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에 나온 후 임유진은 하원 시간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은 것을 확인하고 탁유미의 분식집으로 향했다.분식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또 한 번 지난번에 봤던 검은 승용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해당 차량은 오늘도 탁유미의 분식집이 정확히 보이는 그늘 밑에 주차되어 있었다.임유진은 차량 주인이 이경빈이라는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경빈은 탁유미와의 모든 오해를 푼 후 그 뒤로 어떤 여자와도 스캔들이 나지 않았고 몇 년 전에는 아예 이강 그룹을 S 시로 거의 옮기다시피까지 했다.그 모든 것이 다 탁유미 때문이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다만 이경빈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어떤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만약 그때 탁유미를 절벽 끝까지 몰아세우지만 않았어도 이경빈은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와 잘 지냈을 수 있었을 것이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다.한가한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탁유미는 의자에 앉은 채 고무줄 팔찌를 만들고 있었다.고무줄 팔찌라면 임유진도 어릴 적 만든 적이 있다.“언니, 팔찌는 왜 만들어요?”임유진이 물었다.“어릴 때 생각나죠? 우리 때나 유행하는 건 줄 알았는데 요즘 애들도 이런 걸 좋아한다더라고요. 그래서 애들 밥 먹으러 올 때 혹시라도 팔 수 있을까 해서 만들고 있어요.”탁유미가 웃으며 임유진에게 의자를 내밀었다.“그런데 여기까지는 웬일이에요?”“지나가던 차에 들렸어요.”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아까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이경빈 씨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것을 봤어요. 요즘도 계속 찾아와요?”“그래요? 몰랐네요.”탁유미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꼭 이경빈에 관해서는 아주 조금의 감정도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역시... 아직 이경빈 씨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언니, 그럼 혹시 누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아직 젊은데 평생 이렇게 혼자일 수는 없잖아요.”임유진의
“그런데 입양이라뇨?”“네,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입양이 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겸이 양아버지 되는 사람은 전처가 죽고 금방 다시 결혼해 아들을 얻었어요. 전처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겸이가 누나라고 따르는 여자애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딸과 아들을 모두 가졌는데 갑자기 생뚱맞게 입양을 한 거 있죠. 따로 밖에 여자가 있는 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었는데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애래요. 이상하죠?”탁유미도 학교 근처로 이사한 지 오래됐기에 이웃 주민들의 일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듣고는 괜히 가슴이 찡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럼 저 겸이라는 애는 그 가족과 아예 남남이라는 거잖아. 지난번에 봤을 때도 계속 구박만 당하는 것 같던데 만약 그 누나라는 애가 없었으면 진작에 그 집에서 쫓겨났겠지...?’만약 입양 간 집에서 버려지면 아이들은 대개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거나 운이 좋으면 바로 다시 다른 집에 입양을 가게 된다.하지만 재입양을 가게 되는 것도 나이가 어린 애들이나 가능하지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은 그 기회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게다가 겸이라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무뚝뚝한 편이라 아마 좋은 입양 가족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다.“저 아이한테 가봐야겠어요.”임유진은 분식집에서 나와 학교 대문 앞으로 향했다.이 자그마한 뒷모습이 왜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는지 그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임유진은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를 바라보았다.역시 아이는 다시 봐도 너무나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학교 안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겸아.”임유진은 무릎을 구부린 채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누나 하교하길 기다리는 거야?”누나라는 두 글자에 아이는 그제야 반응하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겸이는 누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아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임유진은 한참이나 아이와 함께 대문 앞에 있다가 율이와 현이의 하원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겸아, 아줌마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겸이 만나러 올게.”아이는 마치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임유진은 그런 아이의 모습에 심장이 찌릿하며 아파 났다. 꼭 심장 조각이 억지로 떼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저 놀이공원에서 한번 마주한 것이 다인 아이일 뿐인데 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무리 아이의 상황이 안쓰러워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픈 건 정상은 아니었다.임유진은 이를 꽉 깨물며 마음을 다잡은 후 천천히 분식집으로 돌아왔다.“저 아이가 신경 쓰여요? 꽤 오래 함께 있던데.”탁유미가 물었다.“전에 놀이공원에 갔다가 우연히 저 아이랑 저 아이의 누나가 함께 있는 걸 봤어요. 양부모라는 사람들도 봤고요. 아직 어린데도 누나를 지켜주려고 하더라고요.”“애가 너무 따르니까 나도 처음에는 친남매인 줄 알았어요. 아주 껌딱지가 따로 없다니까요.”탁유미는 분식집에 자주 오던 두 남매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웃어주는 것도 누나 한정인 거 있죠? 남자애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말을 몇 번 걸어봤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더라고요.”“커서도 지금처럼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가방을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언니, 만약 겸이랑 겸이 누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 줘요. 언제든지요.”“그렇게도 저 남매가 신경이 쓰여요?”탁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 그래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우려고요. 내가 저 아이들을 도와주면 어딘가에 있을 내 아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잖아요.”임유진의 표정이 조금 쓸쓸하게 물들어갔다.“아...”탁유미는 그제야 임유진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이런, 시간이 너무 지체됐네요. 현이가 한소리 하겠어요.”
이경빈은 차 안에서 하교하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들이 보이자 탁유미는 여느 때와 같이 아주 환한 웃음으로 윤이를 반겼다.예전에는 그 웃음과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해 있었는데 멍청하게도 그는 스스로의 두 손으로 그걸 부숴버리고 말았다.이경빈은 그녀의 다정함과 애정이 가득 어린 시선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와 죄악감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를 사랑했던 만큼 고통도 또한 그만큼 컸다.이경빈은 학교 앞을 잔뜩 메운 학부모들이 다 사라지고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차 안에 머물러있었다.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으니 1초라도 더 이곳에 있고 싶었다.그때 분식집 불이 꺼지고 탁유미가 밖으로 나왔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일과를 다 마친 듯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 건가?사실 출근 도장 찍듯 매일 같이 찾아오는 그이지만 이곳에서 탁유미와 윤이를 바라보는 게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설레고 즐거운 마음보다는 미친 듯한 죄악감과 쓸쓸함이 더 컸으니까.아들인 윤이는 더 이상 그를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그리고 탁유미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이경빈은 스스로의 처지가 궁상맞게 느껴지는 듯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시동을 켜려고 손을 움직였다.하지만 그 손은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당연히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탁유미가 분식집에서 나온 후 난데없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가로등 불빛을 가득 머금은 채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스푼의 쓸쓸함이 담긴 한 폭의 그림 같았다.탁유미는 여전히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이식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뒤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아무래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 같다.이경빈은 일전에 몸에 좋은 것들을 보냈다가 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경빈과 달리 탁유미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앞으로 찾아오지 마. 이 말 하려고 왔어.”그녀의 말에 이경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 그냥 멀리서 보고만 있을게.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게. 그래도 안 돼...?”“응, 그러지 마. 우리한테 어울리는 끝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거야. 진작에 그래야 했어.”이경빈은 순간 심장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너무나도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나도 알아. 내가 너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는 거... 하지만 유미야, 나한테 기회를 줘. 어떻게든 갚을게. 무슨 수를 써서든 만회할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멀리서만이라도 널 보게 해줘. 그것만은 빼앗아가지 말아줘...!”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애원했다.늘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을 것 같은 남자가,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지금은 제발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너무나도 애절하게 빌고 있다.하지만 그런 그의 애원에도 탁유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너랑 나 사이의 일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는 여기로 오지 마.”“싫어. 못해... 유미야, 내가 널 얼마나 사...”“그만.”이경빈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탁유미는 단호하게 잘라버렸다.“더 이상 말하지 마.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마. 소름 끼치니까.”이건 진심이었다.탁유미는 할 수만 있으면 이경빈을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을 전부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이경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과거의 멍청하고 바보 같았던 스스로가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이경빈은 탁유미의 말에 몸을 휘청였다.“너와 너의 집안이 윤이와 만나는 것까지는 뭐라고 안 할게. 아빠 노릇이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하지만 거기까지야. 나한테까지는 넘어오지 마. 네가 이렇게 얼쩡거
탁유미의 말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댔다.“내가 남자를 곁에 둬야만 네가 이 짓을 그만두는 거면 그렇게 할게.”이경빈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내가... 그렇게도 혐오스러워?”숨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 탓인지 그는 아주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네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걸 보면 그때의 악몽이 자꾸 떠올라. 그거 알아? 너는 나한테 악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경빈, 나는 더 이상 과거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날 찾아오지 마.”탁유미는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이경빈의 두 눈은 점점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탁유미의 팔을 잡았던 손은 진작에 힘이 빠져있었다.악몽.탁유미에게 그는 악몽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상처만 자극할 뿐인 사람이었다.이경빈은 쌀쌀맞은 탁유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이제 그녀와는 두 번 다시 연인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 말고는.“내 얼굴을 안 보는 게 네 소원이면... 그렇게 할게.”이경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지금 하는 이 결심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자신을 보는 게 악몽이라고 한다면 그녀를 위해 악몽을 없애줘야 하는 게 그가 해야 하는 일이다.이경빈은 탁유미와 대화를 나눈 몇 분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 수척해졌다.“갈게. 다시는 너를 불편하게 하는 일 없을 거야.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나한테 연락하는 게 싫으면 회사에 연락해도 되고. 네 이름을 들으면 그 어떤 요구도 들어주라고 얘기해놓을게. 내 얼굴... 안 봐도 되게 할게.”탁유미의 얼굴에는 여전히 조금의 감정도 일지 않았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얼굴을 가만
입안이 썼다.이경빈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으니까.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하는 그녀인데 과연 뭐라고 할 수 있을까.탁유미는 대화가 끝이 나자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아주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이경빈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그녀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유진이 S 시로 돌아온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었다.라온시에 있을 당시 스승님을 따라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움직였다.주말.임유진은 율이와 현이를 학원에 보낸 후 2시간 정도의 틈을 이용해 강지혁과 함께 근처 빌딩을 둘러보았다.“왜, 사무소라도 차리려고?”강지혁이 물었다.“응, 괜찮은 사무실 있으면 한번 생각해 보려고.”임유진은 그간 라온시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며 실력을 키우는 건 물론이고 인맥도 많이 넓혔다. S 시로 다시 돌아오게 된 지금은 많은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녀는 크게 어려울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럼 내가 고 비서한테 연락해서 괜찮은 위치로 알아봐 달라고 할게.”임유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너 고 비서님한테 제일 비싸고 으리으리한 곳으로 찾으라고 할 거지?”“왜? 그러면 안 돼?”강지혁이 되물었다.“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래. 나는 줄곧 라온시에서만 있어서 여기서는 거의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랑 다를 거 없단 말이야. 그리고 여태 스승님 아래서 배우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래서 아직은 천천히 한 단계씩 밟고 나가고 싶어.”“하지만 나는 뭐든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어.”투자비용이 얼마가 되든 상관이 없다. 애초에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주는 것에는 조금도 아낄 생각이 없으니까.“알지.”임유진은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사무소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지금은 일단
강지혁은 주위의 시선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어떤 맛 좋아해? 아니면 여기 있는 거 전부 다 살까?”“안 돼. 어차피 다 못 먹잖아.”임유진은 강지혁이 멋대로 주문할까 봐 다급하게 말렸다.아마 강지혁의 재력이라면 케이크를 종류별로 다 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아예 가게를 통째로 사들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하지만 임유진은 이런 곳에 괜한 돈을 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나는 초코케이크로 할래. 혁이 너는?”“나는 다 괜찮으니까 초코 다음으로 좋아하는 맛으로 골라.”사실 강지혁은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온 건 그저 임유진이 원했기 때문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달콤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나마 단맛이 적은 블루베리 맛으로 골랐다.케이크가 나오고 임유진은 초코케이크를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확실히 평소에 먹었던 초코케이크와는 다른 맛이었다. 초코 맛이 조금 더 짙고 우유 맛도 더 강했다.“맛있네. 이거 먹어볼래?”임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강지혁의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 움직인 뒤에야 이곳은 집이 아닌 사람들 다 보는 공공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부부 사이에 이런 일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 여전히 부끄러웠다.임유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케이크 쪽이 아닌 케이크를 쥔 포크를 주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걸 건네기도 전에 강지혁이 입을 크게 열더니 그대로 케이크를 받아먹었다.“응, 괜찮네.”강지혁의 부드러운 미소에 임유진은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미친, 방금 케이크 먹여주는 거 봤어?”“근데 저 남자 연예인이야? 왜 저렇게 잘생겼어?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혹시 근처에 카메라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임유진과 강지혁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손님들은 케이크를 먹여주는 장면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얘기를 나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
사람들은 두 가문이 파혼이라는 결말을 맺을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은채는 어제 기자들에게 오늘 오후 정식 기자 회견을 열겠다고 했던 터라 지금 비장한 얼굴을 한 채 기자들 앞에 앉아 있다.“사실 저와 백연신 씨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고 제 현재 남자친구는 기사에서 언급됐던 그분입니다. 백연신 씨와 헤어진 걸 알리지 않았던 건 부모님이 저와 제 남자친구와의 사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백연신 씨에게 부모님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만 저의 남자친구인 척해주면 안 되냐고 했고 백연신 씨는 이에 동의했습니다.”고은채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이번 일은 다 제 잘못입니다. 제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백씨 가문이 곤란해지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반인 여성에게까지 피해가 갔습니다. 정략결혼 얘기는 저희 부모님이 저희 둘 모르게 공표한 것으로 저와 백연신 씨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혼 파기를 빨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불필요한 타격을 입고 상처를 받았을 백씨 가문과 한지영 씨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백연신 씨와의 결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백연신 씨와는 진작에 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고은채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미리 준비해둔 대사를 전부 다 읽어낸 후 진중하면서도 가녀린 얼굴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지금 그녀가 챙길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는 이미지밖에 없었으니까.“그럼 결혼은 지금 남자친구분과 하실 예정인 건가요? 부모님께서 다시 반대하시지 않겠어요?”기자 한 명이 손을 들며 물었다.“결혼은... 당연히 지금 남자친구와 할 생각입니다. 부모님도 시간이 흐르면 저와 남자친구 사이를 예쁘게 봐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계속 반대하신다 해도 헤어질 생각은 없습니다.”고은채는 겉으로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반대도 무릅쓰고 끝까지 갈 것
백연신은 차창을 통해 한지영이 머무르고 있는 1층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만든 자신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는지 같은 질문이 절로 떠올랐다.“안 올라가십니까?”기사가 물었다.“응, 이렇게 보는 거로도 충분해.”백연신은 말을 하며 계속해서 아파트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내일이면 한지영에게 씌워진 오명을 전부 다 벗겨낼 수 있다....다음날.인터넷은 고은채의 기사로 난리가 났다.한 기자가 고은채에게 백연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그것도 여러 명이 있었다며 폭로했기 때문이다.그중 제일 화제가 된 남자는 지하 클럽에서 호스트로 활동했었던 남자였다. 그 남자는 고은채를 만난 후 아주 오랜 기간 그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왔고 그 덕에 현재는 억 소리가 나는 별장에서 살고 있다고 하며 외출할 때도 꼭 경호원을 한 명씩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고은채의 기사를 폭로한 기자는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며 자신의 수중에는 인터넷에 공개된 그녀가 남자와 끌어안고 키스하는 수위가 약한 사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해괴망측한 취향이 가득 담긴 사진도 다수 있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아무것도 모른 채로 백연신의 별장에서 석방된 고은채는 기자들의 손에 들린 사진과 그들의 질문을 통해 아주 빠르게 알아챘다. 지금 이건 백연신이 짠 각본이라는 것을.그녀와 친밀한 사이라고 소개된 호스트는 확실히 그녀의 파트너가 맞다. 백연신의 철벽으로 풀지 못했던 욕망을 어디든 분출해야만 했으니까.아마 기자가 공개하지 않은 사진에는 그녀가 남자의 무릎을 꿇리고 개처럼 바닥을 기게 하는 등의 모습이 찍혔을 것이다.하지만 고은채가 호스트와 놀아난 건 2년 전의 일이었다. 하이에나 같은 기자가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고 그 사진들을 2년이나 간직하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즉, 해당 사진들은 기자가 자기 힘으로 입수한 사진이 아닌 백연신에게서
당시의 백연신은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고은채 밖에 없었고 고은채는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뭐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었다.그녀가 도와줘야 백연신이 살 수 있고 또 그녀가 도와줘야만 백연신은 앞으로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었다.자신이 우월하다는 감각에 취한 탓일까, 고은채는 홧김에 그에게 한지영을 구해주는 대신 자기 옆에 있으라고 했다. 이제껏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이 남자를 지금에야말로 자기 발밑에 무릎을 꿇리고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백연신이 한지영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그녀는 그의 육체라도 곁에 묶어둔 것에 환희를 느꼈다. 어차피 마음 같은 건 시간의 흐르면 당연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백연신은 어느샌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점점 벗어나 있었고 형세는 완전히 뒤집혀버렸다.고은채는 백연신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그의 뒷모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다시 그 여자랑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과 그 여자의 인연은 이미 5년 전에 끝이 났어. 두 번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백연신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말 따위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고은채는 백연신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고씨 가문에 살길이 터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가문이 재기할 수 있게 조금이라도 힘을 모으는 것뿐이다.내일부터 꽤 치욕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말이다.고은채는 한지영의 루머를 바로잡아주고 백연신과 합의 하에 파혼한 것처럼 연기해야 할 생각만 하면 벌써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백연신의 차량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서서히 별장에서 멀어졌다.운전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백연신을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모실까요?”백연신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한지영이 현재 살고 있는 주소로 향해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생각해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어느 한순간 피곤하
“뭐...?”고은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연신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때만을 기다려온 사람이 갑자기 죽여야 하는 상대에게 살길을 터주겠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내가 돈을 빌려주면 해진 그룹은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만큼은 사수할 수 있을 거야.”백연신의 말에 고은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그의 말을 달리하면 고씨 가문은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잃게 된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고씨 가문은 더 이상 부유층이 아니게 되고 한순간에 지위가 하락하게 된다.‘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만 제대로 사수해도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생겨!’“원하는 게 뭐야? 이유도 없이 자금을 빌려주지는 않을 거 아니야.”고은채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내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의 결혼 파기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고은채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며 웃었다.“결혼 파기? 우리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결혼 파기 그까짓게 안 될까 봐 무서워?”“나는 네가 직접 사람들에게 우리 결혼은 합의하에 없던 일이 된 거라고 하길 원하는 거야. 그리고 지영이가 그런 모욕적인 오명을 쓰게 된 것도 네 입으로 직접 해명하길 원하고.”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고은채는 머릿속을 스친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순간 눈을 크게 떴다.“설마...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로 딜을 하려는 게 한지영 때문이야?”“아니면? 내가 그 이유 말고 너희 가문에게 살길을 터줄 이유가 또 있어?”고은채의 두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게 백연신은 지금 고작 한지영 하나 때문에 몇조가 되는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고 있으니까.‘그렇게 오래 판을 짜놓고 이제 와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익을 포기하고 후환까지 남겨둔다고...? 미친 거야?’고은채는 이쯤 되니 백연신이라는 남자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강지혁은 불안한 만큼 더욱더 강하게 임유진을 몰아붙였다. 그러다 갑자기 입술을 떼더니 임유진의 눈을 마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만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하나도 안 아파... 그러니까 날 떠나지 마.”그러고는 또다시 입술을 부딪치며 마치 그녀의 모든 걸 다 집어삼키려는 듯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백연신 씨, 당신 이거 납치야.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라고!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날 내보내!”고은채는 백연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쳐댔다.이곳에 갇혀있는 동안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휴대폰도 압수당한 바람에 그녀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너희 부모님은 지금 너희 집안에 떨어진 불똥 때문에 그거 처리하느라 널 챙길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미 너희 부모님한테 따님이 현재 내 별장에 있다고 얘기했어.”백연신은 소파에 앉으며 느긋한 태도로 얘기했다.“불똥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고은채가 급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이에 백연신은 부하직원에게 눈빛을 보냈고 부하직원은 리모컨을 들어 거실에 있는 티비를 켰다. 모니터 속에서는 요 며칠 해진 그룹과 고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도한 뉴스들이 편집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채는 굳은 얼굴로 영상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마지막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몸을 덜덜 떨었다.‘대체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우리 집안을 완전히 망하게 할 생각이야?’“지금껏 쥐새끼처럼 몰래 움직이면서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거야?!”고은채는 분노로 범벅된 얼굴로 백연신을 바라보았다. 고씨 가문이 며칠 사이에 이렇게까지 무너진 걸 보면 꽤 오랜 기간 이 상황을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그녀는 그가 정성스럽게 판을 짜는 동안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아직도 자신이 모든 걸 주무르고 있다고 착각
“너는 그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그가 말하는 기억이 절벽에서의 일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이곳으로 돌아온 그 날 고이준에게서 들었으니까.강지혁은 두 눈을 임유진에게 고정한 채 그녀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더니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야. 그리고 나는 고통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을 과거라면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라도 괜찮다는 소리야?”“응.”임유진은 고통스러운 과거로 서로가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면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같은 건 영원히 알지 못한 채로 살 수 있게 될 테니까.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손을 뻗어 강지혁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혁아, 기억을 회복하는 것도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마. 네 몸을 축내면서까지 과거 일을 떠올리지 말라는 소리야. 나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머리가 다시금 아파 왔다.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뱉어져 나온 순간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심장을 꽉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강지혁은 자기가 말하고는 자기가 더 놀랐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대체 왜?왜 이 말이 이토록 익숙한지, 왜 이 말을 수백 번은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언제 이런 말을 한 거지?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난 뒤에?강지혁은 기억을 헤집으며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파져 왔다.게다가 이제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고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히며 고통스러운 신음까지 멋대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상태가 점점 더 심각
소민아는 양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씩씩거리며 딸과 함께 저택에서 나왔다.임유진은 율이와 현이를 씻긴 후 방으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현이는 많이 피곤했던 건지 엄마와 오빠에게 번갈아 뽀뽀한 후 금세 잠자리에 들었다.율이는 동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진지한 얼굴로 임유진에게 말했다.“나는 엄마가 계속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아무래도 소민아가 엄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던 모양이다.“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는 절대 다른 여자를 너희 엄마라고 데려오지 않을 테니까.”아이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굿나잇 인사를 한 후 드디어 잠자리에 들었다.임유진은 천사 같은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아이들을, 이 가정을,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지켜주고 싶었다....침실로 돌아온 임유진은 강지혁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는 걸 보고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왜 그래? 또 두통이 도진 거야?”강지혁은 걱정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어려있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조금 놀라며 물었다.“혁아, 무슨 일...”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혁아.”임유진은 그런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물었다.“또 머리가 아파?”강지혁은 한참을 침묵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방금 머리에 통증이 일었을 때 그는 그의 요구로 종일 경호원들을 뒤에 붙인 채로 있어야만 했던 임유진의 모습을 기억해냈다.아무리 임신 중이라 걱정이 됐다고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이건 마치 그녀가 떠날 아주 조금의 틈조차도 주지 않으려는 듯한 무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