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씨, 고마워요.”곽동현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동현 씨가 풀려날 수 있었던 건 그 영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동현 씨가 이런 일을 당한 건 다 나 때문이잖아요. 만약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었을 거예요.”사실 그 영상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누가 배여진의 차에 몰래 카메라를 달아놓은 건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그런 말 하지 말아요.”곽동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유진 씨는 정말 큰 힘이 되어줬어요. 유진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계속 불안에 떨고 있었을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다 그녀가 괜한 마음의 짐을 짊어지게 될까 봐 그러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곽동현은 서류를 작성한 후 임유진과 함께 다시 구치소에서 나왔다.“유진 씨, 나 들었어요. 강현수 씨가 유진 씨 사촌 언니를 사기죄로 고소한다고 했다면서요?”곽동현이 물었다.“아마 그럴 거예요. 나도 기사가 올라온 것만 본 거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 지금 강현수 씨랑 연락하고 있지 않거든요.”“혹시 그거... 내 일 때문이에요?”곽동현이 조금 미안해하며 물었다.“아니요. 그냥 강현수 씨와는 원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요.”임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했다.곽동현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곽동현을 보낸 후, 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전화해 곽동현이 무사히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탁유미도 요 며칠 곽동현의 일로 줄곧 자책했었으니까.탁유미는 당시 윤이가 퇴원할 때 곽동현이 오겠다고 하는 걸 막았더라면 어쩌면 곽동현이 배여진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임유진이 희소식을 전하자 탁유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이에요? 정말 풀려났어요?”“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사실 언니한테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지영이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네?
임유진은 병원 이름을 댄 후 어차피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검은색 승용차가 단지에 들어서고 임유진의 곁에 경호원이 서 있는 걸 보았을 때 탁유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그녀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임유진과 경호원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진 씨, 이게 대체...”“혁이가 붙여준 경호원분이에요. 나 강지혁이랑 결혼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임신 3개월째고요.”그 말에 탁유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진 씨가 결혼에 임신까지 했다고요? 그것도 강지혁 씨랑?!”“네, 일단 타요. 가면서 얘기해요, 언니.”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뒷좌석에 탔다.그러고는 자기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며칠 안 본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변화가 생겼을 줄이야.“참, 양육권 소송 재판은 한 달 후에 열리게 될 거예요. 그때 언니 변호사 쪽에는 나를 제외하고 양육권 소송 전문 변호사가 한 명 더 붙을 거예요. 그래야 승률이 조금 더 올라가니까요.”임유진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아직도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못 해요. 하지만 그래도 여론을 통제해 이번 재판으로 윤이가 기사에 실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볼게요.”탁유미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임유진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강지혁 씨한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 거죠?”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혁이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물론 아직 얘기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해줄 거예요.”탁유미의 일로 강지혁이 뭔가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녀는 그게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다.탁유미에게 보답하고 싶고 윤이도 지키고 싶으니까.“유진 씨, 날 위해서 이러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탁유미가 뭔가 얘기하려는데 임유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하지만은 없어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이에 탁유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몇 초 후 다시 조심스럽게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건 한지영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는 것이었다.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틀 뒤면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질 수 있다고 하며 2차 수술도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회를 끝낸 후 임유진은 다시 탁유미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차에 올라탔다.그런데 이제 절반 정도 왔을 때 갑자기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웠다.이에 임유진이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자 여러 대의 차량이 포위하듯 멈추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차량에서 누군가가 내려 임유진의 차 쪽으로 걸어왔다.앞 좌석에 앉아있던 임유진의 경호원은 진작 차에서 내렸고 바로 강현수를 막아섰다.강현수가 그 경호원을 힐끔 보자 뒤에 있던 남자경호원들이 성큼성큼 다가와 금방 임유진의 경호원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강지혁이 엄선한 경호원은 실력이 좋은 경호원임이 틀림없었지만 수에 밀려 금방 제압당하고 말았다.강현수는 차량 바로 곁으로 와 임유진 쪽 차 문을 벌컥 열었다.그러고는 조금 초췌해진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이 있어.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면 되지 왜 이런 방법을 쓰는 거예요?”“이러지 않으면 너랑 얘기할 기회조차 없을 거니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잠깐이면 돼. 나랑 같이 가줄래?”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임유진은 그 모습에 그가 목숨을 잃을 것도 불사하고 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피범벅이 됐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와 배 속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준 게 강현수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알겠어요. 갈 테니까 대신 저 사람들 좀 물려줘요. 그리고 언니도 보내주고요.”임유진이 경호원 쪽과 탁유미 쪽을 가리켰다.“알았어.”강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유진 씨!”그때 탁유미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임유진을 불렀다.“언니,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요.”임유진은 그녀를 안심시킨 후 기사에게 그녀를 부탁했다.“기사님, 언니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하지만 다 지난 일이라는 그 말이 강현수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그럼 나는...? 나랑 만난 것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야?”임유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네, 나한테는 이미 지난 일이에요. 그러니까 현수 씨도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세요.”그 말에 강현수가 가볍게 웃었다.“현재를 살라고...?”그의 고통, 그의 후회, 그리고 그의 자책은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그때 차량이 멈춰서고 강현수가 말했다.“내려.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임유진은 강현수를 따라 그의 화실로 들어갔다.화실 안에는 온통 어릴 적 임유진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이었다.그날 임유진은 산속에서 강현수를 만났고 강현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손을 꼭 잡아주었으며 강현수를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강현수는 그날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 이 방 안에 간직해 두고 있었다.그림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이거 모두 내가 그린 거야.”강현수가 씁쓸한 얼굴로 그림을 보며 말했다.“네가 생각날 때마다 여기로 와서 그림을 그렸어.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지독한 그리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거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천천히 임유진에게로 주었다.“유진아, 나는 그날 이후로 너를 줄곧 찾아다녔어. 그리고 지금 드디어 너와 만나게 됐어. 그런데 하늘은 내 편이 아닌가 봐. 자꾸 널 앞에 두고 널 놓쳐버리게 해. 만약 내가 그때 네 이름을 물어봤더라면, 네가 어디 사는지, 네가 어디 초등학교에 다니는지 물어봤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애초에 몇 년이나 널 놓치는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사실 너도 조금은 나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 입원했을 때 매일 찾아오고 걱정해준 거잖아.”강현수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만약 네가 날 찾아온 그날 밤 내가 집에서 나왔더라면, 네 친구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를 해줬더라면 넌 강지혁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 둘도 지금과
임유진은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강현수가 해준 것에 감동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그를 만났을 때는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몰랐고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완전히 기억해냈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마음이 가득 차 그를 사랑할 여유가 없었다.“네.”임유진은 단호하게 그에게 답을 내렸다.강현수는 꼭 심장에 큰 타격이라도 입은 듯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지금 나 마음 접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제는 강지혁의 아내라서,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아니요. 강지혁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 대답은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그럼 대답해봐. 강지혁을 사랑해?”강현수가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녀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말이다.그런데 임유진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화실에 울려 퍼졌다.“유진이가 날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걸 물어봐?”임유진이 흠칫하며 고개를 홱 돌리자 강지혁이 화실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늘 무표정하던 얼굴에 지금은 분노가 깔려있었다.“강현수, 누가 내 아내를 멋대로 데려가도 된다고 했지? 이 일로 내가 너희 집안을 어떻게 할지 두렵지도 않나 봐?”강현수는 강지혁이 별장 안으로 들어와 이곳에까지 도착한 것이 크게 놀랍지도 않은 듯 여전히 임유진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대답해. 강지혁을 사랑하는지 아닌지.”강지혁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가자.”하지만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임유진이 제자리에 버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은 오로지 강현수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순간 강지혁은 심장이 욱신거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울렁거리고 정의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의 입이 천
임유진은 그녀의 그림들로 꽉 채워진 화실을 삥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현수 씨가 이러는 건 우리가 어릴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집념 같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얻지 못하면 더 얻고 싶고... 그래서 더 나를 찾는 것에 집착했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무의식중에 나를 너무 미화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는 대단히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별다를 거 없는 사람이에요.”말을 마친 후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더니 두 손을 뻗어 강지혁의 목을 감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행동에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녀가 발꿈치를 들고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출 때까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임유진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먼저 강지혁에게 입을 맞췄다.그리고 강지혁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3초간 가만히 서 있더니 서서히 눈을 감고 응하기 시작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임유진은 조금 달뜬 호흡을 내쉬며 입을 떼고는 강현수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지혁뿐이에요. 현수 씨는 어릴 때 나랑 한 약속 지켰으니까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미련 가지지 마세요.”강현수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으로 잠식되어 갔다.임유진의 입에서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그렇게 오랜 시간 찾아 헤맨 것이 그녀에게는 그저 한낱 약속일 뿐이었다....강현수의 별장에서 나온 임유진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문 바로 앞에 강지혁의 부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조직 보스를 기다리는 듯한 엄숙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강현수 별장에 있던 도우미와 경비원들은 그 사람들에게 완전히 제압돼 있었다.강지혁이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화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왜... 이렇게 많이 데려왔어?”임유진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그녀의 질문에 강지혁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임유
“거짓말을 안 했다고?”강지혁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그럼 강현수 앞에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도 다 진짜라는 소리네? 줄곧 날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는 것도 진짜고?”“맞아.”임유진이 대답에 강지혁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그럼 어디 증명해봐. 네 마음속에 정말 내가 있는지, 나를 어떻게,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사실 그녀도 오늘 강현수의 손에 이끌려 별장으로 와 입 밖으로 강지혁을 향한 감정을 내뱉고서야 지금도 여전히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임유진이 강현수에게 품은 감정은 어릴 때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의 우정과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감동뿐이지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하지만 강지혁에게는 달랐다.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이유가 뱃속 아이들과 한지영 때문인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있었다.만약 강지혁을 향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 결혼생활에 충실해지려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고 그와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도 품지 않았을 것이며 강현수가 ‘만약’이라고 가정까지 해가며 애절하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망설임 없이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강현수 같은 남자가 줄곧 너 하나만 생각하며 찾아 헤맸다고 하는데 심장이 떨리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그런데도 임유진의 심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건 이미 그 심장의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임유진은 손을 들어 천천히 강지혁의 얼굴을 감쌌다.강지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뭔가 결심한 듯한 결연함이 묻어있었다.임유진은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더니 다시 한번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강현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했던 키스와 달리 지금 하고 있는 키스는 조금 더 농밀하고 부드러우며 강지혁의 분노를 잠재울만한 그런 키스였다.강지혁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온 그녀의 행동에 몸이 움찔 떨리며 눈이 조금 커졌다.하지만 임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 경호원이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는 걸 바로 뒤에서 들었음에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임유진을 무사히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임유진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만 걱정이 가실 것 같았다.“난 괜찮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다행이고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윤이는 요즘 어때요?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윤이 보러 가고 싶은데.”윤이를 못 본 지 꽤 되었기에 임유진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윤이는 잘 있어요. 안 그래도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어하더라고요. 아, 손님 왔다. 그럼 먼저 끊을게요.”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하지만 말과는 달리 새 손님 같은 건 없었다.아까는 그저 임유진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뿐이다.요 며칠 일이 많기도 했고 현재 임신 중인 사람에게 괜한 말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사실 윤이는 퇴원한 후 여전히 자주 몸에 멍과 자잘한 상처를 달고 집으로 왔다.유치원 선생님은 윤이가 다른 아이들과 하루가 멀다고 자주 다툰다고 하며 그 이유에 관해서 조금 난감한 얼굴로 탁유미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그 말에 탁유미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감옥살이하다 나온 경력 때문에 윤이가 친구들과 다툰다는 것을 말이다.감옥살이한 그 일은 그녀에게 지우지 못할 낙인이 됐을 뿐만이 아니라 윤이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그녀는 그저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윤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 소원이 그녀에게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그리고 양육권 분쟁에서는 정말 이길 수 있을까?탁유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한편, 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혁이는요?”“별채에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 그때 집사가 그녀를 불러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