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의 눈에는 송재이가 일부러 분위기를 망가뜨리려고 하필 이 타이밍에 방현수 얘기를 꺼낸 것으로 보였다.설영준은 흥이 확 깨져 송재이를 놓아주고는 비웃었다.“넌 역시 세 마디 할 때마다 방현수 씨 얘기를 빼놓지 않네.”송재이는 눈을 내리깔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러나 설영준의 눈에는 송재이가 방현수 때문에 속상해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에 화가 난 설영준은 마음이 더 답답했다.그는 송재이의 몸을 획 돌려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당신 오늘 방현수 씨와 함께 밥 먹었어? 밥 먹으면서 무슨 얘기 했어?”“현수 씨랑 단둘이 먹은 게 아니라 예슬이도 있었어.”송재이는 강조했다.“뭐가 달라?”설영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말 돌리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봐.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했어?”송재이의 머릿속에는 방현수가 자신한테 고백할 때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방현수도 말했다시피 그는 단 한 번도 송재이와 어떻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그저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짝사랑하는 것이 전부였다.송재이는 사람의 감정은 때때로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방현수가 자기감정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이런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송재이는 생각했다.“당신이 민건이를 건드릴 때, 난 당신을 말리지 않았어. 하지만 현수 씨는...”“방현수 씨는 다르다?”“현수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송재이가 말했다.설영준은 시큰둥하게 웃었다.“좋은 사람? 송 선생님, 난 당신의 사람 보는 눈에 좀 문제 있다고 생각해. 당신 처음에 문예슬 씨를 보고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었잖아. 근데 실제로 어땠어?”송재이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난 지금 당신과 현수 씨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 여기서 갑자기 왜 예슬이 얘기를 꺼내는 거야?”“문예슬 씨와 방현수 씨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고 두 사람이 당신과 함께 밥
송재이는 남자가 아니기에 당연히 남자의 생각을 모르고 남자가 성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는지 몰랐다.송재이가 보기에 방현수는 그저 무방하게 짝사랑 중이었고 누구를 해치지도 않았으니,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심지어 송재이는 방현수가 사랑하는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그러나 현실은 얻을 수 없을수록 남자의 첫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송재이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밤이 깊어지고 인기척이 없을 때, 그녀를 생각하면 온몸이 굳어지는 그런 정도였다.송재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그저 설영준의 마지막 귀띔이 너무 상스럽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트라우마를 남겼다!송재이는 방현수가 자신을 생각하며 음란한 짓을 상상했는지 모르지만, 생각만 해도 속이 역겨웠다!그러나 이런 역겨움은 마침 설영준이 원하던 그림이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송재이는 옷장 앞에 등지고 서서 옷을 갈아입을 때, 옷장에 한동안 놓아두었던 두 개의 가죽 벨트를 꺼내면서 생각난 김에 설영준에게 건넸다.“자, 이것이야말로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었어!”설영준은 눈꺼풀을 치켜들고 송재이가 건네주는 쇼핑백을 보며 멈칫하다가 바로 넘겨받았다.“가죽 벨트?”“맞아.”설영준은 눈살을 치켜들며 그윽한 눈빛으로 송재이를 바라보았다.“내가 당신한테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불만을 늘어놓았었지?”송재이가 말했다.“사실이잖아?”“그럼, 지금 줬으니까, 앞으로 이 일로 내게 투덜대지 마.”송재이는 덧붙여 말했다.이 말을 할 때 송재이는 한편으로 자기 옷의 단추를 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설영준과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설영준은 손을 뻗어 송재이를 확 잡아당겨 그녀더러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뭐 하는 거야?”송재이는 사슴 같은 눈을 치켜들면서 촉촉한 눈빛으로 설영준을 바라보았다.설영준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당신이 직접 갈아줘.”송재이는 입술을
아침밥을 먹을 때, 송재이는 마치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송재이는 진심으로 너무 섭섭했다. 이 선물은 그녀가 서유리와 같이 쇼핑할 때 정성스럽게 고른 선물인 데다가 설영준에 대한 송재이의 마음이 가득 담긴 선물이기도 했다.그런데 설영준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그녀를 한바탕 혼냈다.이렇게 생각하자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송재이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그러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물은 줄이 끊긴 구슬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밥상 위에 떨어졌다.설영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송재이한테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러나 송재이는 어린 여자애가 삐진 것처럼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울어?”설영준은 송재이를 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고서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난 당신이 준 선물을 계속 차고 있을 거야. 그러나 당신도 그걸 알아야 해. 감정은 사람과 마음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걸.”“내가 안 그렇다는 거야?”‘내 마음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건가?’설영준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송재이가 자신한테 신경을 쓰는 셈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기랑 비슷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설영준은 그런 느낌이 너무 싫었다.설영준은 자신이 마치 송재이가 어장에서 기르는 물고기같이 느껴졌다. 같이 있을 때, 그녀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만 일단 그의 시야를 벗어나면 그녀는 전혀 얌전히 있지 않았다.설영준은 송재이가 방현수 때문에 자신한테 사정하는 것도 싫고, 송재이가 박윤찬과 무심코 같은 책을 보는 케미도 싫었다. 그리고 그는 송재이가 박윤찬과 사적으로 만나서 밥 먹고 카톡 한 적이 여러 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리고 박윤찬의 엄마 성수연도 송재이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이 일들이 우연이든 아니든,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만난다고 해도 다 설영준을 짜증나게 했다.한번은 서유리가 실수로 그들이 같이 밥 먹고 있던 사진을 설영준의 핸드
송재이는 옷을 다시 입고 소파에 던져진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여러 개의 메시지가 와있었다.모두 서유리가 보낸 메시지였다.[재이 씨 왜 아직도 출근 안 했어요? 조금 전에 전무님의 약혼녀가 경비 두 명을 데리고 저희 오케스트라에 와서 지수 씨를 한바탕 때렸어요. 아주 흥미로웠어요.][재이 씨, 오늘 퇴근하고 우리 같이 지수 씨 병문안 갈까요?]송재이는 뒤늦게 깨닫고 나서 핸드폰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말하자면 최근 들어 연지수는 많이 얌전해졌다. 매일 정상적으로 출퇴근도 하고, 비록 수석직에서 탈락했지만 그래도 제때 리허설에 참여하곤 했다.연지수가 스스로 트집을 잡지 않는 이상, 송재이는 연지수에게 크게 신경을 갖지 않았다.서유리와 송재이 두 사람은 다 연지수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연지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자, 서유리는 송재이와 함께 연지수의 병문안을 가자고 초대했다.송재이는 처음으로 서유리한테도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생각하는 악한 취미가 있다는 걸 느꼈다.송재이는 서유리한테 답변을 보냈다.[아니에요. 이런 상황에 지수 씨는 분명 그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근데 전무님한테 언제 약혼녀가 생겼어요? 저는 처음 들어요.]송재이는 단순히 스캔들이 궁금했다.서유리 쪽에서 재빨리 답변이 왔다.[아휴. 단장님 같은 부잣집 도련님한테 약혼녀가 있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사이가 좋을지 아니면 체면치레일지 모르는 거죠. 근데 내가 그 약혼녀를 봤는데 그 기세나 관상을 보니, 딱 봐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어요!]설영준도 예전에 약혼녀가 있었다. 그가 약혼녀인 주현아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정을 가졌는지 송재이는 몰랐지만, 서유리가 말한 ‘체면치레'와 비슷한 말은 믿었다.이런 재벌 가문은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지 마지막에 결혼하는 아내는 반드시 세력이 비슷한 집안이어야 했다.지금 설영준과 주현아는 파혼했지만 앞으로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고 해도 그 여자는 송재이가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송재이
설도영은 지금 집에서 엄청 얌전했다.지난번에 설도영이 술에 취해서 집에 바래다줄 때 오서희한테 딱 걸렸다.'어린 나이에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니, 정말 대단하다!'그러나 오서희도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남들 앞에서 아들을 꾸중한 적이 없었지만, 집 문을 닫으면 설도영은 좋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그 당시 설영준은 설도영을 위해 사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난생처음으로 오서희와 같은 편에 섰다.설도영도 스스로 찔리는 게 있어서 그날부터 매일 열심히 등교하고 하교하면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최근 학교에서 학부모회가 열리는데, 오서희는 귀부인으로서 상류층의 공개 행사나 부잣집 사모님들의 사적인 모임에만 참석하면 했지 이렇게 서민적인 일은 다 설영준에게 떠맡겼었다.평소에 설영준은 다 참석했지만, 올해는 거절했다."송 선생님, 우리 형이 선생님더러 저의 학부모회에 참석하래요."설도영이 그쪽에서 말했다.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나?"설도영은 국제 사립학교에 다니고 그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즉 부모들은 부자거나 지위가 높으신 분들이었다.설영준은 일단 송재이가 이 학부모회에 참석한다면, 이는 그녀와 설영준의 관계를 대중 앞에 까밝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설영준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아무런 압박도 받지 않을 테지만 송재이는 손찌검을 받게 될 것이다.송재이는 동의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채 설도영과의 전화를 끊고 설영준한테 전화를 걸었다."무슨 뜻이야?"송재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나 요즘 바빠서 학부모회 참석할 시간이 없어. 당신 그래도 도영이 피아노 선생님도 했었고 지금은 또 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한번 도와주는 게 어려워?"그런 관계...설영준의 스스럼없는 네 글자가 오히려 썸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설영준의 말소리는 빨랐고 전화로 그쪽에서 분주한 타자 소리와 옆사람의 작은 말소리가 자꾸 들리는 게 정말 많이 바빠 보였다."근데 이건 학부모회잖아..."송재이가 말했다."당신
송재이는 설영준을 대신하여 자기 동생의 학부모회에 참석하였다.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그녀가 참석하게 되면 그들의 관계는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송재이는 마음속으로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이 일은 곧 설영준의 어머니인 오서희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처음에 오서희는 겉으로는 예의 있게 대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경멸했을 것이다.오서희가 이 일을 알고 난 후의 태도는 그녀는 이미 짐작했었다.…그날 송재이가 퇴근하고 막 빌딩에서 나올 때 검은색 페라리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차 안에는 고귀한 기품이 넘치고 우아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긴 머리로 올림머리를 하였고 50대의 나이지만 관리를 받아서 30대처럼 보였으며 몸매는 아주 날씬하였다. 정말 빨리 오셨네!오서희를 본 순간, 송재이는 의아한 정서가 가장 먼저 나타났고, 이어서 하늘이 내려앉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오서희가 너무 도도해 보였고 또한 설영준의 어머니라서 송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열등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타요!”오서희의 목소리 톤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송재이는 입술을 잘끈 깨물고는 고개를 돌려 같이 있던 서유리에게 말했다.“먼저 갈게요.”서유리도 오서희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네. 내일 봐요.”송재이는 차에 올라탄 후, 서유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서 그 차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요즈음 사유리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그녀가 일편단심 좋아했던 박윤찬이 드디어 주동적으로 데이트 요청을 했지만,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준 시계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다.“유리 씨, 유리 씨의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왜요? 제가 어디가 부족한가요?”서유리는 어릴 적부터 첼로를 배웠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서 자신이 동경했던
솔직히 말해서 당시 설씨 저택에서 송재이는 설영준과 첫만남을 가진 후 며칠 만에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가졌다.그때 그녀의 어머니는 편찮았고 또 아버지는 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다. 병원비의 부담에다 출생 비밀의 충격에 그녀는 답답해서 한동안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취해서 로비에서 방금 룸에서 나온 설영준과 부딪친 것이다. 평소에 감정을 많이 억제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통제력을 쉽게 잃는다더니 송재이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송 선생?”설영준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게 착해 보이고 단정하고 고상해 보이는 여자가 이런 곳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반쯤 얼큰하게 취한 송재이는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매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 했다.“오빠, 날 데리고 가요. 네?”그녀는 자신의 유혹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이 남자는 이런 직설적이고 촌스럽고 저속한 유혹을 많이 받아서 대수로이 여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랫동안 설영준은 주동적으로 품에 안기는 여자라면 다 받아주는 남자라고 생각했다.사실 대부분 남자는 그러하지 않은가.그날 그녀가 아니고 다른 여자라도 몸매와 얼굴이 괜찮고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그 여자를 데리고 갔을 것이다.하룻밤을 지난 후 설영준은 어디서 송재이의 어려운 사정을 들었는지 자발적으로 그녀 어머니의 병원비를 지불해주는 대신에 애인으로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돈을 내고 그녀는 몸을 내준다. 송재이는 이런 거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다른 남자가 이런 제안을 하면 받아들이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영준이기에 그녀는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설영준은 미리 결과를 짐작한 듯 얼굴에 지은 미소는 자신감 외에 약간 경멸스러운 듯한 빛이 보였다. 송재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지지 못하고 그 뒤로 이렇게 많이 엮이게 된 것은 꼭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후에 설영준은 그녀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으로 그녀를 지켜줬고 따뜻한 사소한 일들도 많이 해주었다.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지내면서 밥도 자주 해주었다. 침대에서도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대해줘서 그녀에게 자기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라는 착각이 생기게 하였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송재이는 설영준의 마음속에 자기는 점점 중요한 사람으로 되었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어쩌면 설영준은 그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이런 일들을 함으로써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오서희는 사진 한 묶음으로 그녀의 모든 망상을 완전히 깨뜨렸다. 원래 품고 있었지만, 그녀가 조심스레 숨겨왔던 의혹들이 이때 무자비하게 까발렸다. “영준이가 송 선생을 마음에 뒀다기보단 송 선생의 운이 좋아서 그런 거 같아요. 마침 그가 첫사랑을 잃어서 몇 년 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송 선생이 갑자기 나타난 거죠. 지금 그가 송 선생에게 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보상일 뿐이죠.”오서희는 송재이를 향해 지은 미소에 심지어 동정심이 어려 있다.오서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송재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얘기를 일찍 송 선생에게 말했어야 했어요. 근데 저도 여자라 여자는 가끔 자신을 속이는 것을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송 선생이 달콤한 꿈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으라고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거예요.” 오서희는 정말 이런 선심을 썼을까?송재이가 보기엔 오선희는 그냥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부르르 떨 뻔했다.“영준이는 마음이 한결같다고 할 수 있죠. 몇 년이나 흘렀어도 여전히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무정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첫사랑 외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