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쪽이랑 친했던가요?”은주는 신유리의 날선 말에도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지금 안 친해도 상관없죠, 나중에 친해지면 저를 엄마라고 불러야 될 수도 있잖아요.”은주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린 신유리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나이가 어린 은주는 아직 젊은이들만의 패기가 있는 듯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농담 한번 해본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말을 하던 은주는 신유리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남자를 보자 표정이 확 변하더니 목을 풀고는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했다.“어머, 장 대표님. 왜 이제야 온 거에요? 저 여기서 한참 기다렸다고요.”음식을 주문 할 때까지 신유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져있었고 장수영은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신유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그... 젊은 애가 참 용기 하나는 봐줄만 하죠?”은주가 여기에 있으면 무조건 신기철도 와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신유리는 입맛이 전혀 없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녀의 모습을 본 장수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또 다시 말을 했다.“우리 다른 집 가서 먹을까요? 이 집 참 맛이 없네요.”신유리도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쏠게요.”은주는 웃으며 장대표님을 음식점 안에 있는 룸으로 안내하고는 신기철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는데 아까 장대표와 꼭 붙어있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 같아보였다.장대표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은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장대표는 먼저 입을 뗐다.“은주 비서님은 점점 더 예뻐지십니다? 신 대표님 참 운이 좋다니까. 이렇게 예쁜 미녀 한명을 옆에 꼭 붙이고 다니시고.”은주는 부끄러운 듯 수줍은 미소를 띠며 얼른 대답했다.“장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디가 예뻐요? 신 대표님 따님이야말로 최고 미녀시죠.”“네?”그녀의 말에 호기심이 폭발한 장대표는 신기철을 쳐다보며 물었다.“신 대표님 따님? 저는 왜 신 대표님께 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죠?”“아까 제 옆에 서있던 그 여자
악에 바친 신유리를 보며 은주는 가식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는 입을 뗐다.“그러게요, 장 대표님처럼 멋지고 재밌으신 사람이랑 전화번호 좀 교환하는 것 가지고 뭘 저렇게 난리를 부리는지 참.”“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 대표님이 유리 씨한테 뭘 하려는 줄 알겠어요.”신기철은 안경을 올리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옆에서 말을 보탰다.“장 대표와 나는 오랜 친구다, 그저 너를 관심해주고 신경 써주려고 이러는 거야.”“왜 절 관심해주죠? 저랑 친해요? 그리고-”신유리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물었다.“당신도 저를 포기한지가 몇 년이나 흘렀는데 지금 와서 당신도 아닌 당신 친구가 저한테 관심을 좀 주고 싶다고요? 그걸 누가 믿어? 당신이라면 믿겠어요?”“신유리!”돌려 까는 식으로 말을 하는 신유리에게 신기철은 버럭 화를 내더니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혼을 내려는지 벌개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누가 너한테 웃어른한테 이런 말버릇을 가르쳐 준거야? 네 할아버지? 아니면 네 그 엄마? 애초에 내가 너를 데려 갔어야해, 지금 네가 어떤 모습인지 좀 봐라. 예절도 예의도 뭘 잘못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원래까지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고 있던 신유리는 신기철의 입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비웃는 듯한 말투를 듣자 안색이 싹 굳고는 그에게 버럭 외쳤다.“신기철, 당신은 할아버지를 말할 자격 따위 없어!”신유리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는 늘 신기철을 친아들을 대하듯이 소중히 여겼고 당시 이연지와 이혼을 결심했을 때에도 외할아버지는 신기철의 편을 들어줬었다.나중에 신기철이 먼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유리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신기철에 대한 나쁜 말이나 원망의 말은 한 적도 없는 외할아버지였다.도대체 신기철은 무슨 자격으로 외할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는가?-신기철은 그녀의 말에 손을 치켜 올리더니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신유리에게 고함을 질렀다.“신유리, 너 점점 규칙이라는게 없구나? 감히 나한
서준혁의 뒤를 따라 식당에서 나오는 신유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신기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바람에 신유리는 가슴이 답답해와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그 순간, 성큼성큼 걷던 서준혁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신유리는 갑자기 멈춘 서준혁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고 그를 보는 신유리의 눈빛은 많은 감정들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아까 만약 서준혁이 그녀를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신기철에게 따귀를 맞았을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서준혁에게 먼저 물었다.“아까... 어떻게 오신 거예요?”“장수영 씨가 문자를 보내줬습니다.”서준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신기철 씨와 신연 씨 두 사람 사이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데 그쪽마저 이 일에 발을 들이게 되면 복잡해집니다.”신유리는 서준혁의 말에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물었다.“그래서 서준혁 씨는 저 알려주시려고 온 거네요?”서준혁은 묻는 신유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슥 훑어보더니 되물었다.“이석민 씨더러 신유리 씨를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하라고 할까요?”그는 낮은 소리로 물었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서준혁은 행여나 자신의 일에 방해될 가봐 걱정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서준혁은 원래 일을 하면 세심하고 조심스레 하는 스타일이고 더욱이 신기철은 신연까지 끌어들였으니 복잡해지는 바람에 그는 자연스레 신유리 쪽에서 그 어떠한 일도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신유리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그의 말을 거절했다.“아니요, 저 혼자 회의실로 돌아갈래요.”자신의 비참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그에게 보였으니 그녀는 지금 서준혁을 마주보고 있는 것 또한 편하지만은 않았었다.서준혁도 신유리의 대답에 그녀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유리가 홀로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 장수영은 이미 도착해있었고 그녀가 도착한 것을 본 장수영은 조금 놀라며 물었다.“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장수영은 신유리와 서준혁이 더 오래 같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송지음은 신유리를 보는 순간 멈칫하더니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떨림과 당황함이 담겨있었지만 이내 표정 관리하면서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유리 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신유리도 마찬가지로 송지음을 보고 많이 당황했다.송지음은 전에 청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지금은 아이라인을 길게 빼고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청순하던 긴 생머리도 웨이브를 하고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섹시한 옷을 입고 있었다.마치 어른 옷을 훔쳐 입은 아이처럼 보였다.신유리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여긴 내 방인데, 아마도 네가 잘못 찾아온 모양이야.”그녀의 이 한마디는 마치 송지음을 자극한 듯 송지음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더니 신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전 언니가 여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말을 굳이 그렇게 해야겠어요?”신유리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화가 잔뜩 난 신유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말을 굳이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네가 마음대로 내 방문을 먼저 열었잖아. 송지음, 너 지금 주거침입이야, 당장이라도 신고해서 너를 내보낼 수도 있어.”이신이 예약한 호텔은 성급이 높은 편이라 전체 층이 조용하다 보니 신유리의 말이 유난히 뚜렷하게 들려왔다.신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서 잔뜩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송지음을 보며 하필 오늘 방을 옮기는 바람에 운수 나쁘게 송지음을 부딪쳤다고 생각했다.송지음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막으며 오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튜브톱 스커트를 차려입었는데 자칫하면 노출되기 쉬웠다.그녀는 이곳에서 신유리를 만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다가 그녀를 난처하게 한 것은 신유리는 906호였고 그녀가 가려던 것은 909호로 자신이 잘못 찾은 것이었다.그녀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굴욕스럽고 원망스러운 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눈을 들어 신유리를 깊이 쳐다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내뱉었다.“제가 잘못 찾은 것 같네요.”신유리는 여전히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송지음은
부산시는 최근에 비가 많이 내렸고 굳게 닫힌 문과 창문은 바깥의 한기를 막아서 되려 집안의 분위기를 더욱 건조하고 덥게 만들었다.송지음은 얼굴을 붉힌 채 소파에 앉아 드폰을 응시하고 있다.한세형이 샤워를 하러 가자마자 그녀는 서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준혁이 그녀를 데려가길 원했다.그녀는 여기에 오고 싶지도 않았고 한세형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용화 그룹에 있을 수 없었다.용화 그룹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아무도 그녀를 챙겨주지 않았다. 그녀는 용화 그룹에서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다.그리고 경희영은 원래 그녀와 약속했던 일은 하나도 지키지 않은 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심지어 부산시에 한세형을 찾으러 온 것도 경희영과 그녀가 안배한 일이었다.하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송지음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서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바로 신유리 그 천한 년이 있는 옆방에 있었다. 욕실 문이 갑자기 열리는 소리에 송지음은 하던 일을 멈추었고 한세형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몸에는 샤워 가운만 씌워져 있었고 군살 가득한 허리와 배를 보고 송지음은 구역질이 났다.“지음아.”한세형은 야릇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이리 와서 가운 좀 갖다 줘.”송지음은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한세형은 짜증을 내며 그녀를 두어 번 더 부르며 혼자 걸어오려는데 마침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그는 얼굴에 불쾌감이 스치며 귀찮은 듯 전화를 받으러 갔다. 송지음은 그제야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이 안도의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한세형의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들었다.“알아, 버닝 스타를 추천하는 사람은 꽤 많은데 구체적인 것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송지음은 눈꺼풀을 치켜들고 한세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기 전에 경희영은 한세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녀는 원래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지금은...‘버닝 스타와 관련이 있나?’그녀의 머릿속에는 신유리가
서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뭔 뜻이야?”신유리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입가에 가벼운 조소를 띤 채 말했다.“송지음한테 물어봐, 화인 그룹에 꽤 충성하던데?”신유리가 한세형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송지음은 바로 옆에서 그녀를 방해하면서 화인 그룹을 증거로 삼았다. 마치 버닝 스타가 화인 그룹을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처럼 말이다.신유리는 어젯밤 서준혁이 송지음의 메시지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뜨던 모습을 떠올리며 비아냥거림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핸드폰을 거두고 서준혁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서준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은 더없이 차가웠다.신유리는 밖으로 나가 이신에게 전화를 걸어 한세형의 일을 말하자 이신은 잠시 침묵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한세형은 인품이 별로 좋지 않으니 접촉하지 않는 게 좋겠어. 가서 다시 얘기하자.” 신유리는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버닝 스타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 같은데 계속 이 상태면 어떡해?”이신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홍란의 책임자는 어차피 그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비록 이신은 계속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그녀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채 다시 회의장으로 갔다.비록 한세형이 강경하게 거절했지만 신유리는 쉽게 포기할 성격이 아니었다.한세형은 그녀가 지금까지 만났던 수없는 진상 고객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더구나 버닝 스타는 동종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실력이다.다만 한세형의 태도에 송지음의 연기까지 더해지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남다르기도 했다.장수영은 친분을 믿고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버닝 스타랑 세형 씨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 봐요. 고의적인 것 같은데.”신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직 말을 하기도 전에 또 장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대표님께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까 비서랑 엄청 다정해 보였어요.” 신
신유리는 종래로 서준혁의 앞에서 송지음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송지음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득의양양해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는 줄곧 억눌러왔던 고통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송지음이 저지른 죄를 무조건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만약 서준혁이 그녀를 감싸려 한다면 신유리는 서준혁마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쁜 짓을 하고도 무사하다니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신유리는 고개를 든 채 서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마치 바다와 같이 깊고 어두웠으며 무거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았다.잠시 후 서준혁은 복잡한 눈빛을 거두어들이더니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맘대로 해.”그의 말투에는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났고 신유리는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섰다. 마침 임아중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신유리에게 물었다. “이신이 너 보러 부산시에 간다며?”신유리는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재료 주문하러 오는 거야.”“다 똑같지 뭐. 암튼 부산시에 가잖아.”임아중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유리야, 나도 너 찾으러 가면 안 돼? 나 혼자 성남에서 너무 지루해.”지난번에 임아중이 진욱과 약혼해서 만취한 일을 그들은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일어난 적 없는 일처럼 말이다. 신유리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요즘 부산시 날씨가 계속 흐려있어. 와서 놀 것도 없는데 어쩌면 성남보다 못할지도 몰라.”임아중은 한숨을 내쉬고 신유리와 십여 분 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신유리의 음식도 배달되었다.방문을 열자 마르고 키가 큰 청년이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노란 조끼를 입은 채 서 있었다.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청년은 검은색 캡모자를 푹 눌러썼다. “신유리 씨, 배달입니다.”신유리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더니 이내 진정하고 평온한 얼굴로 말했
신유리는 신기철의 말이 듣기에 우스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전에는 말끝마다 서준혁과 헤어지라고 하더니 지금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서준혁의 신분을 어디서 알게 된 건지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신유리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눈에 담긴 사색을 가리고 부 선생님을 찾으러 가려 했다. 몸을 돌린 순간 송지음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송지음은 그녀를 향해 걸어오더니 그녀 앞에 멈춰선 채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유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신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뭔 일 있어?”송지음은 얼굴에 불쾌감이 스쳐 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버닝 스타에서 홍란 입찰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들었어요. 유리 언니, 전 지금 세형 씨를 따라 일하고 있어요.”한편으로 말하면서 신유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마치 신유리보다 한 수 위인 것처럼 우월감을 감추지 못했다.신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버닝 스타는 지금 홍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으니 송지음은 득의양양해했다. 다만 신유리의 어조는 담담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 말 한마디면 세형 씨가 버닝 스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송지음은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마음속의 화를 누르며 신유리를 향해 언성 높여 말했다. “유리 언니, 저는 호의로 언니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성남시에서 버닝 스타의 명성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고 났을 때 화인 그룹에서도 증언할 수 있잖아요.”그녀는 냉소하며 말했다. “내 앞에서 고고한 척 하기 전에 우선 세형 씨가 버닝 스타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나요?”신유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버닝 스타의 일은 신경 꺼.”그녀는 시종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 송지음의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