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유리를 포옹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는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신유리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부산에서 성남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안 걸려요.”신유리가 입술을 깨문 채 신기철을 쳐다보았다.신기철이 성남을 떠난 뒤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이연지는 이혼하자마자 신기철과 찍은 사진들을 모조리 버렸다. 신유리는 몰래 가족사진 한 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이연지에게 발견되어 욕을 한 바가지 먹었고, 그 유일한 가족사진마저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기억 속 어렴풋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나 있었지만 깔끔한 정장을 입은 성공한 사업인으로 변한 것 외에 별로 달라진 바가 없었다.완전히 달라진 이연지와는 달리 꽤 잘살고 있는 것 같았다.신연준을 봐도 잘살아 보이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입술을 깨문 채 그의 답변을 기다리느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신기철이 말로는 신유리가 커가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다고 했지만 십몇 년 동안 한 번도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전부 거짓말처럼 들렸다.신유리는 전혀 믿지 않았다.십몇 년 동안 정말 하루라도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걸까?신유리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신기철은 당황해하면서 핑계를 찾아보려고 했다.하지만 핑계를 찾기도 전에 아까 그 여자가 다가왔다.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신유리를 쳐다보면서 신기철의 팔짱을 끼려고 했지만 신기철이 피했다.그러자 더욱 불쾌해졌다.“누군데 이렇게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신기철은 마른기침하더니 성질을 부렸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딸 신유리라고.”신기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 여자를 신유리에게 소개해 주었다.“해령 씨라고 해. 우리 회사에 새로 온 실습생. 혼자 부산에 와서 독립한다고 돈이 아까워서 병원도 가지 못하는 걸 내가 데려왔어.”신유리는 자기보다도 어려 보이는 해령을 보면서 말했다.“회사 복지가
신기철의 명령식 말투에 신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준혁이 남자친구이든 아니든 전혀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특히 어른이라고 꼰대질하면서, 자칭 아빠라고 하면서 아빠로서의 책임을 져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신유리는 불쾌한 감정을 억지로 숨기면서 냉랭하게 말했다.“제가 누구랑 연애하든 저의 일이에요.”신기철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 억지로 다정하게 말했다.“미안해, 유리야. 아까 아빠 말투가 좀 거칠었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었어. 다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잖아.”신기철은 또 가소로운 눈빛으로 서준혁을 쳐다보고는 성질을 죽이면서 신유리를 말렸다.“유리야, 아빠 말 믿어. 아빠 사람 잘 봐. 이놈은 딱봐도 돈 한 푼 없는 거지잖아. 난 네가 이런 사람이랑 고생하는 꼴 못 봐. 내가 나이가 비슷한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 오늘 점심에 같이 밥 먹는 거 어때?”신기철은 신유리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했다.신유리가 한숨을 내쉬면서 인내심 없는 말투로 말했다.“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유리야!”신기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하는 일 그만두고 아빠 회사에서 출근할래? 지금보다는 훨씬 편할 거야.”신유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아까부터 계속 아빠, 아빠 하시는데 십몇 년 동안 한 번이라도 저 생각한 적 있었어요? 성남에 저희를 버렸던 거 생각나지도 않으세요? 저를 관심해 주는 척하지 마세요. 고등학교 입학시험 치던 그해 여름날 이후로 연락한 적도 없으면서! 제가 걱정된다면 왜 병원에 왔는지 묻지도 않았겠죠. 그리고, 어떻게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때려치우라고 말할 수 있어요?”신유리가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신기철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신유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 십몇 년 동안 보러 가지 않았다고?”신유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더 이상 필요 없어요.”신기철은 비통하고 실망스러운 표
신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시선을 거두고는 약을 옆에 두고 서준현의 옆에 앉았다.어깨에 있는 상처는 쇄골까지 퍼져있었고 심지어 살결이 찢어져 있었다. 신유라는 약을 발라주기 전, 먼저 상처 주위에 있는 물기부터 닦아냈다.약 발라주다 보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서준혁이 소파에 앉아있었다면 약 발라주기 어려웠을 것이다.신유리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정성스레 서준혁의 상처를 소독해 주었다.반듯하게 누워있는 서준혁의 배에는 복근이 선명하게 보였다.느슨해진 수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치골 라인에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약 발라주다 우연히 이 모습을 발견한 신유리는 멈칫하더니 애써 침착하면서 시선을 돌렸다.“석민 씨한테 돌아올 때 예방약 좀 사 오라고 해. 감염되면 안 되니까.”“응.”누워있어서인지 목소리가 더욱 매력 있어 보였다.서준혁은 우연히 고개 숙여 약 발라주는 신유리의 모습을 쳐다보게 된다. 대충 묶은 포니테일, 가늘고 긴 목.서준혁도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신유리가 모든 걸 다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약 다 발랐어. 일단 옷 입지 마.”서준혁이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자 신유리가 급히 설명했다.“옷 입으면 약 묻으니까. 어차피 나갈 일도 없잖아.”서준혁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병원을 나설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신유리가 말했다.“그러면 휴식 방해하지 않을게. 이따 석민 씨한테 언제 오는지 연락해 봐야겠어.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석민 씨한테 전해.”신유리의 명령식 말투에 서준혁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뭐 병신 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돌봐줄 필요 없어.”신유리가 멈칫했다.“그러면 프론트 데스크에 좀 부탁할까?”서준혁은 신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들쑥날쑥 반복되는 숨소리, 성난 가슴, 성난 이두박근, 완벽한 A라인.스킨십도 해본 사이라 그의 몸매가 좋은 줄 알았지만 자꾸만 시선을 피하게 된다.아까는 약 바르는데 정신이 팔려있어 괜찮았지만 지금은 어색할 따름이다.서준혁이
신연과의 통화를 마친 신유리는 그제야 자신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신연과의 약속은 내일 밤, 포시즌스 호텔 16층이었다.신유리는 자신의 핸드폰을 한쪽에 던져버리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신연과 신기철의 얼굴이 서로 정신없이 바뀌고 있었고 귓가에는 서준혁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그녀는 지금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할뿐더러 우울감이 극도로 치솟은 상태였다.신유리는 자기 스스로를 방안에 반나절 간 가두다 시피 안에만 있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장수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빙빙 돌던 머리가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무슨 일이에요? 왜 신유리 씨랑 서 대표님이 같이 교통사고를 당한 거죠?”전화를 받자 장수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고 신유리는 별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아 간단한 상황설명만 해줬다.“뒤에 오던 차가 저희 차를 박는 바람에... 단순한 추돌사고 일 뿐이에요.”장수영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줄 알았지만 그녀는 순간 말을 바꿔 얼른 신유리에게 말을 했다.“그럼 저희가 지금 갈게요. 신유리 씨랑 서 대표님 같은 호텔이니까 주소 보내주세요. 위안이라도 삼아 드릴게요.”신유리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막 떼려고 할 때, 장수영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오해하지 마요, 저는 그저 이 기회에 서 대표님께 조금이라도 얼굴을 더 비추려고 이러는 거지 절대 다른 뜻은 없어요. 저희 사무실에서 다 갈 건데... 서 대표님께서 투자 좀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이런 장수영의 말을 거절하기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든 신유리는 하는 수 없이 주소를 장수영에게 보내주면서 자신은 보러 올 필요 없으니 직접 이석민에게 연락해 서준혁을 만나면 된다고 연신 강조했다.하지만 장수영 일행은 신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영양제를 한 아름 들고 와 그녀를 보러 왔고 신유리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서 대표님은 위층에 계세요.”“알아요, 위층에 계시는 거. 근데 저희도 바로 올라 갈수는 없어서...
“안에서 피가 고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작스런 충격에 반응을 못한 것 일수도 있고... 저번에 지연이도 그랬어요. 문에 세게 부딪혔는데 다음날에 바로 부어오르더라고요.”장수영은 신유리의 손을 보며 중얼중얼 거리며 신유리에게 응급치료 방법을 알려줬고 말을 하는 중간에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져 몸이 굳어 고개를 돌려 뒤를 봤을 때 서준혁의 검은 눈동자랑 눈이 마주쳐버렸다.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장수영은 얼른 말을 바꿔 안타까워하는 말투로 말했다.“근데 될 수록이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누구도 뼈까지 다쳤는지 아닌지는 모르니까요.”“근데 저희가 지금 얼른 돌아가야 하니까... 서 대표님께서 번거로우시겠지만 같이 가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서 대표님도 다치셨지만 그래도 남자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함께 병원에 가주면 얼마나 편한데요.”장수영은 랩을 하듯 빠르게 말을 하고 몸을 일으켜 자신의 가방을 들며 자신의 회사 동료들더러 서준혁에게 인사를 하라고 눈짓까지 하며 말을 이어갔다.“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손목 빨리 병원 가는 게 좋을 거예요.”말을 마친 장수영은 미련 하나도 없이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신유리도 따라 나서려고 준비하는 순간 서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못 들었습니까? 손목뼈까지 영향된다잖아요.”신유리가 그의 말에 짧은 대답을 했다.“병원 가서 검사할거예요.”“그래요.”서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소리로 대답을 이어갔다.“기다려요, 옷만 바꿔 입고 올 테니까.”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쳐다보며 얼른 거절의사를 내비췄다.“저 혼자 갈 수 있어요.”이미 몸을 일으킨 서준혁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신유리를 내려다보며 변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제가 말했잖습니까. 이석민 씨가 지금 피해보상에 대해 애기중이라고.”서준혁의 말은 무조건 신유리와 함께 병원에 가겠다는 뜻이었고 또 다시 차를 불러 병원까지 향해 이런 저런 검사를 마치자 그냥 단순한 멍이라 큰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그러
신유리는 신기철이 은주를 안고 들어가는 모습을 입구 부근에서 보고 있었고 사실 신기철이 뒤를 한번만이라도 돌아봤다면 신유리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신기철은 은주랑 얘기하는 데만 집중하였기에 다른 곳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신유리는 그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은주의 볼에 뽀뽀까지 해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더 본다면 토할 것 같아 신유리는 급히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옆에서 냉정하고 도도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 딱 맞춰 잘 오셨습니다.”뒤를 볼아본 신유리의 눈에 들어온 신연의 모습은 이제 막 회사에서 온 것인지 정장차림를 하고 이마까지 드러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 전의 그 소년 같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신유리는 그가 언제 도착한 건지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신연도 신기철과 은주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연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약간의 표정변화도 없이 서있었다.그와 눈이 마주친 신유리는 순간 머릿속에 문득 생각이 떠올라 나지막한 소리로 신연에게 물었다.“일부로 약속을 여기로 잡은 거예요?”신연은 신유리의 물음에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는 되물었다.“왜 이렇게 묻는 겁니까?”그는 반박할 의지는 하나도 없어보였고 신유리가 그를 뚫어져라 보는 순간까지도 이상한 기미 하나도 없이 있었고 얼른 16층으로 올라가려고 발걸음을 뗐다.신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섰고 크나큰 룸은 저번에 서준혁이 예약한 장소와 똑같았고 거대한 창으로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신유리는 신연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은주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그녀는 신연을 쳐다보고는 아까 본 은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에 화장기가 가득 하지만 어려 보였고 어른이라기엔 미숙해보였다.“제 기억이 맞다면 열아홉 일겁니다.”그 말에 신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은주가 어리다는 것을 예상했지만 이정도로 어릴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신유리의 눈빛에 알지 못할 감정들이 섞였고 그녀는
“상처가 감염되는 바람에 열이 심하게 나는 것 같은데... 제가 아무리 병원에 가라고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신유리는 이석민의 말에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어제 서준혁이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는 모습을 보고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아무 일 없어 마음을 놓았는데 이렇게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서 대표님 어제 오후부터 미열이 있었는데 저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갑자기 열이 펄펄 끓어 제가 방금 의사한테도 전화를 했는데 저더러 항생제 좀 준비하라고 하시더라고요.”“올라가서 조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혼자 방에서 아프실 가봐 걱정이 돼서...”신유리는 빠르게 말을 하는 이석민에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줬다.“서준혁 씨 약물 알레르기 있어요, 제가 가서 약 사올게요.” 항생제 안에도 알레르기를 일으킬 성분이 있기에 이것 또한 신유리가 어제 서준혁을 걱정한 이유였다.이석민은 신유리의 말에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나한테 약물 알레르기 있단 말은 안하셨는데?]하지만 서준혁이 평소에 별로 아픈 적이 없어 약을 먹는 시간도 짧거나 없었다. 신유리도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오래기에 천천히 그의 이런 저런 습관을 깨달은 상황이었다.마침 부근에 약국이 있어 신유리는 의사가 말한 대로 서준혁의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받았다.돈을 지불할 때서야 이석민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 몇 통을 발견했는데 당시 복잡한 마음 때문에 벨소리를 듣지 못했었다.신유리가 약을 들고 돌아왔을 때 이석민은 방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올라온 것을 발견한 이석민은 쭈뼛거리며 낮은 소리로 말을 했다.“회사 쪽에 문서 하나 처리할게 있어서... 저 먼저 방에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신유리는 원래 그의 말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석민 머리에 씌워진 붕대들 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이석민의 상처는 서준혁보다 더 심각했고 서준혁은 신유리를 보호하려다 다친것이니 원래 대로라면 그녀가 그를 보살피는 것이 더 합리했다.서준혁이 고열이 난다는
마르고 가느린 몸매를 가진 신유리는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고양이 같았다.검고 긴 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신유리는 소파가 조금 불편한 듯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서준혁은 그런 그녀를 새까만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고 빵빵하게 튼 에어컨 때문에 추워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깊은 잠에 들었던 신유리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에 눈을 떴고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유리야, 좀 어때? 몸은 괜찮아졌니?”수화기 너머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의 목소리에 놀란 신유리는 얼른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잠에서 금방 깬 탓인지 잠기고 비음마저 섞인 신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하며 물었다.“내가 너 자는 걸 방해한 모양이구나.”“아니에요, 저 그냥 조금 힘들어서...”신유리가 말했다.“그래 알았다. 푹 쉬고... 내가 너랑 그 못난 놈한테 밥을 시켜줬으니 제때에 밥 챙겨먹으렴. 준혁이 상처가 감염됐다고 이석민 씨가 알려주더구나.”할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내 친손자니 걱정이 되는구나.”그는 신유리와 몇 마디 더 나누다가 그녀의 휴식에 방해될까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고 신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소파에서 잔 탓인지 다리와 손이 저려오는 신유리는 불현 듯 자신의 몸 위에 덮여진 담요 하나를 발견했고 잠시 당황하더니 안쪽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신유리가 체온계와 약을 들고 들어갔을 때 자는 줄 알았던 서준혁은 아직까지도 업무를 보는 중이었고 그녀는 담요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작은 소리로 입을 뗐다.“체온 한번 재요.”서준혁은 신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던 행동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물었다.“푹 잤습니까?”“네, 고마워요.”자신에게 덮여있던 담요가 서준혁이 가져다준 것임을 아는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