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언니 많이 보고싶죠.”세령이 말했다.“그날 임유진을 만났는데 가소롭게도 임유진은 그 어떤 죄책감도 없었어요.”“이제 그만. 그 여자 말을 꺼내지 마.”진기태가 말했다.말하는 사이에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강지혁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 만나러 왔나요? 무슨 일인가요?”지혁이 담담하게 물으면서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지혁의 차가운 눈빛에 세령은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들었다.그 당시 언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세령은 아직도 언니 애령이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말한 것이 기억난다.“세령아, 난 한평생 강지혁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는 아주 차갑고 이성적이야. 그를 안아도 그의 온도를 느낄 수 없어. 그는 아주 정교한 도자기 같고 그의 껍데기를 가진다해도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을 거야.”그렇다. 세령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매번 지혁을 만날 때마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지혁은 준수한 얼굴에 뒤에 GH그룹까지 있기에 이 도시에서 종횡무진할 수 있지만 세령은 단 한 번도 그와 엮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 남자는 너무 무섭고 차갑다.비록 언니가 그 당시 지혁을 죽도록 사랑해 지혁이 결혼을 승낙했지만 세령은 지혁이 언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언니의 장례식에서 지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의 슬픔도 없었다.“지혁아, 세령이 철이 없어서 이런 영향이 안 좋은 사고를 쳤어. 내가 이미 잘 타일렀으니 세령이와 소민준의 약혼식에 참석했으면 좋겠어. 세령이는 애령의 유일한 동생이야. 애령이도 네가 약혼식에 참석하길 바랄 거야.”진기태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진기태를 바라보았다. 진기태는 여러 해 동안 백화점을 운영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사위에게 기세가 눌린 채 자신의 생각이 이미 상대에게 들킨 것 같았다.“네. 철이 없긴 했어요.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 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깟 반지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멍을 때리는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두 번 다시 내 집에 발 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진 씨 부녀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지혁의 이 한마디는 두 사람이 반지를 찾지 못하고 떠난다면 강 씨 가문과 연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지혁이 곧바로 떠나려 하자 두 부녀는 눈을 마주쳤다.눈앞의 연못은 비록 물이 깊지 않고 그리 크지 않지만 30평의 크기에 심지어 연못바닥이 진흙투성이라 작은 반지를 찾기 쉬울 리가 없다.세령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아빠, 어떡해요, 설마 정말 내려가서 찾으라고요? 이렇게 추운 날에 나 혼자 어떻게 반지를 찾을 수 있겠어요!”“네가 저지른 일은 너 스스로 해결해. 만약 강 씨 가문이 정말 진 씨 가문과 연을 끊으면 진 씨 가문이 어떻게 될지 네가 잘 알 거야!”진기태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진 씨 가문의 미래와 관련되니 딸이라 하더라도 그는 용서할 수 없다.세령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 씨네 가문의 여러 사업이 GH그룹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지혁이 정말 등을 돌리면 진 씨 가문에 절대적인 타격이 있을 것이다.세령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연못으로 들어가서 그 작은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세령는 지혁이 유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고 애초에 유진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지금의 그녀는 더더욱 더 처참하다!지혁이 임대주택으로 돌아오자 유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유진의 두 손은 차가운 물에 잠겨 이미 빨갛게 얼었다.“왜 뜨거운 물로 씻지 않는 거야?”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뜨거운 물은 끓여야 하고 전기가 많이 들잖아. 게다가 찬물로 좀 씻으면 손도 뜨거워져.”유진은 말을 하며 옷을 헹구더니 물기를 짰다.그녀의 손을 잡아보니 아주 차가웠다.“다음부터 빨래는 뜨거운 물로 해. 전기세는 내가 벌게.”지혁이 말했다.유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앞으로 돈 쓸 곳이 많아. 참,
유진은 빗으로 지혁의 앞머리를 가볍게 빗은 다음 그의 앞머리를 조금씩 다듬었다. 유진의 표정은 매우 집중되어 있었다. 모든 주의력은 지혁의 앞머리에 집중했고 심지어 앞머리 아래의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지혁은 가까이에 있는 유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추운 날씨로 인해 조금 발그레했고 초롱초롱한 두 눈, 앙증맞은 코, 붉은 입술 그리고 수려한 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조명아래에서 유진은 온몸으로 따뜻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됐어.”얼마나 지났는지 지혁의 귓가에 갑자기 유진의 목소리가 울렸다.“됐어?”지혁은 유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응.”유진은 웃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혁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내 솜씨가 괜찮아. 아주 잘 다듬어졌어. 2천원을 아꼈어.”그녀는 웃으며 말하고는 마른 수건으로 지혁의 얼굴과 목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됐어. 샤워하러 가.”유진이 말했다.지혁은 대답을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좁은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씻어내자 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에 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흘러 이 흉터는 이제 아주 연해졌다. 다만 이 흉터를 볼 때마다 그는 그 여자를 생각하게 된다.그와 아버지를 버렸던 그 여자.이 상처는 아마도 그 여자가 남긴 유일한 것일 것이다.그때 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떠나지 말라고 그와 아버지를 버리지 말라고 빌었지만 그녀는 그를 매섭게 밀어내고 머리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한쪽에 쌓아있던 송곳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의사가 송곳이 관통한 곳이 심장과 아주 가깝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 있었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지혁은 그 사람이 더 이상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지혁은 누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다면 이른바 실망도 없을 것이다.그냥…….지혁은 물을 잠그고 수건을 꺼내
왜 진애령의 차가 자신을 향해 부딪쳤을까.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 증인들은 왜 모두 자기의 잘못이라고 했을까.유진는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수 있는데, 당시의 그 증인과 증거들은 모두 그녀야말로 가해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심지어 애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혁과 결혼할 것인데 인생의 전성기에 고의로 차를 들이받아 자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그래서 누나가 판결을 직접 뒤집으려고?”지혁이 물었다.그러자 유진이 자신을 비웃었다.“그냥 내키지 않는 거야. 판결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그리고 나도 이미 출소했잖아. 됐어. 이 일은 그만 말하고 머리 말려줄게.”유진은 이 문서들을 거두고 드라이기를 가져와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지혁의 눈동자는 점점 깊어졌다…….이튿날, 고이준은 상사의 머리카락이……잘린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헤어디자이너를 보낸 적이 없다.“왜?”아마도 그가 너무 오래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챘는지 지혁이 물었다.“대표님, 이발을 안 한지 꽤 된 거 같은데 헤어디자이너를 예약해 드릴까요?”이준이 물었다.“아니. 어젯밤에 유진이가 손질해줬어.”‘유진…… 임유진이다!’하지만 이준이 더 의아한 것은 대표님이……유진에게 머리손질을 맡겼다는 점이다. 지혁은 평소 최고의 헤어디자이너에게 관리를 받고 있다.하지만 유진은…… 그냥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이다. 설령 그 당시에 변호사였지만 헤이디자이너는 아니다.“괜찮게 다듬었지.”지혁은 앞머리를 만지며 만족스러워 하는 듯했다.이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혁은 평소 아주 까다롭다. 심지어 최고급 헤어디자이너조차 트집을 잡았는데 환경미화원이 다듬은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한다.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그날 점심 한지영이 유진을 만나러갔다. 두 사람은 환경위생과 주변에서 작은 국수집을 찾아 국수를 먹었다.“진세령이 그날 일부러 쓰레기를 뒤지게 한 일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지영은 친구로서 이런 일을 뉴스로 본 것이 너무 짜증이 났다.“별거 아
“진 씨 가문은 내가 진애령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한참 지나 유진이 입을 뗐다. 감옥에서 세령이 사람을 시켜 그녀의 손톱을 뽑으라고 할 때 그녀는 그제야 사람이 이토록 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내가 보기에 진애령이 죽은 것보다 진세령은 네가 자리를 양보했다는 거에 더 기뻐할 거야.”지영은 화가 가시지 않았다.“애초에 네가 판결 받은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진세령은 이미 소민준과 사귀었잖아. 진세령은 그전부터 소민준에게 관심이 있었어.”“나와 소민준의 사이가 그 정도라는 걸 설명하지. 하지만 이 일로 한 사람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소민준 같은 남자는 사랑할 가치가 없어.”지영은 말을 하고는 무엇인가 떠올랐다.“참, 너 새로 알게 된 동생이랑은 어떻게 됐어? 설마 그와 계속 살 작정이야?”“응.”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혁이가 계속 나랑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럴 거야.”“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너희 둘이 연애하고 동거하는 줄 알 거야.”지영이 걱정되어 물었다.“너에게 이상한 행동은 안했지.”“아니.”유진은 말을 하며 머릿속으로 그 이쁜 눈동자가 생각났고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야, 너…….”지영은 친구의 발그레해진 볼을 보더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너 설마 그에게 마음이 간 거야?”“아니야.”유진이 곧바로 부인했다.“지영아, 너도 알 거야.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심지어 감옥에서……난 누구를 사랑할 생각이 없어.”감옥의 일을 언급하자 지영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유진아, 좋은 의사를 찾아보면 아마도……”“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난 한평생 시집갈 생각이 없어. 그럼 굳이 치료해야할 필요도 없고.”유진이 말했다. 애초에 감옥에서 자궁이 파열될 정도로 맞았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앞으로 임신을 하려면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의사는 그녀에게 앞으로 임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한
세령은 반성하는 얼굴로 사과했으며 심지어 허리 굽히며 사과할 때 몸을 바들바들 떨어 많은 동정을 얻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환경위생과에 가서 저를 도와 반지를 찾아준 환경미화원들에게 진심어린 사의를 표할 것이고 저의 올해 업무상의 모든 수입을 기부해 조식차를 만들 것입니다. 환경미화원들은 작업증으로 아침식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기자회견 동영상이 인터넷에 방영되자 세령의 위기 처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팬들은 끊임없이 세령을 도와 기사를 내며 호감을 샀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정말 오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세령이 환경위생과에 가서 감사인사를 전할 때 기세가 대단해 적지 않은 기자까지 찾아왔다.환경위생과 쪽에서는 그날 반지를 찾는 것을 도와준 환경미화원들과 세령에게 일일이 악수하고 세령이 감사의 뜻을 표하는 선물을 받도록 했다.미옥은 선물을 받고 아주 기뻐했다. 선물박스에는 현금 10만 원외에 패딩이 한벌 있는데 가격이 20만원이나 넘은 모양이었다.“유진 씨, 왜 나가서 선물을 받지 않아?”미옥은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유진을 보고 말했다.“저는 필요 없어요.”유진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이 패딩 20만원이나 넘어. 그리고 10만 원짜리 돈봉투도 있어. 월급의 절반이나 돼. 왜 안 받아?”미옥이 설득했다.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휴, 그냥 지나가서 선물만 받아오면 돼.”미옥은 말을 하며 유진을 끌고 나갔다.“아니에요. 정말 필요 없어요.”유진이 말했다.하지만 유진은 미옥의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끌려갔다.“선물을 못 받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요!”미옥이 말했다.갑자기 기자들은 카메라를 임유진에게로 향했다.유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카메라들을 피했다.그 장면은 마치 그녀가 법정 밖에 있을 때 수많은 기자들이 마이크를 내밀며 그녀를 취재하려던 상황 같았다.그리고 그때 민준은…… 유진의 두 눈은 카메라 밖에 서 있는 민준에게
비록 얼굴은 여전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고급진 옷이 아니라 형광색 작업복이었다.소민준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감옥에서 그녀가 필사적으로 그의 앞에서 그에게 믿어 달라고 빌던 모습이 눈앞에 또 한 번 떠올랐다.그때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절박함, 희망, 간청……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흔들림이 보이지 않고 평안해 보였다.진세령은 곁눈질로 곁에 서 있는 남자친구의 반응을 힐끗 보며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띠고 준비한 선물 상자를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날은 정말 미안했어. 너에게 하루종일 반지를 찾아달라고 했으니.”그때의 원망과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침묵하며 상자를 받아들고 돌아섰다.방으로 돌아온 임유진은 들고 있던 상자를 서미옥에게 건네주었다.“언니, 이거 가지세요.”“어? 이렇게 좋은 옷을 버리는 거야?”서미옥이 의아해했다.“전 옷이 충분해서요.”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러면 이 10만 원은…….”“그것도 됐어요.”임유진은 시간을 보고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청소도구를 들고 청소구간으로 가려고 했다.밖에 있던,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환경위생과를 나서자마자 소민준과 마주쳤다.“너…… 괜찮아?”소민준이 물었다. 그는 이 여자를 미워한 적이 있다. 그녀가 진애령을 부딪쳐 죽였고, 그로 인해 그가 가족의 질책을 받아 소 씨네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하지만 지금, 그녀가 환경미화원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 한구석이 불쾌했다.어쨌거나 이 여자는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여자이다.“내가 좋은지 나쁜지는 소민준 씨와 상관없는 것 같은데.”임유진은 담담하게 말하면서 곧 걸음을 옮겨 상대방 옆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임유진, 너 너무 그러지 마!”소민준은 그녀를 가로막고 말했다.“너무 그러지 말라고?
임유진은 웃긴다는 듯 입술을 깨물더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뜨려 했다.소민준은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한 것 같아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임유진, 무슨 뜻이야, 내가 이렇게 너를 돕는다는 것은 이미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한 거야!”“아무도 네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어.”임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너 이러면 세령 씨에게 알려질까 두렵지 않아?”그때 누군가의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나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게 뭐지?”소민준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재빨리 임유진의 팔을 풀고 고개를 돌려 걸어오는 진세령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 말을 들은 진세령은 앞으로 나가 소민준의 팔을 잡았다.“자기야, 자기는 이런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강지혁이 알면 어쩌려고 그래? 자기도 알다시피, 우리 언니는 강지혁이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어 하던 여자야. 우리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었어도 강지혁은 지금까지 옆에 다른 여자가 없어…….”말을 다 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소민준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 이전에 프로젝션 광고가 철거된 일을 떠올렸고, 강지혁이 두 집안의 혼인을 거부하고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도 떠올렸다.소 씨네 집 내부에서도 임유진의 일 때문에 강지혁이 소 씨 가문을 시큰둥하게 대하는 거로 추측했다.“임유진, 넌 그냥 환경미화원이 잘 어울려. 강지혁은 네가 이미 석방됐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S 시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될 거야.”진세령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여왕처럼 이 말을 다 한 후 소민준의 팔을 잡고 떠났다.임유진은 평온한 얼굴로 청소도구를 들고 환경위생과에 배치된 자전거를 타며 그녀가 청소하려는 길목을 향해 갔다.그녀에게 있어서, 옛날 그녀가 소민준에 대한 그 사랑은 이미 철저히 짓밟혔는데, 지금 다시 소민준을 보니 마치 낯선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소민준과 진세령이 다정하게 함께 있는 것을 봐도 그녀는 이미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