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뒤에야 강학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됐네. 유리는 어려서부터 절대 밑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지. 자네도 결국 유리를 설득하진 못할 거야.”갑자기 드러난 비밀을 애써 묻어보는 강학도였다.“할아버님, 장모님도 할아버님도 그땐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그 이유가 뭐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힘들어지는 건 유리뿐이야.”“네, 유리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요.”“난 저번 세대 사람들 사이의 원한은 그저 여기서 끝나길 바랄 뿐이야.”강학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시준이 물었다.“그러니까 제 말은... 왜 이런 가짜 비밀을 만드셨나 그 말입니다.”“자네...”이에 강학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강유리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고정남 대표가 유리와 친자검사를 하신 건 아십니까? 물론 그쪽에서 받은 건 제가 조작한 결과였습니다. 진짜는 제 손에 있고요.”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애초에 검사 결과를 조작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육시준이 받은 진짜 결과 보고서에도 역시 강유리와 고정남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적혀있었다.그렇다면 왜?가짜 비밀 하나를 숨기기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이유가 뭘까? 가짜 비밀로 도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려 하는 걸까?“유리도 알고 있나?”항상 의연하던 강학도의 얼굴에 처음으로 초조함이 묻어났다.“아직 모릅니다. 하지만...”“유리에겐 말하지 말게!”“...”“그럼 이거 하나만 묻겠습니다. 유리... 정말 할아버님 외손녀가 맞긴 한 겁니까?”육시준이 강학도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당연하지. 나도 민영이도 누구보다 유리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알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비밀을 지켜드리도록 하죠.”언젠가 강유리가 여기까지 알아낸다면. 또 진실을 원한다면 그땐 보장할 수 없겠지만.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눈송이가 하나둘씩 흘러내렸다.둘이서 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했냐고 따져물으려던 강유리 역시 창밖의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와, 눈
‘흥, 뭐 대단한 거 도와주는 척하긴. 어차피 그것도 내 계획에 있었다고!’“레드브라이드 기획서도 확인했어. 다음 해 첫 신제품으로 출시하자. 우리 결혼식 올리고 바로. 수익 배분은 네가 제시한대로 LK가 3 세마 스튜디오가 7. 어때?”“...”그제야 눈을 뜬 강유리가 묘한 시선으로 육시준을 살폈따.‘호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시겠다? 오히려 미안해지는데?’강유리가 반응을 보이자 육시준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레드브라이드도 내 친구가 하는 곳인데 인테리어 마치고 내가 따로 개인 온천탕을 만들었어. 레드브라이드의 3대 온천탕은 아무한테나 개방하는 거 아닌 거 알지?”풍문으로는 레드브라이드의 3대 개인 온천탕은 세 창업주가 각자 개인 온천탕으로 나눠가졌다더니 그중 하나가 육시준일 줄이야.강유리의 눈이 반짝임을 더했다.“주인이 하나, 나 하나 그리고 이혁이가 하나 이렇게 나눠가졌었지. 우리야 워낙 바쁘니까 자주 못 가긴 하지만 이혁이는 자주 가는 것 같더라.”빌드업을 마친 육시준이 괜히 한숨을 푹 내쉬었다.“얼마 전에 네가 온천욕 하고 싶다길래 오랜만에 거기로 가볼까 했는데 나만 쏙 빼놓고 갈 줄은 몰랐네.”“흐음...”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강유리가 물었다.“어차피 잘 안 가는 곳이면 차라리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하, 뭐라고?”차가운 시선에 강유리가 괜히 헛기침을 해보였다.“큼큼. 농담이야. 내가 뭐 그렇게 이기적인 와이프인가? 설마 내가 혼자 즐기려고 달라고 하겠어?”“그래?”“그럼! 우리 지금 열애 중이잖아. 커플은 당연히 휴가도 같이 가야지.”“...”강유리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육시준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뭐든 이익을 따져대는 이 여자를 와이프로 맞이한 본인이 재력가라는 것이 솔직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그런데 육경서가 정말 대출금 상환을 추진할까? 성신영과 사이가 틀어지긴 했다지만 그래도 법적으로는 부부사이잖아. 이렇게 해서 자기한테 좋을 게 없을 텐데?”“그렇긴
‘신영이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위로 한마디는커녕 이렇게 매정하게 관계를 끊어내려 하다니.’이익 앞에서는 사랑이고 의리고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 알아보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유쾌하지 못한 통화를 마친 성홍주는 바로 육경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육경서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성홍주는 더 화가 치밀었다.“육 서방,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깊은 한숨을 내쉰 성홍주가 물었다.“은행에서 대출 상환 독촉전화가 걸려왔던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1년 뒤에 갚기로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왜? 내가 갚지 못할까 봐?”“아, 그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구나...”육경서 역시 이 상황이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유강그룹 상황이 악화되니 은행쪽에서도 불안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집안에서 제 말은 딱히 통하지 않아서요. 형이 결정한 일인 것 같습니다.”“개소리! 보증 설 때까지만 해도 이런 소리는 없었잖아!”“...”갑작스러운 침묵에 성홍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하긴, 달라진 게 어디 육경서의 태도뿐일까? 지금 성홍주의 처지에 이렇게 따져물을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잠시 후, 성홍주는 한결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어찌 되었든 한 가족인데 이렇게까지 나와야겠나? 지금 대출금을 상환하는 건 불가능하네. 설마 이 별장마저 빼앗아갈 셈인 건가?”“말씀드렸다시피 이건 LK 본부에서 내린 결정이라...”“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게! 내 이거 하나만 물을 테니 솔직하게 대답해. 설마 우리 신영이랑 정리하려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아버님께서 먼저 물으시니 저도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살짝 한숨을 내쉰 육경서가 말을 이어갔다.“저랑 신영이 요즘... 이혼 절차 밟는 중입니다.”“...”통화를 마친 뒤에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성홍주는 소
“어차피 신영이가 하지도 않는 거 우리 문영이가 좀 하면 어디 덧나니? 자매들끼린 서로 옷도 공유하고 액세서리도 같이 쓰고 그러는 거야!”“참나, 자매는 무슨... 남의 집에서 빌붙는 주제에...”“어머, 형부. 뭐라고 좀 해봐요. 자꾸 오냐오냐하니까 애 버릇이 이렇게 나빠지는 거 아니에요.”어느새 다가온 왕소영까지 싸움에 합세하니 성홍주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매일매일이 전쟁 같은 이쪽과 달리 JL빌라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대출 상환으로 성홍주를 압박하기 위해선 회사 상황 악화를 핑계로 대야 했으므로 최근 강유리는 회사 업무는 거의 보지 않는 상태였으니 오히려 전보다 더 여유로운 일상이 이어졌다.금요일 밤.두 사람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일을 하고 있었다.소파에 앉아 스케치를 하던 강유리가 하늘하늘 내리는 눈꽃을 보곤 문득 입을 열었다.“여보, 오늘 금요일이다?”이에 육시준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응. 오늘 밀린 업무 다 처리하고 내일 제대로 놀아줄게.”‘뭐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까먹은 거야.’스케치북을 내려놓은 강유리는 살금살금 육시준에게 다가갔다.‘흠, 회의 중은 아닌 것 같고.’확인을 마친 강유리는 조용히 2층 옷방으로 향했다.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린 육시준은 조금 갸웃거렸지만 곧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급한 파일을 확인하고 일어서려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강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맨발 상태인 강유리는 실크 소재의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조금 헐렁하게 묶은 끈이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였다.자리에서 일어서던 육시준은 흠칫하다 자연스레 손가락으로 끈을 톡 건드렸다.가운이 스르륵 떨어지며 강유리가 안에 받쳐입은 블루 수영복이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스타일의 수영복이었지만 긴 머리카락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쇄골, 빼어난 각선미가 묘한 섹시함을 부각시켜주었다.육시준의 리액션이 꽤 마음이 들었는지 강유리는 나름 포즈까지 취하며 물었다.“내일 이거 입고 가려고 하는데 어때?
“글쎄. 그런 걸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이 꾸몄는데?”육시준의 품에서 홱 도망친 강유리는 의자에 앉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펜을 굴렸다.“너무 일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서 관심 좀 끌려고 이렇게 입어봤어.”어느새 소파에서 일어선 육시준이 무심하게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그러니까 유혹 맞잖아.”“저~언혀. 당신이 응큼하니까 유혹으로 받아들인 거겠지.”강유리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다리를 들어 육시준의 허벅지를 막았다.매끈한 다리가 크로스되고 따뜻한 조명까지 더해지니 어딘가 야릇한 포즈가 연출되었다.육시준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조금 거칠어진 숨이 지금 그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하얀 강유리의 발목을 잡은 육시준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정말 아무 생각없이 이렇게 입은 거 맞아?”“글쎄... 아까 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내 답도 달라질 것 같은데?”“그렇다면 조금 급했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기사로 답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오늘 오후 법원에서 강제 집행이 시작되었으니 아마 내일쯤 기사로 나올 터, 이번 주 안으로 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육시준이었다.“그래?”드디어 흥미가 생긴 건지 강유리는 자세를 고쳐앉으려 했지만 발목을 잡은 육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아!”허리를 더 숙인 육시준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자, 내 답은 이미 준 것 같은데. 네 답은 뭐야?”“진짜 내일 기사로 나올 거라고? 이렇게 빨리?”솔직히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건지 진도를 묻고 싶었던 건데 생각보다 빠른 진척에 강유리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윽... 뭐, 뭐 하는 거야.”육시준의 입술이 다리에 닿자 강유리가 움찔거렸다.“내, 내일 수영복 입어야 한단 말이야. 그만...”“알아. 조심할게.”하지만 대답과 달리 육시준의 입술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게다가 방금 전 이 수영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더 강조하듯 라인이 보이는 곳만 집요하게 공격하
“엥? 얼마 전에 LK그룹 육시준 대표랑 강유리 대표가 사귄다는 스캔들 있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온다는 건 두 사람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가?”“꼭 그렇게도 볼 수 없는 게 부녀 사이가 안 좋은 건 알 사람들은 다 아니까.”“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 맞는 것 같던데?”“...”유강그룹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댓글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육시준과 강유리 사이를 응원하는 글들이 보이자 강유리는 웃음을 터트렸다.또 댓글 알바라도 고용한 거냐며 물으려던 그때,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는 걸 발견한 강유리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육시준이 물었다.“왜 그래?”“아, 아니야.”어느새 평소의 표정을 되찾은 강유리가 대답했다.“그냥. 기사 내용만 보면 유강그룹은 파산 직전인 회사인 것 같은데 사람들 반응은 꽤 낙관적인 것 같아서.”“그거야 네 이미지 덕분 아닐까?”“아니야. 당신과 나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정말 우리 두 사람이 사귄다면 유강그룹이 위기에 빠졌을 때 LK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뭐, 그렇지.”고개를 끄덕인 육시준은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강유리는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얼핏 보였던 서랍속 여성용 라이터 때문이었다.흡연자인 릴리에게 라이터를 선물하기 위해 여러 브랜드를 뒤지다 워낙 독특한 디자인이라 꽤 인상이 깊었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런데... ‘왜 육시준 서랍장 속에 저 라이터가...’그리고 고주영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시준 씨, 진심으로 좋아했던 여자 있었던 거 알아요? 그래서 레이싱도 그만 둔 거예요.’그녀의 도발에 강유리가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과거에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고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였다.‘그런데 저 라이터는 왜... 지금까지 남겨두고 있는 거지?’“그런데... 레이싱은 왜 갑자기 그만둔 거야?”뜬금없는 그녀의 질문
그의 질문에도 강유리는 여전히 시선을 휴대폰에 둔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서재에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나 봐?”“이 서재에 중요하지 않은 물건도 있나?”이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강유리의 손이 멈칫했다.‘하긴... 계약서며, 회사 파일이며... 서재엔 중요한 물건들뿐이지. 그렇다는 건 그 라이터도...’“그래.”어딘가 심드렁한 대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워낙 평소에도 뜬금없는 질문을 자주 하는 강유리인지라 별 생각없이 다시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종잇장을 넘기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무심하게 일만 하고 있는 육시준을 빤히 바라보던 강유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안방으로 향했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강유리는 육시준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기록을 세웠다.밤새 내린 눈이 정원에 소복히 쌓인 풍경은 굉장히 아름다웠다.평소라면 잔뜩 흥분해선 정원으로 뛰쳐나갔겠지만 창밖을 내다보는 강유리의 표정은 여전히 우울하기만 했다.한참 뒤, 정원에 익숙한 차량이 들어올 때쯤에야 강유리는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시끄러운 육경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오늘 왜 이렇게 일찍 깨셨대? 오늘 노을빌리지로 놀러 간다면서요? 픽업 왔습니다.”“형수님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우리 촬영장 밥차 맛있는데 주리 픽업도 갈겸 같이 가실래요?”“아이참, 또 뭐 그런 눈으로 봐요. 설마 형수님도 저랑 주리 사이 반대하는 거예요?”쉴새 없이 몰아치는 말 폭탄에 강유리는 더 짜증이 치밀었다.“도련님, 조용히 좀 하시죠. 형 아직 자는 중이에요.”“쯧, 아니, 형수님도 이렇게 깨셨는데 아직도 자는 중이라고요?”“왜? 난 늦잠 좀 자면 안 돼?”이때 갑자기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육경서가 움찔거렸다.잠옷 차림으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육시준이 퉁명스레 물었다.“넌 왜 왔어?”뒷담화를 하다 딱 걸린 육경서는 조각상처럼 굳어있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형수님 데리러 왔지.”“네 형수를 왜 네가 신경써? 네 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물론 형 의견도 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주방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육시준이 살짝 미가늘 찌푸렸다.어젯밤부터 태도가 묘하게 차가워지더니 아침 내내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다니.그리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육시준은 자신의 의심이 괜한 착각이 아니었음을 인지한다.“자, 도련님. 아침 일찍 일어나느라 수고 많았어요.”그가 젓가락을 뻗을 때마다 끼어들어 육경서의 접시에 음식을 집어주는 강유리의 모습은 무신경한 육경서가 봐도 어딘가 이상했다.그는 서늘한 육시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미소를 지었다.“형수님, 그만, 그만요. 저 배 터지겠어요. 전 이만 일어날게요.”“에이, 아직도 성장기인데 많이 먹어둬야죠.”친절한 미소와 함께 강유리는 육시준 앞에 놓인 우윳잔까지 빼앗아 육경서에게 건넸다.‘큼, 30대에 성장기라니. 제발 부부싸움은 둘이 있을 때만 하세요. 고래 싸움에 새우는 등이 터진다고요!’탁.이때 포크를 내려놓은 육시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강유리.”“왜?”고개를 돌린 강유리의 순진무구한 표정이 육시준은 기가 막혔다.“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어?”확신이 담긴 질문이었다.“그럴 리가. 우리 남편 잘생겼지 능력있지 자상하기까지. 백점짜리 남편인데 내가 왜 서운하겠어.”“...”‘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곧이어 육시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육경서에게로 향했다.눈빛을 캐치한 육경서가 자연스레 일어서려던 그때, 강유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다 먹었으면 떠날 채비하죠? 지금 출발하면 도착해서 바로 점심 먹을 수 있겠다.”말을 마친 강유리가 주방을 나서고...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육경서가 망설이다 물었다.“형수님 왜 저러시는 거야?”“내가 어떻게 알아?”육시준의 시선이 방금 전 강유리가 넘긴 우윳잔에 있다는 걸 발견한 육경서가 두 손으로 곱게 컵을 돌려주었다.“자, 형 마셔.”식탁 위의 애매한 분위기는 노을빌리지로 향하는 내내 이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주리한테 더 매달려 볼걸.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