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는 일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끊임없이 위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많은 익살스러운 동작을 했다. 마치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마침내 그녀는 성공했고, 소녀는 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그녀는 소녀에게 빵을 사 먹이며 경찰에 신고하고는 그 자리에서 소녀의 가족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마침내 경찰이 소녀의 가족과 함께 왔다. 소녀의 부모는 몇만 원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한 푼도 받지 않았다.그 부모가 어린 소녀를 안고 떠났을 때, 그녀는 그대로 제자리에 서서 그 세 식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평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첫눈에 반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가 난생처음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동현 씨가 신경 안 써도 동현 씨 부모님은 동현 씨가 감옥 간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신경 안 써요?”임유진이 말했다.곽동현은 멈칫했다가 얼굴의 홍조가 사라지고 차츰 얼굴색이 창백해졌다.“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 두 가족의 일이예요. 동현 씨도 내 가족이 어떤지 모르잖아요.”임유진이 말했다.“게다가 나는 동현 씨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말을 마친 임유진은 세면대로 다가가 손을 씻었다.곽동현은 방금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임유진이 손을 씻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곽동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다면…….”그녀는 발걸음을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 없어요. 만약 내가 정말 동현 씨를 좋아한다면, 동현 씨의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동현 씨를 붙잡고 함께 동현 씨의 부모가 승낙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저는 동현 씨를 평범한 동료로 생각할 뿐,
“곽동현에게 꼬리치면서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었네요!”방현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렸다.임유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세상에는 방현주 같은 사람이 많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이 평범하고 야박한 여자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그러나 방현주는 강지혁을 똑똑히 본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남자는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보다 더 멋있었다.그의 앞머리가 좀 두꺼워졌지만 오히려 머리를 잘 다듬고 의상을 바꾸면 아이돌 뺨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방현주는 갑자기 질투했다. 왜 임유진 같은 여자는 동현 씨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멋진 남자도 함께 할 수 있는 걸까!그녀는 갑자기 입꼬리를 치켜들며 악랄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은 임유진 씨의 친구인가 봐요? 아마 그녀가 감옥살이했다는 것을 아직 모르겠죠. 예전에 술에 취해 차를 몰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대요.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니, 이건 고의 살인이랑 같은 거예요!”하지만 그녀는 곧 실망했다. 상대방의 얼굴에 그녀가 보고 싶은 놀라움, 의아함, 혹은 거리낌이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만약 정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 더욱 차가워진 것이다.“보아하니 이 일을 퍼뜨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강지혁은 차가운 눈으로 방현주를 흘겨보며 말했다.방현주의 마음속에는 갑자기 공포가 일어났다. 마치 그녀가 인정한다면 그녀는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말했다.“그러면 어때서요,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에요. 모두 알 권리가 있어요. 자신의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요.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웠다면, 애초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죠!”강지혁은 갑자기 씩 웃었다.“인정하면 됐어.”말이 끝나자 그도 이제는 방현주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누나, 가자. 나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아.”“그래.”임유진이 대답했다.방현주는 두 사
예전에 그녀는 로펌 동료들과 일한 후에 이곳에 와서 한 끼 먹었다. 그때의 그녀에게는 여기서 밥을 먹는 것이 마치 회사 밥을 먹는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은 조금 사치를 부려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그거 괜찮은데, 이따가 누나가 주문해.”강지혁은 흔적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임유진이 주문한 요리는 모두 상대적으로 싼 것이었다. 가장 비싼 요리는 새우볶음이었는데 9600원이었다. 모든 요리 값을 합치면 모두 3만 5천 원이었다.이 돈은 사실 많지 않지만, 이것은 이 기간에 임유진이 여전히 먹었던 가장 비싼 식사였다.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좀 더 많이 주문하라고 했다.“누나, 나 돈 있어.”그러나 임유진이 말했다.“이 정도면 충분해. 좋은 것을 먹더라도 너무 많이 주문할 필요는 없어.”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요리를 내왔고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먹었다. 이곳의 요리는 평소에 그들이 먹는 그 간단한 음식보다 너무 좋았다.새우를 먹을 때 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에게 새우를 까준 뒤 껍질을 벗긴 새우를 그릇에 놓았다.그녀는 멍하니 그 새우를 보고 있었다.“왜 안 먹어?”그가 말했다.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혁이가 사람을 잘 보살피는구나. 앞으로 누가 너랑 연애하든 행복하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새우를 입에 넣었다.그녀가 예전에 드라마를 볼 때,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새우를 까주는 장면을 보았는데 매우 따뜻함을 느꼈던 것을 기억했다.이런 행동은 섬세하고 소중하고 보호받는 느낌을 준다.다만 그때 그녀가 소민준과 연애할 때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새우껍질을 벗겨준 적이 없었다.사실 이전에 연애할 때 일부 세부사항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소민준은 사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 감정은 별로 깊은 것은 아니다.그래서 한바탕 변고가 닥쳤을 때, 그는 그렇게 빨리 철수할 수 있었다!“그래?”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연애라…….”마치 어린아이의 장난 같았다. 그는 평생 영원히 그 어떤 여자와 연애 같은
임유진은 고개를 살짝 들고 한쪽을 바라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계산을 다 했어?”“응, 다 됐어.”“그럼 가자.”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무언가를 피하는 것처럼 그와 함께 가게를 나갔다.“왜, 뭘 피하는 거야?”그가 물었다.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자 얼굴에 난해함이 스쳤다.“전 동료들도 이곳에 와서 밥을 먹네. 나는……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그녀는 말하면서 또 스스로를 비웃었다.“매우 우습지, 사실 그들은 모두 나의 처지를 알고 있어. 아마도 내가 지금 얼마나 초라한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나는 그들을 이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아.”그들의 눈에 비친 동정을 보고 싶지 않고, 그들의 안타까움을 보고 싶지 않았다.한때 변호사라는 직업은 그녀가 일생을 분투하고자 하는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그 동료들이 여전히 그 직업을 하고 있고, 그녀는 이제는 손댈 수 없다.그녀가 지금 이 자신을 향한 비웃음은 그의 마음을 갑자기 아프게 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낮게 말했다.“그럼 피하는 것이 좋겠다. 언젠가 누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살고 있을 거야.”“잘 산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그녀는 어떤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벅찬 현실이었다.————"세령이에게서 들었는데, 너 임유진을 도와 일을 찾아주려 했다면서? 경고하는데 이제는 그 여자의 일에 손을 대지 마라. 그녀가 애초에 해친 것은 세령의 언니야, 강지혁의 약혼녀라고! 우리 소씨네 집은 강지혁의 미움을 사면 안 돼!"핸드폰 너머로 소민준의 아버지의 엄한 경고가 들려왔다. 소민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알았어요.”강지혁에게 미움을 살 수 없다는 이 말을 그는 이미 너무 많이 들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왜 그가 임유진 같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냐고 원망했다.다행히도 후에 그는 유진이와 헤어지고 세령과 교제했다. 세령에 대해 집안은 자연히 매우 만족했다. 두 집안이 대등했으니 말이다. 진 씨 가문과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었다.소민준이 막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몸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그 남자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는 S 시에서 가장 미움을 살 수 없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이 남자의 몸매는 강지혁과 너무 비슷했다!그러나 불가능하다. 강지혁이 어떻게 임유진의 곁에 있을 수 있겠는가? 정말 말도 안 됐다!소민준의 뒤차가 경적을 울리자 소민준은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 순간 임유진 곁에 서 있던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소민준을 향해 바라보았다.상대방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순간, 소민준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느낌만 느꼈다.강…… 강지혁?!‘강지혁인가?’비록 상대방의 지금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그의 인상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얼굴은 정말 똑같았다!소민준은 온몸이 뻣뻣하게 차를 몰며 모든 것이 진실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길목의 임유진이 그 순간 눈을 비볐다. 마침내, 눈에 들어갔던 모래가 빠진 것 같았다. 혁이가 불어 준 것이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옆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 지금 길목의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혁아, 뭘 보고 있어?”임유진이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방금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친구야?”“아니, 나는 그와 친구라고 할 수 없어.”그가 말했다.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소민준은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했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어젯밤 길목에서 본 그 장면뿐이었다.그는 자신이 잘못 본 거로 생각했다. 또는,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은 강지혁과 약간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다.강지혁처럼 도도한 남자가 어떻게 임유진과 함께 걸을 수 있겠는가.더군다나 임유진은 강지혁의 약혼녀를 치어 죽인 사람이다.아마 말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있었다.진짜라면? 그 남자가 정말 강지혁이라면…… 그는 거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이튿날, 소민준은 임유진이 청소하는 거리에 와서 임유진
임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민준이 지금…… 혁이를 묻고 있는 건가?“소민준 씨,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 왜, 나는 내 동생과 함께 있어도 너에게 보고해야 해?”“동생? 너 언제 동생이 생겼어?”소민준이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내가 아는 동생, 안 돼?”그녀가 말했다.소민준은 임유진을 주시하면서 마치 그녀의 표정에서 이 말의 뜻을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이때 도로 반대편에서 바닥을 쓸던 서미옥이 이쪽의 상황을 보고 달려왔다.“소민준 씨,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요. 손대지 말고요.”서미옥은 소민준이 그날 진세령과 함께 환경위생과에 와서 사과하고 선물을 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환경위생과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임유진의 전 남자친구이기도 하다.“소민준 씨, 더 이상 손을 놓지 않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찍힐 텐데, 당신의 진세령 씨에게 보이면 잘 설명해야 하지 않겠어?”임유진이 말했다.소민준의 안색이 변하더니 결국 손을 놓고 자리를 떠났다.서미옥은 걱정스럽게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사람이 유진 씨를 찾아와서 뭐해?”“그가 뭘 하고 싶은지 누가 알겠어요, 상관없어요!”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소민준이 영문도 모른 채 달려와 어느 남자와 함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다만 이건 정말 매우 비정상적이라 소민준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도 몰랐다!“참, 유진 씨 이따가 점심 시간에 소장님을 찾아가서 사정해. 내가 듣기로는 방현주가 사무실에서 무슨 서명을 모집하는 것 같아. 소장님이 유진 씨를 해고하라고 말이야.”서미옥은 자신이 들은 소식을 말했다.임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방현주는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정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소장님이 정말 나를 해고하려 한다면 내가 소장님을 찾아가도 소용없어요. 만약 정말 안 된다면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죠.”이 말은 조금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일은 그녀가
“방현주 씨, 나는 소내에 이렇게 동료를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아요. 임유진은 감옥살이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고 살길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임유진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상 지금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그녀는…… 정직원인데 왜 이렇게 잘린 거지?! 방현주는 전혀 믿을 수 없었지만, 하필이면 이것은 사실이었다!“현주 씨, 말해봐요.”옆에서 누군가 재촉하고 있었다.방현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임유진을 보았을 때 갑자기 원망이 밀려왔다. 그녀는 쏜살같이 앞으로 나가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소장에게 해고당할 수 있겠어! 분명 가야 할 사람은 너인데 말이야!”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해고된 사람이 뜻밖에도…… 방현주라니?!“현주 씨, 농담하는 거 아니죠!”“그럴 리가!”방현주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쳐다보며 손을 뻗어 그녀를 향해 달려들어 싸우려 했다.임유진이 피했지만, 방현주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이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 방현주 앞을 막아 나섰다.“그만 해요, 소장이 당신을 해고하려고 하는데, 유진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녀가 설마 소장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어요!”임유진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곽동현이었다.그리고 일부 기사들은 상황을 보고 앞으로 나가 방현주를 붙잡았다.한바탕 해프닝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고마워요.”임유진은 곽동현을 향해 말했다.“아무것도 아녜요. 나 아니었으면 방현주한테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곽동현은 오히려 좀 쑥스러워했다.임유진이 몸을 돌려 떠나려 할 때 곽동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유진 씨 그 남동생, 정말 친동생 맞아요?”임유진은 의외라는 듯 상대방을 바라보았다.곽동현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단지…… 두 사람이 친남매 같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에요.”그녀가 그 동생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항상 이 두 사람이
비록 임유진이 아침에 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가서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차가 한 농촌주택의 주택단지 앞에 도착하자 소민준은 차에서 내려 주택단지에 들어가 그 동의 좁은 문 앞에 멈췄다.이것은 전형적인 농촌 임대주택이다.임유진이 여기에 살고 있는 걸까?소민준이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무의식적으로 그는 한쪽 그늘진 곳에 숨어 있다가 발걸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하지만 그때 긴 그림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그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소민준의 눈은 더욱 커졌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강……강지혁이다! 진짜 강지혁이다!’아무리 닮았다해도 절대 이 정도로 닮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강지혁의 옷차림은 그가 어제 본 것과 같다. 왜……강지혁이 이곳에 있는 걸까?순간 한기가 불어와 소민준은 점점 추워지는 것 같았다.드디어 강지혁이 소민준이 서 있던 그 좁은 문 앞에 서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잠시 후 누군가 문을 열었다.“왔어?”청순한 얼굴이 소민준의 눈에 들어왔다.소민준은 목이 메어 아주 괴로웠다.문을 연 사람은 임유진이었다.‘진짜 임유진이 강지혁과 만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강지혁은 왜 이런 옷차림인 걸까?’너무 많은 의혹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는 강지혁의 목소리를 들었다.“응, 나 왔어.”소민준은 강지혁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가 기억하는 소리와 같다.소민준은 마침내 이 남자가 강지혁이라는 걸 확신했다.강지혁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갑자기 발걸음이 멈추더니 소민준이 숨어있는 그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았다.순식간에 소민준은 온몸의 피가 굳는 것 같았고 심지어 호흡마저 멈출 것 같았다.“혁아, 뭘 보는 거야?”임유진의 목소리가 전해왔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소민준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고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