카락에는 꼭 모낭이 달려있어야 한다고 알려줘. 할아버지 머리카락만 있다면 채혈하지 않아도 DNA 검사 진행할 수 있어.”하지철은 하씨 가문에서 가장 어린아이였고 또 하예정이 두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그 공포감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하예정도 전태윤의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그러면 태윤 씨가 말한 대로 하지철을 이용해 할아버지 머리카락을 뽑아서 제가 할아버지랑 DNA 검사하는 것이 좋겠어요. 결과가 나오면 아버지가 하씨 가문의 자식인지 알 수 있겠죠.”이 둘 부부는 대화를 이어가면서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 않다고 느껴졌다.곧 로얄팰리스 피크 별장에 도착했다.하예정은 별장 문을 열어주고 있는 숙희 아주머니를 보면서 월급 인상과 관련 문제를 전태윤과 상의했다.“우리 집 결정권은 당신한테 있어. 숙희 아주머니에게 월급을 인상해 주고 싶으면 인상해 드려. 상의 같은 거 안 해도 돼.”“아주머니 일도 아닌데 우리 언니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월급을 인상해 드리지 않으면 제가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요. 이 집은 태윤 씨와 제가 공동으로 꾸려나가는 거잖아요. 태윤 씨한테 결정권이 없다고 해도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저희 집안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그래. 그럼 인상해 드려.”고개 돌려
“...숙희 씨가 말해줘서 다행이에요. 제가 따라 들어갔다간 도련님이 화냈겠어요. 도련님 방은 요구대로 잘 꾸며놨어요?”박 집사가 관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아주 로맨틱하게 다 꾸며놨어요. 사모님이 감동하실 거예요. 두 분 사이도 좋아질 거고요.”숙희 아주머니가 기대를 품고 말했다.“사모님 하루빨리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네요.”전태윤이 노력하는 거 봐서라도 일찍 아이를 가졌으면 했다.“이런 말은 저한테만 하고 사모님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부담을 느끼실 수 있어요. 도련님과 사모님 함께 지낸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아직 둘만의 세계를 누리고 싶어 하실 수도 있잖아요.”박 집사도 하예정이 일찍 아이를 가졌으면 했지만, 이 둘 부부가 몇 년간 둘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직원으로서 재촉하기도 그랬다.숙희 아주머니가 말했다.“알아요. 사모님 앞에서는 이런 말을 안 하죠. 저는 누구보다 사모님과 도련님이 계속 사랑하는 사이였으면 좋겠어요.”숙희 아주머니는 전태윤이 하예정을 좋아하게 된 과정과 두 사람이 서로 다투고 냉전을 벌이는 모습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전태윤은 가끔 숙희 아주머니와 투정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숙희 아주머니는 인생 멘토를 해주기도 했다.박 집사가 말했다.“저도 도련님과 사모님이 영원히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더는 다투고 냉전을 벌이지 말았으면 좋겠네요.”지난번 박 집사한테 일이 생겨서 장 집사가 일을 도맡아 했을 때, 전태윤이 밝힌 신분을 하예정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싸웠을 때도 직원들은 심장을 졸이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 집사는 하루에 몇십 번이고 박 집사한테 전화하여 일을 더는 못하겠다고 투정 부렸다.숙희 아주머니는 그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다.“전씨 가문 남자들은 아내를 예뻐하죠.”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이 둘이 밖에서 하는 대화를 하예정은 들을 수가 없었다. 전태윤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방안은 알록달록한
“그래.”전태윤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하예정은 전태윤이 선물한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핸드폰을 꺼내 방안의 로맨틱한 장식과 자신을 향한 전태윤의 사랑을 기록했다.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마지막에는 함께 셀카를 여러 장 찍었다.하예정은 많이 행복해 보였다.“위층으로 가봐요.”하예정이 웃으면서 말했다.“저희 방도 이렇게 꾸민 거 아니죠? 안 봐도 이쁘고 로맨틱할 거예요. 너무 행복해요.”전태윤은 그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향했다.하예정의 예상대로 레드카펫은 방 문 앞까지 깔렸다.방문을 열고 들어간 하예정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1층과 별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로맨틱한 문구들이 많이 적혀있었다. 이런 로맨틱한 방안에서 이 둘은 술을 한잔 기울이면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이 밤, 아름답고 따뜻한 감정들로 가득했다.해가 뜨고 밤이 낮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하예정은 평소 기상 시간에 깨어나지 못했고 달콤한 잠에 빠졌다.옆에 있던 전태윤은 평소처럼 눈뜨자마자 고요 속에 행복해 보이는 하예정의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예정아, 좋은 아침이야.”전태윤은 그녀에게 입맞춤하고서 귓가에 좋은 아침이라고 속삭였다.달콤한 잠에 빠진 하예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예정아, 어제저녁에는 내가 좀 거칠었지? 계속 자. 나는 출근해서 돈 벌어올게.”전태윤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더니 또 얼굴에 뽀뽀했다. 출근하기 싫었지만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반 시간 뒤.전태윤은 상쾌한 기분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 집사는 전태윤을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아침 준비되었습니다.”전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꾸며진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낮에는 또 다른 모습이네요.”박 집사가 웃으면서 말했다.“이것은 도련님이 사모님을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아름답죠. 사모님께서 많이 행복해하실 겁니다.”어제저녁 많이 만족한
어르신은 전태윤이 아닌 다른 손자들의 혼사를 걱정하고 있었다.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한 쌍 탄생시켰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여 나머지 혼령에 달했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손자들을 장가보내고 싶었다.그리고 증손녀 안기를 기다리면 되었다.천만 원의 보너스를 갖고 싶은 자는 증손녀를 안고 오면 된다.전태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서 15분 동안 신문을 읽고서야 집을 떠나 회사로 향했다.집을 나서기 전까지도 숙희 아주머니에게 하예정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다. 그 걱정스러운 표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하예정을 안고 출근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강일구.”차에 올라타기 전, 전태윤은 갑자기 강일구에게 이렇게 말했다.“오늘은 나 따라다니지 않아도 돼.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 하 씨네 마을로 가서 하지철을 찾아내. 협박으로든 유혹으로든 하 영감의 머리카락 열몇 가닥을 구해오게 해. 모낭이 있는 것으로. 자르면 안 돼. 그리고 투명한 봉투에 영감님 머리카락을 담아 오라 해.”강일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지금 바로 하 씨네 마을로 가보겠습니다.”강일구에게 분부를 마친 전태윤은 그제야 차에 올라탔고 경호원들의 호송 아래 피크 별장을 떠났다.회사로 가던 길, 전태윤은 어제저녁 하예정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 언니가 시름 놓고 장사할 수 있게 우빈이를 가게에서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노 씨 그룹에서 나오면 보이는 거리에 있는 하루 토스트 가게로 가주세요.”전태윤과 친한 친구 사이인 노동명을 자주 노 씨 그룹에 데려다줬기 때문에 노 씨 그룹에서 나오면 보이는 거리라고 말해서 듣자마자 알았다.하예진이 어제 써 붙인 직원모집 공고로 인해 어제 오후부터 전화로 상담하는 사람이 많았다.원래는 한 명만 뽑고 싶었지만 결국 성실해 보이고 손발이 빠른 중년 아줌마 두 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가정 부담이 큰 사람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일을 그만두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두 사람 모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