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 장군부.우림이 급히 발걸음을 옮겨 소현준에게 다가가 보고했다.“오늘 왕비마마께서 만안당에서 직접 의진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이 왕비마마의 의술을 칭찬하고 있습니다.”“칭찬하고 있다…”소현준은 손끝으로 턱을 문질렀다.“그리고, 회남왕께서도 이를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앞으로 매달 3번 정도 의진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소현준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네 말대로라면, 회남왕비께서 앞으로 매달 정해진 날마다 의진을 한다는 것이냐?”“예, 대인.”우림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대인, 소씨 가문에서 의술을 익힌 사람은 원래부터 둘째 아씨뿐 아니었습니까?”그 순간, 소현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그는 창밖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마도, 아주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우림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사실, 최근 들어 그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소씨 가문에서 오로지 의술을 인정받았던 이는 소우희였다.그런데, 왜 최근 들어 소우희는 태연하게 ‘약재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할머니의 진정향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왜 할머니가 아프셔서 도움이 필요할 때, 소우희는 아니라며 소우연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그 순간…“영감께서 오셨습니다!”밖에서 하인이 소리쳤다.소현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이어 소홍범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묵직한 표정으로 책 한 권을 소현준에게 건네며 말했다.“대장군께서 보낸 서찰이다. 군에서 소우희가 만든 상처 치료약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하지만…”소홍범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졌다.“평서왕부에 가서 직접 소우희를 찾았으나, 그 아이는 궁 안에 없었다.”소현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없었다고요?”소홍범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친정에는 오지도 않고, 이렇게 행방을 감추다니.”소현준은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
노부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힘없이 말했다.“그렇다면… 우희가 진정향을 만든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게냐.”“결국 한 병을 만들어 현준이에게 보낸 것이겠지.”그러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한 병뿐이라니! 이제 그것마저 다 떨어졌으니, 나는 또다시 밤마다 잠을 설치고 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구나. 이게 다 불효막심한 것들 때문이다!”소홍범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한 얼굴이었다.“소우연도 괘씸하지만, 소우희 또한 너무합니다. 제가 직접 평서왕부에 서찰을 보냈고, 그 애 어미까지 나서서 요청했건만, 지금까지 답장 한 통 없다니요!”노부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다 너희 부부가 애초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다. 이제 와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으니, 집안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소홍범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어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노부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다. 어서 가서 진정향을 가져오도록 해라!”“알겠습니다.”그러나 진정향 문제도 심각했지만, 현재 군에서 급히 필요로 하는 상처 치료제 또한 문제였다.소현우와 소한준이 영남에서 도적을 소탕 중인데, 원래 소우희가 만들어야 할 치료제가 공급되지 못하고 있었다.소홍범은 결국, 일반적인 치료제로 급히 대체하여 군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평서왕부.소홍범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직접 평서왕부로 찾아가, 서찰을 전하는 것도 없이 단호하게 선언했다.“평서왕과 왕비마마께서 저를 만나 주지 않으신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결국… 반 시진 후, 이종대가 마지못해 그를 접견했다.그러나 소홍범이 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후원에서 낯선 사내들이 몇 명씩 걸어 나오고 있었다.소홍범은 눈썹을 찌푸렸다.‘평서왕부의 후원에 외간남자들이 드나들다니?’잠시 후, 이종대가 후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소
평서왕부, 본채.“갔느냐?”이종대는 하인이 다가오자마자 서둘러 물었다.“예, 방금 떠나셨습니다.”하인의 대답을 듣고, 이종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긴 회랑을 지나 본채로 향했다.그가 도착한 곳에는 하인들이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나르고 있었다.소우희는 욕조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피부가 빨갛게 변할 정도로 거칠게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호라, 부인. 그렇게 고운 피부를 너무 심하게 문지르면 상처라도 나겠소.”그 목소리에 소우희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왕, 왕야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그녀는 잔뜩 움츠러든 채,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이종대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네 애비를 돌려보내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나를 반기지도 않는단 말이냐?”이종대와 소홍범의 나잇대는 비슷했다.이종대처럼 탐욕스럽게 탐탁지 않은 남자는 세상에서도 드물 터였다!소우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던 겁니까?”이종대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야 뭐…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 달라고 하더군.”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오히려 잘 됐지 않느냐. 며칠 동안 쓸모도 없었건만, 이참에 다녀오는 게 좋겠지.”소우희의 손이 욕조 안에서 떨렸다.“저, 저… 저는 안 가겠습니다!”소씨 가문에서 수차례 서찰을 보낸 것은 분명했다.노부인이 다시 두통을 앓기 시작했으니, 그녀에게 다시 진정향을 만들라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제 소우연은 더 이상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도대체 어디서 진정향을 구한단 말인가?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우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한때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껴주던 가족들.하지만 이제 그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급급할 뿐,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신경 써주지 않았다.‘이 썩어빠진 평
“왕야…”소우희는 뺨을 감싸 쥔 채,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이제…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혜주…”그러나, 부르자마자 깨달았다.혜주는 이미 소현준에게 끌려가 형벌을 받았고, 더 이상 그녀 곁에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흐느끼다가, 곧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거기 누구 없느냐!”끼익…방문이 살짝 열리더니, 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소인 여기 있습니다.”소우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옷을 입혀라.”“예.”시녀는 곧 준비를 서둘렀다.그러나, 소우희의 몸을 본 순간, 그녀는 미묘하게 숨을 들이마셨다.몸 곳곳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피부는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소우희는 시녀의 시선을 느끼자, 살기를 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본 것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혀를 뽑고, 눈을 도려낼 것이다.”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예, 왕비마마.”회남왕부.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 주고 침을 놓은 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마사지를 해 주었다.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촛불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그러나, 소우연은 연이어 하품을 터뜨렸다.이육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많이 졸리느냐?”“조금이요.”그녀는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이육진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왕야, 저는 괜찮습니다.”이육진은 그녀의 가녀린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침을 놓고, 마사지를 하느라 손이 많이 고생했겠구나.”그는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간석에게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앞으로는 간석이가 너 대신 마사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그러나, 소우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일은 제가 직접 하고 싶습니다.”이육진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직접 하고 싶다고?”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왜
이육진은 차를 따르던 손을 멈췄다.“평서왕이 무슨 중대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냐?”진규는 다소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평서왕이 어떤 사람인지야 왕야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색을 탐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자지요. 그동안은 첩이나 측실만을 남들과 공유하는 수준이었는데…”그는 말끝을 흐렸다.이육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말해라.”진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했다.“이번에는… 왕비마마마저 그러한 자리에 내놓았다고 합니다.”쾅…차잔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졌다.작은 찻잔이 낮은 탁자 위를 구르더니, 뜨거운 차가 바둑판 위로 흘러내렸다.이육진이 시선을 돌렸을 때, 소우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기침을 가볍게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이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그래서 처음부터 왕비마마께 보고하지 말자고 했던 거였는데…’이육진은 머리를 짚으며 진규를 노려보았다.“더 할 말이 있느냐?”진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 왕야!”“그럼 물러가라.”“예!”진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을 살며시 닫았다.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이육진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평서왕은 참으로 구제 불능이구나.”소우연은 얼굴을 붉힌 채 짧게 대답했다.“그러게요…”그녀는 순간적으로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이육진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그러나, 소우연이 입을 열었다.“왕야, 이제 그만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이육진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쉬자.”두 사람은 조용히 등불을 끄고 침상으로 향했다.소우연은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평서왕이 저런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소우희까지 그런 일을 겪고 있을 줄이야…’‘혼자서 세 사람의 시중을 보게 하다니…’그녀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그 아이는 정말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고 있겠구나.’그때, 이육진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연아.”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네.
만약, 그때 자신이 알았더라면…회남왕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았더라면.전생에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끔찍한 고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 돌아보니,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 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진원 장군부의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마치 버려진 들개처럼...손을 뻗으며, 몇 번이고 간절히 가족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았다.장군부 안에서는, 소우희와 이민수의 혼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온 집안이 그 혼담을 반기며 떠들썩했지만, 오직 그녀는 문 앞에서 피를 흘리며 버려진 채,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그때의 상처는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비록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날의 고통과 절망은 아직도 가슴을 찌르는 듯 선명했다.그 기억이 스쳐 가자, 소우연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그 순간…“연아, 괜찮느냐?”이육진이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무슨 일이든 내가 다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단단했다.소우연은 조용히 속삭였다.“왕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더 꼭 붙잡았다.그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안정감…그것은 그녀가 전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자신이 이육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감사나 연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이틀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소우연에게 하인이 와서 말했다.“왕비마마, 평서왕비께서 찾아오셨습니다.”정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 시점에 온 걸 보면, 또 약을 달라고 하려는 것 아닙니까?”소우연은 천천히 죽을 한 숟갈 떠먹으며 말했다.“약 말고, 그 여자가 달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그럼 왕비마마… 만나시겠습니까?”소우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니, 굳이 볼 필요 없다.”요즘
“왕비마마, 소 대인께서 아직 왕부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회남왕부에서 시중을 드는 이들은 왕비와 소씨 가문의 얽힌 사연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하지만, 소우연과 소씨 가문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다.소우연은 손에 쥔 서찰을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쓰게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아니, 만나지 않겠다.”“예, 왕비마마.”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려 할 때… 다시 소우연이 입을 열었다.“잠깐.”하인은 다시 뒤를 돌아 명령을 기다렸다.소우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인에게 전하거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소우희에게 문제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런데도 여태껏 소우희를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라.”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신 후, 정연을 바라보았다.“대인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이 옥여의를 돌려주어라.”“예, 왕비마마.”정연은 즉시 나무 상자를 정리하여 하인에게 건넸다.하인은 상자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왕비마마, 죄송하지만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소우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말해 보거라.”정연은 살짝 주저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소 대인께서 혹여 이 옥여의를 선물로 드린 것이, 왕비마마께 용서를 구하려는 뜻은 아니었을까요?”소우연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한단 말이냐?”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정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그녀가 방을 나서자, 멀리서 한숨 섞인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연언니, 혹시 연기를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이 말을 한 것은 명심이었다.정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회랑을 돌아가기 전,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 명심을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명심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아니,
소우연이 왕부에 들어온 이후, 궁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특히, 회남왕의 성정이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그것을 느낀 사람들은 은연중에 소우연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오늘 울려 퍼진 고함과 흐느끼는 소리는 그 조용한 변화를 한순간에 뒤흔들었다.간석이 명심을 거칠게 끌고 나가자,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명령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너 또한 부인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그의 시선이 정연에게 향했다.정연은 몸을 떨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예, 왕야…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진규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멀리서 소우연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왕야, 돌아오셨습니까?”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방금 전까지의 불쾌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러나, 소우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방금… 저쪽에서 명심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이육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심이가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쯤 간석이가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잘못이라뇨?”소우연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정연은 명심을 꽤 아끼는 편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왕야, 명심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이육진은 눈빛을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네 뒷말을 했다.”소우연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뒷말이라면…?”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가 말하길, 네가 소씨 가문을 미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강제로 나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불구자’이기 때문에 그 결혼을 더욱 원망한다고 말했지.”그 순간, 소우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입술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이육진은 그녀의 반응을 지켜
“왕야…”씻고 나온 소우연은 책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던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신경은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다.‘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거지?’이육진이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빠르게 다가가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으로 이육진이 들고 있던 책을 거꾸로 돌렸다.“왕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이육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다 씻은 것이냐?”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연에게 목욕물을 새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조금 있다가 해도 된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왕야께서 조금 전에 씻고 싶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조금 전에는 안마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소우연을 보고 함께 씻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제는…“안 씻어도 될 것 같다.”말을 하던 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지팡이를 가져왔다. 그가 휠체어에서 일어나자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축하려고 했다.하지만 소우연이 부축하기도 전에 이육진은 스스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소우연 앞에 서있었다.이육진은 키도 크고 몸매도 건장했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육진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조심하십시오, 왕야.”소우연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휘청거리며 힘겹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팔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걷기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몇십 분 정도 걷기 연습에 집중했고 어느새 이육진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우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으려면 침술과 안마 외에 고통을 참고 재활 치료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왕야, 조금만 쉬었다가 하십시오.”소우연이 손수건을 들고 까치발을 들자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소우연이 이마의 땀을 닦을 수 있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한순간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달 사이에 왕
“소우연에게 전하거라. 걔가 의술을 익혔고 그 약들까지 전부 걔가 조제했다는 사실을 소씨 가문 사람들 전부가 알았다고. 예전에 서럽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직접 보내기까지 했다고. 가족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라고 똑똑히 전하거라.”“그건…”“혈연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런 양심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난 애초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말을 마친 임진숙은 나인과 함께 돌아서서 떠났다.간석은 마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임진숙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채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을 힐끗 쳐다보았다.‘소씨 가문에서 저번에 보상으로 꽤 큰돈을 들였을 텐데 아직도 선물을 준비할 돈이 있나 보네?’본채로 돌아온 간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뒤늦은 가족애는 필요 없어.”곁에 서있던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이 네 말이 맞아.”대신 선물을 받은 이육진이 열어보니 안에는 화차 한 통이 들어 있었다.“말리화차네요.”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전에 소우희 덕분에 말리화차를 몇 번 마신 적이 있는데 마실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저에게 말리화차를 주시네요.”잠시 머뭇거리던 소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말리화차는 소우희가 가장 좋아하는 화차입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럼 연이 너는 어떤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전 국화차를 좋아합니다. 체내의 열을 내려주거든요.”“이 서방님이 잘 기억하고 있겠다.”이육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았다.한편, 곁에 서있던 간석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왕야는 왕비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이육진은
소홍범의 말에 임진숙은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우희가 평서왕세자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진 일이었는데 소우연 그 계집애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그 아이가 무슨 훼방을 놓았단 말이오? 우희에게 혼인을 하사한 사람은 덕빈마마인데 대체 소우연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소우희가 평춘왕과 결혼하게 된 건, 덕빈이 소우희 대신 소우연이 회남왕의 왕비가 된 일에 대한 보복이다!소우희 한 사람만 희생하고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덕빈은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봐야 한다.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자 머리가 아픈 소홍범은 대충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이날.조정을 나선 이육진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우연이 약을 발라주자마자 이육진은 바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에 돌입했다.이때, 간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고 말을 전했고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만나고 싶으냐?”“만날 이유가 없습니다.”소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기분만 나빠졌다.“가서 그자에게 전해라. 난 이미 오래전에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이제 더 이상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거라.”눈치를 살피던 간석은 왕비의 맺고 끊음이 참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왕비는 왕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보면 소우희 대신 왕야와 혼인을 치른 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휴… 왕야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방을 나서기 전, 간석은 몰래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고 결국 불쌍하게 이육진을 쳐다보던 눈빛도 들키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간석은 바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왕야가 어떤 분인데 내가 감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한편,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소우연은 간석이 방을 떠나자마자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혹
“우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임진숙은 황급히 소우희의 입을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그자는 이제 네 서방이야.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가 됐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야 해.”“운명 공동체… 허허…”예전에 소우연을 회남왕 저택에 시집 보낼 때에도 가족들은 똑같은 말로 소우연을 설득했다.소우희는 평춘왕 저택에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설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전부 가짜란 말인가?소우희는 가치가 없어지니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자신의 신세가 소우연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야, 참아야 돼. 그래도 넌 지금 평춘 왕비잖아. 안주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그게 여자의 삶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임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임진숙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소우희가 임진숙을 보며 묻자 임진숙이 대답했다.“없어. 얼른 아이를 낳아야 너도 기댈 구석이 생기는 거야. 이러다가 나이가 많은 평춘왕이 어느 날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소우희는 결국 후처일 뿐이다. 더군다나 평춘왕은 소우희를 임신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매번 합방을 하고 나면 소우희에게 피임 탕약을 먹였다.생각할수록 서러워진 소우희는 친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튿날, 소우희의 바람과 달리 평춘왕은 소우희를 데리러 직접 진원 장군 저택에 찾아왔다.이번에는 사위답게 선물까지 들고 왔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소홍범은 서재에 들어가 평춘왕을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임진숙 혼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평춘왕을 보자마자 소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어머니가 저를 하도 그리워하셔서 친정에 며칠만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소우희는 분노로 들끓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바로 이 순간, 오랫동안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드디어 사라진 듯 숨통이 트이기도 했다.“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저를 버리려는 거잖아요. 저를 버리고 싶은 거잖아요…”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말하자 소홍범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결국 소우희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소우희는 황급히 임진숙 품 안으로 파고 들었고 딸을 품에 안은 임진숙은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대견하던 아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을까!이때, 조용하게 서있던 소현준이 소홍범에게 말했다.“이 일을 형과 셋째 아우에게 얘기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산적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집안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승리해서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는 낫지 않겠습니까?”분통이 터진 소홍범은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소우희를 가리키며 물었다.“네가 우리에게 더 숨기는 것은 없느냐?”“없, 없습니다.”가여운 소우희의 모습에 소홍범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사랑을 듬뿍 주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기에 소홍범도 더 이상 혼낼 수가 없었다.하지만 멀쩡하던 소씨 가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소우희가 더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넌 이제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 평춘 왕비로 조용하게 살 거라.”말을 마친 소홍범은 하루아침에 10년은 늙은 듯 허리를 구부리고는 힘겹게 탁자를 잡고 일어섰고 초점도 잃은 채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한편, 소우희는 아버지의 말에 너무도 서러웠다.“아버지,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주세요. 전 평춘왕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넌 이제 평춘 왕비의 신분이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혼인인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하지만 평춘왕 그자는… 그 사람은…”
다만 소우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의 책임을 소우연에게 돌렸다.소우희가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소현준의 호위무사가 혜주를 데리고 대청에 나타났다.소현준이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소우희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우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아씨, 죄송합니다. 고문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소우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쯤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헛기침을 몇 번 하던 소씨 노부인은 혜주와 소우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구나. 우리 가문에 어쩌다가 너 같은 멍청한 애가 태어난 것이냐!”노부인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곁에 있던 나인은 재빨리 노부인을 부축했다.“네 딸이니 네가 알아서 교육을 하거라!”노부인이 소홍범에게 말하자 안색이 어두워진 소홍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네, 어머니.”숨을 크게 들이마신 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두통 치료로 썼던 진정향을 자신이 제일 싫어하던 소우연이 조제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나중에 시간 나면 소우연 그 아이를 저택에 들라 하거라.”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한번쯤은 확실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소씨 노부인은 지금까지 소우연이 소씨 가문의 저주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저주받은 아이가 자신에게 진정향을 조제해주고 군영에 치료약까지 조제해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소현우가 예전에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며칠동안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에도 소우연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가슴이 답답해진 노부인은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 화가 나서 기절할 것만 같았기에 나인의 부축을 받고 대청을 떠났다
딸의 뜻을 알아차린 임진숙은 서둘러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했다.그 뒤로 한참동안 엉엉 울던 소우희는 결국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했고 임진숙은 너무 큰 충격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넌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잖아. 네가 태어날 때 흠천감의 도사님이 직접 네 운명까지 점을 치셨는데 잘못됐을 리가 없어. 넌 어렸을 때 매일 의서를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떻게 의술을 익히지 못했을 수가 있어?”“그 의서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서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어요.”“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전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때 당시 할머니 두통이 심해졌을 때 제가 의서를 많이 봤다고 저에게 두통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지어오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약을 조제한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소우연이 진정향을 조제해서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버렸어요. 소우연이 그때 당시 할머니께서 나를 믿으시니 나더러 진정향을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어요. 그 진정향은 예상보다 효과가 더욱 좋았고 그때부터 할머니께서는 그 진정향을 제가 조제했다고 확신하게 되신 거예요…”“그럼 나중에라도 사실을 밝혔어야지!”“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께서 두통으로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임진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군영에서 쓰는 약들은 뭐야? 왜 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것이야?”“그, 그 약들은… 어차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걸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제가 만들었다고 얘기한 거예요.”임진숙의 실망한 표정으로 보며 입술을 꽉 깨문 소우희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어머니, 어머니까지 절 버리시면 전 정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임진숙은 주먹으로 소우희의 등을 몇 번 때렸다.“바보 같은 계집애, 어떻게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수가 있어!”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착했던 아
나중에 왕비를 들이고 나서도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었다.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본채 안을 쳐다보던 이지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우희를 발견하자 이종대에게 버럭 화를 냈다.“아버지, 이젠 첩도 모자라서 왕비까지… 저 사람은 아버지가 이 집에 정식으로 들인 정실 부인입니다. 도대체 왕비를 몇 명이나 더 들여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지윤아, 네가 오해를 한 것이다.”이종대는 이지윤을 달래는 와중에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손님들을 내쫓았다.“저기, 왕야, 저희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하던 두 사람은 급하게 저택을 나섰고 이종대도 대충 대답했다.“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고.”고개를 돌린 이종대는 아들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자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지윤이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일들이 많아.”이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모르는 일들이 많긴 무슨. 이 저택 안이 매일 조용하지 않으니 이지윤도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어차피 꼴통 왕야로 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큰 죄를 짓지 않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대충 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자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밖으로 향했다.방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 두어 명을 보자 그제야 소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이종대 저자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네! 이지윤에게 저렇게 고분고분하다니!’멀어져가는 이지윤의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의 마음속에 희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지윤이 그녀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을까?다음날.소우희는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결국 진원 장군 저택으로 돌아왔다.너무 일찍 온 탓에 저택 안에는 소씨 노부인과 임진숙밖에 없었다.“할머니…”조심스럽게 입을 연 소우희는 노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식탁 앞에 앉아있던 노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어젯밤 소현준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 아팠다.어젯밤, 소현준은 소씨 노부인에게 자신이 저번에
“연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럼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진심이냐?”“당연히 진심이지요.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왕야께서는 4년 동안 거의 걷지 않으셨기에 더욱 천천히 적응해야 합니다.”“알겠다. 앞으로 연이 네 말을 잘 듣도록 할게.”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이 말했다.“그럼 앞으로 매일 한 시간만 걷기 연습을 하십시오.”“그래.”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곁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소우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주고 침을 놓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민수가 얘기한 배꽃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왕야?”세 번째 부름에 겨우 정신을 번쩍 차린 이육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아, 그럼 소현준 그자는 왜 그냥 간 것이냐?”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저에게 소우희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겠지요.”“그래도 소씨 가문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알긴 아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소현준은 소씨 가문의 유일한 장원 급제자로써 대리사경 일을 맡고 있었으며 소씨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만약 그때 당시 소현준이 소우연의 편에 들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소우연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평춘왕 관저에서.만안당에서 큰 수모를 당한 소우희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손님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온 평춘왕과 마주치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말까지 더듬었다.“왕, 왕야…”“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것이야?”평춘왕의 말에 소우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겁니다.”“친정에 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