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때 자신이 알았더라면…회남왕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았더라면.전생에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끔찍한 고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 돌아보니,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 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진원 장군부의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마치 버려진 들개처럼...손을 뻗으며, 몇 번이고 간절히 가족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았다.장군부 안에서는, 소우희와 이민수의 혼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온 집안이 그 혼담을 반기며 떠들썩했지만, 오직 그녀는 문 앞에서 피를 흘리며 버려진 채,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그때의 상처는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비록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날의 고통과 절망은 아직도 가슴을 찌르는 듯 선명했다.그 기억이 스쳐 가자, 소우연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그 순간…“연아, 괜찮느냐?”이육진이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무슨 일이든 내가 다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단단했다.소우연은 조용히 속삭였다.“왕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더 꼭 붙잡았다.그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안정감…그것은 그녀가 전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자신이 이육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감사나 연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이틀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소우연에게 하인이 와서 말했다.“왕비마마, 평춘왕비께서 찾아오셨습니다.”정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 시점에 온 걸 보면, 또 약을 달라고 하려는 것 아닙니까?”소우연은 천천히 죽을 한 숟갈 떠먹으며 말했다.“약 말고, 그 여자가 달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그럼 왕비마마… 만나시겠습니까?”소우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니, 굳이 볼 필요 없다.”요즘
“왕비마마, 소 대인께서 아직 왕부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회남왕부에서 시중을 드는 이들은 왕비와 소씨 가문의 얽힌 사연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하지만, 소우연과 소씨 가문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다.소우연은 손에 쥔 서찰을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쓰게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아니, 만나지 않겠다.”“예, 왕비마마.”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려 할 때… 다시 소우연이 입을 열었다.“잠깐.”하인은 다시 뒤를 돌아 명령을 기다렸다.소우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인에게 전하거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소우희에게 문제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런데도 여태껏 소우희를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라.”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신 후, 정연을 바라보았다.“대인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이 옥여의를 돌려주어라.”“예, 왕비마마.”정연은 즉시 나무 상자를 정리하여 하인에게 건넸다.하인은 상자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왕비마마, 죄송하지만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소우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말해 보거라.”정연은 살짝 주저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소 대인께서 혹여 이 옥여의를 선물로 드린 것이, 왕비마마께 용서를 구하려는 뜻은 아니었을까요?”소우연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한단 말이냐?”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정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그녀가 방을 나서자, 멀리서 한숨 섞인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연언니, 혹시 연기를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이 말을 한 것은 명심이었다.정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회랑을 돌아가기 전,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 명심을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명심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아니,
소우연이 왕부에 들어온 이후, 궁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특히, 회남왕의 성정이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그것을 느낀 사람들은 은연중에 소우연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오늘 울려 퍼진 고함과 흐느끼는 소리는 그 조용한 변화를 한순간에 뒤흔들었다.간석이 명심을 거칠게 끌고 나가자,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명령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너 또한 부인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그의 시선이 정연에게 향했다.정연은 몸을 떨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예, 왕야…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진규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멀리서 소우연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왕야, 돌아오셨습니까?”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방금 전까지의 불쾌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러나, 소우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방금… 저쪽에서 명심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이육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심이가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쯤 간석이가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잘못이라뇨?”소우연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정연은 명심을 꽤 아끼는 편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왕야, 명심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이육진은 눈빛을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네 뒷말을 했다.”소우연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뒷말이라면…?”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가 말하길, 네가 소씨 가문을 미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강제로 나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불구자’이기 때문에 그 결혼을 더욱 원망한다고 말했지.”그 순간, 소우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입술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이육진은 그녀의 반응을 지켜
소우연이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서있자 이육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집안일은 원래부터 네가 관리해야 되는 부분이 아니더냐?”“그럼 제가 두고 쓰겠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한없이 매정하고 냉정하지만 하인에게는 이토록 다정하고 잘해주는 소우연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조금 뒤, 정연이 하인들과 함께 목욕물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이육진은 간단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서 욕실을 나왔을 땐 내복만 입고 있었다.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육진은 오늘따라 표정이 조금 차가웠지만 얼굴은 전보다 수려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연아.”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색하게 만지면서 물었다.“얼굴이 전보다 더 추해진 것이냐?”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혹, 제 의술을 의심하시는 겁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탁자에서 거울을 챙겨 이육진에게 건넸다.“왕야, 직접 보십시오.”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던 이육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전에 선명하던 흉터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연해졌다.“내, 내 얼굴이 정말 많이 나은 것이냐?”거울을 잡고 있는 이육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네, 왕야. 이제 두어 달 정도만 더 있으면 예전의 얼굴로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완전히 회복되진 못해도 예전의 외모를 대부분 되찾을 수 있다.이육진의 존귀한 신분과 남다른 기품으로 예전 외모의 절반만 되찾아도 많은 명문 가문 규수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한편, 예전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육진은 고개를 들어 소우연을 쳐다보았다.“네가 되돌려 놓은 이 얼굴이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마음에 듭니다. 전 너무 마음에 듭니다.”소우연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으로 대
왕야의 다리를 낫게 해준 것만으로도 너무 큰 공을 세운 것이다!이육진은 언제 어디서든 늘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진규는 왕야의 얼굴도 다리처럼 낫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왕야, 그럼 왕야 얼굴은…?”이육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자 진규는 감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인사를 올린 뒤 바로 방을 나섰다.“진규 저자가 왕야를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대답했다.“나조차 무서워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맞는 말씀이십니다.”소우연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이육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우연을 발견하게 되었다.뭔가 생각난 듯 이육진이 물었다.“연아, 넌 내가 무서운 것이냐?”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한편, 소우연은 이육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이 소설의 최대 악역인데 무섭지 않을 수가 있을까?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데다가 성격도 난폭한데 얼굴이 망가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고 나서부터 더더욱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아닙니다. 무섭지 않습니다.”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만인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황태자가 믿는 자에게 배신을 당해 폐인 회남왕이 되었는데 누구나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악마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소우연도 마찬가지였다.전생에 그런 처참한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는데 어떻게 증오와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이때,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넌 내 곁에서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이육진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눈앞에 있는 착하고 선한 이 여자는 절대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진심 어린 이육진의 표정에 소우연도 덩달아 마음이 놓였다.“네, 전 왕야를 믿습니다.”다시 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침대 곁에 놓으며 물었다.“소 의원, 앞으로 전 얼마나 오랫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겁니까?”이육진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진 소우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 저는…”소우연은 당연히 싫지 않았지만 이육진의 다리가 아직 회복 단계에 있었기에 합방을 하기엔 불편함이 많을 것이다.더군다나 소우연은 합방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주동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한편, 이육진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예전에 신음 소리를 꽤 잘 내지 않았느냐?”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지금 그녀에게 예전처럼 시늉만 내라는 뜻인가?시늉만 낸다고 해도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웠다.그녀는 빠르게 침을 거두어 화장대 서랍에 다시 넣어두었다. 그리고 침대 곁으로 돌아올 때 방 안을 비추고 있던 촛불을 꺼버렸다.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소우연이 신음 소리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손 하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화들짝 놀란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네가 싫으면 그만…”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우연이 대답했다.“아닙니다. 전 좋습니다.”두 사람은 지금까지 합방을 하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덕빈에게 책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이육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소우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도와줘도 되겠느냐?”소우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던 그때, 이육진의 입술이 소우연의 손등에 닿았다.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찌릿한 소우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꿈쩍도 하지 못했다.“연아, 그래도 되겠느냐?”이육진은 다시 한번 물었고 소우연은 자신이 도마위에 놓인 생선이 된 것만 같았다.소우연은 이육진의 아내로서 이육진이 그녀에게 뭘 하든 정당하고 합리적이다.잠시 생각하던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전… 전 왕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소우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육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어둠이 깃든 밤,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두 시간 뒤, 이육진은 하인들에게 목욕물을 들이라고 했다.간석은 하인 몇 명과 함께 목욕물을 들고 욕실로 향했고 정연은 시녀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보와 이불을 새것으로 갈았다.한편, 너무 창피한 소우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조금 뒤, 하인들이 방을 떠나자 이육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니 얼른 가서 씻거라.”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발그레한 얼굴로 욕실로 향했고 이육진은 휠체어를 끌고 뒤따랐다.“왕야…”조금 전에 너무 격하게 신음소리를 낸 소우연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내가 씻겨 줄게.”“아, 아닙니다.”하지만 소우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육진은 욕조에 가까이 다가가 수건에 물을 적셨다.그렇게 은은하게 비추는 촛불 속에서 소우연은 욕조 안에 앉아있고 이육진은 욕조 밖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한 몸이 되었다.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야릇하게 만들었다.한참 뒤, 이육진의 입맞춤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왕야, 이제 그만 해주십시오.”가볍게 미소를 짓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었다.“혹시 내가 널 아프게 한 것이냐?”“아닙니다…”소우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그럼?”고개를 숙인 소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왕야께서는 저를 기분 좋게 해주셨는데 정작 왕야는…”“연이 너도 날 도와주고 싶은 것이냐?”소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이육진을 도와 뭔가를 해주고 싶은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웠다.조금 전에 침대 위에서는 촛불이 전부 꺼졌기에 서로의 그림자 정도만 볼 수 있었고 소우연도 별다른 걱정 없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이육진의 손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촛불이 너무 밝게 비추고 있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정한 미소와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럼 이육진 이 남자의 눈에 소우연은 어떤 모습일까?소
다음날.이육진은 조정으로 떠나기 전, 정연에게 소우연을 깨우지 말라고 명했지만 이육진이 저택을 나서자마자 소우연은 바로 잠에서 깼다.“왕비님, 깨어나셨습니까?”정연은 얼른 소우연이 씻을 수 있게 준비를 했다.조금 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을 때, 정연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소우연을 보게 되었고 환하게 웃으면서 소우연에게 말했다.“왕비님, 축하드립니다.”“응?”정연의 말뜻을 알아차린 소우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어젯밤 이육진의 손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는데 정연이 바로 문밖에 서있었기에 당연히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예전에 소우연이 이 저택에 들어와 첫날밤을 보냈을 때에도 정연은 소우연에게 축하한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표정이 엄숙하고 진지했다면 지금은 되레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소우연은 딱히 부인하지도 않고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어젯밤 그녀와 이육진은 마지막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사실이니까.소우연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가까이에서 내뿜던 이육진의 숨소리와 그의 손바닥 온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정연을 시켜 진우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왕비님 외출하시려는 겁니까?”정연의 물음에 소우연이 대답했다.“만안당에 가보려고.”“초이렛날까지 아직 며칠이나 더 남지 않았습니까?”“초이렛날은 무보수로 진찰을 하는 날이고 오늘은 돈 받고 진찰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아무 문제없습니다.”대체 어떤 왕비가 푼돈을 벌려고 일을 하러 나간단 말인가!조금 뒤, 만안당에서.임곽수는 만안당에 나타난 소우연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초이렛날이 되기도 전에 찾아온 소우연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우연은 그런 임곽수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혹시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돕고 싶구나.”“전에는 만안당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왕비께서 이 만안당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