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손으로 어깨를 짚자마자 그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밀어냈다.공포에 질린 눈빛과 패닉에 빠진 표정,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마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야... 영준 씨, 난 글렀어.”송재이는 흐느끼며 말하더니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머릿속은 온통 해원뿐이라서 지워지지 않아. 그동안의 일을 어떻게 그리 쉽게 잊겠어?”설영준은 마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싶었고, 무력감이 느껴져 고통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송재이를 강요할 수 없는지라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주기로 했다.“알았어.”이내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기다릴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네가 극복할 때까지 기다려 줄게.”송재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갔다.그리고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는데 눈물이 또다시 조용히 흘러내렸다.밤이 깊었지만 침대에 누운 송재이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머릿속은 뒤죽박죽 했고,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비록 힘들게 꿈나라로 떠났으나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어주지는 못했다.꿈속에서 송재이는 해원을 보았다. 귀여운 소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설영준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이내 손을 뻗어 끌어안으려는 순간 아이는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엄마, 왜 날 버렸어요?”낭랑한 목소리가 꿈속에서 메아리쳤다.“엄마, 나 무서워요. 너무 추워...”송재이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비록 목놓아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뛰어가려고 해도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해원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만 했다.“안 돼!”송재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둠과 적막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결국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의 죄책감과 고통을 직면하기 위해
설영준은 송재이의 반감과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억지로 강요하는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곁을 지키면서 심리 치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지인 추천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입소문이 자자한 심리상담사를 찾았다.상담사는 전문 지식이 뛰어날뿐더러 자상하고 끈기가 있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복잡한 감정 문제를 처리하는 데 능숙했다.설영준과 함께 송재이는 첫 번째 심리 치료를 시작했다.진료실에 앉아 있는 그녀는 한 편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차올라 만감이 교차했다.심리상담사 이서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송재이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그녀도 서서히 마음을 열려고 노력했다.처음에는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포함한 별 보잘것없는 일들을 털어놓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설영준과 이서군의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점차 꼭꼭 숨겨둔 아픈 기억을 언급하기 시작했다.송재이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무의식 중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뭇잎 틈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카펫 군데군데 그림자를 생성했다.이서군은 송재이의 맞은편에 앉아 펜과 노트를 손에 들고 그녀가 했던 얘기를 빠짐없이 기록할 준비를 했다.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재이 씨,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망설이는 것 같은데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재이는 손에 있던 휴지를 움켜쥐고 흔들리는 시선으로 대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매번 끄집어낼 때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요.”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재이야, 내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송재이는 심호흡하고 설영준을 돌아보더니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영준 씨, 고마워. 영준 씨가 있어서 안심돼.”이서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재이 씨가 느끼는 감정
이서군과 설영준의 설득에 송재이도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끔찍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순간 문예슬을 향한 원망이 속에서 꿈틀거렸다.“문예슬!”송재이의 두 눈에 분노와 고통이 담겨 있었다.“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수수방관했어. 문예슬 때문에 해원을 잃었으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꼭 붙잡았고,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져 서둘러 다정하게 타일렀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원망은 고통만 안겨줄 뿐이야. 부정적인 정서를 받아들이고 해소하도록 노력해보는 건 어때?”이서군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보탰다.“원한은 정신 건강에도 영향 줄 수 있는 굉장히 강한 감정이죠. 이러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찾아보고 다른 방법으로 대처 가능한지 함께 알아봐요.”송재이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다.“알아요, 두 사람 말이 맞아요. 하지만 매번 해원을 떠올릴 때마다 제 무능력함 때문에 떠나보냈다는 사실에 마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파요.”첫 번째 상담이 끝나고 이서군의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 송재이는 치료를 진행하며 모든 기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몸은 천근만근이며, 다리도 휘청거렸다.설영준은 그녀를 부축해서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송재이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방금 나눴던 대화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빛이 공허했다.“재이야, 잘했어.”설영준이 위로를 건넸다.“이러한 감정을 마주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첫발을 내디디는 데 이미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해.”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지금은 단지 너무 피곤할 뿐이야. 남한테 털어놓으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아.”설영준은 이해한다는 듯 동조했다.“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걱정하지 마. 감정을 분출함으로 가끔 지칠 때도 있지만 치료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항상 옆에서 응원해줄게.”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고, 설영준은 문을 열고 송재이를
어느 날 점심시간, 송재이는 사무실에 앉아 잠깐의 여유를 만끽할 참이었다.이때,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뜨렸다.처음에는 근처 어딘가에서 작은 불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문틈과 창문 사이로 뿌연 연기가 밀려들기 시작했고 멀리서 소음과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혼란 속에서 송재이는 겨우 눈을 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제야 학교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물론 그녀도 즉시 패닉에 빠졌지만 그동안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응급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웠다.그리고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라 벌떡 일어나 휴대폰과 가방을 챙겼다.사무실 문을 열자 후끈거리는 열기와 짙은 연기가 그녀를 덮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기침했지만 해로운 연기의 흡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빨리 손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탈출로를 따라 이동했고,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치며 아직 사무실이나 교실에 있을지도 모르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비상 상황을 상기시켰다. “다들 날 따라오세요!”비록 본인도 두려웠지만 목소리만큼은 단호하고 확신이 넘쳤다.짙은 연기와 혼돈 속에서 송재이의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그녀는 겁에 질린 학생들과 교사들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와 신속하고 질서 있게 대피했다.모두를 걱정하는 마음에 행여나 뒤처지는 사람은 없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체크했다.그리고 대피시키던 와중에 송재이는 실수로 바닥의 잡동사니에 걸려 넘어졌다.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가득 메운 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 주변 상황을 즉각 판단하기 힘들었다.비록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다.하지만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현기증이 밀려오더니 의식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정신을 잃기 직전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면서 그녀를 향한 도움의 손길도 느껴졌다.그러고 나서 모든 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시 눈을 떴을 때 송재이는 병
설영준은 송재이의 옆에 앉아 시종일관 시선을 뗀 적 없었다.그는 송재이의 고통이 신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송재이의 절망을 조금 덜어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덜어줘야 할지 몰랐다.그와 그녀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문밖에 서 있었다.“송재이 씨 맞으십니까?”그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며 물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전 송재이 친구 설영준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죠?”경찰은 공무원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학교 화재 사건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어서 송재이 씨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힐끗 보았다. 송재이는 놀람과 불안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기에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경찰에게 말했다.“아직 대답하기엔 적합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니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저희의 조사로 이번 화재는 누군가 일부러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방화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을 조사 중이니 송재이 씨가 저희에게 아는 것을 전부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경찰들의 말에 송재이는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학교에 불을 질렀다니 말이다. 무고한 생명을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분노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며 동시에 책임감을 느꼈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꽉 잡았다. 무언가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는 것 같았다.“재이의 도움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도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재이는 지금 휴식과 안정이 필요한 상태라서요. 그러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경찰은 이해한다면서 얼른 진상을 캐보겠다고 약속했다.떠나기 전에 연락처도 남기면서 경찰은 설영준에게 송재이의 상태가 나아진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설영준은 문을 닫은 뒤 송재이의 곁
이틀 뒤, 설영준은 병원 건물에 있는 카페에서 서도재와 만나게 되었다.다소 의외였던 것은 서도재가 먼저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던 것이다.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서도재는 이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설영준의 두 눈을 빤히 보더니 직설적으로 말했다.“형, 재이 씨랑 사이가 아주 좋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거라곤 생각 안 해. 그래서 난 재이 씨한테 내 마음을 전부 표현할 생각이야.”설영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도재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놀라움에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갑자기 웃어버렸다.설영준의 웃음소리는 꼭 서도재를 비웃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서도재가 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으로 이런 시기에 자신과 송재이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는지 몰랐다.서도재는 설영준의 반응을 예상한 듯 설영준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자세하게 자기가 분석하며 말했다.“형, 재이 씨가 해원이 일로 저 상태가 되었다는 거 형도 알고 나도 알잖아. 해원이의 죽음은 재이 씨에게 엄청난 충격과 트라우마를 만들어 주었어. 형도 재이 씨도 그때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지. 거기에다 문예슬은 재이 씨와 더 복잡하게 얽혀있잖아. 문예슬과 그간 벌어진 일들은 형과 재이 씨 사이를 방해하고 있지. 난 형과 재이 씨 감정을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고 가끔 감정이 이 가혹한 현실을 이길 수 없을 때도 있잖아.”서도재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설영준의 처지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던 그는 깍지를 끼면서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잔을 잡고 있던 설영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그는 서도재가 자신에게 도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서도재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서도재.”설영준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가 분
설영준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병원 복도엔 은은한 불이 켜져 있었고 그가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송재이의 병실 앞까지 다가온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송재이는 침대에 앉아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어 보기만 해도 안쓰러워 보였다.설영준은 문에 기대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송재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송재이는 은은한 독서등 아래 더 온화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고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순간 충동이 일어났다. 얼른 송재이에게 다가가 안아주며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드디어 그는 걸음을 옮겨 송재이게게 다가갔다.인기척을 느낀 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설영준은 여전히 다정하고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송재이는 놀람과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설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송재이의 침대 곁으로 간 뒤 팔을 뻗어 힘있게 그녀는 꽉 끌어안았다.그의 품에 안긴 송재이는 다소 경직된 몸으로 밀어내려고 하면서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설영준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꽉 끌어안았다. 행여나 그녀가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송재이는 목에 상처가 있었던지라 아직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자신을 꽉 끌어안은 설영준에게서 그녀는 다소 그의 소유욕을 느끼게 되어 불안감이 들었다.손을 휘적이며 표정으로 아직 자신에게 시간이 필요하니 놓아달라고 표현하고 싶었다.설영준은 그런 그녀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눈치채고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그는 점점 더 세게 끌어안았다. 꼭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에 대한 걱정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점차 숨이 막혀왔다. 당황한 눈빛으로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설영준은 그제야 그런 그녀의 상태를 인식하고 천천히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은 견고했기에 마치 송재이에게
송재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설영준의 격렬한 포옹에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문예슬이 해원이를 옥상에서 밀어버리는 그 기억이 말이다.그 기억은 그녀가 잊으려고 노력하는 기억이었지만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매일 깊은 밤이 찾아오거나 감정이 격해질 때면 마치 동영상 재생하듯 머릿속에 떠올라 그녀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 죄책감이 더 깊어져 버렸다.그는 자신이 이성을 잃기만 하면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악몽 같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침대에 앉아 우는 송재이를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이 너무도 강하게 들었다.송재이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눈물이 눈 앞을 가렸지만, 최선을 다해 글자를 꾹꾹 눌렀다.[영준 씨, 이만 돌아가 줘. 나 혼자 있고 싶어.]설영준은 그녀가 작성한 문자를 보았다.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자신의 충동적인 감정으로 송재이에게 위안이 되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지금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든 송재이를 잃을 것 같았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갔다. 흐릿한 하늘을 막막한 눈길로 보았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의 모습을 보았다. 마음속의 갈등과 몸부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설영준의 그 포옹은 자신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포옹에 저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가슴 깊은 곳에선 설영준이 곁에 있어 주길 바라면서 그의 응원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자꾸만 다가가면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다.혼자 침대에 누워있던 송재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엄청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