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은 품속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목에 기대었다.그는 자연히 그녀가 말하는 냄새를 알게 되었다.오늘 세령 때문에 오랫동안 쓰레기를 뒤졌다. 하지만…….“누나의 몸에서 냄새가 나도 나를 피할 필요 없어.”“하지만…….”유진은 자신의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지혁의 포옹 때문인지 어색했다.“우리가 서로 의지하는 이상 피할 게 뭐가 있어? 언젠간 내 몸에서 냄새가 나면 누나도 일부러 날 피할 거야?”지혁이 반문했다.그러자 유진은 잠시 침묵한 뒤 한숨을 쉬었다.“알았어. 다음부터 그러지 않을게.”지혁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더니 그제야 유진의 손을 잡고 좁은 임대주택으로 돌아갔다.지혁은 미리 음식을 차렸다. 비록 음식은 이미 식었지만 유진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지혁이 물었다.유진은 망설이다가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오늘 일이 사건으로 되었으니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지혁은 인터넷에서 알게 될 것이다.그때 지혁은 조용히 유진의 얘기를 듣더니 말했다.“화나지 않아?”유진는 어쩔 수 없는 듯 웃었다.“화날 것도 없어.”“정말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이잖아. 아니야? 왜 누나는 화나지 않아?”“화가 나도 소용없어.”유진이 말했다.“너 강지혁이라는 사람을 알아?”그는 흠칫 놀라며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그는 S시의 신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해.”그녀가 말을 이었다.“감옥살이를 할 때 내가 교통사고를 내서 그의 약혼녀를 죽게 했다고 판결났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감옥에서 날 괴롭혔어. 만약 모든 일에 화를 낸다면 난 화병 때문에 죽은지 오래전일 거야.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면 돼.”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지혁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유진의 짧은 한 마디에 지혁는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진이 말했 듯이 지혁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떤 아픔을 겪어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토록 덤덤할까?“앞으로 누가 누나를 다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혁은 마치 맹세하는 것처럼 말했다.그러자 유진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해했다.“자꾸 그런 말을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유진는 말을 하며 집중하여 음식을 계속 먹었다.한편 지혁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이와 동시에 일이 커졌지만 세령은 회사 쪽에서 이 실검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인터넷에는 그녀가 반지를 잃어버려 환경미화원이 그녀를 도와 쓰레기통을 뒤졌다는 기사가 퍼져 있다.특히 세령이 화려한 옷을 입고 쓰레기 더미 옆에 서 있고 옆에는 허리를 굽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환경미화원이 있는 사진을 넣었다.이런 대비는 즉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불만을 이끌었고 모두들 그녀의 품성에 문제가 있고 갑질을 한다고 질책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본인이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왜 환경미화원이 찾아야 하나요? 환경미화원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도로 청소를 하는 것도 모자라 반지까지 찾아줘야 해요? 왜 혼자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고?”“스타가 되면 남보다 더 대단해요?”“왜 도시의 자원을 사용하는 거죠? 진세령이 환경미화원의 임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반지를 찾아주는 거예요?”비록 세령의 팬들이 열심히 그녀의 편을 들지만 이런 부정적인 댓글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당시 현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수많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왜 실검도 막지 못해?”악플이 많아질수록 세령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방법이 없어. 어쩐 일인지 대형 잡지사에서 관련된 내용을 내려주지 않아.”그때 매니저가 멈칫하더니 머뭇거리는 듯 말문을 열었다.“세령아, 혹시 너 누구의 미움을 산거야?”“내가 누구의 미움을 사겠어.”S시에서 진 씨 가문의 신분에 게다가 소 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인 진세령이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미움을 살까
심지어 적지 않은 팬들은 탈덕하겠다고 하면서 세령을 미워하겠다고 한다.또 일부 세령의 충실한 팬들은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게 아니냐면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믿기 힘든 것은 세령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경찰이 수사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녀는 다른 네티즌들과 동시에 알았다.세령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설마 몇 년 동안의 그녀의 노력과 커리어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인가?그러나 더 참혹한 것은 뒤에 있다. GH그룹 강지혁의 개인 비서 이준이 소 씨 가문, 진 씨 가문에게 연락하여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세령은 현재의 부정적인 뉴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경찰의 수사 보고서를 본 후 오히려 좀 놀랐다. 수사 보고서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이 이 기사를 내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이다.“진세령, 정말 너무 나쁜 사람이네. 그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반지를 찾아달라고 했으면서 결국 잃어버리지도 않은 거잖아.”환경위생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의론이 분분했다.“인터넷에 진세령을 욕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게 당연해.”“하지만 이상해. 톱스타가 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우리한테 찾으라고 해?”한 직원이 의문을 제기했다.“심심해서 그런 거겠지.”그때 미옥이 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그날 진세령이 유진 씨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잖아. 혹시 아는 사이야?”그때 지나가던 방현주가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서미옥,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임유진이 어떻게 진세령과 아는 사이겠어. 진세령은 부잣집 영애잖아.”“하지만 그날 진세령과 유진 씨가 얘기 나누는 걸 봤어.”“설마 임유진이 진세령의 미움을 사 톱스타가 일부러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한 거 아니야?”방현주는 주범을 찾은 것처럼 말했다.“임유진, 너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통을 뒤진 거네.”동현이 임유진을 좋아하기에 현주는 유진을 겨냥했다. 미옥은 현주가 이
“아빠도 언니 많이 보고싶죠.”세령이 말했다.“그날 임유진을 만났는데 가소롭게도 임유진은 그 어떤 죄책감도 없었어요.”“이제 그만. 그 여자 말을 꺼내지 마.”진기태가 말했다.말하는 사이에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강지혁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 만나러 왔나요? 무슨 일인가요?”지혁이 담담하게 물으면서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지혁의 차가운 눈빛에 세령은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들었다.그 당시 언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세령은 아직도 언니 애령이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말한 것이 기억난다.“세령아, 난 한평생 강지혁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는 아주 차갑고 이성적이야. 그를 안아도 그의 온도를 느낄 수 없어. 그는 아주 정교한 도자기 같고 그의 껍데기를 가진다해도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을 거야.”그렇다. 세령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매번 지혁을 만날 때마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지혁은 준수한 얼굴에 뒤에 GH그룹까지 있기에 이 도시에서 종횡무진할 수 있지만 세령은 단 한 번도 그와 엮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 남자는 너무 무섭고 차갑다.비록 언니가 그 당시 지혁을 죽도록 사랑해 지혁이 결혼을 승낙했지만 세령은 지혁이 언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언니의 장례식에서 지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의 슬픔도 없었다.“지혁아, 세령이 철이 없어서 이런 영향이 안 좋은 사고를 쳤어. 내가 이미 잘 타일렀으니 세령이와 소민준의 약혼식에 참석했으면 좋겠어. 세령이는 애령의 유일한 동생이야. 애령이도 네가 약혼식에 참석하길 바랄 거야.”진기태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진기태를 바라보았다. 진기태는 여러 해 동안 백화점을 운영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사위에게 기세가 눌린 채 자신의 생각이 이미 상대에게 들킨 것 같았다.“네. 철이 없긴 했어요.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 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깟 반지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멍을 때리는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두 번 다시 내 집에 발 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진 씨 부녀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지혁의 이 한마디는 두 사람이 반지를 찾지 못하고 떠난다면 강 씨 가문과 연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지혁이 곧바로 떠나려 하자 두 부녀는 눈을 마주쳤다.눈앞의 연못은 비록 물이 깊지 않고 그리 크지 않지만 30평의 크기에 심지어 연못바닥이 진흙투성이라 작은 반지를 찾기 쉬울 리가 없다.세령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아빠, 어떡해요, 설마 정말 내려가서 찾으라고요? 이렇게 추운 날에 나 혼자 어떻게 반지를 찾을 수 있겠어요!”“네가 저지른 일은 너 스스로 해결해. 만약 강 씨 가문이 정말 진 씨 가문과 연을 끊으면 진 씨 가문이 어떻게 될지 네가 잘 알 거야!”진기태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진 씨 가문의 미래와 관련되니 딸이라 하더라도 그는 용서할 수 없다.세령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 씨네 가문의 여러 사업이 GH그룹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지혁이 정말 등을 돌리면 진 씨 가문에 절대적인 타격이 있을 것이다.세령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연못으로 들어가서 그 작은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세령는 지혁이 유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고 애초에 유진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지금의 그녀는 더더욱 더 처참하다!지혁이 임대주택으로 돌아오자 유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유진의 두 손은 차가운 물에 잠겨 이미 빨갛게 얼었다.“왜 뜨거운 물로 씻지 않는 거야?”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뜨거운 물은 끓여야 하고 전기가 많이 들잖아. 게다가 찬물로 좀 씻으면 손도 뜨거워져.”유진은 말을 하며 옷을 헹구더니 물기를 짰다.그녀의 손을 잡아보니 아주 차가웠다.“다음부터 빨래는 뜨거운 물로 해. 전기세는 내가 벌게.”지혁이 말했다.유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앞으로 돈 쓸 곳이 많아. 참,
유진은 빗으로 지혁의 앞머리를 가볍게 빗은 다음 그의 앞머리를 조금씩 다듬었다. 유진의 표정은 매우 집중되어 있었다. 모든 주의력은 지혁의 앞머리에 집중했고 심지어 앞머리 아래의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지혁은 가까이에 있는 유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추운 날씨로 인해 조금 발그레했고 초롱초롱한 두 눈, 앙증맞은 코, 붉은 입술 그리고 수려한 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조명아래에서 유진은 온몸으로 따뜻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됐어.”얼마나 지났는지 지혁의 귓가에 갑자기 유진의 목소리가 울렸다.“됐어?”지혁은 유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응.”유진은 웃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혁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내 솜씨가 괜찮아. 아주 잘 다듬어졌어. 2천원을 아꼈어.”그녀는 웃으며 말하고는 마른 수건으로 지혁의 얼굴과 목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됐어. 샤워하러 가.”유진이 말했다.지혁은 대답을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좁은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씻어내자 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에 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흘러 이 흉터는 이제 아주 연해졌다. 다만 이 흉터를 볼 때마다 그는 그 여자를 생각하게 된다.그와 아버지를 버렸던 그 여자.이 상처는 아마도 그 여자가 남긴 유일한 것일 것이다.그때 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떠나지 말라고 그와 아버지를 버리지 말라고 빌었지만 그녀는 그를 매섭게 밀어내고 머리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한쪽에 쌓아있던 송곳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의사가 송곳이 관통한 곳이 심장과 아주 가깝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 있었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지혁은 그 사람이 더 이상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지혁은 누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다면 이른바 실망도 없을 것이다.그냥…….지혁은 물을 잠그고 수건을 꺼내
왜 진애령의 차가 자신을 향해 부딪쳤을까.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 증인들은 왜 모두 자기의 잘못이라고 했을까.유진는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수 있는데, 당시의 그 증인과 증거들은 모두 그녀야말로 가해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심지어 애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혁과 결혼할 것인데 인생의 전성기에 고의로 차를 들이받아 자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그래서 누나가 판결을 직접 뒤집으려고?”지혁이 물었다.그러자 유진이 자신을 비웃었다.“그냥 내키지 않는 거야. 판결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그리고 나도 이미 출소했잖아. 됐어. 이 일은 그만 말하고 머리 말려줄게.”유진은 이 문서들을 거두고 드라이기를 가져와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지혁의 눈동자는 점점 깊어졌다…….이튿날, 고이준은 상사의 머리카락이……잘린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헤어디자이너를 보낸 적이 없다.“왜?”아마도 그가 너무 오래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챘는지 지혁이 물었다.“대표님, 이발을 안 한지 꽤 된 거 같은데 헤어디자이너를 예약해 드릴까요?”이준이 물었다.“아니. 어젯밤에 유진이가 손질해줬어.”‘유진…… 임유진이다!’하지만 이준이 더 의아한 것은 대표님이……유진에게 머리손질을 맡겼다는 점이다. 지혁은 평소 최고의 헤어디자이너에게 관리를 받고 있다.하지만 유진은…… 그냥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이다. 설령 그 당시에 변호사였지만 헤이디자이너는 아니다.“괜찮게 다듬었지.”지혁은 앞머리를 만지며 만족스러워 하는 듯했다.이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혁은 평소 아주 까다롭다. 심지어 최고급 헤어디자이너조차 트집을 잡았는데 환경미화원이 다듬은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한다.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그날 점심 한지영이 유진을 만나러갔다. 두 사람은 환경위생과 주변에서 작은 국수집을 찾아 국수를 먹었다.“진세령이 그날 일부러 쓰레기를 뒤지게 한 일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지영은 친구로서 이런 일을 뉴스로 본 것이 너무 짜증이 났다.“별거 아
“진 씨 가문은 내가 진애령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한참 지나 유진이 입을 뗐다. 감옥에서 세령이 사람을 시켜 그녀의 손톱을 뽑으라고 할 때 그녀는 그제야 사람이 이토록 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내가 보기에 진애령이 죽은 것보다 진세령은 네가 자리를 양보했다는 거에 더 기뻐할 거야.”지영은 화가 가시지 않았다.“애초에 네가 판결 받은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진세령은 이미 소민준과 사귀었잖아. 진세령은 그전부터 소민준에게 관심이 있었어.”“나와 소민준의 사이가 그 정도라는 걸 설명하지. 하지만 이 일로 한 사람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소민준 같은 남자는 사랑할 가치가 없어.”지영은 말을 하고는 무엇인가 떠올랐다.“참, 너 새로 알게 된 동생이랑은 어떻게 됐어? 설마 그와 계속 살 작정이야?”“응.”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혁이가 계속 나랑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럴 거야.”“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너희 둘이 연애하고 동거하는 줄 알 거야.”지영이 걱정되어 물었다.“너에게 이상한 행동은 안했지.”“아니.”유진은 말을 하며 머릿속으로 그 이쁜 눈동자가 생각났고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야, 너…….”지영은 친구의 발그레해진 볼을 보더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너 설마 그에게 마음이 간 거야?”“아니야.”유진이 곧바로 부인했다.“지영아, 너도 알 거야.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심지어 감옥에서……난 누구를 사랑할 생각이 없어.”감옥의 일을 언급하자 지영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유진아, 좋은 의사를 찾아보면 아마도……”“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난 한평생 시집갈 생각이 없어. 그럼 굳이 치료해야할 필요도 없고.”유진이 말했다. 애초에 감옥에서 자궁이 파열될 정도로 맞았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앞으로 임신을 하려면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의사는 그녀에게 앞으로 임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한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
그날 밤, 임유진과 강지혁은 마치 5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열렬하게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녀가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강지혁은 정사가 끝이 난 후 노곤해진 그녀를 안아 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욕실로 가 그녀를 깨끗이 씻겼다.아마 그의 이런 챙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임유진뿐일 것이다.다 씻은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가운을 입힌 후 다시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로 걸어왔다.임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혁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강현수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우리 다음에는 자세 좀 바꾸는 거 어때? 물론 리드하는 것도 좋지만 생각보다 내가 체력이 없어서.”“...”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그를 아래에 깔고 멋대로 주도권을 쥐어간 그녀의 행동만 생각하면 지금도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어쩐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그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너는 과거의 내가 선택했던 내 아내야. 예전의 내가 그렇게도 널 많이 사랑했다면 지금의 나도 널 사랑할 수 있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사랑할 거야?”“그래. 하지만 절대 날 배신해서는 안 돼. 5년 전처럼 내 곁을 떠나서도 안 되고. 알았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강지혁은 그날 별채에 있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기억을 잃은 강지혁도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무서운 걸까?“혁아, 내가 널 떠난 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서였을 거야. 절대 원해서 널 떠난 건 아니었을 거야.”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어머니와 똑 닮았
내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키스는 왜 해?임유진은 그 생각에 울컥하며 키스를 끝내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고 맹렬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임유진이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네가 못 믿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방금의 키스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내쉬는 숨은 무척이나 거칠었다.“반대로 물어볼게. 그럼 너는? 너는 날 얼만큼 사랑하는데?”임유진은 귓가에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의 두 눈은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마치 두 사람을 감도는 공기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간신히 진정한 임유진의 호흡이 또다시 흔들리며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잠깐의 침묵 후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그다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다는 등의 말을 꺼내지 마.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도.”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이에 임유진은 만약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낸다면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른 후 더 이상 그가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혁아, 날 똑바로 봐!”다급한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멈추더니 이내 조금 놀란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내가 널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추측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임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했던 키스와 달리 은근하고 유혹적이며 또 절절한 키스를 퍼부었다.키
임유진은 말을 하며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몸을 돌린 순간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강지혁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침대에 눕혀져 버렸다.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겨를도 없이 강지혁의 몸이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다.강지혁은 두 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둔 채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숨이 거칠고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것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아까는 그렇게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 도망가지? 네가 원하는 대로 얘기하고 있잖아.”“네가 흥분을 가라앉히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던 것뿐이야.”임유진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이 누르는 바람에 좀처럼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혁아, 일단 좀 비켜봐.”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가감 없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야.”강지혁이 답했다.그의 코는 거의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였다.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임유진의 체취가 그의 몸을 감싸왔다. 마치 그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그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그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신경이 쓰이는 걸까? 강현수와 그녀의 과거가?“강현수 좋아하지 말고 사랑하지도 마. 알아들었어?”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난 한번도 강현수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어!”임유진이 외쳤다.“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나였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야?”강지혁이 물었다.“그래.”임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단호하게 외쳤다.“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강지혁의 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