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리의 말에 저택은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신영과 왕소영 모녀는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성홍주는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너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었니? 그런데 오늘 바로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성홍주의 말에 강유리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연민마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하, 아빠도 제가 어제 헤어진 걸 알고 계셨네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딸이 자기 언니 남자친구를 빼앗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강유리의 팩폭에 성홍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가족끼리 그런 일로 꼭 얼굴을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니!”성홍주가 자기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성신영이었지만 또다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나랑 천강 오빠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맞는걸.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 우린 그냥 언니가 상처를 받을까 봐 제대로 날 잡고 사과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어. 내가 맞아도 싸지 뭐.”눈시울을 붉히는 성신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홍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성홍주의 눈에 성신영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예쁜 딸이었고 강유리는 자기 엄마를 꼭 닮아 강압적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딸이었기에 마음이 성신영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구니까 남자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네 동생 반만 닮아봐. 천강이가 바람을 피웠겠어?”“아빠, 죄송해요.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비록 신영이랑 제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니 축북해줬어야 했는데 맞죠? 그 집도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주식까지 다 신영이한테 줄 걸 그랬어요.”강유리가 성신영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세 사람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뭐? 집에 주식
하지만 임천강의 비아냥거림이 들리고 순간 스쳤던 빛이 후광이 와장창 깨져버린다.‘임천강, 너도 저 집에서 들어앉은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 가식적이고 탐욕적이지. 역겹게...’임천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리는 뭔가 결심한 듯 엑셀을 거세게 밟았다.순간 차량이 화살처럼 앞으로 발사되고... 방금 전까지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임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임천강은 다급한 나머지 자기 발에 걸려 대자로 넘어지지만 핸들을 잡은 강유리는 도무지 속도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오빠!”“강유리, 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임천강을 마중나온 성신영 모녀는 비명소리만 꺅꺅 내지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끼익...”그리고 그 순간 타이어가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임천강과 단 한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드디어 멈춰 섰다.지잉...차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강유리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픽 웃었다.잔뜩 긴장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너나 잘하세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강유리의 스포츠카는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매연에 세게 콜록거리던 임천강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저 미친... 두고 봐.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여느때와 다름없이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강유리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도로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에 강유리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클럽 죽순이에 걸레라... 그래도 한때 사귀었던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결국 치미는 짜증에 강유리가 자주 가는 바로 핸들을 꺾으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어디야?”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매력적이지만 낯선 목소리.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지?’“누구세요?”“...”잠깐의 침묵 끝에 육시준은 한 번만 더
마치 다른 사람 결혼을 축하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따뜻한 조명과 은은한 디퓨저 향 때문일까 강유리는 기분이 왠지 좋아졌다.“그쪽도 결혼 축하해.”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강유리는 와인을 포도주스처럼 들이키기 시작했다.식사 도중 육시준이 잠깐 전화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유리는 와인 한 병을 전부 비워버렸으니까.취기가 오르는 느낌에 강유리는 의자에 살짝 기대어 보았다.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감싸는 여리여리한 몸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정교한 얼굴,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만한 외모였다.이때, 다가오는 육시준을 발견한 강유리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가까이 와봐.”테이블 가까이 다가간 육시준이 텅 빈 와인병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취했네.”“나 강유리야, 클럽 죽순이 강유리. 내가 그렇게 쉽게 취할 것 같아?”하지만 개미 소리만큼한 목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육시준이 허리를 숙였다.“뭐라고?”육시준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든 강유리의 눈에 옷깃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복근이 들어오고...취기 때문일까 그녀의 하얀 손이 육시준의 옷 안으로 향한다.이에 육시준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강유리!”“왜? 우리 결혼한 사이잖아. 부부끼리 이 정도도 못 만져?”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던 강유리가 막무가내로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 사이에 원피스 나시 끈이 스르륵 내려오며 강유리의 아찔한 쇄골 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로맨틱한 조명 아래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는 강유리, 이 세상에 정말 요정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육시준이었다.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모습에도 육시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오늘 처음 안 사이야. 스킨십은... 강요하지 않을게.”이때 강유리가 벌떡 일어서고 당황한 채 뒤로 물러서던 육시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든 강유리는 침대 위라는 것도 잊고 후다닥 뒤로 물러나고 그만 우스운 꼴로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악!”낮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고통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강유리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려보았다.그리고 미의 신마저도 질투할 것만 같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하지만 더 이상 잘생긴 얼굴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엔 온통 소안영이 소개해 주려던 사람은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만 가득할 뿐이었다.“너... 도대체 누구야?”이불이 걷히고 육시준의 나체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뭐야. 어제 있었던 일 다 까먹은 거야? 이렇게 무책임해도 돼? 여보?”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여보라는 호칭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강유리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보지만 휴대폰에서 들리는 소안영의 호들갑 섞인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뭐야! 강유리, 아까 그거 남자 목소리 맞지! 너 귀국한 지 이제 3일째야. 그런데 남자는 어디서 만난 거래? 그리고! 집에까지 들여? 너 정말 미쳤어?”“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강유리는 숙취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전화를 끊었다.사실 대외적으로 강유리는 클럽 죽순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주량은 그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필름이 끊기기 전, 강유리의 마지막 기억은 서로 결혼 축하한다며 와인잔을 부딪히는 것이었으니...‘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차마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나체는 쳐다보지 못하고 이불에 감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들여다 보던 강유리의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잠시 후, 겨우 이성을 되찾은 강유리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뭐지? 느낌이 이상한데?’이어 그녀의 시선이 베이지색 침대 시트로 향하고...아무런 흔적도 없는 시트를 확인한 강유리는 어느새 쑥스러움을 씻어버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육시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공격을 날리기도 전, 육시준
고개를 젓던 강유리가 다시 한번 자세히 육시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직업이 뭐야?”“비즈니스, 사업가야.”“사업가? 하, 아무리 요즘 경제가 어렵다지만... 부업으로 이런 짓까지 하나?”강유리의 눈이 커다래졌다.이에 육시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 몰라?”‘하, 무슨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말도 안 되는 변명에 강유리가 추궁을 이어가려던 그때, 강유리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는 확 어두워진 얼굴로 안방을 나섰다.어제 계약서를 체결하고 나서 강유리는 바로 전부터 함께 일하던 비서에게 엔터회사 운영 상황을 알아보라고 분부했다.컴퓨터 메일에 도착한 데이터를 확인하던 그때, 문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유강그룹은 현재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다 썩어문드러진 거대한 나무나 다름없습니다. 대외적으론 흑자를 내고 주가도 오르고 있지만... 그룹 내부에 부패, 횡령 문제가 심각합니다. 흑자 역시 장부 조작이 의심되는 상황이고요.”문자를 확인한 강유리가 피식 웃었다.그녀는 올해 안에 엔터회사 매출을 2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라는 성홍주의 조건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2배는커녕 1년 안에 구멍난 곳을 메꾸는 것도 벅찰 것만 같았다.“지금 엔터업계는 레드오션인 거 몰라. 게다가 한국 엔터시장은 로열 엔터가 꽉 잡고 있어. 유강엔터가 설 자리가 있을까? 애물단지만 떠안은 것 같은데.”이때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강유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녀의 컴퓨터 모니터 불빛에 더 오묘하게 반짝이는 육시준의 얼굴을 휙 훑은 강유리가 물었다.“그럼 스타인은?”“뭐 나름 그럴 듯한 모양은 내고 있달까?”육시준이 눈썹을 씰룩였다.“유강 엔터를 맡으면 스타인을 앞설 수 있을 것 같아?”비록 사람들은 신생 엔터회사인 스타인 엔터가 곧 로열 엔터와 견줄 수
유강엔터 본사 건물.직원들 모두 오늘 새로운 대표가 온다는 것도 그 대표가 회장 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평소 조금 붐비게 느껴지던 사무실이 오늘은 유난히 텅 빈 상태였다.직원들 중 3분의 1이 월차를 낸데다 남은 사람들도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꼴이 아무리 봐도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는 아닌 모습이다.오후 세 시쯤, 화려한 스포츠카가 회사 주차장에 들어서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강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단아하면서도 몸매 라인을 잘 살려주는 깔끔한 의상에 각선미를 부각시켜주는 아찔한 하이힐까지.전형적인 커리어우먼 그 자체였다.강유리가 무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 뒤를 따르는 비서가 회사 상황을 다급하게 브리핑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그때, 초조한 표정의 누군가가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바로 허리를 굽실거렸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직접 마중 나왔어야 하는 건데 제가 오늘 좀 바빠서요...”‘하, 텃세를 부리시겠다? 일개 비서 주제에 일 때문에 회사 대표 마중을 깜박했다는 게 말이 돼?’“아니요, 괜찮습니다.”한편, 착한 얼굴로 싱긋 웃는 강유리를 바라보던 장규진 비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역시, 원 대표 말대로 사업의 사자도 모르면서 대표 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계열사 하나 달라고 한 거구만. 안 봐도 비디오지 뭐. 그럼 오늘 제대로 기를 눌러줘야겠어.’“원 대표님은 오늘 몸이 불편하셔서 회사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인수인계는 다음 주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이번 주는 그저 회사 직원들 얼굴이나 기억해 두시죠.”장 비서의 말에 로비에 모인 직원들 모두 숨을 죽였다.부탁이 아니라 명백한 명령, 새로 온 대표에 대한 텃세 그 자체였으니까.‘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앞으로 이 회사에서 제대로 날개나 펴실 수 있을까...’하지만 장 비서의 말에 강유리는 언짢은 표정도, 겁 먹은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계속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걷던 강유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방금 전까지 안하무인이던 장 비서의 눈동자가 공포로 급격히 흔들렸다.‘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계집애인 줄 알았는데...’방금 전, 하석훈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그가 한 말이 단순히 장 비서 한 명에게 한 말이 아닌 유강엔터 직원 모두에게 날리는 경고장이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기점을 시작으로 유강엔터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단 몇 시간만에 절반이 넘는 직원이 해고당하고 여유 넘치던 복도는 해고된 직원들의 애원, 슬픔 그리고 분노의 소리로 가득했다.대한민국 대기업인 유강그룹, 그리고 그 계열사인 유강엔터의 중간 관리직으로서 다들 나름 사회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자신의 직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이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길거리를 떠도는 양아치처럼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다.잠시 후 회사에 도착한 육경서는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입을 떡 버릴 수밖에 없었다.아무런 인맥도, 사업 경험도 없는 강유리라면 원로 직원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부장급 직원들이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다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꼴이라니.‘재밌다...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휴대폰을 꺼낸 육경서는 빠르게 이 광경을 영상으로 남긴 뒤 육시준에게 전송했다.“우리 형수님 보통 분이 아니시네. 형이 왜 형수님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겠어. 잔인한 면이 아주 많이 닮았어.”한편 LK그룹 대표 사무실.동생이 보낸 영상과 문자를 확인한 육시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회사의 기강만 갉아먹던 충치 같은 이사들, 그리고 유강그룹의 친인척들이 분노로 인해 벌개진 얼굴로 회사로 쳐들어가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막는 경비원들...“사모님께서 첫 출근 날부터 부장급 이상 관리직들 그리고 이사들 중 절반을 해고하셨다고 합니다. 유강그룹에서 엔터회사는 아예 정리하려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역시 옆에서 영상을 확인한 임강준이 한마디 덧붙였다.워낙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던 강유라인지라 이번 정리해고
한편, 회사로 들어선 육경서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회사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이 코딱지만한 사무실은 또 뭐고...;“육시준.”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고개를 돌리게 만든 건 바로 강유리의 목소리였다.그리고 평소와 다른 강유리의 모습에 대외적으로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익숙한 육경서마저 어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깔끔한 셔츠에 하이웨스트 스커트, 하얀 다리 라인을 잘 살려주는 하이힐, 만화에서 나올 법한 직장룩의 정석에 꼭 들어맞는 분위기까지.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는 침착한 표정이었다.‘유강엔터... 어쩌면 형수님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도 있겠어.’“아, 강유리 대표님. 육경서라고 합니다.”선글라스를 벗은 육경서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눈앞에서 톱 연예인을 보면 신기해서라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만 한데...한참을 팔짱을 낀 채 그를 훑어보던 강유리는 먼저 내민 육경서의 손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제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시죠.”“네.”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방금 전까지 조용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뭐야! 정말 육경서잖아. 정말 우리가 육경서 전속 계약 따내는 거야?”“강유리 대표라고 했나? 보기보다 대단하잖아.”“와, 육경서 매니저로 일하고 싶다...”한편, 워낙 건물 방음이 별로인 탓에 직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육경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엔터회사면 연예인들 얼굴 실컷 봤을 텐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지? 우리 형수님... 창피하겠다.’하지만 여전히 침착한 표정의 강유리가 싱긋 웃어 보였다.“귀한 분께서 누추한 곳에 오셨네요.”상대를 띄워주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육경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아, 아닙니다. 강유리 대표님이 새 대표로 부임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목이 타네...’말을 마친 육경서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신주리는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대체 뭐 하는 거야?” “나오면 알게 될 거야.” 신주리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신씨 가문 부모님은 일찍 주무시기 때문에 이 시간엔 집 안이 조용하다. 계단 위로는 희미한 불빛이 내려왔고 그 덕분에 방이 너무 어두운 건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가볍게 하며 조심스럽게 나갔다. 별장 문이 살짝 닫히자 그제야 신주리는 자신이 몰래몰래 행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보니 밖에서 소리도 없이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소년의 모습이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마치 불법적인 만남 같았다... 이 생각을 하자 신주리는 갑자기 머리를 흔들며 그런 이상한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작은 발걸음으로 문쪽을 향해 뛰어갔다. 오늘 밤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바람은 매서웠고 비가 섞인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를 툭툭 치며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내가 이제 거의 자려고 했거든? 만약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게 아니라면 너 죽을 줄 알아!” 그녀의 목소리는 귀찮은 듯 위협적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육경서는 그녀의 그 눈빛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가 입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를 보았다. 그녀의 어깨는 가냘프고 예쁜 쇄골 아래로는 빠르게 뛰는 숨결에 따라 가슴이 살짝 오르내렸다... 그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서 차 뒤쪽을 향해 말했다. “내려오지 마!” 차를 막 세운 뒤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내며 인사를 하려던 매니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육경서는 그녀에게 다시 눈길을 주며 재빨리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그 외투를 더욱 단단히 감싸며 그녀를 감쌌다. 신주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소년에게서 나는 낯선
사실 신주리도 궁금해했지만 온 저녁 릴리네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그만 잊어버렸다. 그녀는 입을 열어 되물었다. “너는 어디로 쓴 거야?” 육경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바닷가지! 내가 메시지로 신호를 보냈잖아. 너 그거 못 알아봤어?” 신주리는 천천히 말했다. “알아봤지. 근데 누가 정했어? 알아봤다고 해서 네가 쓴 대로 해야 한다고?” 육경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섭섭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는 신씨 가문 별장 앞에 멈췄다. 신주리는 차에서 내려 기쁘게 손을 흔들며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 나갔다. 몇 발자국 가다가 돌아서더니 마침 차창이 내려지자 몸을 굽혀서 두 팔꿈치를 창에 기대며 말했다. “근데 내가 쓴 주소도 바닷가랑 연관이 좀 있어. 제작진 팀이 중복이라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육경서의 섭섭했던 눈빛은 어느새 빛을 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물어보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며칠 후, 육경서는 바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틈이 신주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별거 없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일정을 보고하거나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묻는 작은 얘기들이었다. 끝에는 항상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네가 쓴 곳은 대체 어디야?] 신주리는 메시지를 확인하면 짧게 답은 하되 항상 마지막 문장은 무시한 채 넘어갔다... 프로그램 녹화는 한 달 넘게 연기되었다. 제작진은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육경서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도대체 어디일까? 녹화 전날 밤까지 그는 여전히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놓지 않았다. 신주리는 평소처럼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끊으려는 찰나 육경서가 다시 묻기 시작했다. [넌 그 목적지가 어디야?] 신주리는 답했다. [하루만 있으면 내일 다 밝혀지는데 그걸 못 기다리겠어?] [그게 내가 내일 녹화를 어떻게 맞이할지 결정하는 거야.] [...] 신주리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내밀고서도 결국 답을 했다.
릴리와 신하균의 대화로 강학도는 결국 육경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묻는 걸 잊었다. 육경서는 친동생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저녁 식탁에서 강학도는 완전히 자신의 손녀사위에게 몰입해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주변을 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육경서와 신주리는 그들만의 공간을 주기 위해 월계만을 떠났다. 차는 천천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신주리는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좌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피곤해?”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주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육경서는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행히 이번 이틀간은 일정이 없으니까 집에서 더 쉴 수 있겠네.” 신주리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육경서는 전방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네 매니저한테 물어봤어. 뭐, 우리 사이니까 그런 거 숨길 이유도 없잖아.” 둘은 잠시 멈칫했다. 신주리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점에 카메라도 없고 그가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이런 자연스러운 말을 한 걸까? 육경서는 자신의 말이 잘못 나왔다는 걸 느끼고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았다. 신주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더 긴장했다. “뭐, 우리 비록 헤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네 전 남자친구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전 남자친구로만 남고 싶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뒤이어 아무런 반박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프로그램 안에서 커플로 나온 거잖아. 그러니까 서로 완전히 관계를 끊을 수는 없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가 이 말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기세가 꺾였다. 신주리는 그가 이렇게 어색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궁금해하지 말라고 했
강학도의 눈은 살짝 떨렸고 이 작은 녀석들의 애절한 눈빛을 마주하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티즌들이 쓰는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한다.’ 대충 이런 말이 그들에게 어울릴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젊은이들 사이로 성공적으로 침투했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가까이에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그는 딸의 연애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송을 보고 나서 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히 그냥 사귀는 연인들인데 왜 그렇게 이상하게 지내고 또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혹시 그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까?’ 육경서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한 번도 어른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일들을 다시 꺼내자니 정말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작은 갈등이 있었어요.” 그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무슨 갈등? 왜? 들어보니 심각한거 같은데! 다 큰 남자가 여자에게 조금 더 양보할 줄 알아야지.” “외할아버지, 저는 정말 너무 속상해요!” 릴리가 갑자기 말을 끊으며 강학도에게 슬픔을 호소했다. 강학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듣고 반응했다. “왜 그래?” 릴리는 불만을 가득 담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는 외할아버지의 진짜 외손녀잖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저와 미래 손녀사위가 같이 서 있는데 외할아버지는 저희에게 관심도 안 두고 다른 사람의 사적인 얘기만 궁금해하시다니요?” 갑자기 자신이 언급된 신하균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옆에 있는 여동생의 어색한 표정을 살펴보면서도 결국 한발 물러서서 모든 걸 자신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다시 진지하게 인사했다. “외 할아버지.” 강학도는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는 외 손녀의 눈빛에 맞서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경서와 주아는 다 우리 가족인데 그게 뭐가 이상한
물론 그녀가 기분이 좋다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딩동!”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네 명은 동시에 문을 바라보며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아마도 방금 전에 강미영의 눈빛에 기가 눌려서 이제는 그 누구도 문을 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인종이 다시 한번 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동시에 신하균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 신하균은 잠시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긴장할 일인가? 몇 분 만에 강미영이 순간 이동이라도 해서 왔을까?’ 그는 일어나 차분하게 문 쪽으로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그는 얼어버렸다. 문밖의 사람도 당황한 표정으로 심지어 자기가 잘못 왔나 싶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문패를 다시 확인하고는 물었다. “저, 제가 잘못 온 건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신하균은 드물게 당황하며 한발 물러섰다. “릴리 집에 있어요. 들어오세요.” 그 사람은 강학도였다. 릴리는 이 소리를 듣고 반짝이는 눈으로 달려갔고 거의 뛰어오르듯 했다. “외할아버지! 딱 맞춰 오셨어요! 우리 네 명의 생명을 구해 주셨어요. 대단해요!” 강학도는 문을 넘기기 직전 잠시 멈칫했다. 그는 이 상황이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고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앞을 가로지르는 작은 아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빨리 와요! 들어오세요! 멋진 걸 보여 드릴게요!” 육경서와 신주리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강학도는 의자에 앉으면서 이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바라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그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지만 외손녀와 그 남자가 단둘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 네 명이 다 함께 있던 거였다. ‘이 작은 녀석들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릴리는 컴퓨터를 끌어안고 할아버지 앞에
그때 강미영은 네트워크를 끈 후 바로 카메라도 껐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이 녀석들이 오지 않는다 했더니 어둠 속에서 숨어 있었구나. 이런 저질스러운 수법을 쓰다니, 내가 자신들과 똑같이 멍청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이건?” 소지석이 언제부터 그녀 옆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카메라를 보며 잠시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미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이들이 장난쳤어요. 우스운 꼴을 보였네요.” 소지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처음 만난 것도 아니잖아요.” 잠시 생각한 후 이 아이들이 조금은 귀찮지만 결국엔 그가 원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도와주려는 의도였다는 걸 깨닫고 본능적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들도 당신을 걱정해서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한 거예요.” 강미영은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이유를 정말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지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이 더 잘 알겠죠. 그들은 단순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에요. 뭐든지 끼어들고 싶은 마음에 제가 벌써 은퇴한 줄 알고 저 앞에서 이런 속셈을 부리는 거죠.” ‘그래, 이제 구할 수 없겠군. 그들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겠지.’ 강미영은 평소처럼 외부에서 사적인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 이야기를 금방 끊어버리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녀는 앞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곳은 천 년의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소지석은 잠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램에서 곧 일정이 잡힐 거예요. 시간문제죠. 하지만 지금 당장 가고 싶다면 저도 함께 갈 수 있어요. 요즘 저는 별로 바쁘지 않아요.” 강미영은 부드럽게 거절하며 말했다. “맞아요. 프로그램에 결국 다 짜여 있어요. 지금 가고 나중에 또 가면 신선함이 없겠죠.” 소지석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무심코 덧붙였다. “그럼 다음 장소는 어디일까
릴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에이, 어차피 우리 엄마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입술 모양 읽기를 육경서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신하균은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러다 신주리가 갑자기 깨달은 듯 급히 고개를 돌려 신하균을 바라봤다. “맞다, 오빠는 전문가잖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 말이 끝나자 세 개의 눈이 동시에 신하균을 향해 집중되었다. 릴리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전에 소지석이 입모양 한 거 다 이해했죠? 뭐라고 말했는지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들이 무슨 얘기 했는지?” 신하균은 그 반짝이는 눈을 보고 도덕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려다가 화면에 나타난 장면에 눈을 빼앗겼다. 카메라가 조정되며 딱 맞춰 강미영을 정면으로 비쳤다. 바로 그때 강미영이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향해 날카롭게 스캔했다. 다른 세 사람은 신하균의 변화를 느끼고 그의 시선을 따라 화면을 봤다. 그리고 네 명 모두 얼어붙었다... 그 카메라를 통해 강미영의 차가운 눈빛이 마치 그들에게 직접 쏟아지는 것 같았다. 강력한 압박감을 주며 한순간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그 강한 위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미영은 손을 들어 카메라를 껐다. 그제야 모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신주리는 급히 손을 뻗어 컴퓨터를 덮었다. “아기야, 너희 엄마 방금 그 눈빛 진짜 무서웠어. 화면을 통해서도 살기를 느꼈어.” 육경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소름 돋았어. 작은 이모의 경계심이 너무 강해.” 신하균도 충격을 받았다. “역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여왕이네.” 릴리는 그들의 감탄과 충격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작은 자신을 감싸 안았고 창백한 얼굴과 멍한 눈으로 말했다. “끝났어요. 이번에는 진짜 끝이에요.” 집 안의 감시 카메라를 이용해 어른들의 프라이버시를 엿보았다니,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순
소지석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느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의 당신이라면 학생으로 다시 학교에 가는 건 힘들겠죠? 아마 교수로 신청하는 게 더 현실적일걸요?” 사람은 모두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했고 강미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진지하게 농담을 던지자 마음속에서 일었던 불편한 감정도 빠르게 사라졌다. “너무 과찬이네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르칠 수 있는 게 너무 많죠! 믿거나 말거나, 당신이 대학에서 명예 교수로 이름을 올리면 학교 측에서 구걸할걸요? 심지어 일부 명문 학교에서는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끌어들이려고 할 거예요!” 강미영은 결국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녀는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게 꽤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농담 식의 아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온화한 성격과 안정된 감정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가 지금 그녀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그녀는 차갑게 선을 긋기 힘들었다. 만약 그의 호감이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으면 차라리 마음을 조금 열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모두 어른이고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대부분의 인생을 전체를 배려하며 살아왔으니 이제 한 번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왜요?” 소지석은 그녀의 침묵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물었다. 강미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은 맑고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잠시 흔들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당신은 제 후배도 아닌데 왜 아직도 이렇게 저를 무서워해요?” 소지석은 본능적으로 반박했다. “그런가요?” 강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주었다. “그래요. 이제 더 이상 후배가 아닌 걸 깨닫지 못한 거죠?” 소지석은 고개
강미영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그동안 이 가족의 연기력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드라마를 그녀 앞에서 너무 서툴게 펼쳤다. 손님을 보내고 난 뒤 그녀는 꼭 그들에게 제대로 한 번 교육을 시켜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팔꿈치를 밖으로 굽히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정원에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강미영은 본능적으로 일어나 빠르게 통유리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강학도의 검은색 세단이 정원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눈가가 미세하게 떨린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결국 이 아빠가 팔꿈치를 밖으로 굽혔고 릴리 그 자식도 그녀에게 떠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 아저씨는 릴리 데리러 갔어요?” 갑자기 소지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강미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노인네는 늘 릴리를 봐줘요.” 소지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게 맞죠.”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했지만 소지석이 묵묵히 눈치채지 못한 척하고 있어 강미영은 마지막으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시 소파로 돌아가서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 “일단 먹어요. 릴리 그 녀석은 시간 개념이 없어서 언제 올지 모르겠어요.” “좋아요.”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지석은 계속해서 얕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일에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던 강미영이 지금은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표정에서, 움직임에서, 그리고 말투에서까지 느껴졌다. 예전에 그는 릴리와 함께 강 할아버지라고 불렀었는데 이제는 강 아저씨라고 부른다. 강미영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것을 인정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소지석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고 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