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차 안에서 하교하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들이 보이자 탁유미는 여느 때와 같이 아주 환한 웃음으로 윤이를 반겼다.예전에는 그 웃음과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해 있었는데 멍청하게도 그는 스스로의 두 손으로 그걸 부숴버리고 말았다.이경빈은 그녀의 다정함과 애정이 가득 어린 시선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와 죄악감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를 사랑했던 만큼 고통도 또한 그만큼 컸다.이경빈은 학교 앞을 잔뜩 메운 학부모들이 다 사라지고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차 안에 머물러있었다.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으니 1초라도 더 이곳에 있고 싶었다.그때 분식집 불이 꺼지고 탁유미가 밖으로 나왔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일과를 다 마친 듯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 건가?사실 출근 도장 찍듯 매일 같이 찾아오는 그이지만 이곳에서 탁유미와 윤이를 바라보는 게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설레고 즐거운 마음보다는 미친 듯한 죄악감과 쓸쓸함이 더 컸으니까.아들인 윤이는 더 이상 그를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그리고 탁유미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이경빈은 스스로의 처지가 궁상맞게 느껴지는 듯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시동을 켜려고 손을 움직였다.하지만 그 손은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당연히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탁유미가 분식집에서 나온 후 난데없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가로등 불빛을 가득 머금은 채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스푼의 쓸쓸함이 담긴 한 폭의 그림 같았다.탁유미는 여전히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이식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뒤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아무래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 같다.이경빈은 일전에 몸에 좋은 것들을 보냈다가 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경빈과 달리 탁유미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앞으로 찾아오지 마. 이 말 하려고 왔어.”그녀의 말에 이경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 그냥 멀리서 보고만 있을게.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게. 그래도 안 돼...?”“응, 그러지 마. 우리한테 어울리는 끝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거야. 진작에 그래야 했어.”이경빈은 순간 심장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너무나도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나도 알아. 내가 너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는 거... 하지만 유미야, 나한테 기회를 줘. 어떻게든 갚을게. 무슨 수를 써서든 만회할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멀리서만이라도 널 보게 해줘. 그것만은 빼앗아가지 말아줘...!”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애원했다.늘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을 것 같은 남자가,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지금은 제발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너무나도 애절하게 빌고 있다.하지만 그런 그의 애원에도 탁유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너랑 나 사이의 일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는 여기로 오지 마.”“싫어. 못해... 유미야, 내가 널 얼마나 사...”“그만.”이경빈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탁유미는 단호하게 잘라버렸다.“더 이상 말하지 마.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마. 소름 끼치니까.”이건 진심이었다.탁유미는 할 수만 있으면 이경빈을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을 전부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이경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과거의 멍청하고 바보 같았던 스스로가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이경빈은 탁유미의 말에 몸을 휘청였다.“너와 너의 집안이 윤이와 만나는 것까지는 뭐라고 안 할게. 아빠 노릇이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하지만 거기까지야. 나한테까지는 넘어오지 마. 네가 이렇게 얼쩡거
탁유미의 말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댔다.“내가 남자를 곁에 둬야만 네가 이 짓을 그만두는 거면 그렇게 할게.”이경빈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내가... 그렇게도 혐오스러워?”숨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 탓인지 그는 아주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네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걸 보면 그때의 악몽이 자꾸 떠올라. 그거 알아? 너는 나한테 악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경빈, 나는 더 이상 과거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날 찾아오지 마.”탁유미는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이경빈의 두 눈은 점점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탁유미의 팔을 잡았던 손은 진작에 힘이 빠져있었다.악몽.탁유미에게 그는 악몽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상처만 자극할 뿐인 사람이었다.이경빈은 쌀쌀맞은 탁유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이제 그녀와는 두 번 다시 연인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 말고는.“내 얼굴을 안 보는 게 네 소원이면... 그렇게 할게.”이경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지금 하는 이 결심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자신을 보는 게 악몽이라고 한다면 그녀를 위해 악몽을 없애줘야 하는 게 그가 해야 하는 일이다.이경빈은 탁유미와 대화를 나눈 몇 분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 수척해졌다.“갈게. 다시는 너를 불편하게 하는 일 없을 거야.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나한테 연락하는 게 싫으면 회사에 연락해도 되고. 네 이름을 들으면 그 어떤 요구도 들어주라고 얘기해놓을게. 내 얼굴... 안 봐도 되게 할게.”탁유미의 얼굴에는 여전히 조금의 감정도 일지 않았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얼굴을 가만
입안이 썼다.이경빈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으니까.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하는 그녀인데 과연 뭐라고 할 수 있을까.탁유미는 대화가 끝이 나자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아주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이경빈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그녀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유진이 S 시로 돌아온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었다.라온시에 있을 당시 스승님을 따라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움직였다.주말.임유진은 율이와 현이를 학원에 보낸 후 2시간 정도의 틈을 이용해 강지혁과 함께 근처 빌딩을 둘러보았다.“왜, 사무소라도 차리려고?”강지혁이 물었다.“응, 괜찮은 사무실 있으면 한번 생각해 보려고.”임유진은 그간 라온시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며 실력을 키우는 건 물론이고 인맥도 많이 넓혔다. S 시로 다시 돌아오게 된 지금은 많은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녀는 크게 어려울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럼 내가 고 비서한테 연락해서 괜찮은 위치로 알아봐 달라고 할게.”임유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너 고 비서님한테 제일 비싸고 으리으리한 곳으로 찾으라고 할 거지?”“왜? 그러면 안 돼?”강지혁이 되물었다.“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래. 나는 줄곧 라온시에서만 있어서 여기서는 거의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랑 다를 거 없단 말이야. 그리고 여태 스승님 아래서 배우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래서 아직은 천천히 한 단계씩 밟고 나가고 싶어.”“하지만 나는 뭐든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어.”투자비용이 얼마가 되든 상관이 없다. 애초에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주는 것에는 조금도 아낄 생각이 없으니까.“알지.”임유진은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사무소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지금은 일단
강지혁은 주위의 시선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어떤 맛 좋아해? 아니면 여기 있는 거 전부 다 살까?”“안 돼. 어차피 다 못 먹잖아.”임유진은 강지혁이 멋대로 주문할까 봐 다급하게 말렸다.아마 강지혁의 재력이라면 케이크를 종류별로 다 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아예 가게를 통째로 사들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하지만 임유진은 이런 곳에 괜한 돈을 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나는 초코케이크로 할래. 혁이 너는?”“나는 다 괜찮으니까 초코 다음으로 좋아하는 맛으로 골라.”사실 강지혁은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온 건 그저 임유진이 원했기 때문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달콤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나마 단맛이 적은 블루베리 맛으로 골랐다.케이크가 나오고 임유진은 초코케이크를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확실히 평소에 먹었던 초코케이크와는 다른 맛이었다. 초코 맛이 조금 더 짙고 우유 맛도 더 강했다.“맛있네. 이거 먹어볼래?”임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강지혁의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 움직인 뒤에야 이곳은 집이 아닌 사람들 다 보는 공공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부부 사이에 이런 일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 여전히 부끄러웠다.임유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케이크 쪽이 아닌 케이크를 쥔 포크를 주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걸 건네기도 전에 강지혁이 입을 크게 열더니 그대로 케이크를 받아먹었다.“응, 괜찮네.”강지혁의 부드러운 미소에 임유진은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미친, 방금 케이크 먹여주는 거 봤어?”“근데 저 남자 연예인이야? 왜 저렇게 잘생겼어?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혹시 근처에 카메라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임유진과 강지혁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손님들은 케이크를 먹여주는 장면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얘기를 나
“그냥 인사하는 것뿐이잖아. 그리고 연우진 씨는 지영이 친구야.”임유진이 말했다.“그럼 왜 아까 눈도 안 깜빡이고 봤어?”강지혁이 되물었다.“그, 그건 그냥 궁금하니까. 지영이 남자친구인 줄 알았단 말이야.”임유진은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해명했다.“그리고 나는 다른 남자한테 관심 없어.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니까!”강지혁은 그 말에 입꼬리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렸다. 그녀에게서 이 말을 들으려고 일부러 유도한 것 같기도 하다.임유진의 얼굴은 어느새 또다시 빨갛게 물들었다.강지혁은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시 한번 말해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럴 때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한 이불 덮고 자는데도 여전히 막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뜬 사춘기 소녀처럼 볼이 빨개지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한 번만 더.”강지혁은 귀 바로 옆까지 다가와 계속해서 은근한 목소리로 유혹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 너야. 나는 너밖에 없어...”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소원대로 나지막이 사랑을 속삭였다.한편, 한지영과 함께 케이크 고르러 온 연우진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아직도 멍한 얼굴이었다.“방금 그 사람... 강지혁 씨라고 했죠?”연우진은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재차 확인했다.“네.”한지영은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GH 그룹의 그 강지혁 회장 맞죠...?”“네, 맞아요.”연우진은 한지영의 답변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설마 SNS에서 가장 핫한 케이크 집에서 그 유명한 강지혁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게다가 더 놀라운 건 그 강지혁의 아내가 바로 한지영의 친구라는 것이다.“왜 그래요?”한지영은 멍한 얼굴의 연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지영 씨 친구분의 남편이 강지혁 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조금 놀랐어요.”“뭐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라긴 했죠. 아, 혹시 불편해요? 그러면 이따 케이크 나오면 우리 먼저 가죠.”“괜찮아
한지영은 속으로 결혼에 관해 생각하다 갑자기 난데없는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는 자기가 떠올리고도 깜짝 놀라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그렇게 잊겠다고 해놓고 또다시 백연신을 떠올리다니, 정말 구제 불능이 아닐 수 없었다.케이크를 고르고 다시 임유진과 강지혁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을 때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며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그도 그럴 것이 절친한 친구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강지혁에게 케이크를 받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얼씨구, 아주 깨가 쏟아지네.’한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친구가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우여곡절 끝에 이어진 두 사람이기에 잘 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다시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서로를 향해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한지영은 대화를 나누다 임유진이 법률 사무소를 차릴 예정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그럼 너 개업하는 날에 내가 축하 화환이랑 엄청 큰 선물을 줄게!”“약속한 거야?”“그럼!”“우진 씨도 시간 나면 지영이랑 함께 놀러 오세요.”“꼭 그럴게요.”연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대화를 통해 연우진이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이라 경쟁이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그런 쟁쟁한 사람들을 제치고 팀장 자리까지 차지한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강지혁은 대화에 거의 끼지 않았고 임유진을 먹이는 데만 집중했다.임유진은 케이크를 다 먹은 후 아이들에게 줄 케이크도 주문했다. 현이는 달콤한 걸 좋아하는 아이라 분명히 엄청 좋아할 게 분명했다.케이크 포장을 받은 후 가게에서 나온 네 명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이제 막 발걸음을 떼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여러분, 그 망할 변호사 여기 있어요!”그리고 곧이어 한 무리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곧장 임유진 쪽으로 무언
강지혁은 고개를 돌려 경호원에게 말했다.“책임은 돌아가서 물을 테니까 지금은 저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 와.”“네, 대표님.”경호원의 말이 끝난 순간, 제압당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임유진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여기로 오면 우리가 못 찾을 것 같았어? 당신과 당신 스승이라는 그 양반이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난 2년 반이나 형을 살아야 했어! 결국에는 아내랑도 헤어지고 자식도 못 보게 됐다고! 너 내가 가만 안 둬! 각오해!”임유진은 그 말에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해당 중년 남성은 임유진이 원고의 변호사를 담당했던 사건의 피고인이었다.“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그저 법에 따라 마땅한 벌을 받았을 뿐이에요.”“개소리하지 마. 네가 내 사건을 발판삼아 변호사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려보려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런 파렴치한...!”남성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경호원에 의해 입이 막혀버리고 말았다.그리고 그때 차 한 대가 다가오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일단 타.”“지영이랑 연우진 씨는...”“경호원들이 이미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으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그 말에 주위를 삥 둘러보았다. 확실히 한지영과 연우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신호음만 갈 뿐 아무리 기다려도 한지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아무래도 지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가봐야겠어.”임유진의 다급한 말에 강지혁은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만 더 기다려봐. 금방 연락이 올 거야.”아니나 다를까 강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화가 걸려왔다.경호원의 말에 의하면 연우진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고 한지영은 백연신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고 한다.“백연신이... 지영이를 데려갔다고?”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백연신은 대체 언제 나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