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때 자신이 알았더라면…회남왕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았더라면.전생에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끔찍한 고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 돌아보니,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 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진원 장군부의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마치 버려진 들개처럼...손을 뻗으며, 몇 번이고 간절히 가족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았다.장군부 안에서는, 소우희와 이민수의 혼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온 집안이 그 혼담을 반기며 떠들썩했지만, 오직 그녀는 문 앞에서 피를 흘리며 버려진 채,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그때의 상처는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비록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날의 고통과 절망은 아직도 가슴을 찌르는 듯 선명했다.그 기억이 스쳐 가자, 소우연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그 순간…“연아, 괜찮느냐?”이육진이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무슨 일이든 내가 다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단단했다.소우연은 조용히 속삭였다.“왕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더 꼭 붙잡았다.그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안정감…그것은 그녀가 전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자신이 이육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감사나 연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이틀 후, 아침 식사를 마친 소우연에게 하인이 와서 말했다.“왕비마마, 평춘왕비께서 찾아오셨습니다.”정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 시점에 온 걸 보면, 또 약을 달라고 하려는 것 아닙니까?”소우연은 천천히 죽을 한 숟갈 떠먹으며 말했다.“약 말고, 그 여자가 달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그럼 왕비마마… 만나시겠습니까?”소우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니, 굳이 볼 필요 없다.”요즘
“왕비마마, 소 대인께서 아직 왕부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회남왕부에서 시중을 드는 이들은 왕비와 소씨 가문의 얽힌 사연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하지만, 소우연과 소씨 가문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다.소우연은 손에 쥔 서찰을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쓰게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아니, 만나지 않겠다.”“예, 왕비마마.”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려 할 때… 다시 소우연이 입을 열었다.“잠깐.”하인은 다시 뒤를 돌아 명령을 기다렸다.소우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인에게 전하거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소우희에게 문제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런데도 여태껏 소우희를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라.”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신 후, 정연을 바라보았다.“대인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이 옥여의를 돌려주어라.”“예, 왕비마마.”정연은 즉시 나무 상자를 정리하여 하인에게 건넸다.하인은 상자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왕비마마, 죄송하지만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소우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말해 보거라.”정연은 살짝 주저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소 대인께서 혹여 이 옥여의를 선물로 드린 것이, 왕비마마께 용서를 구하려는 뜻은 아니었을까요?”소우연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한단 말이냐?”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정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그녀가 방을 나서자, 멀리서 한숨 섞인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연언니, 혹시 연기를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이 말을 한 것은 명심이었다.정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회랑을 돌아가기 전,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 명심을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명심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아니,
소우연이 왕부에 들어온 이후, 궁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특히, 회남왕의 성정이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그것을 느낀 사람들은 은연중에 소우연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오늘 울려 퍼진 고함과 흐느끼는 소리는 그 조용한 변화를 한순간에 뒤흔들었다.간석이 명심을 거칠게 끌고 나가자,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명령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너 또한 부인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그의 시선이 정연에게 향했다.정연은 몸을 떨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예, 왕야…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진규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멀리서 소우연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왕야, 돌아오셨습니까?”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방금 전까지의 불쾌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러나, 소우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방금… 저쪽에서 명심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이육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심이가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쯤 간석이가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잘못이라뇨?”소우연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정연은 명심을 꽤 아끼는 편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왕야, 명심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이육진은 눈빛을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네 뒷말을 했다.”소우연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뒷말이라면…?”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가 말하길, 네가 소씨 가문을 미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강제로 나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불구자’이기 때문에 그 결혼을 더욱 원망한다고 말했지.”그 순간, 소우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입술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이육진은 그녀의 반응을 지켜
소우연이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서있자 이육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집안일은 원래부터 네가 관리해야 되는 부분이 아니더냐?”“그럼 제가 두고 쓰겠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한없이 매정하고 냉정하지만 하인에게는 이토록 다정하고 잘해주는 소우연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조금 뒤, 정연이 하인들과 함께 목욕물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이육진은 간단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서 욕실을 나왔을 땐 내복만 입고 있었다.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육진은 오늘따라 표정이 조금 차가웠지만 얼굴은 전보다 수려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연아.”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색하게 만지면서 물었다.“얼굴이 전보다 더 추해진 것이냐?”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혹, 제 의술을 의심하시는 겁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탁자에서 거울을 챙겨 이육진에게 건넸다.“왕야, 직접 보십시오.”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던 이육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전에 선명하던 흉터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연해졌다.“내, 내 얼굴이 정말 많이 나은 것이냐?”거울을 잡고 있는 이육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네, 왕야. 이제 두어 달 정도만 더 있으면 예전의 얼굴로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완전히 회복되진 못해도 예전의 외모를 대부분 되찾을 수 있다.이육진의 존귀한 신분과 남다른 기품으로 예전 외모의 절반만 되찾아도 많은 명문 가문 규수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한편, 예전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육진은 고개를 들어 소우연을 쳐다보았다.“네가 되돌려 놓은 이 얼굴이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마음에 듭니다. 전 너무 마음에 듭니다.”소우연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으로 대
왕야의 다리를 낫게 해준 것만으로도 너무 큰 공을 세운 것이다!이육진은 언제 어디서든 늘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진규는 왕야의 얼굴도 다리처럼 낫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왕야, 그럼 왕야 얼굴은…?”이육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자 진규는 감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인사를 올린 뒤 바로 방을 나섰다.“진규 저자가 왕야를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대답했다.“나조차 무서워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맞는 말씀이십니다.”소우연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이육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우연을 발견하게 되었다.뭔가 생각난 듯 이육진이 물었다.“연아, 넌 내가 무서운 것이냐?”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한편, 소우연은 이육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이 소설의 최대 악역인데 무섭지 않을 수가 있을까?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데다가 성격도 난폭한데 얼굴이 망가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고 나서부터 더더욱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아닙니다. 무섭지 않습니다.”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만인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황태자가 믿는 자에게 배신을 당해 폐인 회남왕이 되었는데 누구나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악마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소우연도 마찬가지였다.전생에 그런 처참한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는데 어떻게 증오와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이때,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넌 내 곁에서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이육진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눈앞에 있는 착하고 선한 이 여자는 절대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진심 어린 이육진의 표정에 소우연도 덩달아 마음이 놓였다.“네, 전 왕야를 믿습니다.”다시 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침대 곁에 놓으며 물었다.“소 의원, 앞으로 전 얼마나 오랫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겁니까?”이육진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진 소우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 저는…”소우연은 당연히 싫지 않았지만 이육진의 다리가 아직 회복 단계에 있었기에 합방을 하기엔 불편함이 많을 것이다.더군다나 소우연은 합방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주동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한편, 이육진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예전에 신음 소리를 꽤 잘 내지 않았느냐?”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지금 그녀에게 예전처럼 시늉만 내라는 뜻인가?시늉만 낸다고 해도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웠다.그녀는 빠르게 침을 거두어 화장대 서랍에 다시 넣어두었다. 그리고 침대 곁으로 돌아올 때 방 안을 비추고 있던 촛불을 꺼버렸다.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소우연이 신음 소리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손 하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화들짝 놀란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네가 싫으면 그만…”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우연이 대답했다.“아닙니다. 전 좋습니다.”두 사람은 지금까지 합방을 하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덕빈에게 책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이육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소우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도와줘도 되겠느냐?”소우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던 그때, 이육진의 입술이 소우연의 손등에 닿았다.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찌릿한 소우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꿈쩍도 하지 못했다.“연아, 그래도 되겠느냐?”이육진은 다시 한번 물었고 소우연은 자신이 도마위에 놓인 생선이 된 것만 같았다.소우연은 이육진의 아내로서 이육진이 그녀에게 뭘 하든 정당하고 합리적이다.잠시 생각하던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전… 전 왕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소우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육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어둠이 깃든 밤,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두 시간 뒤, 이육진은 하인들에게 목욕물을 들이라고 했다.간석은 하인 몇 명과 함께 목욕물을 들고 욕실로 향했고 정연은 시녀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보와 이불을 새것으로 갈았다.한편, 너무 창피한 소우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조금 뒤, 하인들이 방을 떠나자 이육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니 얼른 가서 씻거라.”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발그레한 얼굴로 욕실로 향했고 이육진은 휠체어를 끌고 뒤따랐다.“왕야…”조금 전에 너무 격하게 신음소리를 낸 소우연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내가 씻겨 줄게.”“아, 아닙니다.”하지만 소우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육진은 욕조에 가까이 다가가 수건에 물을 적셨다.그렇게 은은하게 비추는 촛불 속에서 소우연은 욕조 안에 앉아있고 이육진은 욕조 밖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한 몸이 되었다.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야릇하게 만들었다.한참 뒤, 이육진의 입맞춤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왕야, 이제 그만 해주십시오.”가볍게 미소를 짓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었다.“혹시 내가 널 아프게 한 것이냐?”“아닙니다…”소우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그럼?”고개를 숙인 소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왕야께서는 저를 기분 좋게 해주셨는데 정작 왕야는…”“연이 너도 날 도와주고 싶은 것이냐?”소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이육진을 도와 뭔가를 해주고 싶은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웠다.조금 전에 침대 위에서는 촛불이 전부 꺼졌기에 서로의 그림자 정도만 볼 수 있었고 소우연도 별다른 걱정 없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이육진의 손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촛불이 너무 밝게 비추고 있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정한 미소와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럼 이육진 이 남자의 눈에 소우연은 어떤 모습일까?소
다음날.이육진은 조정으로 떠나기 전, 정연에게 소우연을 깨우지 말라고 명했지만 이육진이 저택을 나서자마자 소우연은 바로 잠에서 깼다.“왕비님, 깨어나셨습니까?”정연은 얼른 소우연이 씻을 수 있게 준비를 했다.조금 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을 때, 정연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소우연을 보게 되었고 환하게 웃으면서 소우연에게 말했다.“왕비님, 축하드립니다.”“응?”정연의 말뜻을 알아차린 소우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어젯밤 이육진의 손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는데 정연이 바로 문밖에 서있었기에 당연히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예전에 소우연이 이 저택에 들어와 첫날밤을 보냈을 때에도 정연은 소우연에게 축하한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표정이 엄숙하고 진지했다면 지금은 되레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소우연은 딱히 부인하지도 않고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어젯밤 그녀와 이육진은 마지막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사실이니까.소우연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가까이에서 내뿜던 이육진의 숨소리와 그의 손바닥 온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정연을 시켜 진우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왕비님 외출하시려는 겁니까?”정연의 물음에 소우연이 대답했다.“만안당에 가보려고.”“초이렛날까지 아직 며칠이나 더 남지 않았습니까?”“초이렛날은 무보수로 진찰을 하는 날이고 오늘은 돈 받고 진찰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아무 문제없습니다.”대체 어떤 왕비가 푼돈을 벌려고 일을 하러 나간단 말인가!조금 뒤, 만안당에서.임곽수는 만안당에 나타난 소우연을 보자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초이렛날이 되기도 전에 찾아온 소우연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우연은 그런 임곽수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혹시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돕고 싶구나.”“전에는 만안당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왕비께서 이 만안당
“이제보니 소우희의 외출 목적이 소현우와 소한준 두 사람을 경성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였네.”소우연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때, 정자에 앉아있던 이육진이 말했다.“소우희 그 여자는 경성의 천재 소녀가 아니라 완전 멍청이였어.”“예전에 덕빈 마마께서 소우희의 어여쁘고 천재적인 모습을 보고 폐하께 왕야와 소우희를 위해 혼인을 하사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육진은 그녀를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그러고보니 소우희 그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니구나. 그자가 아니었으면 나와 연이 너의 인연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이육진은 그동안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단서를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특히 용강한은 전에 이육진에게 소우희 대신 시집온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하면서 어쩌면 소우연이 그의 고달픈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때 당시 이육진은 용강한에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점을 봐 달라고 했고 용강한은 그런 이육진에게 급할 것 없다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만 얘기했다.이육진은 용강한의 말투와 태도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그러다가 혼사를 치른 뒤, 소우연의 몸에서 생명의 은인과 똑같은 약초향이 나자 이육진은 그제야 용강한은 사기꾼이 아니라 실력이 뛰어난 점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한편, 소우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나와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그 말은 마치 이육진이 두 사람이 언젠가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내 지운 소우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왕야 말씀이 맞습니다.”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소우연이 잘못된 선택을 하나라도 했더라면 오늘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육진 이 남자만 봤을 때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며
소현우는 아버지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대 당시 최전방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후방을 책임지던 회남왕이 습격을 당한 탓에 지원군들이 제때에 나타나지 못했다.결국 삼천 명이 넘었던 병사들은 몇백 명 밖에 남지 않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소현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부하는 곧바로 소현우를 조청강에 위치한 그의 외갓집으로 데려갔지만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그러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이 소우희였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소우희가 매일 소현우 곁을 지켰고 하인을 시켜 약을 달이고 직접 소현우에게 먹여 주기까지 했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외출하느라 바빴다.자세하게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소우연은 매일 소우희에게 소현우가 아직도 고열을 앓고 있는지,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지는 않는지 확인하라고 얘기한 것 같았다.“이제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겁니까?”의자에 앉아있던 소현준이 소현우를 빤히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소현우는 소우희에게 의심이 생긴 게 확실하다.소홍번도 소현우를 보며 말했다.“진실이 무엇인지 너도 이제 다 알았을 거야. 의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너를 살려주었겠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소현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홍범의 말에 대꾸를 했다.“아버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우리 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미안한 게 많아. 하지만 근래에 네 어머니와 현준이가 회남왕에 찾아가 소우연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그 아이가 그렇게 냉정하단 말입니까?”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쳐다보았고 소현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소현우의 머릿속에 소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도대체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 소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라버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소우연은 지금 회남왕비입니다.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던 예전의 소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 소한준은 너무 안쓰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소우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그래도 우린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가족인데 소우연이 너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소우연은 지금 저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보십시오. 소우연은 얼굴도 비추지 않을 겁니다.”소우희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씨 가문의 나머지 사람들은 속이기 쉽지 않지만 소한준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가장 예뻐하고 아껴줬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기에 이번에도 무조건 그녀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난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복덩이야.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한편, 소한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자 소우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와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소우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갔는데 소우연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솔직히 전 소우연이 제 모든 걸 빼앗아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소우연의 행동을 보면 저희 소씨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깊어 보입니다. 만에 하나,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겠다는 소우연의 말이 그냥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떡합니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는 제 입에서 소우연이야말로 의술을 할 줄 아는 딸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소우연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 걸고 금주까지 와서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는 겁니다!”“다들 미쳤구나!”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말하다가 너무도 가여운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두 눈은 너무
소현우와 소한준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소한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우희야,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하지 말아라. 큰형과 난 언제든 네 편이다.”소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걱정하지 말 거라. 내일 내가 일단 아침 일찍 경성으로 출발하마! 우희 넌 한준이와 함께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소우연은 아마도 소우희를 도와서 약을 제조할 때 의술을 조금 익혔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가문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회남왕은 왜 갑자기 자비를 베풀어 소우연을 살려둔 걸까?예전에 소현우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소우희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곁에서 소현우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밖으로 싸돌아 다니느라 바빴다.친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쓴 소우연만 생각하면 소현우는 너무 실망스웠다.“고마워요, 큰 오라버니.”소우희가 가까스로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소현우가 곁에 있던 혜주에게 말했다.“넌 일단 우희가 푹 쉴 수 있게 모시고 나가거라.”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혜주는 소우희를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가자 소한준이 씩씩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소우연 걔는 미친 게 분명해요.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다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입니다.”“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 이 일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소우연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이야.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고 우희의 억울함을 풀어줘야지.”“아버지와 둘째 형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우연의 말만 듣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우희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소우연이 할머니로 우희를 협박했다고. 우희에게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소우연이라고 인정하라고. 심지어 본인이 소씨 가문 복덩이로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지 않았느냐? 소우연 걔가 참…”한편, 방을 나선 소우희와 혜주는 멀리
“혜주 얘는 왜 이래?”그제야 평소와 다른 혜주를 눈치챈 소현우가 묻자 소우희가 대답했다.“소우연이 절 협박했다는 사실을 혜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우연이 일부러 이런 수를 쓴 겁니다.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화를 버럭 내시더니 혜주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혜주의 혓바닥은 결국 소우연이 자른 겁니다.”“아버지가?”소현우와 소한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하긴, 아버지께서 사실을 왜곡한 소우연의 말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불과 몇 달 사이에 집에 이렇게 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소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현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가고 이 때문에 황제가 평춘왕와 소우희 두사람의 혼사를 하사했을 때부터 소현우는 소씨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소우연까지 이렇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이건 단순한 변고가 아닙니다! 소우연이 회남왕을 부추겨 덕빈 마마와 폐하게 평춘왕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고 한 게 분명해요. 소우연이 우리 우희를 철저하게 망가트리려고 한 겁니다.”소우희는 감동한 눈빛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말로는 다들 소우희를 예뻐하고 아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앞에 나서서 소우희를 지키는 사람은 소한준밖에 없었다.이런 생각에 소우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셋째 오라버니, 소우연이 절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할머니의 병으로 장난치는 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소우연이 어떤 태도인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소우연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이 없습니다. 심지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소현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급하게 제지하자 소우희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오라버니, 제가 어렸을
예상에 없던 폭우 때문에 노정이 지체된 소현우와 소한준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금주에 도착했다.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우희는 뒷돈을 챙겨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금주 역참에 들어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게 되었다.“우희야, 네가 금주엔 어쩐 일로 온 것이냐?”소현우는 자신과 소한준 앞에 무릎을 꿇은 소우희를 재빨리 부축하며 물었지만 소우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혜주에게 말했다.“얼른 우희를 일으키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혜주가 얼른 소우희를 부축했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혜주도 소우희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냐?”성격이 급한 소한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애절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때, 소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큰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이제 저에겐 돌아갈 친정집이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할머니를 위해 조제할 진정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약재를 소우연이 전부 싹쓸이했습니다. 제가 세자께 부탁을 해서 금주와 영주 약방을 다 돌아봤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도무지 가만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 소우연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소우연이 글쎄… 글쎄…”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우희가 한참동안 훌쩍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소우연이 저를 도와 약재를 달였을 때 전 처방전을 조금도 숨김없이 다 보여줬었습니다. 그런데 소우연이 갑자기 돌변하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소우희의 말에 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난 산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부터 네가 마음에 걸렸다!”소현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소현우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소우희는 못 이기는 척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들, 소우연은 분명 진정향
마음속에 큰 파도가 출렁거렸지만 소우연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ㅇ르 유지한 채 다정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 왕야를 믿습니다.”이렇게 좋은 왕야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막연하다고 했던 용강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리고 용강한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상하기도 했다. 용강한은 소우연이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혹 용강한 그자가 너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도 한 것이냐?”이육진은 이제 용강한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용강한은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점괘를 보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아닙니다.”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소우연은 왠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용강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한편, 금주 성문 부근에서.“왕비님, 소인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 장군님 일행은 오늘 내로 금주에 도착하여 역참에 묵을 예정이라고 합니다.”검은 복장을 차려입은 호위무사가 소우희에게 보고를 올렸고 소우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곁에 있던 시녀 춘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서 혜주를 데려오거라.”벙어리가 된 혜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참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혜주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네.”밖으로 나간 춘화는 이내 혜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낡은 마의를 입은 혜주는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우희는 그런 혜주를 재빨리 일으켰다.“얼른 일어나거라.”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말했다.“너희들은 이만 물러나거라.”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우희는 혜주를 안아주더니 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혜주야, 너와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일 줄
한편, 정연은 명심에게 왕비와 왕야를 위해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왕비님이 나오셨습니다.”소우연을 발견한 명심이 말했다.정연과 명심은 가까이 다가가다가 휘청거리는 소우연의 모습에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왕비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화들짝 놀란 정연이 다급하게 물으며 대청마루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괜찮다.”소우연이 대답했다.‘괜찮다고? 얼굴이 이렇게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다니?’정연과 명심은 양쪽에서 소우연을 부축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던 이육진과 마주치게 되었다.핏기를 잃은 소우연의 모습에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찌된 일이냐?”겨우 진정한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일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잠시 휘청거렸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핑계를 당연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에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가 없다.“그럼 얼른 가서 간식 좀 준비하거라.”“네, 알겠습니다.”정연과 명심이 소우연을 부축한 채 떠났다.이때, 대청에서 나온 용강한은 문턱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 왕비가 뭘 물어본 것이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묻자 용강한은 조금 전에 소우연이 했던 질문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만 용강한과 소우연이 어렸을 때의 인연과 그가 소우연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소우연의 화들짝 놀란 반응에서 용강한은 그녀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그저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왕비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놀란 걸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왕야, 왕비님이 겉으로 보기엔 씩씩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상처가 많은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네.”“나도 왕비가 또래 소녀들처럼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걱정 없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이육진은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강한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