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도 요새 살이 많이 빠졌어. 그래도 정신은 점점 차리는 것 같더라. 괜찮아. 여자아이니 심술부릴 만도 하지.”민효연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주성 그룹도 요즘 인수 의향을 내비치던데 민 사장님은 알고 계셨나요?”설영준이 갑자기 물었다.장기 말을 들고 있던 민효연의 손이 멈칫했다.“설 대표, 주성 그룹이 인수한다는 회사를 귀띔해 주기라도 하려고?”“회사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입니다.”이 일은 주성 그룹도 매우 조심스러웠기에 성사하기 전에는 절대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바닥에 몸을 담그고 있는 설영준은 이런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아도 들렸다.이에 설영준은 역시 짬밥은 무시 못 한다고 생각했다. 설동훈도 전에 주정명은 속이 매우 좁은 사람이니 조심하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주정명이 노린 건 설영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설영준은 눈빛이 날카로웠고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 아리송했다.“사장님이 지금까지 한 제일 현명한 선택이 주성 그룹과 선을 그은 거예요. 그러니 제가 손을 쓴다 해도 사장님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민효연이 한참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내 생각은 여전히 같아. 주정명이 한 짓은 나랑 아무 상관 없어. 하지만 현아는 건드리지 마. 현아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그건 주현아가 사장님만큼 총명한지 봐야죠. 낄끼빠빠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걸 잘해야 무사할 수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설영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주현아가 내 아이를 죽인 건 사실이잖아요. 내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으니 이 원수는 죽을 때까지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맞은편에 앉은 민효연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던 민효연이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내 딸은 내가 잘 교육할게. 전에 설 대표한테 한 짓은 내가 대신 사과하지.”“사과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앞으로 다시는 범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설영준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이
설영준이 소파에서 외투를 집어 들더니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갈아신으며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밖에서 기다릴게.”이에 송재이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코끝에는 설영준 특유의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참 좋아했던 향기였고 너무 좋아서 푹 빠졌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마치 그녀를 잠식하는 독약처럼 느껴졌다.뒤에서 설영준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송재이는 설영준이 완전히 떠난 게 아니라 밖에 세워둔 차에서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설영준이 어떻게 응징할까? 송재이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민효연도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도 전무는 그냥 송 선생님이 오면 이 반찬통을 건네주라고만 했어요. 그때 내 신경은 온통 연우한테 쏠려 있었고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민효연이 말끝을 흐린 건 송재이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녀가 도정원에게 만두를 준 사실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애초에 설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파혼할 때 설영준은 여론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지수라는 희생양을 찾았다. 덕분에 송재이는 진흙탕과도 같은 상황에서 발을 빼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송재이는 설영준이 그녀를 위해 한 일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민효연은 설영준의 입장에 대입해 봤다. 어떤 목적이든 설영준은 송재이를 보호하려 애썼지만 송재이의 행동을 보면 결국 설영준은 죽을 쒀서 개를 준 셈이 된 것이다.자존심이 세고 오만한 설영준이 과연 이를 견뎌낼 수 있을까?민효연의 눈에 예쁘장한 송재이는 남자를 잘 홀리는 여우와도 같은 이미지였다. 그리고 남자가 잘 꼬이는 여자는 다른 여자의 경멸을 살 것이다.하지만 지금 민효연의 생각은 달라졌다. 송재이가 일부러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런 행동을 벌인 거라면 정말 너무 상스럽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거라면, 딱히 골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그녀의 행동 하나에 남자가 걸려드는 거라면 송재이는 타고났을 수도 있다. 타고난 건 어쩔
아까 별장에 있을 때부터 송재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도 면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건 설영준에게 거짓말을 한 것도 모자라 여러 번 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아닌데 말이다.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릴 적 받은 가정교육 때문인지 약삭빠르고 둥글지 못했다. 대체로 듬직하고 성실한 성격인데 가끔 이렇게 걸리면 잘못을 저지른 초딩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반찬통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설영준에게 건네주었다.“이거...”하지만 설영준은 받지 않았다. 그저 앞 유리로 까마득한 어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라이터를 송재이에게 던졌다. 송재이는 그제야 반응하고는 허둥지둥 담배에 불을 붙였다.담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왜 거짓말했어?”설영준의 목소리는 침착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송재이에겐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 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송재이는 동문서답형으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저번에 도 전무님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거든. 아저씨가 참 좋은 분 같더라고. 도 전무님도 좋은 분이고. 그리고 연우도 좋은 아이고...”“한 명씩 돌아가면서 칭찬하는 걸 보니 결혼이라도 하고 싶다는 소리야? 그러면 그들과 섞일 명분이 생기는 거잖아.”설영준의 말은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설영준은 송재이가 가정의 따듯함을 갈망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도씨 가족을 좋아해 연우의 새엄마가 되겠다고 나올 수도 있다.“아니야! 결혼이라니 무슨 말이야!”송재이가 잠깐 멍해 있다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정말 설명하면 할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그럴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설영준이 코웃음 치며 오만한 표정으로 훈수를 두었다. 그가 발견한 것만으로도 벌써 두 번째인데 진도를 어디까지 뺐는지 설영준은 알 수 없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은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문 나머지 으스러질 것 같았고 바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다행히 이 길에 다른 차가 없었기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송재이도 안전벨트를 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정말 튕겨 나갔을 수도 있다.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고 나가려는데 설영준이 잽싸게 그녀의 손을 꽉 눌렀다.송재이가 그런 설영준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이거 놔...”하지만 설영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키스했다.주변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바람만 쌩쌩 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송재이는 설영준과 키스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설영준은 키스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서로 기분이 상한 지금 눈앞에서 사라져 주지는 못할망정 키스를 할 기분이 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귓가에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일 수도 있고 요동치는 바람 소리일 수도 있다.“송재이, 나 화나게 하지 마. 나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설영준이 송재이의 귓불을 깨물며 나쁜 남자 특유의 매혹적이고 사악한 톤으로 속삭였다.설영준의 손이 송재이의 허벅지를 스쳤다. 이내 그는 촉촉이 젖은 손을 그녀 눈앞에 흔들어 보이더니 코웃음 쳤다. 송재이는 얼굴이 너무 화끈 달아올라 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도정원은 돌싱에 딸이 있긴 했지만 사람이 정직하고 우수했다. 도정원이 조금이라도 덜떨어졌다면 설영준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도정원보다 설영준을 더 화나게 한 건 송재이였다. 그녀의 불성실함에 화났고 그녀가 뭔가를 숨기는 거세 화났다. 그것도 모자라 송재이는 지금 얕은 수작을 부리기까지 했다.설영준은 차에서 키스하는 걸로 송재이의 정신을 반쯤 빼놓았다. 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어 장하 별장으로 향했다. 이 별장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송재이도 이곳이 익숙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차에서 내린 설영준은 거의 송재이를 잡아끌다시피 안으로
정신이 몽롱한 송재이에게 설영준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송재이의 얼굴에 뽀뽀하고는 이렇게 말했다.“앞으로 한 번만 더 얕은 수작 부리면 이렇게 응징할 거야. 알았지?”설영준은 ‘도정원’이라는 이름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 자꾸 꺼내면 그가 뭔가 질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설영준은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송재이가 헛된 망상에 빠지는 게 싫었다. 송재이를 응징하고 마음이 편해진 설영준은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송재이는 멍한 표정으로 설영준을 돌아봤다. 침착한 설영준의 얼굴이 달빛 아래 온화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이에 송재이의 마음에 실망이 엄습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오늘 밤 송재이는 장하 별장에서 잤다.원래 여기에 뒀던 일상용품과 옷은 이미 다 가져간 상태였다. 이튿날 잠에서 깬 송재이는 그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거울 앞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설영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송재이가 멈칫하더니 쇼핑백을 열었다. 안에는 세면도구와 그녀 사이즈의 옷과 바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평소 입는 그런 브랜드는 아니었다.설영준은 원래도 송재이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그녀가 한 브랜드 옷만 입는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송재이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설영준이 그런 송재이를 보며 물었다.“안 바꿔?”송재이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쇼핑백을 받아 갔다. 임시로 입는 거니 그냥 대충 입기로 했다.“고마워.”송재이는 이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욕실 문을 닫았다.설영준도 송재이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채고 문 앞에 1분 정도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송재이가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거실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설영준이 아침을 준비한 것이다. 설에 며칠 같이 지내면서 사랑을 나눈 뒤로 매번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설영준은 그녀에게 밥을 해주곤 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요리를 꽤 좋아했다.
송재이가 웃음을 참으며 설영준의 입가를 가리켰다.“여기, 부스러기 묻었어.”아마도 빵을 먹다가 묻은 것 같았다. 진지한 설영준의 표정과 부스러기는 묘하게 이질적이었다.설영준이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아냈다. 여러 번 반복해도 닦아야 할 위치를 닦지는 못했다.“거기 아니야.”가만히 보고 있던 송재이가 손을 내밀어 대신 닦아줬다.“이제 됐어.”송재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매우 뜨거웠다.멈칫하던 송재이가 설영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송재이는 얼른 손을 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만약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송재이는 느끼한 변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영준은 마치 플러팅에 최적화된 사람처럼 여자를 홀리는 데 능숙했다. 돌직구였지만 매우 자연스러웠다.송재이는 설영준이 어딘가 사악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직함과 사악함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도대체 어느 쪽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설영준이 만약 고대 신화에 나왔다면 분명 남자 구미호로 나왔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결국 그의 남자다운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항상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쪽일 것이다.송재이는 순간 박윤찬이 떠올랐다. 저번에 설영준의 집에서 설을 보낼 때 송재이의 얼굴에 밀가루가 묻은 적이 있었다. 이를 발견한 박윤찬이 핸드폰을 가져다 화면으로 송재이의 얼굴을 비춰주며 닦으라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송재이는 박윤찬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홀릴 줄 몰랐기에 그냥 FM 답게 해결하면 그만이었다.박윤찬가 비기면 설영준은 정말 요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설영준은 송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송재이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자 설영준의 입꼬리가 묘한 각도로 올라갔다. 원하는 걸 이뤘다는 의미였다.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을 홀리는 게 플러팅의 최고 경지 아닐까?...식사를
전화를 끊은 주현아의 머릿속엔 설영준과 송재이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짜증 났지만 한편으로 서럽기도 했다.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질투도 섞여 있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주현아를 힘들게 했다.몇 분 뒤, 주현아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지금 바로 송재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직접 얼굴 보고 대화하고 싶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차를 타고 오케스트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이목을 끌까 봐 설영준에게 길 맞은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설영준도 바로 아래에 세울 생각은 없었지만 송재이가 이렇게 말하자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설영준과의 사이가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설영준이 송재이를 차갑게 쏘아봤다.“나 갈게.”송재이는 예의상 이렇게 말했다. 설영준이 송재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앞을 바라보며 대꾸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거지?송재이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없던 터라 바로 차에서 내렸다.오전 훈련이 절반쯤 끝나고 잠깐 화장실에 들린 송재이는 거울 앞에서 두 여자애가 토론하는 걸 들었다.“너도 들었어? 누가 우리 오케스트라 인수한다고?”“나는 그냥 찌라시인 줄 알았는데 너도 들었구나.”“에이 설마. 이렇게 갑자기?”눈이 휘둥그레진 송재이가 얼른 화장실에서 나와 대화에 끼어들려 했다.“방금 한 얘기 뭐예요? 누가 오케스트라를 인수해요?”...이 소식은 아직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내부적으로 쉬쉬거리는 정도였고 단장에게 확인한 내용은 없었다.연습실로 돌아온 송재이는 마음이 불안했다. 인수라면 사안이 중대한데 아직 어느 회사에서 인수하는지도 모른다.송재이는 앞길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연지수가 몸을 배배 꼬며 걸어왔다. 정교한 화장에 파마도 다시 한 것 같았다.송재이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송재이는 연지수에게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송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재채기했다.연지수가 고개를 돌리더니 자기가 뿌린 향
점심을 먹고 돌아온 송재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현아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이곳은 주현아가 처음 파견 업무를 나온 곳이기도 했다. 주현아의 까만 눈동자가 송재이를 향했다.“나 찾으러 온 거예요?”송재이는 자기를 아래위로 훑는 듯한 주현아의 눈빛이 매우 거슬렸다.전에는 주현아가 설영준의 약혼녀였다면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송재이도 더는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주현아가 눈을 찌푸리더니 턱을 살짝 들었다.“잠깐 얘기 좀 할까요?”송재이는 주현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현아가 원한다고 그녀가 꼭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송재이는 주현아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마침 나도 물어볼 거 있었어요.”주현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송재이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전에 설 대표님 약혼녀였으니 설 대표님 생일이 언제인지도 알겠네요. 언제였죠? 나는 기억이 잘 안 나서요.”아니나 다를까 주현아의 표정이 변했다. 송재이의 대담함과 직설적인 말투에 놀란 듯 보였다.어제 설영준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배짱이라도 생긴 건가? 그래서 이렇게 우쭐거리는 거겠지?송재이의 말투는 분명 도발이었다. 그리고 주현아에 대한 경고도 있었다.전에는 약혼녀일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이다. 주현아가 아무리 오만한 자태를 보여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태도 표시기도 했다.“설 대표님과 파혼한 건 맞아요. 우리 사이도 과거형이 됐죠. 그러니 만났던 사람 또 만나는 송재이 씨와 비길 것도 없죠. 근데 직접 물어봐도 되는 건 본인한테 확인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주현아도 질세라 이렇게 비아냥댔다.송재이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 그러네요. 내 남자에 관한 걸 다른 여자한테 물어보고 있었네? 내가 헛짓거리했네요.”“내 남자요?”주현아가 눈을 부릅떴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