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무는 비록 아주 두꺼운 밍크를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흑여산맥의 찬바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뺨에 닿으면 얼굴이 칼에 베이는 것만 같았다.“헉, 헉.”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다무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의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큰일이에요. 하늘을 보니 눈보라가 칠 것 같아요. 은인님, 저희 하룻밤 쉬었다가 다시 출발할까요?”윤구주는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이 흑여산맥의 눈보라는 정말 무시무시한걸요. 만약 저녁에 정말로 눈보라가 친다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요.”다무가 말을 마치자마자 윤구주는 갑자기 허공에 대고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부적이 나타나자 윤구주는 손을 들어 그것을 톡 쳤고 곧 빛이 다무를 감쌌다.“제가 있으니 마음 놓고 길을 재촉해도 돼요.”윤구주가 말을 마쳤다.조금 전까지 찬바람 때문에 추위에 덜덜 떨던 다무는 윤구주의 빛이 몸을 감싸는 순간 한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빛에서부터 전해졌다. 다무는 마치 엄동설한이었다가 화창한 봄날을 맞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빛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다무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세상에, 정말 놀랍네요! 이 빛의 막에서 온기가 느껴져요! 은인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다무는 이렇게 신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참지 못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잘것없는 재주인걸요. 자, 우리는 계속 가요.”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계속해 길을 재촉했다.곧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곧 눈보라가 칠 것만 같았다.차가운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흑여산맥에서 기승을 부렸다.싸늘한 돌풍이 불어옴과 동시에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윤구주의 보호막을 두르게 된 다무는 한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걸으면 걸을수록 땀이 날 정도였다.다무는 윤구주를 점점 더 존경하기 시작했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은인님은 대체 정체가 뭐지?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실력을 갖추고 계신 거지?’늦은 밤이
“은인님, 도착했습니다. 어서 보세요. 저기가 바로 우리 화진 국경수비대가 있는 막사입니다.”이때 다무가 흥분한 얼굴로 먼 곳에 있는, 타오르는 모닥불이 보이는 막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윤구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있을 때부터 윤구주는 이미 화진 국경수비대의 기운을 느꼈다. 그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은인님, 저랑 같이 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다무는 낙타를 타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바람은 아주 차가웠고 폭설도 내렸지만, 두 사람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그들은 곧 화진 국경수비대의 막사에 도착했다.다무의 말대로라면 그곳에는 한 개의 소대만 있을 뿐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겨우 수십 명 정도밖에 없었다.윤구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설국 병사들을 상대할 때 그는 많은 임시 주둔지를 만들었었다.그렇기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정상적인 일이었다.막사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기랄,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왜 또 폭설이 내리는 건데?”“야, 왜 아직도 넋을 놓고 있어? 얼른 가서 술 좀 데워 와. 우리 오늘 진탕 마실 거니까!”“좋아, 좋아!”막사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윤구주의 안색이 폭설보다도 더욱 차갑게 변했다.“은인님, 갑시다. 제가 사람들을 소개해 드릴게요!”다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낙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윤구주를 데리고 막사 안쪽으로 걸어갔다.군영은 꽤 컸는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십여 명의 두꺼운 겉옷을 입고 군영 안에 모여서 큰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병사들이 보였다.그들은 비록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들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다무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술을 마시고 있던 병사들은 눈보라 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서 말했다.“누구야?”그중 손에 술이 담긴 큰 그릇을 들고 있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
“은인님, 어찌 됐든 이 사람들은 우리 화진의 군인들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씨에 술을 좀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것은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한 번만 살려주세요.”다무는 선한 사람이었다.윤구주가 국경수비대 병사들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서둘러 애원했다.윤구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중상을 입고 쓰러진 십여 명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좋아요. 어르신 체면을 봐서 오늘을 일단 살려주도록 하죠. 말해봐. 당신들 상사는 누구지? 누가 이렇게 멋대로 술을 마시도록 허락한 거야?”윤구주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십여 명의 병사들에게 물었다.과거 구주왕이었던 윤구주는 군인들이 규율을 어기는 것은 상부에서 묵인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그는 대체 누가 이런 행위를 묵인한 건지 알아낼 생각이었다.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던 병사 한 명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우리 통령은... 기병 교위 원호산 통령입니다.”그 이름을 들은 순간 윤구주는 곧바로 신해를 이용하여 설국과 결탁했던 국경수비대 교위 이름을 떠올렸다. 그가 바로 기병 교위 원호산이었다.기산에 있을 때 윤구주가 마지막으로 죽였던 설국 제사장 파마는 설국과 결탁했던 장군들의 이름을 직접 알려줬었다.그중에 기병 교위 원호산, 진부대장 진추해, 좌익 국경 장군 강문정 등등이 있었다.그런데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와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호산은 어디 있지? 지금 당장 날 만나러 오라고 해.”윤구주나 매섭게 말했다.“원 통령님은 어제 총병으로 가셔서 이제 곧 돌아올 겁니다.”국경수비대 병사는 전전긍긍해서 말했다.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그는 반드시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이다.오직 그래야만 국경수비대 병사들로 하여금 화진의 땅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땅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알게 할 수 있었다.그것이 바로 구주왕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더니 8명의 두꺼운 옷을 입은 국경수비대 병사들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바로 기병 교위 원호산이었다.원호산은 구레나룻이 짙고 몸이 다부졌다.그가 나타나자 윤구주에게 중상을 입은 십여 명의 병사들은 곧바로 밖에서 그를 향해 외쳤다.“원 통령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원호산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는 병사들이 눈보라를 맞으면서 추위에 덜덜 떨며 밖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물었다.“멍청한 것들. 왜 안에 있지 않고 밖에 나와 있는 거야?”십여 명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덜덜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묻잖아. 대답해!”원호산은 병사들이 대답하지 않자 계속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내가 밖에 서 있으라고 했거든.”그 목소리를 들은 원호산은 흠칫했다가 고개를 돌려 군영 쪽을 바라보았다.군영 안에는 흰옷을 입은 윤구주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군영 속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얼굴을 본 원호산은 서늘한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당신은 누군데 감히 우리 군영에 멋대로 들어온 거지? 죽고 싶어?”윤구주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그가 눈을 뜨는 순간,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원호산 등 사람들을 감쌌다.원호산과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들은 마치 윤구주의 시선에 겁을 먹은 듯했다.“당신이 바로 기병 교위 통령 원호산이야?”윤구주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라면 뭐?”원호산이 인정하자 윤구주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묻지. 화진의 군율에 따르면 무단으로 이탈한 자는 죽어 마땅하지?”그 말에 원호산은 심하게 당황했다.“또 물을게. 규율을 어기고 부하가 멋대로 하게 놔두는 자도 죽어 마땅하지?”윤구주의 싸늘한 말이 마치 우레처럼 다시금 원호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마지막으로 묻지. 나라를 배신하고 화진의 국민들을 해치는 자는 그 삼족까지 전부 죽여 마땅하지?
원호산의 피범벅인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지자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도, 다무도 전부 넋이 나갔다.윤구주가 기병 교위 한 명을 죽인 것은 중죄였기 때문이다.“우, 우리 원 통령님을 죽인 겁니까?”국경수비대 병사들은 그제야 반응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총을 꽉 쥐면서 두려움에 찬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총을 쏠 기세였다.그러나 윤구주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당당한 얼굴로 원호산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원호산 같은 매국노는 죽어 마땅하지 않아?”“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 원 통령님이 설국과 결탁했다고 하는 거죠?”한 병사가 물었다.“나 윤구주가 한 말이 바로 증빙이야!”윤구주가 이름을 대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당황했다.그러나 윤구주가 과거 천하무적이었던 구주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들은 그저 윤구주의 이름에 어떠한 마력이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윤구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아무도 더는 묻지 못했다.“얘기해 봐. 지금 국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의 지휘관은 이름이 뭐야?”윤구주가 갑자기 물었다.국경수비대 지휘관은 흑여산맥의 국경 지역을 지키는 최고 지휘관이었다.윤구주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자 병사들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우리 지휘관님 성함은 유기철입니다.”“그였다니.”그 이름을 들은 순간 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사실 10국과의 전재에서 유기철은 구주군 제6군단의 소대장이었다.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의 그가 국경수비대 지휘관이 된 것이다.과거를 떠올린 윤구주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유기철에게 당장 날 만나러 오라고 해.”‘뭐?’“우, 우리 지휘관님에게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하라고요?”국경수비대 병사들은 모두 당황했다.“그래. 너희는 그에게 지인이 방문했으니 빨리 가보라고 하면 돼.”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병사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군영 안으로 돌아갔
병사의 말을 들은 유기철은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야?”“조금 전 연락을 받았는데 원호산 통령님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병사는 서둘러 말했다.‘뭐라고?’“원호산이 살해당했다고? 어서 얘기해. 누가 한 짓이야? 설마 빌어먹을 설국 놈들이 싸움을 건 거야?”유기철이 호된 목소리로 물었다.“지휘관님, 전보에 따르면 원 통령님을 죽인 건 설국인이 아니라 윤구주라는 남자랍니다.”병사가 말했다.“윤구주?”그 이름을 들은 순간 유기철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마치 그 이름 자체에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유기철은 그 이름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말해. 원호산을 죽인 그놈은 지금 어디 있어?”유기철이 매섭게 물었다.원호산은 그래도 국경수비대 기병 교위였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살해당했다고 하니 유기철은 화가 났다.“지휘관님, 23번 진영의 병사들이 말하길 그 살인자는 지금 군영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병사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뭐?”“그 살인자가 말하길, 지인이 방문을 했으니 지휘관님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했답니다.”그 말을 들은 유기철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건방지구나! 내 병사를 죽였으면서 내게 명령까지 내려? 좋아. 어떤 미친놈이 이렇게 건방을 떠는 건지 어디 한번 봐야겠어! 여봐라. 지금 당장 23번 진영으로 갈 테니 준비하도록 해.”유기철은 명령을 내리더니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23번 진영으로 향했다.많은 차량이 기세등등하게 23번 진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유기철은 어두운 얼굴로 장갑차 안에 앉아 있었다.그의 곁에 있던 병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지휘관님, 사실 아까 23번 진영에서는 전화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전했는데 제가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뭐라고 했는데?”“그들이 말하길 그 살인자가 원 통령님의 머리를 벤 이유는 원 통령님이 설국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윤구주는 눈조차 뜨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잘 왔네요.”“은인님, 정말로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잊지 마세요. 은인님은 국경수비대의 통령 한 명을 죽였습니다. 만약 지휘관님이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면... 일이 복잡하게 될 겁니다.”다무는 아직도 윤구주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그런데 윤구주가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이 세상에 감히 내게 책임을 물을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그 말은 마치 우레와도 같았고 그 순간 다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밖에서 유기철은 200여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장갑차에서 내렸다.이 순간 군복을 입은 유기철은 가장 앞에 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23번 진영의 병사 십여 명이 서 있었다.“얘기해 봐. 사람을 그 미친놈은 어디 있어?”유기철은 군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사납게 물었다.“지휘관님, 그 살인자는 막사 안쪽에 있습니다.”유기철은 고개를 들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막사를 보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오늘 어디서 온 놈이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한 번 보겠어! 이곳을 지금 당장 포위해!”유기철이 명령을 내리자 200여 명의 병사들이 곧바로 챙겨온 총을 들고 군영을 전부 포위했다.군영을 전부 포위한 뒤 유기철은 그제야 사람들을 데리고 군영 안으로 들어갔다.커다란 군영 안, 유기철이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다무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윤구주를 보았다.“지휘관님, 저 자식이 우리 원 통령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원 통령님이 설국과 결탁했다고 모함했습니다. 지휘관님, 원 통령님을 위해 꼭 복수해 주십시오!”한 병사가 윤구주를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유기철은 서늘한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윤구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국경수비대의 지휘관인 유기철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휘둥그레졌고,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진 채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천하무적의 최강자 윤구주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지휘관님, 왜 그러십니까?”곁에 있던 병사들은 전부 얼이 빠졌다.“다들 무릎 꿇어!”유기철은 갑자기 눈이 벌게져서 고함을 질렀고, 그의 곁에 있던 병사들은 비록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유기철의 명령에 따라서 윤구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자 윤구주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천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왕의 기운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피가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윤구주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서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유기철을 바라보았다.“얘기해 봐. 구주군의 10대 군율이 뭐지?”그 말을 들은 유기철은 순간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빠르게 대답했다.“저하, 구주군의 10대 군율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나라를 배신하지 않는다. 둘째,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셋째, 전우끼리 싸우지 않는다. 넷째, 백성을 갈취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규율을 어기지 않는다. 여섯째, 사리사욕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일곱째, 다른 이들과 결탁해서는 안 된다. 여덟째, 나태해서는 안 된다. 아홉째, 청렴결백해야 한다. 열째, 나라를 지켜야 한다.”유기철이 구주군의 10대 군율을 읊자 다들 넋이 나갔다.윤구주는 유기철이 10대 군율을 다 읊자 차갑게 말했다.“10대 군율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어겼을 때 어떤 벌이 내려질지도 알겠지?”“죽음... 입니다!”유기철이 덜덜 떨면서 말을 내뱉었다.“죽어 마땅하다는 걸 아는군. 그러면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윤구주의 싸늘한 말에 유기철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저하께서 죽으라고 하신다면 제 목숨으로 속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하, 저 유기철은 이번 생에 다시 저하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국경수비대의 지휘관인 유기철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우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윤구주를 봐서 우는 것이었다.유기철은 눈물을 흘리면서 윤구주를 향해 세 번 머리를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