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리의 말에 저택은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신영과 왕소영 모녀는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성홍주는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너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었니? 그런데 오늘 바로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성홍주의 말에 강유리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연민마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하, 아빠도 제가 어제 헤어진 걸 알고 계셨네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딸이 자기 언니 남자친구를 빼앗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강유리의 팩폭에 성홍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가족끼리 그런 일로 꼭 얼굴을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니!”성홍주가 자기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성신영이었지만 또다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나랑 천강 오빠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맞는걸.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 우린 그냥 언니가 상처를 받을까 봐 제대로 날 잡고 사과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어. 내가 맞아도 싸지 뭐.”눈시울을 붉히는 성신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홍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성홍주의 눈에 성신영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예쁜 딸이었고 강유리는 자기 엄마를 꼭 닮아 강압적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딸이었기에 마음이 성신영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구니까 남자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네 동생 반만 닮아봐. 천강이가 바람을 피웠겠어?”“아빠, 죄송해요.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비록 신영이랑 제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니 축북해줬어야 했는데 맞죠? 그 집도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주식까지 다 신영이한테 줄 걸 그랬어요.”강유리가 성신영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세 사람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뭐? 집에 주식
하지만 임천강의 비아냥거림이 들리고 순간 스쳤던 빛이 후광이 와장창 깨져버린다.‘임천강, 너도 저 집에서 들어앉은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 가식적이고 탐욕적이지. 역겹게...’임천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리는 뭔가 결심한 듯 엑셀을 거세게 밟았다.순간 차량이 화살처럼 앞으로 발사되고... 방금 전까지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임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임천강은 다급한 나머지 자기 발에 걸려 대자로 넘어지지만 핸들을 잡은 강유리는 도무지 속도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오빠!”“강유리, 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임천강을 마중나온 성신영 모녀는 비명소리만 꺅꺅 내지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끼익...”그리고 그 순간 타이어가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임천강과 단 한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드디어 멈춰 섰다.지잉...차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강유리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픽 웃었다.잔뜩 긴장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너나 잘하세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강유리의 스포츠카는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매연에 세게 콜록거리던 임천강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저 미친... 두고 봐.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여느때와 다름없이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강유리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도로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에 강유리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클럽 죽순이에 걸레라... 그래도 한때 사귀었던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결국 치미는 짜증에 강유리가 자주 가는 바로 핸들을 꺾으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어디야?”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매력적이지만 낯선 목소리.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지?’“누구세요?”“...”잠깐의 침묵 끝에 육시준은 한 번만 더
마치 다른 사람 결혼을 축하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따뜻한 조명과 은은한 디퓨저 향 때문일까 강유리는 기분이 왠지 좋아졌다.“그쪽도 결혼 축하해.”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강유리는 와인을 포도주스처럼 들이키기 시작했다.식사 도중 육시준이 잠깐 전화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유리는 와인 한 병을 전부 비워버렸으니까.취기가 오르는 느낌에 강유리는 의자에 살짝 기대어 보았다.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감싸는 여리여리한 몸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정교한 얼굴,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만한 외모였다.이때, 다가오는 육시준을 발견한 강유리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가까이 와봐.”테이블 가까이 다가간 육시준이 텅 빈 와인병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취했네.”“나 강유리야, 클럽 죽순이 강유리. 내가 그렇게 쉽게 취할 것 같아?”하지만 개미 소리만큼한 목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육시준이 허리를 숙였다.“뭐라고?”육시준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든 강유리의 눈에 옷깃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복근이 들어오고...취기 때문일까 그녀의 하얀 손이 육시준의 옷 안으로 향한다.이에 육시준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강유리!”“왜? 우리 결혼한 사이잖아. 부부끼리 이 정도도 못 만져?”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던 강유리가 막무가내로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 사이에 원피스 나시 끈이 스르륵 내려오며 강유리의 아찔한 쇄골 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로맨틱한 조명 아래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는 강유리, 이 세상에 정말 요정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육시준이었다.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모습에도 육시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오늘 처음 안 사이야. 스킨십은... 강요하지 않을게.”이때 강유리가 벌떡 일어서고 당황한 채 뒤로 물러서던 육시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든 강유리는 침대 위라는 것도 잊고 후다닥 뒤로 물러나고 그만 우스운 꼴로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악!”낮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고통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강유리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려보았다.그리고 미의 신마저도 질투할 것만 같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하지만 더 이상 잘생긴 얼굴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엔 온통 소안영이 소개해 주려던 사람은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만 가득할 뿐이었다.“너... 도대체 누구야?”이불이 걷히고 육시준의 나체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뭐야. 어제 있었던 일 다 까먹은 거야? 이렇게 무책임해도 돼? 여보?”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여보라는 호칭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강유리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보지만 휴대폰에서 들리는 소안영의 호들갑 섞인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뭐야! 강유리, 아까 그거 남자 목소리 맞지! 너 귀국한 지 이제 3일째야. 그런데 남자는 어디서 만난 거래? 그리고! 집에까지 들여? 너 정말 미쳤어?”“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강유리는 숙취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전화를 끊었다.사실 대외적으로 강유리는 클럽 죽순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주량은 그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필름이 끊기기 전, 강유리의 마지막 기억은 서로 결혼 축하한다며 와인잔을 부딪히는 것이었으니...‘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차마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나체는 쳐다보지 못하고 이불에 감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들여다 보던 강유리의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잠시 후, 겨우 이성을 되찾은 강유리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뭐지? 느낌이 이상한데?’이어 그녀의 시선이 베이지색 침대 시트로 향하고...아무런 흔적도 없는 시트를 확인한 강유리는 어느새 쑥스러움을 씻어버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육시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공격을 날리기도 전, 육시준
고개를 젓던 강유리가 다시 한번 자세히 육시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직업이 뭐야?”“비즈니스, 사업가야.”“사업가? 하, 아무리 요즘 경제가 어렵다지만... 부업으로 이런 짓까지 하나?”강유리의 눈이 커다래졌다.이에 육시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 몰라?”‘하, 무슨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말도 안 되는 변명에 강유리가 추궁을 이어가려던 그때, 강유리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는 확 어두워진 얼굴로 안방을 나섰다.어제 계약서를 체결하고 나서 강유리는 바로 전부터 함께 일하던 비서에게 엔터회사 운영 상황을 알아보라고 분부했다.컴퓨터 메일에 도착한 데이터를 확인하던 그때, 문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유강그룹은 현재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다 썩어문드러진 거대한 나무나 다름없습니다. 대외적으론 흑자를 내고 주가도 오르고 있지만... 그룹 내부에 부패, 횡령 문제가 심각합니다. 흑자 역시 장부 조작이 의심되는 상황이고요.”문자를 확인한 강유리가 피식 웃었다.그녀는 올해 안에 엔터회사 매출을 2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라는 성홍주의 조건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2배는커녕 1년 안에 구멍난 곳을 메꾸는 것도 벅찰 것만 같았다.“지금 엔터업계는 레드오션인 거 몰라. 게다가 한국 엔터시장은 로열 엔터가 꽉 잡고 있어. 유강엔터가 설 자리가 있을까? 애물단지만 떠안은 것 같은데.”이때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강유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녀의 컴퓨터 모니터 불빛에 더 오묘하게 반짝이는 육시준의 얼굴을 휙 훑은 강유리가 물었다.“그럼 스타인은?”“뭐 나름 그럴 듯한 모양은 내고 있달까?”육시준이 눈썹을 씰룩였다.“유강 엔터를 맡으면 스타인을 앞설 수 있을 것 같아?”비록 사람들은 신생 엔터회사인 스타인 엔터가 곧 로열 엔터와 견줄 수
유강엔터 본사 건물.직원들 모두 오늘 새로운 대표가 온다는 것도 그 대표가 회장 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평소 조금 붐비게 느껴지던 사무실이 오늘은 유난히 텅 빈 상태였다.직원들 중 3분의 1이 월차를 낸데다 남은 사람들도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꼴이 아무리 봐도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는 아닌 모습이다.오후 세 시쯤, 화려한 스포츠카가 회사 주차장에 들어서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강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단아하면서도 몸매 라인을 잘 살려주는 깔끔한 의상에 각선미를 부각시켜주는 아찔한 하이힐까지.전형적인 커리어우먼 그 자체였다.강유리가 무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 뒤를 따르는 비서가 회사 상황을 다급하게 브리핑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그때, 초조한 표정의 누군가가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바로 허리를 굽실거렸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직접 마중 나왔어야 하는 건데 제가 오늘 좀 바빠서요...”‘하, 텃세를 부리시겠다? 일개 비서 주제에 일 때문에 회사 대표 마중을 깜박했다는 게 말이 돼?’“아니요, 괜찮습니다.”한편, 착한 얼굴로 싱긋 웃는 강유리를 바라보던 장규진 비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역시, 원 대표 말대로 사업의 사자도 모르면서 대표 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계열사 하나 달라고 한 거구만. 안 봐도 비디오지 뭐. 그럼 오늘 제대로 기를 눌러줘야겠어.’“원 대표님은 오늘 몸이 불편하셔서 회사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인수인계는 다음 주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이번 주는 그저 회사 직원들 얼굴이나 기억해 두시죠.”장 비서의 말에 로비에 모인 직원들 모두 숨을 죽였다.부탁이 아니라 명백한 명령, 새로 온 대표에 대한 텃세 그 자체였으니까.‘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앞으로 이 회사에서 제대로 날개나 펴실 수 있을까...’하지만 장 비서의 말에 강유리는 언짢은 표정도, 겁 먹은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계속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걷던 강유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방금 전까지 안하무인이던 장 비서의 눈동자가 공포로 급격히 흔들렸다.‘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계집애인 줄 알았는데...’방금 전, 하석훈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그가 한 말이 단순히 장 비서 한 명에게 한 말이 아닌 유강엔터 직원 모두에게 날리는 경고장이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기점을 시작으로 유강엔터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단 몇 시간만에 절반이 넘는 직원이 해고당하고 여유 넘치던 복도는 해고된 직원들의 애원, 슬픔 그리고 분노의 소리로 가득했다.대한민국 대기업인 유강그룹, 그리고 그 계열사인 유강엔터의 중간 관리직으로서 다들 나름 사회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자신의 직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이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길거리를 떠도는 양아치처럼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다.잠시 후 회사에 도착한 육경서는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입을 떡 버릴 수밖에 없었다.아무런 인맥도, 사업 경험도 없는 강유리라면 원로 직원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부장급 직원들이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다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꼴이라니.‘재밌다...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휴대폰을 꺼낸 육경서는 빠르게 이 광경을 영상으로 남긴 뒤 육시준에게 전송했다.“우리 형수님 보통 분이 아니시네. 형이 왜 형수님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겠어. 잔인한 면이 아주 많이 닮았어.”한편 LK그룹 대표 사무실.동생이 보낸 영상과 문자를 확인한 육시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회사의 기강만 갉아먹던 충치 같은 이사들, 그리고 유강그룹의 친인척들이 분노로 인해 벌개진 얼굴로 회사로 쳐들어가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막는 경비원들...“사모님께서 첫 출근 날부터 부장급 이상 관리직들 그리고 이사들 중 절반을 해고하셨다고 합니다. 유강그룹에서 엔터회사는 아예 정리하려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역시 옆에서 영상을 확인한 임강준이 한마디 덧붙였다.워낙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던 강유라인지라 이번 정리해고
한편, 회사로 들어선 육경서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회사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이 코딱지만한 사무실은 또 뭐고...;“육시준.”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고개를 돌리게 만든 건 바로 강유리의 목소리였다.그리고 평소와 다른 강유리의 모습에 대외적으로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익숙한 육경서마저 어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깔끔한 셔츠에 하이웨스트 스커트, 하얀 다리 라인을 잘 살려주는 하이힐, 만화에서 나올 법한 직장룩의 정석에 꼭 들어맞는 분위기까지.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는 침착한 표정이었다.‘유강엔터... 어쩌면 형수님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도 있겠어.’“아, 강유리 대표님. 육경서라고 합니다.”선글라스를 벗은 육경서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눈앞에서 톱 연예인을 보면 신기해서라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만 한데...한참을 팔짱을 낀 채 그를 훑어보던 강유리는 먼저 내민 육경서의 손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제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시죠.”“네.”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방금 전까지 조용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뭐야! 정말 육경서잖아. 정말 우리가 육경서 전속 계약 따내는 거야?”“강유리 대표라고 했나? 보기보다 대단하잖아.”“와, 육경서 매니저로 일하고 싶다...”한편, 워낙 건물 방음이 별로인 탓에 직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육경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엔터회사면 연예인들 얼굴 실컷 봤을 텐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지? 우리 형수님... 창피하겠다.’하지만 여전히 침착한 표정의 강유리가 싱긋 웃어 보였다.“귀한 분께서 누추한 곳에 오셨네요.”상대를 띄워주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육경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아, 아닙니다. 강유리 대표님이 새 대표로 부임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목이 타네...’말을 마친 육경서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