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눈송이들이 떨어지며 마침 바람에 날려 신유리의 눈가에 내려앉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서준혁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보며 속눈썹을 가볍게 움직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에 신유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신유리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버닝 스타의 마지막 보고서가 아직 화인 그룹에 제출되지 않았어."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 “작업실이 휴가 중이라 보고서는 연후에 제출될 거야.”서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연후에는 중요한 일이 많아서 버닝 스타의 보고서가 우선 처리되지 않을 거야.”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조금 후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그녀는 말을 마치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보고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서준혁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멈췄다. 이번에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먼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홍란의 계획이 연후에 바로 시작될 예정이라 많은 세부 사항을 논의해야 해.”홍란의 입찰은 다음 해 2월에 정식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연후가 지나면 바로 제출해야 했다. 신유리는 서준혁이 집으로 따라 들어오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서준혁은 신유리의 집에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의 낡은 모습을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는 확실히 너무 낡았다. 각 건물의 벽은 벗겨지고 있었고 내부의 얼룩이 드러나 있었다.1층의 녹지대에는 온갖 종류의 채소가 심겨 있었고 창문 밖에 걸린 막대기에는 각종 명절 음식이 걸려 있었다. 낡은 단지라 평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래도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설 쇠러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다.신유리는 문을 열고 돌아보자 서준혁의 불만 가득한 눈빛에 그녀는 별로 개의 않았다. “문 닫을 때 조심해. 여기 방음이 별로 안 좋아.”그녀는 신발장에서 일회용 슬리퍼를 찾아 서준혁에게 던졌다
흰색 만두 위에 푸른 채소가 얹어져 있어 보기만 해도 식욕이 당겼다. 서준혁은 기꺼이 그릇을 건네받았다. 그는 음식을 먹을 때 섬세하고 우아했으며 마치 만두를 먹는 것이 아니라 고급 요리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신유리도 천천히 먹었지만 그녀는 단순히 입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오래된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고 그녀는 그릇 속 만두를 휘저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만두가 싫어졌어?”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유리는 고개를 들자 서준혁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신유리는 사실 만두를 좋아했다.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도 무엇을 먹을지 모를 때면 항상 만두를 먹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고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이미 늦었어.”서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그는 그녀가 거의 손대지 않은 만두 그릇을 보며 말했다.“저녁으로 이것만 먹고 괜찮겠어?”“입맛이 없어.”신유리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말했다.“왜?”서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신유리는 서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숟가락을 쥔 손을 조였다가 천천히 풀었다. 숟가락은 그릇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그냥, 입맛이 없어.”서준혁이 떠난 후, 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몸에서 풍기던 익숙 하려야 더 이상 익숙할 수 없던 우디향이 사라지면서 신유리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임아중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유리야, 나 너희랑 시한에 못 가게 됐어. 아빠가 외국에서 빌라 두 채를 예약했는데 온 가족이 그 섬에서 보낸대. 내일 아침 비행기야.”신유리는 대답했다. “좋네.”“뭐가 좋아, 진욱 그 자식도 간다니까.”임아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틀림없이 그 자식이 노윤지를 데려갈 거야.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왜 아빠는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신유리는 임아중과 곡연이 진욱과 노윤지의 일에 대해 불평한
신유리가 단지 입구로 들어서자 두 아이가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가방에는 막 받은 세뱃돈이 들어 있었다. 신유리는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예전 생각에 잠겼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 커다란 매듭을 천천히 거실에 걸었다. 귀여운 토끼 모양이 썰렁한 거실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었다.저녁에 신유리는 다음날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근처 마트에 갔다. 돌아올 때 보니 서준혁의 차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신유리는 못 본 척하려 했지만 서준혁은 다가와 짤막하게 말했다. “보고서 받으러 왔어.”신유리는 그를 흘겨보고는 말했다.“메일로 보내면 되잖아.”화인 그룹은 연말이 다가오자 사실 꽤 바빴다. 직원들은 쉴 수 있지만 사장인 서준혁은 각종 모임과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신유리가 화인 그룹에 있을 때 매년 연말과 연초에 가장 바빴다. 다양한 회식 자리, 협력 파트너, 가족 연회 등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매년 설날 저녁에는 무조건 집에 돌아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명절을 보냈다.서준혁은 담담히 말했다.“지나가던 길이었어. 메일로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잖아.”신유리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와 보고서를 서준혁에게 건네주었다.서준혁은 거실에 서서 커다란 매듭을 바라보더니 눈에 반짝이는 빛이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다시 신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자 걸었어?”“응.” 신유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파일 전송 상황을 확인하며 말했다. “메일로도 보냈어. 보고서는 도장이 필요해서 명절 후에 제출할 수 있어.”서준혁의 시선은 여전히 매듭에 머물렀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으나 마침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서준혁은 매우 바빠 보였다. 연이어 세 통의 전화가 걸려 와서 그를 재촉했다. 신유리 집에 머문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그가 떠나자, 원래 좁던 집은 더욱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신유리는 거실에 잠시 앉아 있다가 TV를 켰다. 간단히 국수를 끓여 먹고는 천천히 청소를 시
이석민이 서준혁에게 먹을 것을 사다주려고 외출한 탓에 온 방에는 서준혁과 신유리 둘만 남아있었다.“신연 씨는 제남에 처리할 업무가 있어 왔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바로 부산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하니 설 명절은 제남에서 보낼 것 같지 않습니다. 태 씨 가문의 할아버님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좀 힘들 텐데...”조용한 방안에 서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는 소파에 기대앉아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쳐다보았고 몸이 아픈 탓인지 미간은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낮았다.신유리는 그런 그를 흘깃 쳐다보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태씨 가문과 신연 사이를 익히 들어왔지만 도통 어찌된 영문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하지만 신연이 자신을 찾아와 조건을 제시할 때의 태도가 자꾸 생각나는 신유리는 신연에게 더 이상 무엇을 물어볼 흥미도, 의지도 없어져버렸다.신유리는 원래 서준혁이 떠난 후 바로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외출을 한지 한참이 흐른 이석민이 갑자기 전화가 와 부근에 문을 연 식당이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필경 성북 거리는 성남 거리와는 달리 북적거리지 않고 조용한 곳이라 식당이 있다고 해도 개인가정에서 하는 자그마한 식당뿐이었다.게다가 지금은 마침 명절을 보낼 시간들이라 대부분 식당 주인들은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 것이 분명했다.이석민의 전화가 뚝 끊기자 서준혁의 시선은 신유리에게 향했고 신유리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을 꺼냈다.“조금 있다가 이석민 씨 오면 집에 데려다 주라고 할게요.”“네.”서준혁은 짧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키더니 신유리에게 물었다.“주방 잠간만 써도 되겠습니까?”신유리가 대답하기도 전, 서준혁은 이미 주방으로 발을 들였고 마치 이 주방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인 듯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만두를 꺼냈다.그러나 이런 일을 잘 해보지 못했던 그인지라 만두를 꺼내고는 뭐부터 해야 할지를 몰라 헤매는 눈치였다.신유리는 서준혁이 아까운 음식을 행여나 낭비할까 두려웠고 무표
서창범은 끊임없이 서준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서준혁은 단 한통도 받지를 않았다.신유리는 입맛에 전혀 없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보더니 물었다.“이제 그만 떠나시는게 어때요?”그녀의 말에 서준혁은 멈칫했고 옆에 있는 핸드폰은 무음 상태도 설정했지만 여전히 메시지와 전화가 수도 없이 오는 것이 눈에 보여졌다.신유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되게 방해되는데요, 저한테.”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예능은 어느덧 하이라이트로 향했고 관객들이 박수소리와 환호소리는 밖에서 터지는 폭죽들의 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하고 나서야 입을 뗐다.“신유리 씨는 제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럼 아니에요?”신유리는 여전히 냉랭한 눈빛으로 물으며 대답을 이어갔다.“업무상의 일로 저를 찾아오시는 거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오늘 섣달 그믐날이에요, 그래도 명절의 예절과 풍습이 있으니 오늘까지 서준혁 씨와 다투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미 저를 많이 방해하고 계시니까 빨리 떠나주셨으면 좋겠어요.”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을 하는 신유리의 태도는 누구보다 더 단호했다.서준혁은 그녀와 조금 눈을 마주쳤고 그녀의 시선은 또 다시 서준혁의 핸드폰으로 향했다.한통의 메시지가 더 전송되고 나서야 그는 몸을 일으켰고 핸드폰을 들고 신유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꼿꼿하게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다.낡은 건물의 방음은 매우 좋지 않았고 문도 잘 닫히지 않았는데 서준혁이 문밖으로 나설 때, 부실 듯 세게 닫는 소리는 온 방에 울렸다,신유리는 밥상에 앉아 잠시 멍을 때리는 듯싶더니 다시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서준혁은 짜증이 가득 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 발신자는 그가 갑자기 전화를 받을지는 몰랐는지 조금 침묵하다다 말을 했다.“오늘 명절인데 너는 집에 올 생각도 없는 거냐? 네 눈
주현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했고 서준혁은 그녀를 보며 찌푸렸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지만 눈빛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전 그쪽이랑 이런 재미없는 게임 놀아줄 생각 전혀 없습니다.”서준혁은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고 주현은 그의 단호함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발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이신과 신유리는 곧장 화원으로 향했고 멀리서부터 이나와 어느 할머니 한분이 같이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할머니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꽃무늬 안경을 끼고 있었고 이신은 신유리에게 할머니를 소개시켜줬다.“내 할머니야.”이신의 할머니는 인자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신 분이었지만 나이가 드는 바람에 청력이 좋지만은 않아 그들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그러나 신유리를 보는 눈빛만큼은 유독 자상하고 즐거워했다.신유리 그녀조차도 도통 자신이 왜 이렇게 나이가 있으신 분들에게 인기가 많은지를 이해하지를 못했다.그녀는 할머니와 조금 동안 얘기를 나눈 뒤, 시간도 많이 흘렀고 기온도 그다지 높지만은 않은 날씨였기에 이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갔다.서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인물이 출중한지라 어디를 가도 한 눈에 보일만큼 유별났다.주현과 문성경, 그리고 하정숙은 환한 미소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옆에는 서준혁과 서창범이 서있었는데 화목하고 단결된 한 가족 같아 보이는 장면이었다.이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신유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우리 할아버지께서 이번 생일파티에 거의 뭐 이 분야사람들 절반은 넘게 부르신 것 같아, 서 씨 가문은 너도 잘 알지?”“네, 사회생활이라는게 다 이렇죠 뭐.”신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가 괜찮다면 됐네.”신유리는 주동적으로 먼저 서준혁을 찾아갈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었으니 딱히 신경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신유리도 이신의 아버지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서창범과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반겨주며 자상하게 대해줬다.이신이 신유리를 데려가 인사를
주현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불쾌하기 그지없었고 그녀는 신유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뭐가 됐든 준혁 씨 아이가 아니면 됐어요, 저랑 그 사람 곧 약혼할 사이라 이 시기에 아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귀찮잖아요.”신유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있었고 주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핸드폰을 꽉 쥐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주현 또한 키가 꽤 컸고 거기에 하이힐까지 신은 탓에 신유리보다 더 커보였는데 주현은 신유리를 하대하듯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밖에 여자가 있는 거는 참아도 아이가 있는건 못 참는거 잘 아시잖아요.”주현은 잠시 멈칫대다가 신유리의 배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베란다를 떠나버렸다.폭죽은 여전히 화려하고 예쁘게 터지고 있었지만 신유리는 그저 차디찬 바람만 느껴졌다.주현의 경고의 말들을 잘 알아들은 신유리는 평평한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신기하네, 여기 안에 새 생명이 들어있다니...]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고 임아중과 곡연이 채팅방에 문자를 보내왔다는 것을 확인한 신유리는 몸을 돌려 베란다를 떠났다.실내에 들어서자 마침 이신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손에는 외투 한 벌도 들려있었다.그도 신유리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천천히 멈추며 말을 했다.“밖에 기온이 낮아서... 난 네가 안 들어온 줄 알았어.”신유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환하게 웃으며 서준혁에게 다가가는 주현을 보았고 원래 서창범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서준혁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현을 쳐다봤다.그리고 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던 서창범은 주현을 보는 순간 표정이 인자하고 자상하게 바뀌었다.신유리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려 이신에게 물었다.“조금 있다 다른 스케줄 있어?”이신은 신유리가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외투를 걸쳐주며 말했다.“아니, 이젠 없어. 집에 데려다줄게.”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레몬과 같은 향과 갓 밖에서
서창범의 눈빛에 가득한 경계를 본 신유리는 이 상황이 웃기기 시작했다.[아니, 내가 임신한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신유리와 서창범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서창범의 눈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뗐다.“유리 씨, 우리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않나요? 나중에 아이 태어나면 제가 정말 잘해줄 자신 있는데... 제일 좋은 이모해줘도 돼요?”신유리는 주현이 일부로 자신을 조롱하고 놀리려는 의도로 말을 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굳이 주현과 엮이고 싶지 않아 대꾸하기가 싫었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 하정숙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현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저쪽에서는 너랑 말도 섞기 싫어하는데 너는 왜 자꾸 치근덕거리려고 해?”“제일 좋은 이모 같은 소리한다, 나중에 너랑 준혁이가 아이 낳으면 그 누구보다 더 잘난 아이일거야. 쟤 뱃속에 아이가 무슨 핏줄일줄 알고?”신유리는 자신을 깔보는 것이 아닌 뱃속 아이까지 건드리는 하정숙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고 미간을 팍 찌푸리며 입을 뗐다.“하 여사님, 말 좀 가려서 하시죠?”주현은 이런 신유리의 모습이 의외인 듯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하정숙은 날선 신유리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내가 조심하긴 뭘 조심해? 너 혹시 무슨 수를 써서 준혁이 아이를 임신하고는 아이 엄마라는 명분으로 우리 서 씨 가문에 들어오고 싶은거 아니야?”“신유리, 만약 그런게 맞다면 얼른 그 마음 접기를 바랄게. 네가 보기에는 네 아이가 참 잘나고 소중하겠지만 네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를 우리 집안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하정숙의 말에는 온갖 조롱과 불평불만이 가득했고 신유리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다.“하 여사님, 망상증 있으시면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제 아이는 서준혁 씨, 그리고 서 씨 가문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명심해두세요!”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주변 공기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