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화면을 보니 하정숙에게서 온 전화였고 신유리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하정숙이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전화받는 것을 망설이다 결국 받았고, 하정숙의 명령하는 듯한 어투가 전해졌다. “시내에 있는 병원 쪽으로 오고, 오는 길에 비타민 좀 사 와”신유리는 도착하고 나서야 연우진의 어머니인 안부인이 팔을 다치셨고, 병원에 입원해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하정숙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물건은 내려놓고, 너는 가도 돼.”그녀의 말투는 좋지 않았고, 신유리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정숙은 서준혁의 어머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고생하셨어요.” 오히려 침대에 누워계신 연우진의 어머니가 따뜻하고 매너 있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신유리는 고개를 흔들었고, 하정숙의 독촉으로 병실을 떠났다.병실을 나서자마자, 급히 오고 있던 연우진과 부딪쳤다.연우진은 여기서 신유리와 마주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했고,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아?”“괜찮아.”신유리는 연우진의 길을 막고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옆으로 살짝 비켜주어, 연우진은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안 부인의 병실은 1인실이다. 방을 들어가면 문 바로 뒤쪽에 파티션이 있었고, 신유리는 아직 병실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하정숙이 날카로운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유리 불러. 어차피 쟤 할 일도 없어. “신유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정숙이 그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아직 마무리 못한 일들이 있었고, 돌아가서 또 야근을 해야 했다. “유리가요?” 연우진은 하정숙이 하는 말을 듣고선 신유리를 옹호하는 말을 몇 마디 한 후, 들어가서 안부인을 간병하러 갔다.그는 원래 신유리에게 저녁을 사주려고 했지만, 신유리는 회사로 가야 했기에 거절했다.회사에 도착하니 이미 2시
신유리도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타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연우진은 신유리를 여유 있게 들썩 들어안았다. 신유리는 비록 키가 작지 않았지만 수척하다 보니 180센치미터가 넘는 연우진에게 안기니 어쩐지 한없이 가냘파 보였다.연우진에게 안겨진 신유리가 마침 서준혁의 시꺼먼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꿔뚫어 볼 것같이 숨김없는 냉기를 띠었다.신유리는 잠깐 놀라고는 속눈썹을 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준혁 오빠?” 송지음은 서준혁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서진 씨 랑 식사 약속 있잖아?”서준혁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는 낮게 응답하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송지음은 연우진과 신유리의 방향을 힐끗 살피고는 입꼬리를 실룩하더니 보란 듯이 서준혁의 팔짱까지 끼고는 같이 차로 향했다. 신유리는 연우진을 따라 병원에 갔다. 전에 다쳤던 자리를 또 다쳐서 의사로부터 하이힐 금지령을 받고 말았다. 신유리는 미안함에 미쳤다. “미안해. 저녁 약속까지 했는데.”“다친 데 큰일 아니면 돼.” 연우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신유리는 납작구두로 바꿔 신어 겨우 제 발로 걸을 수 있었다.저녁 약속은 물 건너갔고 연우진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수밖에 없었다. 신유리가 발을 다쳐서 운전할 수 없으니, 연우진은 마지못해 “내일 내가 데리러 올게.”라고 말했다. "아냐, 택시 타면 돼.”신유리가 미안해하며 거듭 거절했다. "여기서 택시 타려면 몇백 미터 걸어가야 해, 정말 괜찮겠어? 내일 아침 데리러 올게.”신유리의 거절은 먹히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 연우진은 과연 제시간에 나타났다.그는 신유리를 회사까지 데려다주고는 말했다.“오후에 데리러 올게.”신유리가 거절하려 할 때 마침 서준혁의 마이바흐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서준혁은 매일 아침 송지음과 함께 출근하였다. 처음에는 시비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들 익숙해졌다.신유리는 눈을 내려 회사로 돌아섰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뒤에서 규칙적
신유리는 한참 뒤에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는 쉰 목소리로 "준혁이 너, 지금 일부러 나한테 그런 거지?"라고 물었다. "네가 더 어울렸을 뿐이야, 깊게 생각하지마."서준혁은 손에 들던 물건을 놓고 검은 눈동자로 신유리를 훑어보았다. 그는 눈썹을 피더니 피식 웃으면서 되물었다."왜! 너랑 연우진 연애하는 걸 방해라도 할까 봐? "서준혁을 바라보던 신유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준혁만은 자신을 다르게 대할 줄 알았다.알고 보니 다를 게 없었다!신유리는 목이 메더니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 나 시한으로 갈게."서준혁의 눈에는 풍자와 조소가 더해졌다. 그는 담담한 눈매로 눈길을 신유리의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두더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돼." 라고 말했다. "서준혁."신유리가 말을 가로챘다. 남자의 차가운 눈매를 바라보며 마음속 한구석은 문뜩 피로감이 생겼다.서준혁의 곁에 있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너무 오래돼서 지겨울 정도였다."계약이 만료되면 재계약 안 할 거야."그녀는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 자기 말이 들렸다.서준혁은 동공이 흔들리더니 신유리를 바라보던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안색은 철저히 어두워졌다."조건을 달아서 나를 협박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이런 결론을 지은 것인지 신유리는 갈피를 못 잡았다. 이 남자가 원하던 결과 아니었던가?그녀는 눈을 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갑고 무거운 서준혁의 목소리가 무서웠다."그래, 너 후회만 안 한다면!"신유리가 시한 지사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신속하게 퍼졌다.사무실 내 사람들의 신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해졌다. 그나마 양예슬이 그녀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걸었다."유리 언니, 서 대표가 언니를 보냈다고 하는데 거기에 얼마 동안 있을 거예요? ""모르죠."신유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이직 준비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그녀는 오후에 물건을 잘 정리해 놓고 퇴근하자마자 요양원으로 달려갔다.시한 지사로 가게 되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외할아버지를
신유리는 내색 하지 않고 송지음의 말을 무시한 채 서준혁을 올려보았다.“언제 떠나?” 송지음은 단순히 여행으로 서준혁의 꼬리를 따라왔다. 업무상 서준혁은 그녀와 관계가 없는지라 업무 이외의 시간에는 기꺼이 그녀와 동반했다. 서준혁은 그녀에게 온갖 편애를 보였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동반하였다.신유리는 한낱 부하로서 뭐라 할 자격이 없어 자신의 본업에만 충실했다. 송지음은 관광지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하자 서준혁은 응했고 신유리는 눈치 있게 차를 가지러 갔다. 차에 오르자마자 송지음은 서준혁의 품에 안겨 애틋한 목소리로 오전 외출할 때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서준혁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에 휴가니까, 푹 더 자.”말투는 부드럽지 않지만, 다정다감이 몰려왔다. 신유리는 운전에 집중했다.하지만 차 안에는 칸막이가 없어 송지음의 애교를 막을 수가 없었다.식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관광지라서 주차장은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송지음은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까 봐 서준혁을 끌고 먼저 자리를 떴다.가면서 신유리에게 말했다.“유리 언니, 준혁 오빠랑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을 테니, 차를 세우고 우리랑 만나요.”신유리는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았다.차를 세워놓고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혼자 밖에서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어도 송지음과 서준혁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신유리는 할 일이 없어 잠시 휴대전화를 만졌다. 업무용 카톡 아이디가 아직 바뀌지 않아 모멘트를 클릭했더니, 마침 송지음의 메인 포토가 눈에 들어왔다.그녀와 서준혁의 점심 식사 사진이겟지.신유리는 식탁이 2인 위치였고 메뉴도 2인분이란걸 알아챘다.전혀 그녀를 무시한 채. 신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캐톡을 끄고 막 나가서 구경하려고 할 때, 전화가 걸려 왔다.서준혁이 그녀더러 그들을 데리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가 보낸 위치는 상가 거리였는데 갔더니 송지음이 한창 쇼핑 중이었다. 옥선가게에 송지음이 작은 펜던트를 골라잡았다.가격이 다섯 자리
신유리는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었고 턱에 두드러기가 생겨 서준혁한테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휴가를 냈다.그녀의 턱이 나았을 때쯤 송지음은 성남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래서 그녀의 휴가도 길지 못했다.신유리는 서준혁이 그녀와 함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가지 않자 의외라고 생각했다.송지음도 신유리랑 서준혁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기 전에 서준혁을 잡고 한참 동안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신유리한테 말했다.“유리 언니 수고하네요. 준혁이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잘 부탁해요.”이 말은 겉치레로 하는 말 같았지만 실제로는 유리를 경계하는 것이었다.송지음을 보내고 신유리는 서준혁과 함께 약속한 고객을 만나러 갔다.이번에는 서준혁이 운전을 했고 신유리는 자료를 보고 있었다. 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받았다. 요즘 리연지가 그녀에게 연락을 너무 자주 했다.이연지는 입만 열면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유리야, 네 동생이 또 발작이다.”신유리는 핸드폰을 잡은 손을 꽉 쥐고 “전에 이미 이백만을 주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이연지는 우물쭈물하며 “유리야, 동생한테 사백만을 더 보내주면 안 되겠니? 미미가 또 재촉하는구나.”라고 말했다.신유리는 “제가 이번 달에 대체 몇 번이나 이체했는데요.”라고 말했다.이연지는 여전히 훌쩍거렸고 무슨 일인지 우물쭈물거리며 제대로 말은 하지 않고 결국 소란을 피우다가 전화를 끊었다.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서준혁은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듣고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다.신유리는 리연지에 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싫어서 입을 오므리고 말하지 않았다.서준혁도 강요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업무에 지장 주지 마.”고객은 세련된 중년 여성이다. 성남 출신이라고 하던데 후에 시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문선경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서준혁한테 인사를 하며 말했다.“나와 네 엄마
“네 그렇게 할게요.” 서준혁은 잠시 고민하다 흔쾌히 대답했다. 문선경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다. “예전에 네 어머니와 농담 삼아 사돈 맺자고 했었어.”신유리는 곁에서 그들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문선경은 회사 얘기는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말끝마다 자기와 하정숙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강조한다. 서준혁이 언제 회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고 만약 돌아가면 문선경 쪽 일 처리가 쉽지 않을 것이다.신유리는 자기 일을 생각하느라 서준혁과 문선경의 얘기가 끝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서준혁은 시더우드 향이 나는 외투를 신유리에게 벗어던졌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신유리의 주의를 끌었다. “문 대표님 모셔주고 와.”신유리는 서준혁의 외투를 받아 문선경과 함께 나가려다 문선경의 제지를 받았다. “난 괜찮아.”말을 마친 문선경은 서준혁을 보며 말한다. “요 며칠 현이는 네가 잘 케어해줘.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많을 거야.”서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알겠어요.”신유리는 흠칫했다. 문선경은 주현을 아예 서준혁 곁에 있게 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다. 서준혁이 알아차렸는지가 미지수다.하지만 서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송지음이 성남에 있는데 어떻게 대처하려나.서준혁은 신유리를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차 가지고 와.”신유리는 고개를 떨구고 차를 가져오려고 몸을 돌린 찰나 주현이 말한다.“준혁 씨, 오늘 준혁 씨랑 호텔 가도 돼요?”신유리는 멈칫했다. 서준혁의 외투를 들고 황급히 주차된 곳으로 갔다.서준혁의 대답을 듣지 못한 주현은 가까이 다가가 서준혁의 소매를 잡으면서 묻는다.“혹시 불편해요?”서준혁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고는 맘에 없는 듯 대답한다.“괜찮아요, 좋을 대로 해요.”신유리가 차를 가지고 왔을 때 서준혁과 주현은 이미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세워놓자 서준혁은 차 뒷문을 열고 주현에게 말한다. “타
차 안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신유리도 서준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서준혁이 운전한다면 자신은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주현은 서준혁이 침묵하자 웃으면서 한발 물러선다. “당신이 운전하기 싫다면 내가 운전하죠.”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본다. 신유리는 태연하게 입을 뗀다. “혼자 갈 수 있어.”서준혁은 낮게 알았다고 대답한다. 신유리는 가방을 가지고 차에서 내린다.이렇게 맑은 날씨에 느끼는 시한의 강한 자외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회사에서 꽤 걸어야 차를 탈수 있어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는 택시가 하나도 없다.태양이 내리쬐는 상황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절반 정도 걸었을 때 연우진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직도 신유리에게 친구 소개해 주는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내가 시한에 있어서 당장은 시간 내기 힘들어.”“괜찮아. 이신도 마침 시한에 있거든. 걔 귀국한지 얼마 안 됐어.” 연우진은 사소한 일도 신유리에게 전했다. “유리야, 시간 나면 이신 한번 만나봐. 걔가 이쪽 세계에서는 프로야. 팀도 있고.”연우진은 신유리의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신유리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어 이신의 연락처를 받아 시간 되면 만나서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마음이 놓인 연우진은 그제야 웃었다. “ 이신과 내가 절친이지만 걔 성격이 좀 이상한 편이거든.”호텔로 돌아온 신유리는 이신의 카톡을 추가했지만 상대방은 감감무소식이다. 나중에는 신유리도 신경 쓰지 않았다.오히려 연우진의 전화로 인해 시한이 무척 민족 특색이 있는 도시이고 그중 전시회나 예술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신유리는 잠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후 근처에 있는 옛날 거리로 구경을 갔다.재미있는 공예품을 보자 연우진이 생각나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리액션이 좋아 봐둔 공예품을 모조리 샀다.더 이상 볼거리가 없자 신유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서준혁과 주현은 아직도 밖에 있는 모양이다.밥 먹고 난 뒤
주현과 서준혁이 가까이 앉은 탓에 주현의 향수 냄새가 서준혁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주현은 무릎으로 서준혁을 터치하면서 낮게 말한다. “내가 당신 비서보다 더 괜찮을 수 있어요.”주현을 바라보는 서준혁의 눈빛에 더 이상의 흥미가 없었다. “나는 문 대표님과 일 얘기를 하러 온 것이지 그분의 따님과 자러 온 게 아닙니다.”주현은 잠시 굳었다가 서준혁의 옷소매를 잡았다. “엄마는 준혁 씨를 탓하지 않을거예요. 엄마도 준혁 씨 맘에 들어 하세요.”서준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신유리가 테이블에 놓고 간 약을 들어서 본다. “이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잠시 뜸을 드리고 다시 말한다. “더군다나 집에 사람도 있어서.”서준혁을 바라보는 주현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위약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비서가 사다 준거에요?”“당신과 상관없을 텐데요.”신유리는 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시한은 날씨도 적당하고 낮에 이리저리 구경했어서 오늘 밤엔 푹 잘 수 있었다.새벽이 되자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자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밤에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올라와.”신유리는 핸드폰을 쥐고 목이 잠긴 채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주현이 아직 방에 있을 텐데 서준혁은 올라오라고 한다.그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신유리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올라갔다.방문은 열려있었지만 신유리는 뜸을 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방에는 누구도 없었다.신유리가 나가려 하자 발코니 문이 열리면서 잠옷을 입은 서준혁이 보였다.그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었다. 잠옷은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고 허리에는 벨트가 매여져 있었다.통화할 때 신유리에게 눈길 한번 슥 주고 목소리를 낮춰 상대방과 굿나잇 인사를 했다.신유리는 옆에서 목석처럼 서있었다. 서준혁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도저히 알지 못했다.드디어 서준혁이 통화를 마쳤다. 굿나잇 인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