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디가 좋아?”부승원이 갑작스레 질문했다.사실 부승원은 반우희의 마음을 진작 눈치를 챘었다. 하지만 그동안 늘 반우희가 어린아이처럼 보여 그 마음을 모른 척했었는데 오늘따라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어린 친구들은 이승우 같은 사람이 더 취향 아닌가?’반우희는 이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어 하나하나씩 세면서 대답했다.“첫째. 변호사님이 부자인 게 좋아요!”부승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세웠다.잔뜩 구겨진 부승원의 표정에 반우희가 빠르게 말을 덧보탰다.“난 변호사님 돈만 밝히지 다른 사람 돈엔 관심이 없어요.”“...”부승원은 심호흡을 하며 애써 진정하려고 자신을 다독였다.“돈이 없으면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바로 반박하더니 두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돈만 있는 게 아니라 똑똑하고 일도 잘하잖아요!”“그건 첫 번째 이유랑 다를 게 없잖아.”부승원은 어이가 없어졌다.“아니요. 달라요. 변호사님이 돈이 많은 이유는 아주 다양하잖아요. 능력도 좋고 재벌 2세이기도 하고!”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은 어이가 없어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또 어처구니없는 가설을 하며 질문을 이었다.“내가 돈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 일도 잘 못하면 그래도 날 좋아할 거야?”“당연하죠.”반우희는 부승원의 입술에 뽀뽀하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또 잘생겼잖아요.”“...”그 순간 부승원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러자 반우희는 작게 감탄하며 말했다.“그리고 변호사님이 돈이 없을 리가 없어요.”“부모님이 그렇게 돈이 많은 데다 또 똑똑하고 잘생겼잖아요.”반우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정말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모든 게 달라진다고 해도, 이 얼굴 하나로도 돈 잘 벌 걸요.”부승원은 정말 피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길게 심호흡했다.“너 정말 돈만 보고 날 만나는 거지? 내가 돈이 없으면 얼굴이라도 팔아서 돈 벌게 하려고? 그리고 돈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승원은 질투에 눈이 멀어 콘돔을 샀다.하지만 집에 돌아오고 나니 어느새 차분해져 반우희를 한번 봐주려 했었다. 그런데 반우희가 무릎 위로 앉는 것도 모자라 자꾸 이리저리 비벼댈 줄은 몰랐다.반우희는 질문을 던지고 부승원의 대답을 기다렸고 부승원은 아랫배가 점점 아파지는 게 느껴졌다.반우희는 여전히 두 눈을 깜빡거렸고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그리고 부승원도 거의 본능적으로 반우희를 다시 제자리로 앉게 했다.그 순간 반우희는 작게 신음을 뱉았다.부승원은 턱을 꽉 깨물며 겨우 이성의 끈을 잡았다.반우희는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 들었고 모든 고민거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탄탄한 부승원의 팔을 잡고 눈치껏 부승원을 살폈다.서재는 전등을 켜 사방이 환했고 빤히 느껴지는 반우희의 시선에 부승원은 저도 모르게 목이 타고 있었다.그리고 반우희는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반우희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겁이 없었다.두 사람은 고작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었고 서로의 변화는 고스란히 느껴졌다.부승원이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눈치챈 반우희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부승원을 몰래 살폈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의 표정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으나 허리에 올려 둔 손은 내리지 않았다.부승원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반우희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기로 하고 품에 안겨 낮은 소리로 말했다.“방금 약국에서 그거 샀죠?”다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보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내가 뭘 샀는지 알면서 지금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거야?”“내가 뭐 못 할 짓이라도 했어요?”반우희는 눈을 반짝거리며 부승원의 턱에 키스했다.“어차피...”반우희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이 입가를 맴돌다가 좀 더 솔직하게 뱉어졌다.“난 변호사님이랑만 하고 싶은걸요.”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부승원은 발끝부터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나
반우희는 온몸의 힘이 풀려 나른하게 부승원에게 기댔다.키스에 얼굴은 시뻘게졌고 시작도 전에 벌써 힘이 빠져 부승원의 어깨에 기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부승원은 드디어 반우희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반우희의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거실을 지나칠 때 반우희는 부승원의 목 언저리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그거 안 챙겼는데요...”부승원은 반우희를 다독이며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쳇.’‘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말하지 말라니까 하지 말지 뭐.’사실 부승원은 여전히 이미지를 챙기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반우희의 말 한마디에 자꾸 나쁜 생각이 떠올라 겨우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반우희를 침대 위로 올려 두고 부승원은 그 위를 올라탔다. 그리고 키스로 반우희의 입을 막으며 가운을 풀었다.가운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가운이 사라지니 부승원이 닿았던 곳마다 따뜻하다가 곧 더 차갑게 느껴졌다.어깨, 가슴 언저리, 닿는 모든 곳이 그러했다.반우희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부승원이 강하게 누르고 있는 탓에 입을 삐죽이며 다리로 부승원의 허리를 옭아맸다.온몸이 물처럼 녹아 사라질 무렵 부승원은 반우희를 놓아주었다.반우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아직 부족하다는 듯 부승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부승원은 이런 반우희의 귓불에 키스했다.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부승원은 침대 중간에 파묻힌 반우희를 보며 아랫배가 점점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고 이불로 반우희를 조금 덮어주고 거실로 향했다.거실에서는 무언가 박스를 해체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반우희는 몸을 작게 움직여 마침 부승원이 긴 손가락으로 포장지를 뜯는 걸 확인했다.부끄러운 마음에 반우희는 다시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방금은 흥분해 미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 부끄러워 이불 안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딸깍.전등이 꺼지고 모든 시야가 어두컴컴해지자 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그 위를 올라탔다.어둠속에서 사방은 조용해지고 오감만 예
사실 부승원은 적당히 할 생각이었으나 반우희의 태도에 이성의 끈이 사라지고 있었다.반우희는 몸도 마음도 말랑거렸고 잠시 긴장하던 것도 잠시 곧 여유롭게 리듬에 맞춰 부승원이 원하는 대로 따라갔다.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함께 땀을 흘렸다.반우희는 호흡이 딸렸지만 정신이 흐릿한 상황에도 하염없이 부승원의 이름을 불렀다.처음엔 부승원...변호사님...그리고 그것도 부족한지 승주처럼 삼촌이라고 불렀다.부승원은 견딜 수가 없었고 반우희를 끝까지 몰아붙였다.반우희는 진작 체력이 떨어졌고 끝났다 싶을 때면 다시 불이 붙는 부승원을 보며 죽을 맛이었다.그렇게 반복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반우희는 발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지난번 잠자리와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부승원은 그래도 애써 자제하여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했다.그러나 부승원은 쓰던 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새로운 포장을 뜯는 행동을 반복했다.처음엔 반우희도 안달이 나 리듬에 맞출 수 있었으나 점점 힘이 달려 그만하자고 애원했다.그런데 이미 불이 붙은 상황에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할 수가 없었다.오늘 밤은 아주 길었다.반우희는 서서히 눈이 감기고 모든 상황을 뒤로 한 채로 잠이 들었다.꿈속에서도 부승원의 체향이 느껴졌다.다시 눈을 뜨니 새벽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반우희는 건조해진 눈을 비비다가 이미 잠이 든 부승원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 품을 파고들다가 실수로 부승원을 깨우고 말았다.얇은 이불을 사이 두고 꺼진 불씨가 다시 사르르 붙으려 했다.하지만 부승원은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반우희는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고 부승원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로 자꾸 코알라처럼 들러붙었다.부승원은 졸리지만 본능에 못 이겨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자 반우희도 잠에서 깼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다가오는 부승원을 슬쩍 밀어내다가 결국 포기했다.모든 물건은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었고 언제 다시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움직임에 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아야... 내 허리...’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는데 부승원이 파자마로 갈아입고 커피잔을 들고 나타났다.“출근 안 했어요?”반우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출근?’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네가 언제 그렇게 회사에 충성했다고.”‘지금 이 상황에 회사 생각을 다 하네.’반우희는 배시시 웃으며 이불을 위로 끌어당겼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나야 늘 그렇지만 난 변호사님이 이미 가버린 줄 알고.”부승원은 반우희의 하얀 팔을 슬쩍 보다가 자연스레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주문한 아침이 도착한 것 같으니 가지러 나가볼게.”부승원은 대화 주제를 돌렸고 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변호사님도 땡땡이친 거죠!”‘내가 회사를 나가지 않은 거에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오늘 오전엔 다른 일정이 있어 회사로 나가지 않았을 뿐이야.”반우희가 ‘쳇’ 하고 소리를 냈다.‘대표 말이 곧 답이지 뭐.’“그럼 나는요? 대신 휴가 처리해 줬어요?”“아니.”“네?”반우희는 바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변호사님은 즐길 만큼 즐기고, 나는 몰라라 하는 거예요? 내 개근 수당 어떡해요!”부승원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즐길 만큼 즐기고 모른 척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래?’‘뭔가 듣기에 찝찝한데?’부승원은 반우 희환데 농담하려 했으나 세게 머리를 벅벅 긁는 반우희를 보며 할 수 없이 질문했다.“개근 수당이 얼만데? 내가 대신 줄게.”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냉큼 이렇게 말했다.“400만 원이요.”“...”‘무슨 직급이기에 개근 수당이 400만 원이나 돼?’그러나 반우희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당당해 보였다.“그럼 말 끝낸 거예요. 이번 달에 나한테 400만 원 보상해 줘야 해요!”그리고 다시 편히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부승원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말했다.“일단 아침부터
“이거 엄청 맛있어요. 다음에도 또 해주세요.”“그리고 이건 별로예요. 블랙 리스트.”반우희는 한입씩 맛보며 평가했다.부승원은 전날 밤 반우희가 ‘뭐든지 해주겠다는 말’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말했었던 건 모두 거짓임을 알아차렸다.잠자리가 끝나고 나니 반우희는 또다시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이젠 머리 위에서 밥까지 먹고 덩실덩실 춤도 췄다.“어어, 입 더 크게 벌려요.”반우희는 계란을 흰자만 먹었고 노른자는 바로 부승원의 입에 넣었다. 부승원은 하다 하다 잔반 처리까지 맡고 있었다.‘다음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자 이것도 먹어요.”‘뭔데?’‘아. 시금치.’“안 먹을 거야...”그러나 반우희는 냅다 입안으로 욱여넣었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음식 낭비하면 벌받아요.”“...”부승원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입안의 음식을 삼켰다.고개를 숙이자 계획에 성공해 웃고 있는 반우희가 보였고 부승원은 티슈를 한 장 뽑아 반우희의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여전히 반우희의 등받이 신세를 자처하고 있었다.반우희는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고 부승원은 더 이상 잔소리하기도 지쳐 스스로 반우희가 먹은 아침상을 치웠다.부승원이 방을 나서자 반우희는 몰래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한참 뒤 부승원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쳐나와 등 뒤로 부승원을 꼭 껴안았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더 안 자도 돼?”반우희는 얼굴을 등에 비비며 말했다.“혼자 자는 건 싫어요.”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의 손을 잡았고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반우희는 거의 습관적으로 부승원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품을 파고들었다.말랑해진 분위기에 차갑던 부승원도 녹아내려 갔다.그래서 반우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침대 위로 누워. 난 그 옆에서 서류 볼게.”“일하지 마요.”반우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졸랐고 빠르게 턱에 뽀뽀했다.“그냥 나만 보고 있으면 안 돼요? 다른 건 하지 말고요.”하룻밤이 지나고 부
소원대로 침대로 향하자 반우희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고작 부승원 정도는 아주 쉽다고!’‘흥.’반우희는 입이 귀에 걸렸으나 가식적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대낮부터...”“...”부승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턱을 움켜쥐었다.“대낮인 걸 알고는 있어?”그러자 반우희는 가볍게 다리를 굴렀다.‘그럼, 뭐?’부승원은 얼굴만 봐도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혼내고 싶다가도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그렇게 대치 상태에 놓이고 반우희는 또 장난하려 했다.그러자 부승원은 바로 반우희의 입에 키스하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이에 반우희는 작게 신음을 흘렸고 목에 팔을 건 채로 호흡에 맞췄다.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뭐든지 빠르게 배우는 부승원은 하룻밤 사이에 반우희의 스탯을 모두 학습해 바로 반우희를 자극했다. 반우희는 몰래 숨을 몰아쉬다가 또 부승원에게 잡혀 키스를 이어갔다.반우희는 자신의 꾀에 넘어간 격이 되었고 부승원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그만해요. 난 조금 쉬어야겠어요.”부승원은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얼굴 옆으로 내려두었다.‘거절.’반우희는 너무 힘들어 겨우 버티다가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키스는 끝나지 않고 부승원의 손아귀 아래에서 도망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반우희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턱 끝을 지그시 잡은 채로 숨을 돌릴 시간을 주었다.반우희는 침을 넘기는 부승원을 보며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그리고 슬쩍 내빼려는데 부승원이 더 가까이 다가와 손목에 키스했다.반우희는 눈만 깜빡거렸고 온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르르해졌다.갑자기 다정해진 부승원은 정말 마다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반우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밥 금방 먹어서 그렇게 누르면 불편해요.”부승원은 심호흡을 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반우희를 바라봤다.그리고 순식간에 휙 몸을 돌리더니 서로의 위치를 바꿨고 반우희는 부승원의 몸 위로 올라탄
늦은 오후, 양시연이 전화를 걸어오자 부승원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정인 그룹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반우희는 코알라처럼 매달려 저녁을 차려달라고 졸랐다.“돌아와서 해줄 게. 지금은 일단 회사로 가봐야 할 것 같아.”“그럼, 나랑 같이 가요.”“더 안 쉬어도 괜찮겠어?”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 내내 쉴 만큼 쉬었는걸요.”부승원은 반우희를 실컷 괴롭히고 나니 이젠 반우희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줬다. 그래서 반우희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 걸 기다렸다가 나란히 아래층으로 향했다.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나니 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회사로 가는 내내 조잘조잘 떠들었다.회사 아래에 도착하고 보니 직원이 적지 않게 모여 있었다.부승원은 차량을 깊숙한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 반우희에게 골프용 모자를 씌웠다.반우희는 그 뒤를 졸졸 따르며 푸념했다.“이 모자는 너무 크잖아요!”부승원은 손을 잡다가 어깨를 감싸며 모자를 다시 꾹꾹 눌러줬다.“그리고 마스크도 너무 불편하고 답답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답했다.“다음엔 좋은 거로 챙겨줄 테니까 오늘만 봐줘.”반우희는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배고파요...”“올라가면 먹고 싶은 거 시켜줄게. 미리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둬.”반우희는 바로 신이 났다.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난 게 아닌, 부승원이 자기 말대로 고분고분 따라주는 것에 신이 났다.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반우희는 몰래 부승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꼬실 걸 그랬어요.”부승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몇 번 잤다고 이렇게 다정해지다니. 적응이 안 되는걸요?”“변호사님은 의외로 마음이 약한 사람인가 봐요?”“그런데 처음 그때에는 왜 모른 척했지?”반우희가 어느새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자 부승원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라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반우희가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말을 이어 하려는 반우희의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
이튿날 아침, 비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춰왔다.악몽에서 벗어난 양혁수는 그제야 어제 충동으로 벌인 일이 떠올랐고 왠지 이제는 후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하는 걸 포기한 듯한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이 떠보듯 말을 걸었고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뒤에는 다시 악동으로 변했다.변여름은 아침 댓바람부터 서양식 브런치를 먹겠다고 난리였다.변여름에게 오냐오냐 귀여움을 받던 양혁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변여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동안 변여름의 차려준 음식을 실컷 먹었으니 자신도 한 끼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서양식 브런치야 식재료를 구우면 그만이었다.그렇게 첫째 날 아침을 무사히 마치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변여름은 어제 먹은 브런치가 너무 맛있었다고 또 졸랐다.‘그래, 뭐. 맛있다는 데 해줘야지.’그러나 세 번째 아침엔 변여름이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난도를 높여 버렸다.‘음... 그것도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점심이 되자 변여름은 스테이크와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양혁수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말없이 스테이크를 구웠고 그 옆에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는 변여름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쭈, 지금 복수하는 건가?’‘평생 밥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한테만 요리해 주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야.’‘어쩌면 밥은 물론, 언젠간 뜨개질도 해달라고 할지도 몰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혁수의 등 뒤를 꼭 껴안았다.양혁수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하려 했지만, 스테이크 기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먼저 변여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변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불이 너무 세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래?”그러자 변여름은 쏙 빠져나와 등 뒤로 숨었고 양혁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싫어요.”“난 오빠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맛이 엉망이어도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