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일이 잘못되었는데도 육시준은 한참 동안 육경서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폭풍전야 같은 기분은 그를 불안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강유리의 문자가 온 것을 보고 그녀의 덕을 보고 싶었다. “아마도 내가 눈에 거슬릴 거예요.”맥없이 축 처져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강유리는 생각에 잠겼다.‘둘만의 세계를 즐기고 싶었던 건가? 하긴, 도련님이 있는 것보다 조용하긴 하겠네.’그녀가 침묵하자 육경서가 당황한 듯 말했다.“형수님, 혹시 저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강유리는 대충 대답했다.“그럴 리가요.”누가 돈줄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는가?“그럼 절 데리러 오실 수 있어요? 형수님이 들어오라고 했다고 말해주시면 안 돼요? 내가 들어오려고 한 게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강유리는 어이가 없었으나 육경서가 불쌍하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육시준에 대해 매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육경서도 유달리 애틋하게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4시 반이었다. 그녀는 집에 가는 길에 마중 가는 것도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저녁에 촬영 있어요? 아니면 제가 지금 데리러 갈까요?”“촬영 없어요. 지금 당장 오셔도 돼요!”육경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고 휴게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팀과의 동거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였다. 지나가던 직원들이 한껏 들뜬 그의 모습을 보고 농담조로 물었다.“오늘 데이트 있나 봐요? 기분 좋아 보이네요?” 그는 헤벌쭉해서 대답했다.“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요. 저녁 여기서 안 먹을 거니까 제 건 안 챙기셔도 돼요.”사람이 있는 곳에는 입소문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한테 알려졌다. 촬영장 모퉁이에서 남자 조연 배우와 카메오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남자 조연 배우는 휴게실 방향을 쳐다보면
강유리는 어떻게 밸런타인데이를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오 씨 아주머니가 오늘 저녁에 샤부샤부를 먹는 게 어떠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요 며칠 담백한 음식만 먹어서인지 그녀는 자극적인 것이 먹고 싶었던 참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 여보 위가 안 좋은데…… 남편 생각도 해야지.’하지만 강유리는 담백하게 먹는 것과 건강하게 먹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그래서 고민 끝에 몸 관리의 신이라고 불리는 신주리한테 메시지를 보냈다.【위에 좋은 음식 좀 추천해 줄래? 맛도 좋고 기력에도 좋은 거 어디 없나?】【위에 좋은 음식이랑 기력 보충하는 거랑 완전히 다르지. 다 네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한테 해주려고 그래?】【누구긴 누구야. 남편이지. 위가 안 좋아서 좀 안쓰러워. 자주 밤새워서 일하니까 기력 보충도 좀 시켜야 도리 것 같아.】【부러우면 지는 거다, 정말.】신주리의 옹졸한 이모티콘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일단락됐다. ......차가 JL빌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강유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낯선 차량 몇 대가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육경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의문점을 가진 채 차를 세워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반짝이는 두 눈은 가만히 있어도 매력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중년 남자 한 명과 작업복을 입은 사람 여러 명이 서 있었다.강유리는 낯익은 옷을 보고 DH 브랜드임을 알아보았다. 오 씨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려는데, 강유리가 온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대헌그룹에서 오셨대요.”아주머니의 말에 강유리의 눈빛은 조금 흔들렸다. LK그룹의 행동에 대헌그룹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먼저 일 보세요. 아, 이 요리들 할 줄 알아요?”강유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신주리가 보내준 레시피를 내밀었다
이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이때 육경서가 다급하게 김찬욱을 밀어냈다.“비켜! 그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로 우리 형수님한테 수작 부리지 말라고!”한참을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은 김찬욱이 소리쳤다.“육경서!”“하, 왜? 이게 사과하러 왔다는 사람 태도야? 형수님, 저 자식이 주는 거 받지 마요. 다음 해 형수님 옷장은 내가 평생 책임질게요! 저딴 브랜드 옷 안 입으면 그만이니까!”하지만 김찬욱도 지지 않겠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앞으로 3년 동안 형수님이 사는 옷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브랜드는 형수님이 원하는대로 고르시고요.”“난 5년 동안 책임질 건데?”“10년!”“20년!”“평생! 평생 책임지겠습니다.”이에 육경서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싸움에서 진 사람답지 않게 계획대로라는 간사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김찬욱도 그제야 자신이 당했음을 인지하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저번 드레스룸을 꾸밀 때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해마다 옷에 쓰는 돈이 꽤 많은 것 같은데 그걸 평생 책임지게 생겼다니...게다가 내 여자도 아닌 다른 여자에게 그런 돈을 써야 한다니 속이 쓰려왔다.“아닙니다. 제 옷 정도는 저희 남편이 충분히 살 수 있어요.”하지만 정작 강유리가 거절하니 김찬욱은 더 다급해졌다.“형수님, 우리 사이에 이렇게 매정하게 구실 겁니까?”“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요?”“시준 형이랑도 제가...”“우리 형 쟤랑 안 친해요.”때마침 육경서가 탁 맥을 끊어버리자 두 사람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하지만... 희한하게 그 모습이 사이가 나빠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찐친끼리 서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인달까?한편, 쿠션을 끌어안은 강유리의 눈동자가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스쳤다.김찬욱에 대해선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김대헌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손자로 워낙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인지 싸가지는 없어도 비즈니스적인 능력은 출중하다고 알려진 인물.젊은 나이에 대헌그룹에서 요직을 떡하니 차지한 건 온전히
말을 마친 강유리는 두 사람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이상해... 예감이 안 좋단 말이야...’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던 육경서는 은혜라도 입은 듯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찬욱의 모습이 들어오니 왠지 더 울컥했다.“하이고, 지금 웃음이 나와?”“왜? 뭔데?”오늘 저녁 식사에서 이 모든 거짓말이 전부 들통난다면 김찬욱도 육경서도 화를 면하기 힘들 터, 서로의 안위를 위해 육경서는 김찬욱에게도 육시준, 강유리의 기막힌 인연과 오해에 대해 털어놓았다.“우리 형수님이 얼마나 똑똑한데. 지금 뭔가 눈치채신 것 같거든? 우리 형이 LK그룹 회장인 게 들통나면 우리 형은 끝이야. 우리 형이 끝장나면 너도 나도 무사할 것 같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먹어. 알겠어?”한편,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유리가 휴대폰을 확인했다.[바빠?]육시준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자연스레 답장했다.[응. 도련님도 집으로 오셨어. 아주머니한테 당신 좋아하는 음식 잔뜩 해두라고 했으니까 일찍 들어와?]...한편, 불그스런 저녁 노을이 물들인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유강엔터 회사 건물 앞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떡하니 멈춰서있다.벌써 20분 넘게 이곳에서 강유리를 기다리고 있던 육시준은 문자를 확인하고 깊은 침묵에 잠긴다.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폰만 노려보는 육시준,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던 임강준이 넌지시 물었다.“사모님께서 많이 바쁘신가 봐요?”“퇴근했다네. 경서 데리러 갔었나 봐?”‘이크, 사모님이랑 엇갈리셔서 기분이 안 좋으셨던 거구나...’“그 자식은 멀쩡한 차 두고 왜 운전을 안 해? 차고에 자리만 차지할 거면 차라리 팔아버리는 게 낫지. 임 비서, 알아서 처리해.”“알겠습니다.”육경서도 모르는 사이 소유 차량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소름 끼치게 차가운 목소리에 임강준마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이크, 정말 화가 나셨나 보네.’차고에 있는 육경서의 차량 중 몇 대는 아직 제대로 개시도
쿠궁!김찬욱의 말에 수저를 들려던 강유리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멈추었다.그리고 우습게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음흉하게 웃던 신주리의 표정이었다.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김찬욱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흘렸다.“아, 아... 전 또 형수님께서 일부러 준비하신 줄 알았죠. 뭐, 잘됐네요. 저도 요즘 몸이 허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몸보신 좀 하죠.”“그래. 필요한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육경서가 낚지 호롱 두 개를 던져주다시피 김찬욱에게 건넸다.“...”이런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다간 누구 하나 체기에 병원으로 실려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거란 생각에 육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역시, 남편 생각해주는 건 와이프뿐이라니까.”“아, DH 제품들도 전부 리콜되고 당신한테 고마운 게 많아. 이렇게라도 고백해야지.”“쿨럭, 쿨럭.”순간 낙지에 목구멍에 콕 걸린 듯한 기분에 김찬욱은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참, 아까 김 대표님 말씀으론 다들 서로 친하다면서?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어도 돼? 우정에 금이라도 가면 어쩌지? 찬욱 씨가 많이 슬퍼할 거 같은데...”강유리가 육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평소의 맑은 눈동자가 아닌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육시준의 시선이 김찬욱에게 향하고 육경서는 테이블 밑으로 김찬욱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대답 잘해라, 이 자식아...’자연스레 잔에 든 음료를 마신 김찬욱이 한 마디 툭 뱉었다.“슬프긴요 뭐.”하지만 잔에 든 액체를 삼킨 김찬욱이 미간을 찌푸렸다.‘육경서 이 자식... 잔에 보드카를 담으면 어떡해... 맹물인 줄 알고 잔뜩 마셨잖아! 아니지, 지금은 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리는 게 맞아...’아예 잔에 든 음료를 전부 원샷한 김찬욱이 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오늘은 진심으로 사과드리려고 온 겁니다.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저희 측 잘못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직원 관리를 잘못한 제 잘못이겠죠.”“사과라... 어떻게든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보글보글...연포탕이 끓는 소리만이 적막이 잠긴 식탁을 메우고...어느새 술기운이 잔뜩 오른 김찬욱은 육경서의 손을 더 꽉 부여잡았다.“아까 우리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한편, 바위처럼 굳어버린 육경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김찬욱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하, 이 손...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잘라버리고 싶다...’깜짝 놀란 건 강유리도 마찬가지였다.‘세상에...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어쩐지... 뭔가 이상하긴 했어. 김찬욱 대표가 뭔가 말하려고 하면 도련님이 바로 막아내는 거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했었는데 커밍아웃 때문이었어?’“형, 형수님.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경서가 자꾸만 비밀로 하자고 해서요. 저도 나름 기업 대표고 경서도 연예인으로서 얼굴 다 팔렸잖아요. 요즘 이미지도 좋은데 게이설이라도 돌면... 이해하시죠?”진심어린 눈동자에 감동한 강유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 그럼요. 그런데...”육경서가 단순히 엔터회사 소속 연예인이었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찬성했을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순 없는 관계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인연인지 알고 있어서였다.하지만, 육경서는 그녀의 남편, 육시준의 친동생이기도 하다.자기 동생의 커밍아웃에 피를 나눈 가족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호기심이 앞섰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육시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피식 웃었다.“이해는 하지만... 허락은 글쎄...”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찬욱은 아예 한 술 더떠서 두 사람의 기구한 러브스토리까지 꾸며내 들려주는 기염을 토해냈고 세기의 사랑이라고 타이틀을 붙여도 될 만큼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강유리는 물론이고 육경서조차 본인이 정말 이런 경험을 했던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그렇게 한참을 혼자 떠들던 김찬욱이 머쓱한 표정으로 또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런데 형이 무슨 짓을 하셨길
강유리, 육시준이 자리를 뜨고 식탁에는 어색함만이 남고 말았다.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김찬욱이 방금 전 말했던 그 광경들이 오버랩되며 육경서도, 김찬욱도 동시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욱!”세상에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른 거짓말이 또 있을까?한편, 2층 복도.잠옷을 갈아입고 씻으려던 강유리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베이지색 잠옷에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목소리, 귀여운 고양이귀 모양 머리띠, 그리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과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착장도 행동거지도 10대 소녀라고 해도 될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육시준은 목덜미를 잡다시피하여 강유리를 안방으로 끌어당겼다.“아, 왜 그래! 궁금하지 않아? 당신 동생 인생이 달린 일이잖아.”강유리가 발버둥을 치며 나지막히 경고했다.안방문을 닫은 뒤에야 손에 힘을 푼 육시준이 말했다.“글세, 내가 너라면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그... 그게 무슨 소리야?”강유리가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워낙 조용한 분위기인데다 어딘가 야릇한 눈빛.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강유리가 옷을 여미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큼, 나 아직 일 안 끝났어. 그리고 이제 겨우 7시야. 정신 좀 차려.”“그래? 남편 몸 걱정을 지나치게 하길래 오늘 일은 다 마친 줄 알았지...”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 육시준이 자연스레 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풀기 시작했다.“윽...”대충 핑계 몇 마디 대서는 벗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강유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진짜... 진짜 당신 몸 보신 해주고 싶었던 거였어. 그런데 하필 메뉴들이...”한참을 뒷걸음질 치던 강유리의 발목이 소파에 닿고 순간 중심을 잃은 강유리가 털썩 소파에 쓰러졌다.어느새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헤친 육시준이 소파에 눕다시피 한 강유리 위로 다가왔다.“메뉴가 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특별히 준비한 건 아니고?”
한편 1층 식탁.한참 헛구역질만 하던 두 사람 역시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진심으로 현타가 밀려온 김찬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진짜 할만큼 했다. 이 정도면 너희 형 화도 풀리겠지?”“양심이 있다면 풀어야지.”육경서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또 다시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두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들어 안에 든 액체를 원샷했다.그리고 잠시 2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김찬욱과 육경서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올랐다.역시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육시준은 부스스한 머리 때문인지 단순히 옷 때문인지 평소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애꿎은 술만 마셔대던 육경서, 김찬욱이 쪼르르 달려왔다.육시준이 육경서에게 묘한 눈빛을 보내고 형에 관해선 눈치 백단인 육경서가 바로 입을 열었다.“두 사람 천천히 얘기 나눠. 난 내일 아침 일찍 촬영이라.”이때다 싶어 도망치는 육경서를 김찬욱은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저 자식이 정말... 아주 의리는 제대로 말아드셨구만.’“대표님.”그리고 김찬욱도 드디어 진지한 얼굴로 육시준을 마주했다.여유로운 얼굴로 소파에 앉은 육시준이 그에게 물었다.“네가 이 사람 저 사람 잘 만나고 다니는 줄은 알았지만... 우리 집안 사람한테까지 눈독 들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감정을 알아챌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에 김찬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큼, 경고인가?’“사모님과 어떤 상황이라는 건 대충 들어서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더다 보니... 그리고 저희 측 직원과 있었던 일은 정말 몰랐어요. 영상도...”“워낙 바쁘니까 이해해. 그리고 내가 직접 오더 내린 게 아니라 임 비서가 움직인 거니까 소홀히 여길만도 했지.”‘윽, 이 사람 이렇게 잘 비아냥대는 성격이었던가?’차라리 화를 내면 좋을 텐데. 아무 감정없이 덤덤하게 말하니 진심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휴.”잠시 후, 김찬욱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제 소홀로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