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지자. 넌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23살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 올해 천강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고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강유리가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다.휴대폰을 바라보던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3년 동안 롱디라서 많이 섭섭했나? 그게 미안해서 금전적으로 어떻게든 뒷바라지 해줬던 건데. 그리고 그 동안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었잖아.’일방적인 이별 통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오랜 롱디에 지친 남자친구의 귀여운 투정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귀국했다.당일 밤 11시.‘내가 자길 위해서 특별히 귀국했다는 걸 알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서프라이즈를 제대로 해주기 위해 강유리는 기나긴 채팅기록을 뒤져 언젠가 그가 알려주었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냈다.“삑삑, 삐리릭.”문이 열리고...트렁크를 살며시 내려둔 채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가던 강유리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첫사랑 절대 못 잊는다던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는 거야?”“뭐래. 내 첫사랑은 너야. 강유리 걔는... 어디까지나 돈 때문에 좋아하는 척 하는 거였다고. 우리가 애도 아니고. 플라토닉 연애라니. 하여간 더럽게 비싸게 굴어요.”“뭐야. 그럼 스킨십하려고 나랑 만난다는 거야?”“자기도 즐겨놓고 왜 이래. 응?”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밖에서 이 모든 걸 듣고 있던 강유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방으로 다가갔다.역시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로 뒤엉킨 남녀의 모습이 보이고... 강유리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냈다.“찰칵.”휴대폰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방금 전까지 서로에게만 빠져있던 임천강, 성신영이 화들짝 놀란다.방 앞에 서 있는 강유리를 발견한 임천강이 일단 급한대로 이불로 비루한 몸뚱어리를 가려본다.“강유리? 네... 네가 어떻게 여길...”떨리는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그냥... 네가 원하는 게
화풀이를 끝낸 강유리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둘 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뻔뻔해? 무릎 꿇고 애원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나만 이 상황 이해 안 가는 거야?”“너...!”“임천강, 나 늙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애랑 결혼 안 해. 네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는데 그럼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났어야지. 추잡하게 이게 뭐 하는 거야? 어쨌든... 오늘 이 치욕...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 어떻게든 복수할 거니까 두고 봐.”말을 마친 강유리가 자리를 뜨고 분노에 찬 임천강의 절규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강유리, 너야말로 두고 봐! 내가 멍청이처럼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한편, 오피스텔을 나서며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던 강유리가 우뚝 멈춰 섰다.‘아니지. 여긴 내 집이잖아. 왜 내가 나가야 해?’휴대폰을 꺼낸 강유리는 바로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 502호 주인인데요. 3년 동안 집을 비웠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무단침입해서 살고 있네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어서 처리해 주세요.”늦은 밤, 강유리의 전화에 벌떡 일어난 관리인은 바로 경비원들과 함께 502호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마지막 미션까지 마친 강유리는 트렁크를 끌며 새벽의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연인의 배신, 슬프다기 보다 짜증이 밀려왔다.그녀와 임천강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수많은 남자들 중 임천강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한때 열렬하게 그녀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그런데... 오늘 밤 그녀가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은 지난 3년이란 시간을 그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애초에 날 좋아한 적도 없었잖아. 그냥 내 돈 보고 접근한 거였어?’“나쁜 자식들!”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짜증이 밀려들어 발에 닿는 조약돌을 퍽 차는 강유리다.하지만 다음 순간, 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조약돌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에 부딪히며 캉 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헉!”가까이 가보니 롤스로이스 한정판.방금 전
한편, 육시준 역시 갑자기 나타나 계약 결혼이네 한달에 천만 원이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강유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내민 곳은 뒤쪽이었다.“자료 좀 주실래요?”어젯밤 차에 남긴 정보에 따라 비서가 이미 강유리의 뒷조사를 완벽히 끝낸 상태.무표정으로 태블릿 PC를 넘기던 육시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1000만원은 너무 적지 않나? 적어도 0 하나는 더 붙여야지. 그래야 육씨 집안 사모님이란 타이틀에 걸맞을 테니까.”목소리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강유리는 0 하나는 더 붙여야 한다는 말에 꽂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하이고? 요즘 호스트는 가격 흥정을 이렇게 하나? 하긴, 저 얼굴에 저 분위기에... 부잣집 사모님 한 명 제대로 잡으면 월에 억은 쉽게 받겠어. 하지만...’“5000만원, 이 정도에서 끝내지. 적당히 해.”해외에서 매달 임천강에게 용돈 명목을 부쳐준 돈이 겨우 2000만원 남짓, 강유리가 부자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로 호구 잡힐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이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데... 5000만이든 1억이든 누가 누구한테 주는 거지?”“내가 그쪽을 고용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주는 거지.”이에 육시준은 다시 강유리의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얼핏 얼핏 보이는 요염함이 매력적인 정교한 얼굴, 지금까지 그의 돈에 빠져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던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만만함을 넘어 어딘가 고고하기까지 한 눈빛...‘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좋아.”잠시 후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다.하지만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강유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익숙한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꽂힌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저 차 주인한테 빚을 좀 진 게 있거든.”강유리를 보는 육시준의 눈이 또 묘하게 변하고...비서 역시 상황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 싶지만 육시준의
충격으로 일렁이는 육경서의 눈동자는 제발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육시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비서에게 분부했다.“강유리, 그리고 그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줘요.”3년 동안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가 귀국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강행하는 걸 보면... 뭐에 쫓기는 듯한데.육시준은 그 답이 그녀의 집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알겠습니다. 해외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어제 비서가 급하게 구한 자료에선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년 간 도피 유학을 떠났다는 정보가 전부,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아니요.”‘그건 그 여자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육경서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다.여기 오면서 비서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제 일부러 육시준 차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오늘 못 알아보는 척 결혼 제안을 한 여자라던데...‘아무리 생각해도 꽃뱀 같단 말이야. 뭔가 냄새가 나... 구린 냄새가...’“형, 그 여자 진짜 형 얼굴 모르는 거 맞아?”서울시에서 한정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육시준 한 사람뿐.그의 차가 곧 그의 얼굴이자 이름 같은 존재인데 아무리 갓 귀국했다지만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동생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육시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글쎄..”“그런데 왜...”“내가 알아서 해.”동생의 말을 잘라버린 육시준이 말을 이어갔다.“아, 아주머니한테 내 짐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줘. 오늘부터 와이프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한편, 강유리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들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마침 저녁 시간, 문 앞에 차를 댄 강유리는 검은색 철문 옆에 적힌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성홍주”강민영이 세상을 뜬 뒤로 성홍주는 강유리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재산을 전부 빼앗은 것도 모자라 첫사랑과 낳은 사생아까지 집안에 들였다.빨리 어른이 되
강유리의 말에 저택은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신영과 왕소영 모녀는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성홍주는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너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었니? 그런데 오늘 바로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성홍주의 말에 강유리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연민마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하, 아빠도 제가 어제 헤어진 걸 알고 계셨네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딸이 자기 언니 남자친구를 빼앗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강유리의 팩폭에 성홍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가족끼리 그런 일로 꼭 얼굴을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니!”성홍주가 자기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성신영이었지만 또다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나랑 천강 오빠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맞는걸.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 우린 그냥 언니가 상처를 받을까 봐 제대로 날 잡고 사과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어. 내가 맞아도 싸지 뭐.”눈시울을 붉히는 성신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홍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성홍주의 눈에 성신영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예쁜 딸이었고 강유리는 자기 엄마를 꼭 닮아 강압적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딸이었기에 마음이 성신영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구니까 남자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네 동생 반만 닮아봐. 천강이가 바람을 피웠겠어?”“아빠, 죄송해요.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비록 신영이랑 제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니 축북해줬어야 했는데 맞죠? 그 집도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주식까지 다 신영이한테 줄 걸 그랬어요.”강유리가 성신영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세 사람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뭐? 집에 주식
하지만 임천강의 비아냥거림이 들리고 순간 스쳤던 빛이 후광이 와장창 깨져버린다.‘임천강, 너도 저 집에서 들어앉은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 가식적이고 탐욕적이지. 역겹게...’임천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리는 뭔가 결심한 듯 엑셀을 거세게 밟았다.순간 차량이 화살처럼 앞으로 발사되고... 방금 전까지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임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임천강은 다급한 나머지 자기 발에 걸려 대자로 넘어지지만 핸들을 잡은 강유리는 도무지 속도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오빠!”“강유리, 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임천강을 마중나온 성신영 모녀는 비명소리만 꺅꺅 내지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끼익...”그리고 그 순간 타이어가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임천강과 단 한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드디어 멈춰 섰다.지잉...차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강유리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픽 웃었다.잔뜩 긴장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너나 잘하세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강유리의 스포츠카는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매연에 세게 콜록거리던 임천강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저 미친... 두고 봐.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여느때와 다름없이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강유리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도로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에 강유리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클럽 죽순이에 걸레라... 그래도 한때 사귀었던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결국 치미는 짜증에 강유리가 자주 가는 바로 핸들을 꺾으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어디야?”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매력적이지만 낯선 목소리.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지?’“누구세요?”“...”잠깐의 침묵 끝에 육시준은 한 번만 더
마치 다른 사람 결혼을 축하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따뜻한 조명과 은은한 디퓨저 향 때문일까 강유리는 기분이 왠지 좋아졌다.“그쪽도 결혼 축하해.”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강유리는 와인을 포도주스처럼 들이키기 시작했다.식사 도중 육시준이 잠깐 전화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유리는 와인 한 병을 전부 비워버렸으니까.취기가 오르는 느낌에 강유리는 의자에 살짝 기대어 보았다.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감싸는 여리여리한 몸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정교한 얼굴,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만한 외모였다.이때, 다가오는 육시준을 발견한 강유리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가까이 와봐.”테이블 가까이 다가간 육시준이 텅 빈 와인병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취했네.”“나 강유리야, 클럽 죽순이 강유리. 내가 그렇게 쉽게 취할 것 같아?”하지만 개미 소리만큼한 목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육시준이 허리를 숙였다.“뭐라고?”육시준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든 강유리의 눈에 옷깃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복근이 들어오고...취기 때문일까 그녀의 하얀 손이 육시준의 옷 안으로 향한다.이에 육시준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강유리!”“왜? 우리 결혼한 사이잖아. 부부끼리 이 정도도 못 만져?”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던 강유리가 막무가내로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 사이에 원피스 나시 끈이 스르륵 내려오며 강유리의 아찔한 쇄골 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로맨틱한 조명 아래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육시준을 향해 손을 뻗는 강유리, 이 세상에 정말 요정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육시준이었다.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모습에도 육시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오늘 처음 안 사이야. 스킨십은... 강요하지 않을게.”이때 강유리가 벌떡 일어서고 당황한 채 뒤로 물러서던 육시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든 강유리는 침대 위라는 것도 잊고 후다닥 뒤로 물러나고 그만 우스운 꼴로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악!”낮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고통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강유리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려보았다.그리고 미의 신마저도 질투할 것만 같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하지만 더 이상 잘생긴 얼굴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엔 온통 소안영이 소개해 주려던 사람은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만 가득할 뿐이었다.“너... 도대체 누구야?”이불이 걷히고 육시준의 나체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뭐야. 어제 있었던 일 다 까먹은 거야? 이렇게 무책임해도 돼? 여보?”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여보라는 호칭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강유리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보지만 휴대폰에서 들리는 소안영의 호들갑 섞인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뭐야! 강유리, 아까 그거 남자 목소리 맞지! 너 귀국한 지 이제 3일째야. 그런데 남자는 어디서 만난 거래? 그리고! 집에까지 들여? 너 정말 미쳤어?”“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강유리는 숙취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전화를 끊었다.사실 대외적으로 강유리는 클럽 죽순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주량은 그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필름이 끊기기 전, 강유리의 마지막 기억은 서로 결혼 축하한다며 와인잔을 부딪히는 것이었으니...‘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차마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나체는 쳐다보지 못하고 이불에 감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들여다 보던 강유리의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잠시 후, 겨우 이성을 되찾은 강유리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뭐지? 느낌이 이상한데?’이어 그녀의 시선이 베이지색 침대 시트로 향하고...아무런 흔적도 없는 시트를 확인한 강유리는 어느새 쑥스러움을 씻어버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육시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공격을 날리기도 전, 육시준
게스트들이 대부분 세대 가문 자녀이기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 이름을 들은 적이 한두 번씩은 있었다. “우리 아빠한테서 이단호 씨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아주 높게 평가했어요.”신주리의 신분이 이미 들통났기에 숨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자 육경서도 이내 입을 말했다.“맞아요. 우리 아빠도 얘기한 적이 있어요.”그러자 신주리는 고개를 돌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자식이 지금 자기 아빠가 더 잘났다고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누구 아빠 인맥이 더 넓어 이 사람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는지 겨뤄보겠다는 거야?’“네 아빠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얘기해 봐.”신주리는 그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는 표정으로 흘겨보자 육경서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더니 이내 예쁜 반달눈으로 노려봤다.‘그저 인사치레로 한 말에 왜 죽자고 덤벼들어?’이단호는 연예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기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방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육경서는 그저 신주리를 곁들어 말했을 뿐이란 걸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단호는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었고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4대 재벌 중의 우두머리인 육씨 가문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부드럽게 웃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곤경에 빠진 육경서를 구원해 줬다.“두 분 너무 과찬이세요. 이제부터 한동안 함께 지내야 할 테니 서로 천천히 알아가죠.”이단호는 비굴하지도 과장되지도 않게 말했고 두 사람의 말이 인사치레라는 것을 안다는 뜻을 내비쳤고 육씨 가문과 신씨 가문 같은 재벌가에서 자기를 거론할 가능성이 극히 드물다고 생각했다.신주리는 뭐라고 말하려다 끝내는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노려봤다. 자기는 분명히 진실을 말한 것인데 육경서가 끼어드는 바람에 이단호가 인사치레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이게 바로 이 자식의 목적인가?’육경서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버스 중간 위치 좌석에 이미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게스트들이 줄줄이 탑승하자 그 남자는 예의 바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게스트들도 줄줄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고 나니 어쩐지 공기가 삽시간에 고요해진 것만 같았다.게스트들은 이미 서로 친숙해졌지만 새로 합류한 신인은 어색했고 새 게스트뿐만 아니라 원 멤버들도 생소한 얼굴이 있으니 어쩔 바를 몰라 했다...그때 강미영이 먼저 침묵을 깨며 말을 걸었다.“혼자 오셨어요? 새 게스트가 두 명 합류하기로 한 거 아니에요?”나머지 사람들도 강미영과 마찬가지로 궁금했지만 다른 한 명의 게스트는 목적지 아니면 다른 차에 탑승해 있다가 서프라이즈 식으로 등장할 것으로 추측했다. “두 명이라고 하던가요? 새 게스트는 저 한 명이라고 알고 있어요.”그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피디가 나서더니 2부는 야외촬영인 관계로 여자 게스트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니 일단 남자 게스트 한 명만 출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자 게스트는 체력도 여자 게스트보다 우월하고 힘들어도 버틸 수 있으며 도움도 줄 수 있다고 말했다.피디 말에 강미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전 피디님 말에 찬성하지 않아요. 여자라고 고생을 못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러면 저희가 남자 게스트들의 부담인가요?”“그런 뜻은 아니고요...”“우리가 그런 존재라면 2부 촬영은 참여하지 않을게요.”신주리도 이내 곁들어 말했다. 밤샘 작업을 한 한지원이 비몽사몽인 상태로 퀭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네? 그럼 이번 촬영에 참여하지 않아도 돼요?”피디는 아무 말 없이 한지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들어야 할 건 하나도 못 듣고 듣지 말아야 할 건 죄다 들었지 뭐야.’피디는 머릿속으로만 투덜거리고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실수했다면서 사과하면서 이번 촬영에 참여하기로 했던 여자 게스트가 거절했다고 말했다.그러자 강미영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우리한테는
그러자 서진태가 머뭇거리며 난처한 듯 말했다.“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해.”신주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육경서가 이내 알아차리고 물었다.“비매품인가요?”“이건 우리 한의학연구원에서 자체로 사용하는 물품이라 대외로 판매하지 않아요.”“그렇군요.”신주리는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고마워요. 제가 필요하면 이모한테 대신 부탁할게요.”강미영이 고개를 숙이고 팔에 찬 모기퇴치 팔찌를 연구하다가 신주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저한테 서 선생님 연락처가 없어요.”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방송을 정주행한 신주리는 현재 국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솔직히 소지석은 별로 가망이 없어 보였고 그의 후배라는 신분을 당분간 바꾸기 힘들것으로 보였다.서진태는 외모며 사람 됨됨이도 아주 괜찮았고 1부 때 신주리를 위해 한약도 달여준 적이 있었다. 서진태는 신주리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어색하게 기침을 짓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뭐 그래도 돼.”“다들 지석 오빠 표정을 봤어요?”“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눈빛은 숨길 수가 없어요.”“주리야. 소지석은 육경서의 롤모델인데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아아아. 주리와 키다리 아저씨와의 만남. 내가 찜해놓은 커플인데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다들 봤어요? 위층 글쓴이 같은 사람을 바보라고 칭해요.”“...”다들 강미영, 소지석과 서진태 세 사람의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은 서진태가 판매 목적으로 출연했다고 했던 댓글러들을 혼내주고 있었다.“방금 서 선생님이 장사하러 왔다고 했던 사람들 다들 나와서 대신 팔아줄지 그래요?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재주가 있으면 저 제품들을 구해오기만 해요.”그러자 조금 전까지 비아냥대던 사람들이 사라진 듯 조용해졌다.육경서는 어두운 표정의 소지석과 해맑게 강미영과 서진태를 엮어주려는 신주리를 번갈아 바라봤지만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한참 뒤 그는 고개를 돌려
다들 마지막 한마디 말에 설득당했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육경서와 신주리가 금방 아침을 먹고 출발했으니 배고플 리가 없고 두 사람은 그저 이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하고 싶었던 모양이다.그리고 만일 그들의 제의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면 제작팀에서 먼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한지원이 부랴부랴 도착했다.“정말 정말 미안해요. 어제 밤새워서 그림 원고를 그렸더니 늦잠을 자버렸어요. 프로그램 진행에 영향 준 건 아니죠? 정말 미안해요.”한지원이 바람처럼 달려오며 말했다.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미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많이 늦지 않았어. 아침은?”한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아요. 더욱이 잠을 잘 자지 못하면 더 못 먹겠더라고요.”그러면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방금 차 안에서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카메라맨이 부탁했던 말이 기억나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혹시 절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니죠?”그러자 육경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걱정하지 말아요.”육경서의 말에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일 함께 아침을 먹으려고 남은 게스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면 엄청나게 미안했을 것이다. 그제야 댓글 창에서 육경서가 제의를 잘했다고 연신 감탄했다.“저만 그런가요? 지각은 매우 예의 없는 행동 아닌가요? 이튿날 촬영이 있다는 걸 알면서 왜 밤샘 작업을 해요?”“자기만의 고유의 사고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추측하지 말아요. 예술인들에게 영감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그리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인데 지금 왜 살고 있어요?”“맞아요. 제가 지원 언니 채널에 들러서 오는 길인데 캐리어는 이미 준비해 놓았고 아침에 화장도 못 하고 나왔어요. 최선을 다했어요.”“맞아요. 제가 더 일찍부터 채널에 있었는데 제작팀에서 갖은 방법을 다 해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서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니까요.”“이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지만
댓글 창은 여전히 시끄러웠으나 유달리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아침을 먹고 나니 신주리는 육경서가 전처럼 얄밉지 않았고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했기에 화장도 하지 않은 채 허둥대며 캐리어를 정리했다. 카메라맨들은 허가를 받기 전에 절대 여자 연예인의 드레스룸에 함부로 진입하지 않기에 먼발치에서 그림자만 찍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이거 가져가야 해. 요즘 기온이 내려갔어. 교외나 산속은 여기보다 더 추워!”“이것도 두어 개 더 챙겨서 가지고 가.”“모기 퇴치제와 일용품은 따로 챙기지 않아도 돼. 내가 많이 가져왔어.”“이건 뭐야? 이건 어떻게 입는 거야?”“꺼져.”앞에는 육경서의 잔소리였고 마지막 한마디는 신주리가 참다못해 터져 나온 축객령이었다. 육경서는 울상이 되어 신주리 말대로 드레스룸에서 꺼져버렸고 누구도 그가 무엇 때문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댓글 창이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고 신주리 팬과 커플 팬들의 활약이 대단했다.육경서 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입을 닫아걸고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그들은 질척대는 오빠의 모습을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어 입을 닫는 것이 상책이었고 더욱이 입만 열었다 하면 신주리 팬들의 조롱이 이어졌다...10분 뒤 신주리가 준비를 마쳤는지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나왔고 첫 번째보다 훨씬 준비를 많이 한 듯싶었다. 2부는 야외촬영이라 예상 밖의 일이 많이 발생할 수 있기에 되도록 만전의 준비를 해야했다. 제작팀은 두 개의 캐리어와 백팩을 보더니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끝내는 입을 다물더니 별장에 집합한 뒤 다시 의논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집합했던 JL빌리지의 별장에 도착해보니 두 사람이 이미 지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순서로 도착했고 그들보다 더 늦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강미영과 소지석 둘뿐이었다.“이모, 지석이 형, 일찍 오셨네요.”육경서가 바보같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던 강미영이 그들이 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육경서 팬들이 자기 아이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자 사처에서 빈정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어머머, 육 도련님같이 대단한 분이 하찮은 우리 주리를 좋아해 주신다고 하니 더없는 영광이죠. 신씨 가문에서 알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딸내미가 드디어 육씨 가문의 덕을 볼 수 있게 된 거잖아요.”신주리의 신씨 가문 아가씨 신분이 폭로되고 나서부터 팬들의 태도도 전과 다르게 강경해졌다. 신주리 팬들은 육경서 팬들이 나타나자마자 귀족이니 왕자이니 하면서 빈정댔고 육경서 팬들은 찍소리 못하고 바로 꼬리를 내려버렸다.‘전에 한두 마디 욕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역시 재벌 2세는 무서운 존재였고 신주리는 일부러 신분을 감추고 일반인인척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에 비해 육경서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이고 재벌 2세 중에서 제일 맑은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댓글 창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일 때 문이 벌컥 열렸고 신주리는 촬영팀이 도착한 걸 알았지만 방금 잠에서 깼기에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육경서의 예쁜 반달눈을 마주하자 신주리는 댓글 창의 댓글과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거 아닌가?’그러더니 이내 쾅 하고 문을 차갑게 닫아버렸다. 육경서와 카메라 감독은 멍하니 서로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댓글: 하하하하, 역시 우리 주리야.카메라가 한창 문 앞을 찍고 있었고 한참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참다못한 육경서가 다시 노크하려 할 때 문이 재차 열렸다. 육경서는 신주리가 다시 문을 닫아버릴까 봐 그녀를 헤집고 쏜살같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아침부터 대체 뭘 숨겨놨기에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신주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육경서를 힘껏 노려보았다.그러자 댓글 창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역시 육경서답게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댄다고 놀려댔다. 육경서 팬들은 그 모습이 너무 창피해 잠적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경서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뭐가 문제야? 유리 신분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니까 내가 지시만 하면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어.”바론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저는요?”“육 서방 서류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자네가 협조하기만 한다면...”“협조 못 해요.”육시준이 바로 대답하자 바론 공작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면서 나한테 왜 물었어? 이럴 거면 귀국할 거라고 얘기하면 되 것을 남을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물었어?’“하지만 전 유리 의견을 존중해요. 유리가 남고 싶다면 저도 함께 남을 것이고 비행기는 이미 준비됐으니 싫다고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바론 공작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그래서 자네가 지금 내가 유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육시준은 그걸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그런 뜻은 없어요.”바론 공작은 육시준을 힘껏 노려보더니 귀찮은지 가버렸다.‘이 자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유리 앞에서 갖은 자상한 척을 다 하더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기다려 봐. 내가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에 남게 하면 널 데릴사위로 맞아들일 거야.’시간이 훌쩍 지나 제2부가 시작되었다.이 동안에 육경서는 그날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어버린 듯이 여전히 신주리의 주위를 맴돌며 갖은 비위를 맞춰갔다.육경서는 녹화 날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준비해 신주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카메라 감독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한 무리 사람이 돌처럼 굳어버리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육경서는 그런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문을 노크하자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신속하게 카메라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경서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늘 녹화하는 날인 걸 잊지 않았죠?”“알아요.”육경서가 대충 대답하자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그럼 경서 씨 카메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하마터면 바론 공작의 코에 부딪힐뻔하자 그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역시 딸내미는 시집가면 남이야. 자기 남편밖에 몰라. 열받아.’강유리 심부름을 다녀왔던 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살짝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다시 험상궂은 바론 공작을 보더니 비밀을 배속으로 삼켜버리면서 말했다.“부부 사이 일이겠죠. 공작 어르신은 잠깐 기다렸다가...”“대디 걸이라고 누가 그랬어? 저 아이가 부부 사이의 일을 나한테 말해줄 것 같아? 이럴 때면 아비를 문밖에 버려두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계집애.”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론 공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유리는 너무 흥분돼 정신이 나갔는지 육시준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뒤 화장실에 숨어 뒤에 감춘 물건을 보여줬다. 빨간 두 줄이 눈앞에 나타나자 육시준은 멍하니 서 있었고 표정은 변함없지만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육시준은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게 뭐야? 그래서 결과가 뭐야?”“이게 뭔지 몰라? 두 줄이잖아. 나 임신했어. 이번에는 진짜야.”강유리가 활짝 웃으며 감격해 말했다. 육시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테스트 시제를 받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담담한 척했을 뿐이다. 그는 선명하게 찍힌 빨간 두 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그렇다면...”“당신 아빠가 되었어.”강유리는 이런 육시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참지 못하고 재차 설명해 줬다. 다음 순간 강유리의 발이 허공에 뜨더니 육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천정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귓가에는 흥분으로 가득한 남자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아빠가 됐어. 드디어 아빠가 됐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강유리는 머릿속이 죽통이 되는 것 같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진정. 진정. 정숙.”이 순간에 무슨
강유리가 잠깐 멍하더니 살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왜?”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은 일정은 별로 끌리지 않아.”강유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요 며칠은 주로 집에서 바론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일정에 대해 강유리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리고 예측하는 것이 있기에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유리는 육시준이 눈치챘는지를 모르기에 머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비비더니 온화하게 물었다.“여보, 내가 요 며칠 라이브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한테 신경 못 썼어.”“맞아. 그래서 어떻게 보상할 거야?”육시준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강유리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착한 육시준이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해한다고 했을 텐데 보상을 요구했다.“부부 사이에 보상을 얘기하면 서운하지.”강유리는 작은 손을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육시준은 그런 강유리한테 속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저번에 내가 긴급회의를 했다고 나한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어? 그때는 왜 내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을 안 했어?”‘이득 앞에서 못 본 체하는 건 바보가 아닌가?’하지만 강유리는 절대 육시준이 쉽게 이득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보상해 줄게. 내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전의 제의 들어줄게.”그 말에 육시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봤다.‘방금 제기한 요구라면 혹시 앞당겨서 귀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육시준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던 그지만 강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앞당겨 귀국하자고 한 건 사실 진짜로 귀국하자는 것이 아니고 강유리가 요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자기한테 소홀한 것 같아 귀띔해 주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바보인 척하며 그의 제의에 찬성했다. 강유리는 육시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