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설영준은 비행기의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두터운 구름층은 마치 그의 가슴 위에 얹힌 무거운 돌처럼 느껴졌다.설영준은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서는 바로 얼마 전 문예슬이 보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영상 속에서 박윤찬이 송재이를 얼마나 신경 쓰고 걱정하는지가 너무도 뚜렷이 드러났다. 하나하나의 세세한 행동들이 설영준에게 박윤찬이 여전히 송재이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때문에 설영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류지안이 송재이 곁에 있어 준다면 박윤찬의 영향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송재이에게는 여성 친구의 위로가 큰 힘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영상 속 박윤찬의 시선과 다정한 행동들, 그 모든 것이 설영준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설영준은 잘 알고 있었다. 송재이는 지금 그의 강인함과 지지가 필요했다.하지만 그의 이성적이고 자제력 있는 모습으로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질투와 불안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설영준은 다시 한번 그 영상을 재생하며 박윤찬이 송재이에 대해 가진 감정의 깊이를 찾으려 애썼다.이런 행동이 지나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송재이를 믿어야 한다는 작은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신뢰를 놓지 말아야 한다고.비행기가 가볍게 흔들리자 설영준은 그제야 생각에서 벗어나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안 돼. 냉철한 정신을 유지해야 해.’남도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송재이의 병세, 박윤찬의 마음, 그리고 문예슬의 의도까지 설영준이 마주해야 할 문제들은 많았다.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다시금 결의와 냉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도의 병원에서 송재이는 류지안과
설영준은 송재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병실의 고요함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설영준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발신자가 문예슬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속에서는 문예슬에 대한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하지만 그녀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예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늘 숨겨진 의도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잠시 망설이던 설영준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설 대표님이시죠? 저예요. 문예슬.”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무슨 일입니까, 문예슬 씨?”그녀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는지라 설영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대표님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요.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문예슬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순간 설영준의 마음은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직감했으니 말이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설영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하지만 내일로 미룹시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그러자 문예슬은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내일 봅시다. 기대하고 있을게요.”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설영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문예슬과의 만남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확인하고 다가올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다음 날 설영준은 사람들에게 송재이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한 후, 문예슬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그는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공개된 장소를 선택했다.약속된 카페에 도착했을 때, 문예슬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녀는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완벽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녀를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문예슬은 이 상황을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었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자리를 일부러 선택했고 이
설영준이 떠난 후, 문예슬은 그를 뒤쫓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눈물 자국이 사라진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냉정하고 계산적인 표정이 자리 잡았다.문예슬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가볍게 닦았다. 마치 방금 벌어진 독백 연기의 여운을 즐기는 듯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카페 구석구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었고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기자를 발견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도 조금 전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고 기자는 거의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긍정하는 듯한 신호를 작게 보냈다.모든 것이 조용히 진행되었고 주위 사람들은 이들 사이의 교감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문예슬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좋아. 계획이 절반은 성공했어.’자리에서 일어난 문예슬은 기자 쪽으로 걸어가며 놀란 척 인사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장 기자님이시잖아? 여기서 뵙다니 우연이네요.”그러자 장 기자는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문예슬 씨, 정말 우연이네요. 사실 여기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문예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도 친구랑 잠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잠깐 같이 앉아 얘기할까요?”장 기자는 당연히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이어갔다.대화 중 문예슬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며 장 기자가 자신이 알리고 싶어 하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했다.장 기자도 눈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의했다.이 교묘하게 짜인 만남은 문예슬에게는 원하는 ‘증거'를, 장 기자에게는 훌륭한 기사 소재를 제공해주었다.그렇게 둘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한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페를 떠났다.하지만 설영준은 문예슬의 의도를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기자를 이용해 여론을 조성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병원으로 돌아와 송재이를 지키며 문예
송재이가 뭔가를 마음에 걸려 한다는 것을 설영준은 느꼈다.그래서 손에 든 도시락을 내려놓고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어? 뭔가 봤거나 들은 거라면 나한테 말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옆에 있을 거야.”송재이는 망설였지만 결국 설영준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어 아까 본 기사를 설영준에게 보여주었다.핸드폰을 받아 화면을 쓱 훑어보던 설영준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빛이 서렸고 마음속에는 분노와 실망이 뒤섞였다. 문예슬이 이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했을 거라 직감했지만 이렇게까지 계산된 행동을 할 줄은 설영준도 몰랐다.“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설영준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더니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나도 알아, 영준 씨.”송재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속엔 여전히 설영준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그냥... 좀 속이 답답했어.”송재이가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해주고 싶어 설영준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 거야. 문예슬이 우리에게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할 테니까 나만 믿어줘. 알겠지?”그러자 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영준에 대한 의지와 신뢰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녀는 그가 모든 일을 잘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곧 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는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예요, 설영준. 문예슬 문제 처리해요. 다시는 어떤 매체에서도 내 이름과 그 여자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지 않도록 하세요.”전화를 끊고 난 후, 그는 다시 침대 옆에 앉아 송재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할 일은 잘 쉬고 몸을 회복하는 거야. 다른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전화 속 상대는 설영준의 비서인 여진이였다.지시를 듣던
설영준은 하나하나의 댄스 파트너를 거절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는 그에게 있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그의 걸음걸이는 당당하고 품위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매번 회전할 때마다 풍기는 여유로움은 설영준의 기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연회장 안의 조명이 얼굴을 비추자 그의 신비로운 매력이 더해졌다.그 와중에 문예슬은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그녀는 단정하고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단순하게 뒤로 묶어 올려 격식을 차린 모습이었다.문예슬은 설영준이 모든 여성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살짝 당황하며 생각에 잠겼다.점차 부드러운 음악으로 바뀌자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결단을 내린 듯 설영준에게 다가갔다.대리석 바닥을 딛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흔들림 없었다.“대표님, 저도 춤 한 곡 청할 수 있을까요?”문예슬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지만 완벽한 포커페이스 상태였다. 그녀는 설영준에게 예의를 표하면서도 과도하게 아첨하지 않았다.곧 문예슬 쪽으로 몸을 돌리던 설영준의 눈에는 순간 알 수 없는 빛이 번뜩였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영광입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문예슬의 춤동작은 가벼웠고 둘의 호흡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길을 내어주었고 두 사람은 연회장의 중심이 되었다.춤을 추던 중, 설영준이 갑자기 문예슬의 귀에 속삭였다.“그쪽이 한 짓 다 알고 있어요.”이 말은 아주 조용히 전해졌지만 문예슬의 마음속에선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곧 감정을 다잡고 평정심을 되찾았다.“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제가 뭐라도 했나요?”차갑고 예리한 눈빛을 한 채 설영준이 낮고 강렬한 목소리로 말했다.“문예슬 씨, 우리 서로 속이지 맙시다. 당신도 내가 무슨
설영준은 문예슬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그녀가 연회장을 서둘러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하지만 그리 큰 승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이 연회는 설영준에게 그저 사회적 의무에 불과했으며 진정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문예슬과의 대결은 잠시 마무리되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퇴장은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되레 또 다른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영준은 잘 알고 있었다.자신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문예슬이 촬영하도록 시켰다는 것을 설영준은 직감할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되레 이런 일은 송재이에게 먼저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말이다.문예슬은 무도장을 떠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숨어 설영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계획들이 떠오르고 있었다.문예슬은 자신이 촬영한 이 영상이 새로운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적절하게 언론에 유출한다면 설영준의 대중적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말이다.그녀의 생각은 간단했다. 설영준의 사생활이 복잡해질수록 자신이 그와의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생각이 복잡하게 꼬여있어 피곤해진 설영준은 자리로 돌아가 잠시 머리를 꾹꾹 눌렀다.문예슬의 위협을 다시 한번 평가하고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이 게임은 설영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고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그 시각, 송재이도 연회장에 도착했다.하지만 그녀는 설영준이 알아차리지 못한 곳에 조용히 있었다.송재이는 우연히 이런 연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설영준이 아마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그녀는 내내 설영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문예슬과 춤추는 모습을 보았고 떠날 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문예슬의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송재이는 눈물을 참으며 음료 코너로 향해 술을 한 잔 들었다.연회는 계속되었지만 분위기
송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저절로 흘러 베개를 적셨다.그러자 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돌려 마주 보게 했다.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목소리마저 조금 무게감이 있었다.“송재이, 왜 울고 있어?”송재이는 눈물을 머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남자가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즐기는데 난 울 자격도 없다는 거야?”순간 설영준은 심장이 덜컹했다.그는 박윤찬이 송재이를 바라볼 때의 그 애정이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은 자신 앞에서도 숨김이 없었고 그때마다 질투가 피어올랐다.복잡한 감정이 설영준의 마음을 휘감았다. 송재이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단지 춤춘 것뿐인데 이렇게 심하게 반응할 일이야?”설영준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담겼다.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송재이는 더욱 크게 울었고 목소리도 떨렸다.“그게 단지 춤춘 거라고? 그 여자들이 영준 씨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얼굴이 굳어진 채 설영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여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설영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그는 일부러 냉담하게 굴어 송재이에게 자신이 느꼈던 질투와 불안을 느끼게 하려는 듯했다.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요동쳤고 박윤찬에 대한 질투와 송재이에 대한 깊은 애정이 얽혀 있었다.송재이는 그의 말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떨리는 목소리에서마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영준 씨, 난 영준 씨가 나를 이해하고 나를 믿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날 몰아붙이다니... 우리 관계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설영준은 자신에 송재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걸 알았지만 자존심과 질투 때문에 쉽게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고통스러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그는 다시 냉담한 표정을 되찾았다.“널 믿지 않는 게 아니야. 그냥...”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송재이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뉴스와 SNS를 습관적으로 둘러보았다.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한 화면에 멈췄다.설영준이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영상이 각종 사이트에 퍼져 있는 것이었다.송재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하나를 눌렀다.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 문예슬과 설영준이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었다.마음이 복잡한 채로 송재이는 계속해서 영상 밑의 댓글들을 읽어 내려갔다.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춤을 칭찬하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천생연분이라는 표현까지 썼다.질투일까, 실망일까, 아니면 설영준에 대한 배신감일까?복잡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외부의 소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안 되겠어. 영준 씨랑 제대로 얘기 나눠봐야겠어.’곧 송재이가 설영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음성 메시지뿐이었다.전화를 끊고 그녀는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설영준의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다시 전화를 걸자 이번엔 방 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방에 없구나...’의문과 불안을 가득 품은 마음으로 송재이는 발길을 돌렸다.회사로 가서 설영준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그에게서 무슨 설명이든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회사를 향해 가는 길, 송재이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어젯밤의 다툼과 설영준의 냉정한 태도가 계속해서 떠올랐고 그녀는 점점 불안해졌다.설영준이 합당한 설명을 해줄지 아니면 자신이 그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송재이는 곧바로 설영준의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송재이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설영준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엔 서류가 쌓여 있었다. 마치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송재이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영준 씨, 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