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딱딱한 정장차림 아니면 샤워를 마치고 헐벗은 모습만 보다 이렇게 캐주얼한 코디를 보니 왠지 색다른 기분이었지만...‘지금 내가 남자 얼굴에 홀려서 헤벌레 할 때가 아니지...’고개를 거세게 저은 강유리가 따져물었다.“쇼핑했어? 뭐 산 거야? 아니... 도대체 뭘 샀길래 50억을 긁은 거냐고.”“정확히 320억이지.”태연하게 정확한 숫자를 짚어주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강유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으며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자, 어디 좀 보여줘 봐. 얼마나 대단한 걸 산 거야?”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강유리를 바라보던 육시준이 피식 웃더니 쇼핑백을 건넸다.쇼핑백에 든 건 옷도 가방도 신발도 아닌 파일을 담은 폴더. 그 안에 담긴 문서를 하나하나 확인하던 강유리의 눈이 또다시 커다래졌다.“JL빌라 펜트하우스?”“응.”“...”부동산 계약서를 바라보던 강유리는 이 상황에서 도대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JL빌라 펜트하우스라면 시가로 300억짜리 부동산, 그런 집을 도대체 무슨 수로 50억에 매입한 것인지는 알 수조차 없었다.하지만 궁금함도 잠시, 명의자 이름에 똑똑하게 서있는 강유리 이름 석자를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한편, 어느새 소파에 앉은 육시준은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하니 서류만 보고 있는 강유리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뭐 해? 나 잘했... 윽!”바로 그때, 강유리가 그의 손목을 확 잡더니 바로 콱 물어버리더니 큰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아파?”어느새 손목에는 가지런한 치아자국이 남았지만 강유리의 촉촉한 입술을 보고 있자니 순간의 짜증도 아픔도 전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똑같이 갚아줘?”퉁명스러운 질문에 강유리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다시 이성을 되찾은 강유리가 물었다.“펜트하우스는 매입 불가라며. 거긴 LK그룹 대표 소유라고.”“만약 내가 그 LK
육경서가 친구의 친구에게서 겨우 연락처를 받아냈고 와이프가 펜트하우스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라고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싼 값에 넘겼다는 육시준의 해명을 듣고 있던 강유리의 표정은 점점 더 묘하게 변해갔다.어딘가 이상했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는 묘한 느낌.더 캐물으려던 그때, 육시준이 벌떡 일어섰다.“됐고. 얼른 짐 정리해. 전 남친보다 먼저 이사해야 할 거 아니야.”역시 육시준의 도발은 정확히 먹혀들어갔다.뭐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랴.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JL빌라 펜트하우스 주인이 강유리 본인으로 이미 바뀐 것을.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강유리는 반나절만에 짐 정리를 끝내는 놀라운 효율을 보여주었고 해가 지기 전에 두 사람은 JL빌라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었다.고풍스러운 유럽식 인테리어,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딱 봐도 비싸보이는 가구들과 인테리어 소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직 펜트하우스 거주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큰 정원과 실외 골프장까지.임천강이 왜 그렇게나 JL빌라, JL빌라 노래를 불러댔는지 이해가 가는 강유리였다.그렇게 얼떨떨한 상태에서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 시청을 하던 그때,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한숨소리에 육시준이 질문을 뱉어냈다.“왜 그래? 여기서 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왜 자꾸 한숨이야. 기분 안 좋아?”“좋지, 왜 안 좋겠어.”‘표정만 보면 거의 나라 잃은 사람인데...’“그냥 한평생 모은 돈을 다 퍼부었다는 생각에 속이 쓰리네. 하우스 푸어가 이런 건가?”어젯밤까지 성홍주가 내놓은 자산들을 어떻게 가장 낮은 가격으로 인수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였는데...자상한 남편 덕분에 고민거리가 싹 사라져버렸다.성홍주가 뭘 내놓든 살 돈 조차 없어졌으니까.“우리 남편 진짜 대단하다니까. 사랑해.”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백,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육시준의 마음 한켠은 달콤해졌다.남편...너무나 평범한 호칭임에도 강유리의
한편, 섹시하게 움직이는 육시준의 목젖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강유리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내 친구 중에 유명 투자자가 있는데 걔도 그랬어. 이 드라마 무조건 뜰 거라고.”“설마 그 친구라는 게 신아람이야?”‘연예계 미다스 손이라고 불리는 신아람을 제외하고 그런 장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역시나 그의 말에 강유리는 깜짝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어? 네가 아람이를 어떻게 알아?”“...”호기심이 담긴 반짝이는 눈동자, 자연스레 늘어터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선...그 동안 미인이란 미인은 지겹게 봐왔지만 강유리, 이 여자는 왜 자꾸만 더 특별하게만 느껴지는 걸까?자연스레 그녀의 잔머리를 넘겨주던 육시준의 눈빛에 묘한 감정이 서렸다.“그래서 로열 엔터랑 협력 투자하고 싶다는 말이지?”“응.”강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육경서랑 친하잖아. 로열 엔터에서도 나름 한 자리 맡은 것 같은데 이번 프로젝트만 제대로 해내면 당신도 출세할 수 있어. 아, 물론 당신 혼자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유강엔터가 제작비 중 30%는 투자할 거야. 윈윈인 거지.”자신만만한 강유리의 모습에 육시준은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다들 어떻게든 로열 엔터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안달난 상황인데 강유리는 오히려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이 큰 자비인 것마냥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유강엔터 상황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다른 회사들도 다 피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왜 유강엔터랑 함께 일을 해야 하지?”“우리 회사에는 육경서가 있으니까.”강유리의 당당한 대답에 육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육경서는 로열이 버린 카드인데.”“내가 강덕준 감독 섭외할 수 있어.”“뭐?”육시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펜트하우스를 사는 데 자산 중 대부분을 다 썼음에도 아직 유강그룹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모습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 놀려줬던 것뿐인데 이런 대어가 딸려올 줄이야.‘강덕준 감독은 차기 오스카 감독상
80억이라는 가격에 망설일 줄 알았는데 다른 작품 저작권까지 다 사들인다고?“형, 내가 작가분 팬이라 작품은 다 읽어봤는데 이 좋은 소설인 건 맞아. 하지만 다른 소설은... 영상으로 제작되기엔 부족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존경하는 작가에게 예우를 차려준 것뿐. 다른 네 작품은 이라는 대작을 만들기 위한 습작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런데 똑같은 가격으로 저작권을 사들인다니.이번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릴리 작가와 독점 계약을 맺는 조건이라 해도 이건 너무 과하다 싶었다.임강준 역시 당황스럽긴 했으나 대표님의 결정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 게 그의 신조였으므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한편, 앉은 자리에서 400억을 써넣고도 차분한 형을 가만히 관찰하던 육경서의 눈이 번뜩였다.“설마... 형수님 때문이야? 며칠 전엔 갑자기 집을 팔지 않나... 그냥 주면 주는 거지 뭘 또 팔고 그런대? 그리고 내가 알아봤는데 이 소설 작가 신비주의긴하지만 한국 국적 아니라던데? 사실 형수님이 작가였다 이런 스토리는 불가능하다고.”“요즘 많이 한가한가 봐?”하지만 육시준의 차가운 말 한 마디에 육경서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괜히 까불었다가 남주인공 역이 물 건너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캐스팅이 결정되기 전까진 형 비위를 맞춰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육경서가 입을 다무니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지고 잠시 후 임강준이 다시 들어왔다.“연락해 봤는데 다른 작품 저작권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해 보겠다고 하더군요.”“고민을 해? 이건 그냥 공짜로 퍼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왜?”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던 육경서는 바로 울상을 지어보였다.“형, 혹시 돈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고 막 그래? 그럼 나, 나한테 좀 써줘. 유강엔터가 입김이 별로라 나 요즘 일도 많이 줄었단 말이야.”“강유리 말이야. 해외에 있는 3년 동안엔 뭘 했는지 전혀 모른다고 했지?”시
또각또각.급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저희 새로 온 사람들인데요. 주차 자리를 못 찾아서...”하지만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여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자 성신영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언니가 여길 어떻게...”“빌라 주민들은 다 개인 차고 받았을 텐데. 이게 무슨 민폐야?”이에 성신영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그리고 머릿속에 며칠 전 임천강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펜트하우스에 사는 LK그룹 대표도 스포츠카를 모으는 게 취미라고 했었지. 저번에 얼핏 봤을 땐... 붉은색 벤틀리 밖에 안 보이더구만. 그러고 보니 같은 차종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유리 차일 리가 없잖아.’성신영이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언니가 사는 오피스텔은 여기가 아닐 텐데?”턱을 살짝 치켜든 성신영이 말을 이어갔다.“설마... 나랑 오빠 신혼집 구경하고 싶어서 온 거야?”“돈은 마련했나 보지?”하지만 강유리의 차분한 말에 성신영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는다.‘하여간... 사람 아픈 데만 골라서 콕콕 찍는단 말이야...’지금 이사가 코앞인데 집값을 전액 현금으로 지불해야 입주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게 바로 오늘.임천강이 옆에 없는 이유 역시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부동산 측에 물으러 가서였다.“그럼!”하지만 강유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성신영은 더 당당하게 나갔다.“아,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도 언니 덕분에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됐어.”‘집안 기둥 다 빠져나가는 걸 모르고 멍청하긴.’“아빠가 나 신혼집 해준다고 계열사까지 넘기셨지 뭐야.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나한테는 뭐든 최고로 해주고 싶으시다지 뭐야?”강유리 앞에서 자신의 우월감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성신영이 놓칠 리가 없었다.“그런데 더 대박은 뭔지 알아? LK그룹이 우리 유강그룹 계열사에 관심이 있다나봐.”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저 멀리서부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임천강이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바로 물었다.“신영아, 왜 그래?”하지만 고개를 돌린 그 역시 강유리를 발견하고...“오랜만이야, 강유리.”평소라면 성신영과 한편에 서서 강유리에게 악담을 퍼부었을 텐데 오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하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경비원을 보느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성신영은 겁 먹은 얼굴로 임천강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오빠, 얘기는 잘 끝냈어?”“아, 응.”멍하니 강유리를 바라보던 임천강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무조건 전액 현금으로 구매해야 한다네. 부족한 돈은 아버님께서 마련하시기로 했으니까 입주하는 데는 문제 없을 거야.”입주에 문제가 없다는 말에 성신영이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그럼 그렇지. 이제 나도 이 JL빌라 입주민이나 마찬가지야.’그리곤 바로 우아한 표정으로 경비원들에게 따져물었다.“JL빌라는 외부 차량 출입금지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아무나 들여도 되는 거예요?”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당연히 방금 전 전화를 건 여자가 성신영이라고 생각한 경비원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신거렸다.“죄송합니다, 강유리 님. 저희 실수입니다.”“강... 유리 님?”성신영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그 뒤편에서 강유리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제가 강유리입니다. 방금 전 전화드린 사람이요.”강유리, JL빌라 펜트하우스의 주인...빠르게 머리 회로를 돌린 경비원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굽신대기 시작한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지나치게 비굴한 모습에 강유리는 손사래를 치며 턱끝으로 성신영의 차를 가리켰다.“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저 차량 JL빌라 입주민 차량 맞나요?”“아, 본사 측 매니저님과 함께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그러니까 아직 입주민은 아니라는 거죠.”“저희 측에서 조회한 정보로는 그렇습니다.”“그렇데 이렇게 길을 막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은데.”시계를 힐끗 쳐다보던
아무것도 모르면서 강유리를 깎아내리기 바쁜 성신영의 모습이 아니꼬왔지만 자기 입으로 강유리의 남편이 재계 1위 그룹 대표 육시준이라고 밝히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으므로 임천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강유리가 어떻게 살든 그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야. 신경 쓰지 말자.”차갑게 굳은 임천강의 얼굴을 확인한 성신영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실렸다.‘그래. 오빠도 이젠 강유리한테 완전히 실망한 거야. 이제 오빠한테는 나뿐이라고.’그리고 그녀 역시 고개를 들어 아득하게 높은 철대문을 바라보았다.‘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저곳으로 들어갈 거야. 강유리보다 뒤처질 수는 없어.’한편, 빌라를 나선 강유리는 거세게 엑셀을 밟았다.비록 두 사람을 골탕 먹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둘에게서 받은 배신감에 비하면 이 정도 복수는 턱도 없었으니까.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누나. 로열 쪽에서 저작권 사겠대. 대표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는데? 게다가 다른 세 작품 저작권까지 사겠다는데. 가격은 전부 80억으로.”끼익!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에 강유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핸들을 꽉 쥔 강유리의 눈이 커다래졌다.“대표가 직접 밀어붙였다고?”“응. 대표 비서라는 사람이 직접 나한테 연락 왔었어.”“게다가 다른 작품 저작권까지?”“응. 그 망작들까지 전부 다 사겠대.”“허...”헛웃음을 끝으로 한참을 침묵하던 강유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아니, 그 사람 바보 아니야? 아니, 애초에 그런 안목으로 사업을 어떻게 하는 거래? 그 쓰레기 같은 작품을 왜...”다 무너져가는 유강그룹 계열사에 말이 좋아 작품이지 낙서나 다름없는 작품까지...설마 돈이 썩어나는 건가?“누나는 참... 스스로에게도 참 가차없구나. 자기 작품을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큼, 그나저나 아쉽네. 그쪽에서 그렇게 쉽게 오케이 할 줄 알았으면 80억이 아니라 좀 더 높게 부르는 건데.”‘게다가 내가 눈독 들인 회사까지 빼앗으려고 들고 말
“아니, 왜 굳이 유강그룹 계열사를 인수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죠.”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 그건 저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예요.”육경서가 어깨를 으쓱했다.어차피 그의 머릿속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유를 알아낼 길은 없으니 강유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육경서 씨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작품들 쭉 훑어봤는데 로코 장르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육경서 씨 데뷔 년차도 꽤 쌓였고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것 같은데.”이에 육경서의 눈이 반짝였다.“! 저 그 작품 주인공 할 수 있는 거예요?”원작 속 남자주인공은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완벽한 이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역을 따내고 싶었다.‘형수님만 오케이하며 형이야 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고... 그러니까 제발...’“아, 남자주인공을 연기하기엔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 서브 남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육경서 씨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고...”하지만 육경서의 머릿속에는 온통 “육경서 씨가 조금 부족할 것 같고”라는 말 뿐, 다른 말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내가... 내가 부족해? 하, 내가 찍은 작품마다 다 대박이었어! 게다가 조연이라니. 난 조연은 해본 적도 없다고!’한편,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강유리는 캐릭터 분석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서브 남주는 재벌 2세인데 육경서 씨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맞을 것 같고요. 지금까진 항상 차도남 스타일만 연기했잖아요. 서브 남주는 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스타일이라 육경서 씨 이미지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것...”“이 얼굴로 조연이요?”참다 못한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주연은 누군데요? 도대체 누구길래 이 육경서를 밀어내고 주연을 하는 거냐고요! 대표님, 나 육경서예요.”‘내가 얼마나 핫한지 몰라’라고 얼굴에 적혀있는 모습을 보던 강유리가 헛웃음을 지었다.‘생각보다 자기 커리어에 프라이드가 대단하네.’“주연은 소지
“뭐가 문제야? 유리 신분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니까 내가 지시만 하면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어.”바론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저는요?”“육 서방 서류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자네가 협조하기만 한다면...”“협조 못 해요.”육시준이 바로 대답하자 바론 공작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면서 나한테 왜 물었어? 이럴 거면 귀국할 거라고 얘기하면 되 것을 남을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물었어?’“하지만 전 유리 의견을 존중해요. 유리가 남고 싶다면 저도 함께 남을 것이고 비행기는 이미 준비됐으니 싫다고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바론 공작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그래서 자네가 지금 내가 유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육시준은 그걸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그런 뜻은 없어요.”바론 공작은 육시준을 힘껏 노려보더니 귀찮은지 가버렸다.‘이 자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유리 앞에서 갖은 자상한 척을 다 하더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기다려 봐. 내가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에 남게 하면 널 데릴사위로 맞아들일 거야.’시간이 훌쩍 지나 제2부가 시작되었다.이 동안에 육경서는 그날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어버린 듯이 여전히 신주리의 주위를 맴돌며 갖은 비위를 맞춰갔다.육경서는 녹화 날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준비해 신주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카메라 감독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한 무리 사람이 돌처럼 굳어버리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육경서는 그런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문을 노크하자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신속하게 카메라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경서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늘 녹화하는 날인 걸 잊지 않았죠?”“알아요.”육경서가 대충 대답하자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그럼 경서 씨 카메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하마터면 바론 공작의 코에 부딪힐뻔하자 그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역시 딸내미는 시집가면 남이야. 자기 남편밖에 몰라. 열받아.’강유리 심부름을 다녀왔던 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살짝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다시 험상궂은 바론 공작을 보더니 비밀을 배속으로 삼켜버리면서 말했다.“부부 사이 일이겠죠. 공작 어르신은 잠깐 기다렸다가...”“대디 걸이라고 누가 그랬어? 저 아이가 부부 사이의 일을 나한테 말해줄 것 같아? 이럴 때면 아비를 문밖에 버려두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계집애.”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론 공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유리는 너무 흥분돼 정신이 나갔는지 육시준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뒤 화장실에 숨어 뒤에 감춘 물건을 보여줬다. 빨간 두 줄이 눈앞에 나타나자 육시준은 멍하니 서 있었고 표정은 변함없지만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육시준은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게 뭐야? 그래서 결과가 뭐야?”“이게 뭔지 몰라? 두 줄이잖아. 나 임신했어. 이번에는 진짜야.”강유리가 활짝 웃으며 감격해 말했다. 육시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테스트 시제를 받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담담한 척했을 뿐이다. 그는 선명하게 찍힌 빨간 두 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그렇다면...”“당신 아빠가 되었어.”강유리는 이런 육시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참지 못하고 재차 설명해 줬다. 다음 순간 강유리의 발이 허공에 뜨더니 육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천정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귓가에는 흥분으로 가득한 남자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아빠가 됐어. 드디어 아빠가 됐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강유리는 머릿속이 죽통이 되는 것 같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진정. 진정. 정숙.”이 순간에 무슨
강유리가 잠깐 멍하더니 살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왜?”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은 일정은 별로 끌리지 않아.”강유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요 며칠은 주로 집에서 바론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일정에 대해 강유리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리고 예측하는 것이 있기에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유리는 육시준이 눈치챘는지를 모르기에 머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비비더니 온화하게 물었다.“여보, 내가 요 며칠 라이브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한테 신경 못 썼어.”“맞아. 그래서 어떻게 보상할 거야?”육시준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강유리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착한 육시준이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해한다고 했을 텐데 보상을 요구했다.“부부 사이에 보상을 얘기하면 서운하지.”강유리는 작은 손을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육시준은 그런 강유리한테 속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저번에 내가 긴급회의를 했다고 나한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어? 그때는 왜 내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을 안 했어?”‘이득 앞에서 못 본 체하는 건 바보가 아닌가?’하지만 강유리는 절대 육시준이 쉽게 이득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보상해 줄게. 내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전의 제의 들어줄게.”그 말에 육시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봤다.‘방금 제기한 요구라면 혹시 앞당겨서 귀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육시준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던 그지만 강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앞당겨 귀국하자고 한 건 사실 진짜로 귀국하자는 것이 아니고 강유리가 요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자기한테 소홀한 것 같아 귀띔해 주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바보인 척하며 그의 제의에 찬성했다. 강유리는 육시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신
육경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욕이라도 할까 봐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수를 욕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강유리의 뒤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더욱 두려운 건 육시준이었다. 화를 못 이겨 육경서는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바닥에 있는 쿠션과 인형을 발로 차버리고는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발길에 채워 저 먼 곳에 불쌍하게 누워있는 인형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주워서는 원래 자리에 예쁘게 놓아줬다. 이건 주리가 선물한 것이기에 절대 이 아이한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육경서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형수가 한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에 강유리가 주리를 설득해 화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두 사람이 절친이기에 그녀를 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이렇게 좋은 절친이 있으니 주리는 절대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경서가 남도 아니고, 아아아아악!강유리가 빨리 도망치라고 했기에 주리가 육경서를 냉랭하게 대한 것이고 전혀 기회를 줄 뜻이 없었으며 오해를 풀고 나서도 화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단 말인가?육경서는 털썩 주저앉아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철없고 진지하지 못한 게 생리적 결함도 아닌데 고치면 되잖아.’육경서는 반드시 주리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가 다시 자기를 신임할 수 있게끔 하리라고 결심했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육경서가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심리 변화와 최종 결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강유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의식 간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육시준이 팔짱을 끼고 베란다 옆 수납장에 기대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왔어? 부르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강유리는 육경서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여론 뒤에 또 모순이 생긴 모양이다. 솔직히 강유리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긴 하지만 육경서가 아직 철들지 못했고 반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아왔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만 모순이 생기거나 좌절을 겪으면 의심하고 심지어 포기해 버리기에 이대로 지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힘들어질 것이고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강유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한테 비밀을 알려드릴게요.”육경서는 전혀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비밀이요?”육경서는 주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지만 형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주리가 처음 육씨 가문에 왔을 때 어머님이 사실 두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강유리가 진지하게 말하자 육경서는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터져버렸다.“이게 다 형수님 탓이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제가 해칠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그러자 강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이게 왜 이상한 소리예요? 도련님이 저한테 직접 말했잖아요.”“형수님, 미안해요.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해줘요.”“도련님이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강유리가 느릿느릿 말하더니 이내 덧붙여 말했다.“제가 이 말을 하려는 건 어머님 태도 때문에 주리가 그날 기분이 상당히 잡쳐있었어요.”육경서는 이해가 안 가는지 되물었다.“왜요?”강유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도련님 생각에는요?”“주리가 승벽심이 강하고 어디를 가든 항상 주목받던 사람인데 어르신들의 사랑을 못 받으니 서운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육경서 말에 강유리는 조용히 눈을 흘겼다.‘여태까지 솔로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오랜 침묵 끝에 육경서가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붙은 건지 담대하게 예측했다.“혹시 저를 위해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바론 공작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의료진은 불같이 달려왔고 한바탕 검사를 마친 뒤 아무 문제도 없다는 아주 난처한 결론을 내렸다.“당신들 뭐 하는 사람이야?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아빠가 너무 흥분하셨어요. 단순하게 위장이 불편했을 뿐이에요.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강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론 공작을 위안했고 지금은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유리의 말에 찬성했다.“맞아요. 그럴 수도...”바론 공작은 그때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뒷말을 제지했다.‘네 자식이 감히 음식 습관이 안 맞다고 말을 하기만 해 봐. 내 딸이 어떻게 자기 집에서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 있어?’얼토당토않은 이유이고 이건 강제로 귀국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의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이해하고 이내 덧붙여 말했다.“아가씨가 이곳에 오신 지 한참 되셨는데 음식 습관 때문에 위장이 불편할 건 같지 않고요. 제가 보기에는 내일 병원에 가셔서 전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자택에서 검사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환경 제한이 있었다. 의사가 다행히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바론 공작이 비록 불만이 잔뜩 했지만 이내 손을 저으며 가보라고 했다. 강유리는 헛구역질 한번 한 것으로 아빠가 난리법석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래도 마음속은 따뜻했다. 사실 강유리는 생리가 일주일이나 미뤄졌기에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전에 한번 해프닝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확정된 다음에 말하려고 아무 내색을 내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강유리는 도우미를 불러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하자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강유리는 식지로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비밀이야. 바론 공작과 육시준이 알게 하면 안 돼.”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둠이 내리자 강유리는 베란다 소파에 앉아 절반 넘게 진행
어떤 커플이 툭하면 사귀고 툭하면 헤어지고 그런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톡톡히 혼내주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반드시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치고 진심을 보여주게 해야 한다.그리고 아직 예능 프로그램이 남았으니 함께 출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경서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솔직히 절친이 있으면 이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며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자제하게 해준다.전에 신주리도 마찬가지로 릴리와 신하균이 사귄다고 했을 때 가족애를 버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여기까지 생각한 신주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날 밤 네가 그랬잖아. 신하균과 사귀는 것이 단지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 도덕에 반했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이건 릴리가 신하균과 연애한 뒤 신주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다.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신주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릴리는 말문이 턱 하니 막히더니 부자연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어?”그러자 신주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분명히 했어.”릴리는 생각하는 척하더니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맞는 말이잖아. 내가 그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금 운수가 안 좋아.”신주리는 릴리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융통성이 전혀 없고 일밖에 모르는 신하균은 예쁜 말로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낭만도 모르며 외모 빼면 자랑할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 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단체방에서 수다를 떨다 결과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릴리가 오프해버리는 바람에 심심한 나머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동시에 머리 한쪽 구석으로 이젠 귀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도우미들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어렴풋이 전해오자 강유리는
그 기분이 신씨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잘 유지되었고 비록 두근거리고 긴장됐지만 그래도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신주리의 이 한마디 말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어들었다.‘연기라고 했어...’육경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한참 동안 노려보자 불편함을 느낀 신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을 책임진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신주리는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투덜거렸다.“왜 쏘아보고 그래? 그러다 물기라도 할 것 같아.”육경서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주리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오해가 생긴 게 유미나 때문인 줄 알았어.”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는 유미나만 해결하면 두 사람이 화해할 줄 알았지만 신주리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 그를 혼내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주리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생각이 틀렸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솔직히 신주리도 유미나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절대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한 번도 육경서와 그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대하는지의 문제였다. ...여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상심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했다. 유미나와 매니저는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고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까지 떠안게 되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육경서와 신주리도 아직 화해하지 못했기에 똑같이 수심에 빠져있었다. 신주리는 절대 나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러 월계만으로 달려가 눈에 띄는 커플만 있으면 헤집어놓을 심산이었다. 릴리 집에 도착해보니 뻔뻔한 친오빠는 그곳에 없었고 릴리 혼자만 절친 단체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신주리였다.“핸드폰이 그렇게도 좋아?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서
현재 신주리 실력과 지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지하 주차장에 신씨 가문 차량이 오래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고 경호원이 기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서슬이 퍼레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신주리는 매니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향해 걸어가자 경호원이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줬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오르니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신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육경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기자한테 포위돼 못 빠져나가는 것을 어머님, 아버님이 구해주셨어.”신명진은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신주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다 가족인데 모순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문 닫아걸고 얘기해.”그러자 한영숙도 한마디 곁들었다.“그래. 이 자식이 평소에는 믿음이 별로 안 갔는데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것을 보니 그나마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신씨 부모님은 신주리의 열혈 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수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단지 팬에 그쳤고 딸이 실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서서히 신씨 가문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육경서가 신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사위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또 이런 특별한 사건이 생긴 시점이라 덜컥 겁이 났다.바로 이때 신주리가 입을 열고 말했다.“두 분은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아직 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와야겠어요.”그러자 한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회사 여부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요.”신주리는 대충 아무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을 차 밖으로 밀어냈다. 합리적인 이유라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영숙은 차에서 내리면서 낮은 소리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