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벤치에 앉아 있는 신유리는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통화는 언제 끊겼는지 알 수 없었다.하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호흡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누군가가 신유리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얼굴은 너무 차가웠고 무감각하게 뻗은 손에 물기가 만져졌다.울고있는 건가?신유리는 눈물로 젖은 손을 바라보았다.서준혁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녀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를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신유리의 어깨가 축 늘어지고 귀에 걸렸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그때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지고 익숙한 체취가 소독향에 섞여 신유리의 코를 자극했다.서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몸은 바로 경직되었다.“수술받고 싶어?”서준혁의 말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신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아직 눈물이 걸려 있었다.그는 담담한 표정이었고 짙은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원해?”당황한 머릿속이 서서히 정리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서준혁에게 물었다.“조건이 뭐야?”서준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운 눈에는 전에 있던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도 같았다.눈을 가늘게 뜬 서준혁은 무심하게 말했다.“내가 왜 도우려고 하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 봐.”창백했던 신유리의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이 안 보였다. 그저 서준혁을 응시 할 뿐이었다.눈썹을 치켜세우던 서준혁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야.”그의 손끝만큼은 몹시 다정했다.신유리의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그의 힘에 이끌려 신유리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그 순간
복잡한 생각이 전화벨 소리로 인해 끊겨졌다. 신유리가 휴대폰을 꺼내보니 전화를 건 당사자는 임아중이었다.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던 신유리였지만 갑자기 룸의 불이 꺼졌다.시력이 좋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지금 어디에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임아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유리가 멈칫했다.“밖이야.”“이신과 같이 있어? 전화를 넘겨 봐. 아까 나와 경천이가 여러 번 전화 했는데 한 통도 받지 않았어. 급한 일이란 말이야.”“함께 있지 않아.”임아중은 의아했다.“그럼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이미 수십 통은 걸었는데.. 휴, 그럼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이신은 고의로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였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눈쌀으르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심유리가 말했다.“아마 바쁜가 보지.”신유리는 순간 오전에 하성쪽에서 거절했다며 시무룩해하던 이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그렇게 의기소침한 이신은 처음이었다.그때 그녀는 마음이 안 좋았어서 이신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입술을 깨물던 신유리가 임아중에게 말했다.“내가 한 번 전화해 볼게.”임아중과의 통화를 마치고 신유리는 이신에게 전화하려 했다.그때 서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아끼나 봐?”신유리의 휴대폰 화면은 아직 연락처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서준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진도는 어디까지 나간 거야?”그는 그녀와 이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었다.신유리는 시선을 내리 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신과의 관계에 대해선 신유리가 여러 번 해명했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 그녀가 더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야 서준혁이 만족하는가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 서준혁이 냉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어 그녀의 앞에 가져갔다. 그리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그가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까지 내가 가르쳐 줘야 해? 멍청하면 어떻게 되는 지는 잘 알고 있지 않나?”멈칫한 신유리는 그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서준혁이 이미 일어나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무심하게 힐끗 보며 말했다. "물건 좀 사러 가."그의 말투는 냉정했지만 신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서준혁이 일부러 그녀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든 나가는 것이 이 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으로 배척했다.그러나 우서진이 하필 건들거리는 표정으로 서준혁을 바라보았고, 이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일부러 신유리 씨를 나가게 하는 건가?"그러자 신유리는 멈칫 했고 곧 서준혁의 담담한 대답이 들려왔다."케이크를 사오라고 하려던 것 뿐이야."하지만 서준혁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우서진은 곁눈질로 신유리를 바라보다 서준혁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송지음이 케이크가 먹고 싶대?"서준혁이 “응.”이라고 답했다.우서진의 얼굴에는 의심스러운 표정이 더욱 짙어졌고 시선을 신유리에게 옮겼다. 그는 눈빛에 담긴 혐오감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목청을 높여 농담하는듯이 말했다."들었어요? 준혁이가 신유리 씨한테 케이크를 사 오라네요."그는 마치 신유리가 모르는 것처럼 일부러 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를 강조하였다."솔직히 말하면 송지음씨는 준혁이의 진짜 여자친구예요. 신유리씨가 준혁이 비서인 이상 그의 예비 아내를 모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앞으로 그녀가 당신의 사모님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우서진은 말을 마치고 또 고의로 한마디 덧붙였다."아, 잊고 있었어요. 신유리 씨는 이미 자신의 부도덕함으로 화인 그룹에서 잘렸네요."업계 안에서 신유리가 예전에 모두가 예상하던 서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다.그러나 지금 우서진이 갑자기 송지음을 언급하는 것은 일부러 신유리가 이미 서준혁에게 차였다는 것을 말하며 깎아내리려고 하는것이 틀림 없었다. 그의 말들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었고 신유리를 괴롭히려
신유리는 그를 보았고,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가슴이 콕콕 쑤셨다."그래서 어떡할 건데?"항상 담담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가면은 찢기는 것만 같았고 망연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드러나 버렸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한테 대체 뭘 더 하라는 거야….?"그러자 서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쳐다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그게 네 장점 아니였어?"그는 뒤로 몸을 기대었는데, 눈빛은 조금 어두워졌다."사람 만족시키는 데에 강하지 않아? 연우진부터 이신까지."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셔츠 옷깃에 걸쳤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단추 두 개를 풀어헤쳤다.그의 눈빛은 분명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하는 말은 마치 칼처럼 신유리의 가슴에 박혔다."신유리, 내 앞에서 순진한척할 필요 없어."차 안은 공간이 매우 좁아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려왔다.신유리는 손을 핸들 위에 올리고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도망가려는 충동이 생겼고 어쩐 일인지 숨을 쉴 수 없었다. 차 안의 공기는 모두 바늘을 품고 있는 것처럼 호흡할 때마다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그녀는 한참 뒤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서준혁은 그녀의 얼굴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드러나자, 마음에 조금 이상한 감정이 맴돌았지만 곧바로 원상 복귀 되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웃고 난 뒤 말했다."그들 앞에서도 이렇게 연기 한 거야?"그의 말이 떨어지자, 신유리가 갑자기 그에게 다가왔다.그렇게 그녀의 입가는 서준혁의 턱에 닿았고 천천히 문지른 후에야 입을 뗐다. 그녀의 목소리는 솜처럼 가벼워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이렇게 환심을 사면 되는 건가?"신유리는 지금의 자신이 틀림없이 아주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지겹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비위를 맞추다니…! 그녀의 마음은 마치 얼음장과도 같았지만 서준혁이 말한 만족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방
신유리는 머릿속의 생각들이 아주 많아 혼란스러웠다. 별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침 집에 돌아온 이신과 마주쳤다.이신의 눈가에는 조금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고 신유리를 보자 멈칫했다.이내 그는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물었다. ."외할아버지 쪽은 상황이 어때?""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 거야.""미안해, 내 문제야.."이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이미 오랫동안 이 씨네에 돌아가지 않았고, 이번에도 일 문제로 돌아와 그의 가족들과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이모가 하씨 집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하성이 그렇게나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네가 도와준 것만으로도 아주 고마워."신유리가 말했다."내 문제야.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게."원래 외할아버지의 일은 이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가 돕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도 신유리는 이미 아주 고맙기 때문에 이신을 탓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곡연이 말한 일을 떠올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이신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곡연한테서 금융전시 합작을 취소한다고 들었어."이 일을 언급하자 이신의 안색은 조금 안 좋아졌다.그는 오늘 병원에 가는 길에 갑자기 회의에 불려 갔는데, 바로 이 일 때문이었다.그들과 이 전시회의 합작은 마지막 단계만 남았고, 바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 앞서 상대가 갑자기 합작사를 바꾸겠다고 했다.신유리는 이신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무슨 이유인지는 말했어?""글쎄. 원인이 조금 복잡해."이신도 머리가 아파왔다. "다른 작업실도 끼어들려고 했고, 성남 많은 기업의 협력 의향서도 가져와서 지금 조금 난처해."그가 말하자 신유리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금융 전시회는 부서 쪽의 경제 발전과 사회화를 추진하는 의사결정이다. 만약 여러 기업이
"주국병이 나한테 다 말했어."사무실에서 이연지는 손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앞에 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서준혁은 책상 뒤에 앉아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이연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신유리가 나를 찾아온 것을 알고 있나요?"이연지는 요즘 계속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고 그의 작은딸도 입원했으며 주국병까지 매일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재촉했다.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서 대표, 유리가 자네와 같은 사장을 만날 수 있는 건 정말 유리의 큰 복이야. 이전에는 내가 회사에 와서 소란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네. 내가 그 행동은 사과할게. 자네들에게 다 사과할게. 서 대표가 예전에 유리를 도우려 했으니, 지금도 유리를 돕는 셈 치는 게 어때?""유리를 돕는다고요?"서준혁은 손끝으로 탁자를 짚고 말투 평범했다. 그는 이연지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유리가 이미 화인에서 해고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화인의 직원이 아닌 이상 내가 대체 왜 도와야 하죠?"이연지는 신유리가 화인에서 해고될 줄 생각지도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줄곧 인터넷상의 소식에 관심을 두지 않아 신유리가 여전히 화인에 있다고 생각했었다.그녀는 곧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물었다."서 대표네 회사와 유리가 무슨 계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유리가 해고된 후 몇백만 원을 배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서준혁은 멈칫했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몇 초 동안 멈췄고, 이내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있어요.""그럼, 바로 나한테 주면 안 되나? 나는 유리의 엄마잖아. 내가 대신 돈을 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서준혁은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모두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연지를 보았다.이연지는 그의 시선에 다소 불편함을 느꼈고 게다가 주국병이 말이 생각나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우리는 모두 서
서준혁의 말투가 차가워지자, 신유리는 입을 약간 오므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연지를 끌고 자리를 떴다.이미 출근 시간인지라 밖에는 송지음, 쥴리, 이석민까지 모두 나와 있었다.이연지가 아침 일찍 서준혁을 찾으러 온 일은 이미 회사에서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송지음은 신유리가 이연지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유리 언니, 이곳은 회사예요. 아주머니한테 경솔하게 달려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 좀 드리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이젠 신유리의 앞에서 더 이상 가식적인 연기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얼굴에는 가벼운 비웃음만이 담겨 있었다."나와 서 대표님이 아주머니를 지금 만났으니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주머니가 경호원한테 제지를 당해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을테니까요."신유리는 지금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송지음과 더 이상 말을 할 여력도 없었다.그녀는 부은 그 손으로 이연지를 잡고 있었고 통증은 계속 몸에 퍼지고 있었다.그 와중에 이연지는 하필 눈치도 없이 신유리의 팔을 잡힌 채 송지음과 대화를 하려고 했다."그래, 확실히 지음 씨 덕분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정말 들어오지 못했을 거야."송지음의 눈 안에 담긴 혐오감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바로 그 눈빛을 거두었고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앞으로 회사에 오시려면 유리 언니를 데리고 함께 오세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니, 언니를 아는 사람도 많아 아무도 막지 않을 거예요. 유리 언니, 안 그래요?"송지음은 말을 마치고 가만히 있는 신유리에게 물었지만 신유리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송지음의 말이 맞긴 했다. 그녀는 화인에서 오랫동안 일했기에 그녀를 아는 사람은 적지 않을뿐더러 많기까지 했다.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미 퇴사한 상태이다. 그리고 화인의 규정 중 하나가 바로 관계자 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다.송지음은 말을 그럴듯하게 했지만, 그저 이연지가 신유리를 데리고 와서 함께 체면을 잃기를 바라는 듯해 보였다
곡연의 전화였다.곡연은 평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보통 카톡으로 문자한다. 게다가 오늘 아침 그녀가 나갈 때 그들은 그녀가 병원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신유리는 어제 작업실 일을 들었기 때문에 지금 곡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보자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신유리는 이연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받자마자 곡연의 다소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리 언니, 아직도 병원에 계세요?”“아니, 왜?”“부서에서 임시로 회의가 열렸어요. 협력 문제에 관해서요. 저희가 올 때 좀 급해서 자료를 가져오는 걸 잊어버렸어요. 만약 언니가 늦지 않는다면 대신 가져오실 수 있어요?”신유린는 금융 전시회의 일 때문에, 이미 스튜디오에 이름을 올렸다. 아직 공식적인 근무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외부 인력으로 간주했다.그녀가 대답했다. “주소 보내줘. 이따가 가져다줄게.”“그럼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오후 1시에 회의 시작이에요.”아직 점심 11시이다. 하지만 비가 오기 때문에 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신유리가 운전하고 별장으로 가서 물건을 가지고, 다시 간대도 12시 30분 정도가 된다.신유리는 이연지가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페달을 밟고 가버렸다.어젯밤에 이신과 허경천이 말한 걸 듣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끼어든 스튜디오가 성남의 오래된 예술 스튜디오 중 하나라는 것을 대략 알게 되었다.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많은 그래서 그들이 많은 기업과 협업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었다.신유리는 이신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챙긴 후, 잠시 생각하다 인터넷에서 몇 가지 데이터를 검색한 후에 함께 인쇄해서 가져갔다.말하면 아마 아무도 안 믿을 테지만, 신유리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편안할 때이다.그리 많은 생각을 할 필요 없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니, 어쨌든 숨을 좀 돌릴 수 있는 느낌이었다.그녀가 서류를 가져갔을 때, 1시까지 몇 분 남았다.곡연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