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의 앞머리 아래 눈동자는 유난히 맑았다. 마치 이 문제가 그에게는 단순한 문제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음…… 강지혁은 매우 단순해 보인다. 그가 이 말을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임유진은 이런 생각에 목청을 가다듬었다.“좋아할 수는 있어. 이건 사랑이 아니야.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건 두 가지 감정이야.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일생일대,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심지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생사를 같이한다고?’이상하게도 그가 그녀의 입에서 이 답안을 들었을 때, 맨 처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그녀와 생사를 같이하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그럴 리가? 그는 갑자기 스치는 자기 생각에 실소했다.그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고, 미련이 있고, 신경이 쓰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곁에 있는 이런 느낌에 빠진 것 같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게임도 그렇게 오래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일찍이 자신에게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그리고 혁이도 나를 슬프게 하지 않겠지”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그는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과, 옅은 미소를 보며 나지막하게 웃었다.“맞아, 혁이는 누나를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다만 이 여자가 언젠가 그가 강지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슬퍼할까?아니면 좋아할까? 기뻐하며 그에게 아부하지 않을까?그러나 어떤 부류든 그는 오히려 그녀를 평생 보호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 쉬운 일이니 말이다.————임유진은 이튿날 출근했다. 서미옥과 거리를 청소한 후 환경위생과로 돌아와 점심 휴식할 때, 환경위생과의 동료들이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은 호기심도 있고 경멸도 있고 조롱도 있으며 또 일부 동정도 있었다.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녀를 향해
이때 방현주가 다가와 경멸에 찬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서미옥 씨, 이 사람이랑 무슨 말을 해요?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잖아요! 사람을 죽였대요!”“현주 씨, 모두 동료인데,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어? 게다가 유진 씨가 감옥에 있는 것도 단지 운전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데…….”서미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현주가 말을 가로챘다.“그런데 그 차에 치이어 죽은 사람이 바로 진애령래요, 서미옥 씨, 진애령이 누군지 알아요? 바로 그 진세령의 언니예요! 어쩐지, 진세령이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반지를 찾게 한다 했어요. 그분이 겨냥하는 것은 임유진인데 우리 모두 연루된 거잖아요.”“그래서 우리도 사과와 보상을 받았잖아?”서미옥이 말했다.방현주는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서미옥이 이렇게 임유진을 위해 말하는 것에 불만스러워했다. 오늘 그녀가 감옥살이했다고 폭로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며칠 전 그녀는 우연히 임유진이 소민준, 진세령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약간의 공을 들여 인터넷에서 소민준과 진세령의 각종 뉴스를 찾아서야 진애령을 치어 죽인 사람이 바로 임유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서미옥 씨, 설마 임유진에서 뭘 받은 건 아니겠죠? 이렇게 편들어 주는 걸 보면.”방현주가 비꼬으며 말했다.“방현주 씨…….”서미옥이 화를 냈다.“됐어요, 할 말이 뭐 있어. 교통사고는 사고였고 유진 씨도 고의는 아니었어.”한 남자가 끼어들었다.임유진은 곽동현이 그녀를 두둔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러나 이렇게 되자 방현주는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임유진이 눈에 거슬렸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곽동현을 좋아하지만 곽동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임유진이기 때문이다.“곽동현 씨, 이렇게 임유진 씨를 감싸줘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녀가 동현 씨를 마음에 들거로 생각해요?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소민준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SY 그룹의 도련님이라고요!”곽동현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달아올랐다.방현주는 더욱 신나게 비꼬았다.“하지만 그
저녁에 임유진이 전셋집으로 돌아와 강지혁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임유진은 좀 의아했다. 보통 그녀의 문을 두드려 줄 사람이 없는데, 설마 그녀의 아버지와 계모, 여동생이 또 찾아왔단 말인가?!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뜻밖에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곽동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곽동현은 검은색 겨울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는 임유진을 보며 다소 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전…….”그가 겨우 입을 열려던 순간 임유진의 뒤에 있는 강지혁을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잠시 망설였다.강지혁은 집 밖에 서 있는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남자, 그는 기억하고 있다. 임유진의 환경위생과 동료인데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왜요, 누나 찾으러 왔어요?”강지혁이 물었다.“저…… 일이 좀 있어서 유진 씨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곽동현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 괜찮을까요?”강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방의 입에서 뱉어낸 ‘유진 씨’ 라는 호칭이 그를 다소 귀에 거슬리게 느꼈다.임유진이 대답하려던 찰나, 강지혁이 끼어들었다.“무슨 일인데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어요?”“그건…….”곽동현이 머뭇거렸다.그러자 임유진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 솔직히 말해도 돼요.”“유진 씨, 저…… 전 유진 씨가 감옥살이한 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전 정말 유진 씨를 좋아해요. 유진 씨가 내 여자친구가 돼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유진 씨가 아직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그가 단숨에 말했다. 이 말들은 용기를 내어 말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멍해졌다.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저도 알아요, 전 그냥 운전기사일 뿐이라는 걸 말이에요. 하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거예요. 전…… 저는 단지 유진 씨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곽동현이 말을 마쳤지만 임유진이 아무 말이 없자 또
“그 남자가 이런 말을 해서 누나가 상대방을 좋아하게 된 건가?”그는 중얼거리며 물었지만, 눈에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질투가 역력했다.그녀의 코끝은 온통 그의 숨결이었다. 이런 접근은 그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했다. 몸에서 본능적인 위기감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간 맹수처럼 덮쳐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맙소사,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임유진은 마음속으로 방금 스친 자기 생각을 질책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혁이지 결코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나는 곽동현 씨를 좋아하지 않아.”그녀가 말했다. 상대방의 그 감정에 대해서도 그녀는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누나는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내가 그런 걸 왜 속이겠어.”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출소한 후에 평생 누구를 다시 사랑하게 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 무겁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묶이고, 나중에 버림받았을 때, 그 충격을 그녀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물들었다.“그럼 그를 거절하는 것을 잊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 남자는 아마도 계속 누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거절할 거야.”그녀가 말했다. 이 감정이 의도치 않은 이상 당연히 상대방을 질질 끌 수 없다.하물며 곽동현은 괜찮은 사람이므로 진정으로 그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 시간을 그녀에게 낭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참, 그가 어떻게 누나가 감옥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강지혁이 불쑥 물었다.임유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한 동료가 그 당시 나의 교통사고 뉴스를 알아냈어. 그래서 지금 환경위생과 전체가 내가 감옥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됐어. 자, 이젠 손을 놓아. 내 방을 치워야 해.”그녀는 말을 돌렸다.그는 그제야 손을 놓았는데, 그녀가 그의 곁에서 떠날 때, 마치 온도도
예전엔 자기 힘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젠 이런 일이 매우 쉽지 않았다.“그래도 이렇게 젊은데 늘 이런 일만 할 수는 없잖아. 유진 씨 이러면 나중에 어떻게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겠어!”서미옥 같은 사람이 가장 관심을 두는 건 시집가는 문제였다.“동현 씨는 유진 씨의 과거에 개의치 않는 것 같은데 정말 생각해보지 않을 거야? 동현 씨처럼 성실한 남자는 요즘 드물어.”“아니에요, 저랑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임유진이 말했다.서미옥은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유진 씨, 혹시 동현 씨가 운전기사라 사회적 지위가 좀 낮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진 씨 전 남자친구가…….”“언니!”임유진은 서미옥의 말을 끊었다.“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저는 이런 많은 일을 겪었고, 지금은 정말 연애할 마음이 없을 뿐이에요.”“유진 씨도 참!”서미옥은 한숨을 쉬었다.“유진 씨, 정말 시집가지 않으면 혼자 외로울 거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아이가 곁에 없으면 그런 외로움은 결코 모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야.”아이……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마도 이것은 욕심일 것이다.종일 일을 끝낸 임유진은 서미옥과 함께 공구를 정리하고 환경위생과 쪽으로 돌아갔다.공구를 돌려줄 때 임유진은 곳곳에서 그녀를 겨냥하던 방현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씻으러 가려고 할 때 세면대 쪽에서 방현주가 곽동현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임유진은 감옥살이했는데, 동현 씨는 왜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요? 설마 내가 감옥살이를 한 사람만도 못하다는 거예요?”방현주가 분노했다.곽동현은 불쾌하게 말했다.“입만 열면 감옥에 갔다는 마을 하지 말아요. 유진 씨는 운전하다가 부주의로 사고 낸 거지 고의로 사람을 해치려는 것도 아니잖아요!”“그걸 음주운전이라고 해요, 그런데 왜 고의가 아니라는 거예요!”방현주가 말했다.“그녀는 여우예요. 그래서 동현 씨를 끌어당긴 게 분명해요
그때 그는 일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끊임없이 위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많은 익살스러운 동작을 했다. 마치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마침내 그녀는 성공했고, 소녀는 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그녀는 소녀에게 빵을 사 먹이며 경찰에 신고하고는 그 자리에서 소녀의 가족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마침내 경찰이 소녀의 가족과 함께 왔다. 소녀의 부모는 몇만 원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한 푼도 받지 않았다.그 부모가 어린 소녀를 안고 떠났을 때, 그녀는 그대로 제자리에 서서 그 세 식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평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첫눈에 반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가 난생처음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동현 씨가 신경 안 써도 동현 씨 부모님은 동현 씨가 감옥 간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신경 안 써요?”임유진이 말했다.곽동현은 멈칫했다가 얼굴의 홍조가 사라지고 차츰 얼굴색이 창백해졌다.“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 두 가족의 일이예요. 동현 씨도 내 가족이 어떤지 모르잖아요.”임유진이 말했다.“게다가 나는 동현 씨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말을 마친 임유진은 세면대로 다가가 손을 씻었다.곽동현은 방금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임유진이 손을 씻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곽동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다면…….”그녀는 발걸음을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 없어요. 만약 내가 정말 동현 씨를 좋아한다면, 동현 씨의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동현 씨를 붙잡고 함께 동현 씨의 부모가 승낙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저는 동현 씨를 평범한 동료로 생각할 뿐,
“곽동현에게 꼬리치면서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었네요!”방현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렸다.임유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세상에는 방현주 같은 사람이 많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이 평범하고 야박한 여자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그러나 방현주는 강지혁을 똑똑히 본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남자는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보다 더 멋있었다.그의 앞머리가 좀 두꺼워졌지만 오히려 머리를 잘 다듬고 의상을 바꾸면 아이돌 뺨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방현주는 갑자기 질투했다. 왜 임유진 같은 여자는 동현 씨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멋진 남자도 함께 할 수 있는 걸까!그녀는 갑자기 입꼬리를 치켜들며 악랄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은 임유진 씨의 친구인가 봐요? 아마 그녀가 감옥살이했다는 것을 아직 모르겠죠. 예전에 술에 취해 차를 몰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대요.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니, 이건 고의 살인이랑 같은 거예요!”하지만 그녀는 곧 실망했다. 상대방의 얼굴에 그녀가 보고 싶은 놀라움, 의아함, 혹은 거리낌이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만약 정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 더욱 차가워진 것이다.“보아하니 이 일을 퍼뜨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강지혁은 차가운 눈으로 방현주를 흘겨보며 말했다.방현주의 마음속에는 갑자기 공포가 일어났다. 마치 그녀가 인정한다면 그녀는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말했다.“그러면 어때서요,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에요. 모두 알 권리가 있어요. 자신의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요.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웠다면, 애초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죠!”강지혁은 갑자기 씩 웃었다.“인정하면 됐어.”말이 끝나자 그도 이제는 방현주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누나, 가자. 나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아.”“그래.”임유진이 대답했다.방현주는 두 사
예전에 그녀는 로펌 동료들과 일한 후에 이곳에 와서 한 끼 먹었다. 그때의 그녀에게는 여기서 밥을 먹는 것이 마치 회사 밥을 먹는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은 조금 사치를 부려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그거 괜찮은데, 이따가 누나가 주문해.”강지혁은 흔적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임유진이 주문한 요리는 모두 상대적으로 싼 것이었다. 가장 비싼 요리는 새우볶음이었는데 9600원이었다. 모든 요리 값을 합치면 모두 3만 5천 원이었다.이 돈은 사실 많지 않지만, 이것은 이 기간에 임유진이 여전히 먹었던 가장 비싼 식사였다.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좀 더 많이 주문하라고 했다.“누나, 나 돈 있어.”그러나 임유진이 말했다.“이 정도면 충분해. 좋은 것을 먹더라도 너무 많이 주문할 필요는 없어.”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요리를 내왔고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먹었다. 이곳의 요리는 평소에 그들이 먹는 그 간단한 음식보다 너무 좋았다.새우를 먹을 때 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에게 새우를 까준 뒤 껍질을 벗긴 새우를 그릇에 놓았다.그녀는 멍하니 그 새우를 보고 있었다.“왜 안 먹어?”그가 말했다.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혁이가 사람을 잘 보살피는구나. 앞으로 누가 너랑 연애하든 행복하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새우를 입에 넣었다.그녀가 예전에 드라마를 볼 때,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새우를 까주는 장면을 보았는데 매우 따뜻함을 느꼈던 것을 기억했다.이런 행동은 섬세하고 소중하고 보호받는 느낌을 준다.다만 그때 그녀가 소민준과 연애할 때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새우껍질을 벗겨준 적이 없었다.사실 이전에 연애할 때 일부 세부사항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소민준은 사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 감정은 별로 깊은 것은 아니다.그래서 한바탕 변고가 닥쳤을 때, 그는 그렇게 빨리 철수할 수 있었다!“그래?”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연애라…….”마치 어린아이의 장난 같았다. 그는 평생 영원히 그 어떤 여자와 연애 같은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
모든 건 다 강문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한 가지, 임유진이 정말 강지혁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물론 임유진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정말 그런 선택을 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유진의 목숨을 살려주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을 뿐 그 뒤의 일은 김재호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래서 김재호는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자기가 직접 이후의 일을 설계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그조차도 모르지만 말이다.강문철은 강지혁에게 약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일 큰 약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임유진을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강문철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강지혁에게도 졌고 임유진에게도 졌다.‘만약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시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 맞는 일일까?’김재호는 속으로 되뇌다 쓰러진 강지혁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강지혁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만약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언젠가 다시 대표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하지만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죠.”...5년 후.화려한 파티장 안은 늘 그렇듯 S 시의 부잣집 자제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는 건 단연코 GH 그룹의 회장인 강지혁이었다.이제 고작 34세밖에 안 된 나이로 회장직에 오르게 된 그였지만 그는 강문철이 세상을 떠난 후 5년간 완벽하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며 진정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과 양녀가 각각 한 명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자들은 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며 틈틈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노렸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여자들은 파티라는 훌륭한 교류 장소를 빌려 그와 거리를 좁혀가며 강지혁과 인사를 나눌 때 은근히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