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은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문 나머지 으스러질 것 같았고 바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다행히 이 길에 다른 차가 없었기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송재이도 안전벨트를 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정말 튕겨 나갔을 수도 있다.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고 나가려는데 설영준이 잽싸게 그녀의 손을 꽉 눌렀다.송재이가 그런 설영준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이거 놔...”하지만 설영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키스했다.주변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바람만 쌩쌩 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송재이는 설영준과 키스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설영준은 키스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서로 기분이 상한 지금 눈앞에서 사라져 주지는 못할망정 키스를 할 기분이 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귓가에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일 수도 있고 요동치는 바람 소리일 수도 있다.“송재이, 나 화나게 하지 마. 나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설영준이 송재이의 귓불을 깨물며 나쁜 남자 특유의 매혹적이고 사악한 톤으로 속삭였다.설영준의 손이 송재이의 허벅지를 스쳤다. 이내 그는 촉촉이 젖은 손을 그녀 눈앞에 흔들어 보이더니 코웃음 쳤다. 송재이는 얼굴이 너무 화끈 달아올라 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도정원은 돌싱에 딸이 있긴 했지만 사람이 정직하고 우수했다. 도정원이 조금이라도 덜떨어졌다면 설영준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도정원보다 설영준을 더 화나게 한 건 송재이였다. 그녀의 불성실함에 화났고 그녀가 뭔가를 숨기는 거세 화났다. 그것도 모자라 송재이는 지금 얕은 수작을 부리기까지 했다.설영준은 차에서 키스하는 걸로 송재이의 정신을 반쯤 빼놓았다. 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어 장하 별장으로 향했다. 이 별장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송재이도 이곳이 익숙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차에서 내린 설영준은 거의 송재이를 잡아끌다시피 안으로
정신이 몽롱한 송재이에게 설영준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송재이의 얼굴에 뽀뽀하고는 이렇게 말했다.“앞으로 한 번만 더 얕은 수작 부리면 이렇게 응징할 거야. 알았지?”설영준은 ‘도정원’이라는 이름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 자꾸 꺼내면 그가 뭔가 질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설영준은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송재이가 헛된 망상에 빠지는 게 싫었다. 송재이를 응징하고 마음이 편해진 설영준은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송재이는 멍한 표정으로 설영준을 돌아봤다. 침착한 설영준의 얼굴이 달빛 아래 온화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이에 송재이의 마음에 실망이 엄습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오늘 밤 송재이는 장하 별장에서 잤다.원래 여기에 뒀던 일상용품과 옷은 이미 다 가져간 상태였다. 이튿날 잠에서 깬 송재이는 그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거울 앞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설영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송재이가 멈칫하더니 쇼핑백을 열었다. 안에는 세면도구와 그녀 사이즈의 옷과 바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평소 입는 그런 브랜드는 아니었다.설영준은 원래도 송재이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그녀가 한 브랜드 옷만 입는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송재이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설영준이 그런 송재이를 보며 물었다.“안 바꿔?”송재이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쇼핑백을 받아 갔다. 임시로 입는 거니 그냥 대충 입기로 했다.“고마워.”송재이는 이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욕실 문을 닫았다.설영준도 송재이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채고 문 앞에 1분 정도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송재이가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거실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설영준이 아침을 준비한 것이다. 설에 며칠 같이 지내면서 사랑을 나눈 뒤로 매번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설영준은 그녀에게 밥을 해주곤 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요리를 꽤 좋아했다.
송재이가 웃음을 참으며 설영준의 입가를 가리켰다.“여기, 부스러기 묻었어.”아마도 빵을 먹다가 묻은 것 같았다. 진지한 설영준의 표정과 부스러기는 묘하게 이질적이었다.설영준이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아냈다. 여러 번 반복해도 닦아야 할 위치를 닦지는 못했다.“거기 아니야.”가만히 보고 있던 송재이가 손을 내밀어 대신 닦아줬다.“이제 됐어.”송재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매우 뜨거웠다.멈칫하던 송재이가 설영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송재이는 얼른 손을 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만약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송재이는 느끼한 변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영준은 마치 플러팅에 최적화된 사람처럼 여자를 홀리는 데 능숙했다. 돌직구였지만 매우 자연스러웠다.송재이는 설영준이 어딘가 사악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직함과 사악함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도대체 어느 쪽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설영준이 만약 고대 신화에 나왔다면 분명 남자 구미호로 나왔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결국 그의 남자다운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항상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쪽일 것이다.송재이는 순간 박윤찬이 떠올랐다. 저번에 설영준의 집에서 설을 보낼 때 송재이의 얼굴에 밀가루가 묻은 적이 있었다. 이를 발견한 박윤찬이 핸드폰을 가져다 화면으로 송재이의 얼굴을 비춰주며 닦으라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송재이는 박윤찬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홀릴 줄 몰랐기에 그냥 FM 답게 해결하면 그만이었다.박윤찬가 비기면 설영준은 정말 요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설영준은 송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송재이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자 설영준의 입꼬리가 묘한 각도로 올라갔다. 원하는 걸 이뤘다는 의미였다.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을 홀리는 게 플러팅의 최고 경지 아닐까?...식사를
전화를 끊은 주현아의 머릿속엔 설영준과 송재이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짜증 났지만 한편으로 서럽기도 했다.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질투도 섞여 있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주현아를 힘들게 했다.몇 분 뒤, 주현아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지금 바로 송재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직접 얼굴 보고 대화하고 싶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차를 타고 오케스트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이목을 끌까 봐 설영준에게 길 맞은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설영준도 바로 아래에 세울 생각은 없었지만 송재이가 이렇게 말하자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설영준과의 사이가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설영준이 송재이를 차갑게 쏘아봤다.“나 갈게.”송재이는 예의상 이렇게 말했다. 설영준이 송재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앞을 바라보며 대꾸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거지?송재이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없던 터라 바로 차에서 내렸다.오전 훈련이 절반쯤 끝나고 잠깐 화장실에 들린 송재이는 거울 앞에서 두 여자애가 토론하는 걸 들었다.“너도 들었어? 누가 우리 오케스트라 인수한다고?”“나는 그냥 찌라시인 줄 알았는데 너도 들었구나.”“에이 설마. 이렇게 갑자기?”눈이 휘둥그레진 송재이가 얼른 화장실에서 나와 대화에 끼어들려 했다.“방금 한 얘기 뭐예요? 누가 오케스트라를 인수해요?”...이 소식은 아직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내부적으로 쉬쉬거리는 정도였고 단장에게 확인한 내용은 없었다.연습실로 돌아온 송재이는 마음이 불안했다. 인수라면 사안이 중대한데 아직 어느 회사에서 인수하는지도 모른다.송재이는 앞길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연지수가 몸을 배배 꼬며 걸어왔다. 정교한 화장에 파마도 다시 한 것 같았다.송재이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송재이는 연지수에게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송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재채기했다.연지수가 고개를 돌리더니 자기가 뿌린 향
점심을 먹고 돌아온 송재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현아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이곳은 주현아가 처음 파견 업무를 나온 곳이기도 했다. 주현아의 까만 눈동자가 송재이를 향했다.“나 찾으러 온 거예요?”송재이는 자기를 아래위로 훑는 듯한 주현아의 눈빛이 매우 거슬렸다.전에는 주현아가 설영준의 약혼녀였다면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송재이도 더는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주현아가 눈을 찌푸리더니 턱을 살짝 들었다.“잠깐 얘기 좀 할까요?”송재이는 주현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현아가 원한다고 그녀가 꼭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송재이는 주현아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마침 나도 물어볼 거 있었어요.”주현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송재이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전에 설 대표님 약혼녀였으니 설 대표님 생일이 언제인지도 알겠네요. 언제였죠? 나는 기억이 잘 안 나서요.”아니나 다를까 주현아의 표정이 변했다. 송재이의 대담함과 직설적인 말투에 놀란 듯 보였다.어제 설영준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배짱이라도 생긴 건가? 그래서 이렇게 우쭐거리는 거겠지?송재이의 말투는 분명 도발이었다. 그리고 주현아에 대한 경고도 있었다.전에는 약혼녀일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이다. 주현아가 아무리 오만한 자태를 보여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태도 표시기도 했다.“설 대표님과 파혼한 건 맞아요. 우리 사이도 과거형이 됐죠. 그러니 만났던 사람 또 만나는 송재이 씨와 비길 것도 없죠. 근데 직접 물어봐도 되는 건 본인한테 확인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주현아도 질세라 이렇게 비아냥댔다.송재이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 그러네요. 내 남자에 관한 걸 다른 여자한테 물어보고 있었네? 내가 헛짓거리했네요.”“내 남자요?”주현아가 눈을 부릅떴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만
주성 그룹에 도착한 주현아는 바로 주정명이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다리를 꼰 채 주정명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주현아의 시선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방현수라고 합니다.”그는 주성 그룹 협력 회사의 재무팀 팀장으로 오늘은 주정명과의 미팅 때문에 이곳에 방문했다.주현아는 싱긋 웃고는 그와 악수를 했다.그녀는 그제야 이 남자를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렸다.방현수는 송재이와 함께 춤을 춘 적이 있었고 설영준과 연지수가 끌어안고 춤추고 있는 사진 속 뒤편에 찍혔었다.방현수는 당시 송재이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그 장면을 떠올린 주현아는 점점 미소를 지워갔다.방현수가 주정명과의 얘기를 다 마치고 사무실을 떠나려는 그때 주현아는 그를 불러세우더니 연락처를 교환하며 서로 카톡도 추가했다.그 모습을 보던 주정명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방현수가 사무실을 나간 뒤 그는 주현아를 향해 물었다.“너 설마 쟤가 마음에 든 거냐?”방현수는 일개 팀장일 뿐이고 설영준보다는 한참이나 급이 낮은 그런 사람이다.주현아는 그의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아빠, 내가 미쳤다고 저런 사람이 마음에 들겠어요? 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송재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방현수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설영준은 2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낯선 번호로 온 것이었지만 내용을 보는 순간 발신자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그는 메시지 내용을 캡처하고는 [내 남자]라는 세글자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 말을 한 당사자인 송재이에게 캡처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주현아를 ‘도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마지막 말에만 초점을 두었다.[네 남자가 누군데?]송재이는 그 메시지를 보고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주현아가 이렇게 빨리 설영준에게 얘기했을 줄은 몰랐다.주현아를
설영준은 왼손에 휴대폰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오후 2시가 되었을 무렵 그는 주정명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레스토랑 룸.주정명은 설영준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나이도 그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매번 아들뻘인 설영준과 만날 때면 이상하게 불편했고 심지어는 우스갯소리로 마치 주상전하를 모시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하지만 주현아와의 약혼이 무산된 일만큼은 설씨 가문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때 설영준이 안으로 들어오고 주정명은 그저 고개를 살짝 까딱할 뿐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다.웨이터가 들어온 후 설영준은 주정명이 즐기는 우롱차를 주문했다.“기억력이 좋구나. 이제는 예비 사위도 아닌데 내가 즐겨 마시던 것도 다 기억하고.”“그럼요. 그래서 누가 언제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 같은 것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웨이터가 나간 뒤 설준영은 주정명을 바라보며 뼈 있는 말을 꺼냈다.이에 주정명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아무래도 설영준이 무언가를 단단히 준비하고 온 듯했다.그리고 그 무언가가 오케스트라 인수 건보다 더 강력하고 날카로운 무기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최근 주성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여자가 속해 있는 오케스트라를 인수하시겠다고요? 돌려 말할 생각 없습니다. 그 인수 건 계속 진행할 생각이라면 저도 대표님께서 몇 년 전에 저질렀던 일을 그대로 경찰서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뭐야?”설영준은 그의 여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름을 대지 않았다.주정명은 이미 머리가 새하얘져 입이 바짝 말라왔다.“설영준,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20년 전, 대표님이 건설회사 대표직을 맡고 있었을 당시 부실공사로 다리 하나가 붕괴했었죠. 그때 3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은 인명피해가 있었고요. 사건이 일어난 뒤 대표님은 제일 먼저 다리 공사 총 책임자를 매수해 수치를 조작했고 가짜 증언을 하게 했죠.
저녁.송재이는 서유리와 함께 빌딩에서 걸어 나왔다.빌딩 바로 앞 도로변에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멈춰서 있었다.그 차가 설영준의 차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서유리는 옆에 있는 송재이에게 눈치를 주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발견하고는 창문을 내려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타요.”그의 얼굴을 본 순간 송재이는 그가 ‘네 남자’라 했던 말이 생각나 어딘가 모르게 민망하고 또 어색했다.저녁 바람이 솔솔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다.송재이는 머리를 뒤로 한번 쓸어넘긴 다음 운전석에 앉은 그를 향해 말했다.“유리 씨랑 가야할 곳이 있어요. 먼저 가요.”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서유리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설영준은 피식 웃더니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정말 안 탈 거예요? 악단이 곧 인수되게 생겼다던데 그 인수하려는 사람이 나란 생각은 못 하나 봐요?”그 말에 송재이와 서유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서유리는 서둘러 송재이를 차량 쪽으로 떠밀며 말했다.“빨리 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요. 그리고 인수하려는 사람이 정말 대표님이라면 그때는 미인계로 어떻게 해봐요, 알겠죠?”송재이는 어이가 없었다.미인계라니!그때 빌딩 안에서 사람들이 밀려 나왔고 그들을 보고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이 송재이는 서유리와 인사하고 난 후 차에 올라탔다.한동안 설영준에게서는 처음 맡아보는 여자 향수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가 주현아의 향수 냄새였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하지만 최근 그에게서 그녀의 향수 냄새는 사라졌고 지금도 설영준의 차 안에서는 은은한 우디향만 풍겼다.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송재이는 시트에 등을 편히 기댔다.그리고 차에 시동이 걸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물었다.“인수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응, 들었어.”그 말은 인수하려는 사람이 설영준은 아니라는 소리였다.‘아까는 그냥 하는 소리였나 보네. 설영준이 아니면 대체 누구지?’“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가?”송재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