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돈 주세요!”반우희의 말에 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해고하는 거면 배상해 주셔야죠. 세 배 금액으로!”“...”“빨리요!”반우희는 굳은 얼굴로 루나를 재촉했다.‘그래. 돈은 주면 그만이지. 빨리 우희 씨 자극해 두 사람 관계에 불이 붙게 하는 게 우선이야.’루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가방에서 한 묶음의 현찰을 꺼냈다. 그 금액이 족히 200만 원은 되어 보였다.“가져가요.”루나는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건넸고 정말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반우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어때? 화나지? 빨리 날 욕하고 부승원한테도 퍼부어!’“지금 그 금액으로 날 거지 취급해요? 시급이 20만 원이고 한 달에 8번 근무였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2,000만 원은 주셔야죠!”‘뭐야? 이게 아닌데?’반우희는 화를 내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의자 위로 휙 벗어 두었다.“현금이 없으면 수표라도 주세요! 빨리요!”루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래도 이번 연기에 누군가 모두 책임질 거라 했기에 불을 더 붙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자, 여기 2,000만 원. 됐죠?”방금보다 더 과한 연기와 액션이었다.하지만 반우희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가방을 챙겨와 루나가 보는 앞에서 현찰과 남은 간식을 챙겼다.‘그만두라고 하면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변태 사장, 나도 싫어!’‘퉤.’반우희는 간식을 쓸어 담으며 또 루나를 흘겨보았다.‘정말 끼리끼리 잘 만났어.’루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이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반우희가 먼저 부승원에게 찾아가는 계획에 실패했다면 부승원이 먼저 다가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루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참, 쓰레기도 가지고 내려가세요.”반우희는 가방을 척 메고 표독스럽게 루나를 노려보며 문으로 향했다.‘그래. 간다. 가!’루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반우희를 몰래 살폈다. 다른
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달려갔으나 반우희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큰 소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197만 원... 198만 원...”“2만 원이나 부족하잖아!”“나쁜 사람. 어떻게 이 돈도 떼먹냐!”반우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돈을 움켜쥐고 표정을 구겼다.공돈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반우희는 몇 년 전 부승원이 했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부승원은 자신의 신분으로 부승원을 넘보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 했었다.하지만 반우희는 단 한 번도 부승원을 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을 가끔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매일 독설만 날리는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지 않은가?‘그런데 부승원은 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고 키스도 마음대로 하는 걸까?’‘술이 면죄부야?’‘변태!’이런 생각을 하며 반우희는 고개를 숙여 움켜쥔 돈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짜증 나.’‘어떻게 돈으로 사람을 내칠 수 있냐?’“그래. 돈 많아서 참 좋겠네... 짜증 나!”눈물이 추위에 빨개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고,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 남성 구두가 보였다.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부승원은 소나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토끼 모자가 보였고 작게 몸을 웅크린 토끼가 돈을 한 장 한 장세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녀석이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엔 곧이곧대로 듣고 무턱대고 집을 박차고 나가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반우희의 코며 손등이며 빨갛게 부어오른 게 보였고 눈시울까지 붉어진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반우희가 먼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든 돈을 가방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하고 반우희의 옆으로
반우희가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는 말에 부승원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래서 빠르게 다시 손목을 잡고 말했다.“루나는 내 학교 후배이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런데 왜 루나 씨는 변호사님 약혼녀라고 한 거죠?”“오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너한테 자꾸 농담하는 거야.”반우희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농담?’‘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어린 애인 줄 아나? 이런 일로 농담하게?’“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이제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배상금도 받았으니 다시 나오지 않을 거예요!”그리고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러나 부승원이 또 한 번 반우희를 붙잡았다.자꾸 반복되는 상황에 반우희는 정말 화가 났다.“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왜 자꾸 저를 잡는 건데요?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에요?”“변호사님은 남자, 저는 여자인데 우리 선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반우희가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쏟아붓자 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그러나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고 반우희는 아예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약혼이든 아니든 저랑 아무 상관 없고 다시 저 유혹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남남이고 다시 만나지 않는 거예요!”“지금 뭐라고 했어?”반우희는 아주 당당했다.“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그날 스파게티도 해주고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또 키스도 했잖아요!”마지막 키워드에는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러자 부승원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천하의 변호사 부승원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러나 반우희는 한번 시작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키스 말이 나와서 그러는 건데요. 제 허락은 받으셨어요?”“그때 변호사님이 저한테 그랬잖아요. 거리 유지하고 절대 변호사님 넘보지 말라고!”부승원은 바로 허점을 찾아 말을 끊었다.“내가 너한테 넘보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네! 그게 그 뜻이죠. 뭐!”반우희는 오히려 더 다가와 거의 한 대 칠 기세로 말했다.“몇 년 전 시연 언니가 떠나기 전, 우리 집 계단에서 저한
반우희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변호사님도 돈 주시게요?”“...”“키스하고 돈을 받으려고? 정말 날 뭐로 보고?”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변태요.”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했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반우희의 양 볼을 꼬집으려는데 반우희가 한발 빠르게 목을 뒤로 움츠려 얼굴을 목도리 안으로 숨기고 동그란 두 눈만 드러나게 했다.그렇게 두 눈이 마주치고 부승원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무의식적으로 보인 반우희가 너무 귀엽게 보여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부승원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손을 거두었다.“올라가서 천천히 얘기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래요.”‘내가 뭐 무서워할 줄 알고?’부승원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으나 다시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앞으로 걸으며 자연스레 반우희의 손을 잡았다.반우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잡힌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부승원을 따라 걸고 있었다.그렇게 오피스텔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루나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화가 났고 루나한테 직접 따지려 했다.그러자 부승원은 손에 힘을 주어 반우희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루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유롭게 걸어왔다.“선배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너랑 뭔 상관인데!’반우희는 하마터면 바로 말을 뱉을 뻔했으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나의 호칭이 이상했다.‘선배님?’반우희는 부승원에게 잡힌 손과 루나를 번갈아 바라봤다.‘두 사람 연인이라며?’‘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데 화도 안 나?’부승원은 다시 반우희를 등 뒤로 숨기며 루나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연정훈 부부가 너한테 얼마나 큰 딜을 했기에 이러는 거야?”루나는 웃음이 터졌다.“선배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부승원이 헛웃음을 내쉬었다.루나는 등 뒤의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저는 미션 완수했으니 어린 친구에게 제대로 사과할게요. 방금은 죄송했어요. 돈은 첫 만남 선물로 해두죠.
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날이 어두워졌는데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했던 남자는 없었어요.”‘그러니까 유혹하는 게 맞지!’부승원이 말을 이었다.“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래.”“그런 사람이 나한테 키스해요?”“그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쳇.”반우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비아냥거렸다.“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요?”“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키스한 건데요?”“...”반우희는 말을 계속이었다.“그리고 나한테 키스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요!”‘흥. 어디 한번 변명해 보시지?’부승원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말없이 가스레인지를 켜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반우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왜요? 왜 말이 없어요?”부승원이 몸을 돌려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요리해 주는 건...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로 치자.”유혹이라는 단어는 너무 속 보여 단어를 바꿨다.그러자 반우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건 모르죠.”“내가 그동안 밥도 해주고 간식 몰래 먹는 것도 모르는 척해줬는데 왜 내가 호감 표시하는 걸 몰랐어?”“...”“그때부터 알아차렸으면 미리 피해 다니지, 그래.”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그게...”부승원은 덤덤하게 한 방을 먹이고 면을 휘저었다.“그럼,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린 걸까?”부승원은 이 질문으로 반우희가 잠시 잠잠해질 거로 생각했지만 반우희는 거침이 없었다.“흔들렸으면 왜요?”부승원이 행동을 뚝 멈췄다.반우희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외모가 제 취향이라 좀 흔들렸다면 어쩌시려고요?”‘이젠 어떻게 나오실 건가?’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차가운 성격을 가졌지만 잘생긴 외모와 좋은 가문, 그리고 공부도 곧 잘해 고백을 셀 수 없이 받았었다. 요즘 들어 뜸하긴 했으나 없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반우희처럼 직접적인 사람은 드물었다.부승원은 재차 말문이 막혔고 귓불부터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인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지금 누가 누굴 꼬시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수박 주스를 컵에 담아 건네며 말했다.“자, 마셔.”“네.”반우희는 가까이 다가와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부승원은 손을 뻗어 컵에 빨대도 꽂아주었다.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빤히 쳐다보자 부승원이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마셔.”그러자 반우희가 고개를 숙여 빨대를 입에 물었다.어느새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부승원은 반우희를 등지고 면과 소스를 끓였다.뾰로통하던 반우희는 수박 주스에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그래서 그 옆에 서서 얌전히 기다렸다.얼마 뒤, 요리를 완성한 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런데 완성된 스파게티는 1인분이었다.반우희는 포크를 쥐고 몰래 힐끔거렸다.“변호사님은 안 드세요?”“난 이미 먹었어.”‘그럼. 거절하지 않겠어.’반우희는 폭풍 흡입을 했고 부승원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왜 날 빤히 보는 거예요?”여전히 센 척하는 반우희에 부승원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계속 그런 태도면 너 해고한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그러다가 포크를 쥐고 잠시 고민하던 반우희가 말했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절대 해고 못해요!”“대표인 내가 말만 하면 시연 씨가 안 된다고 한 적 있어?”“그래도 시연 언니는 날 해고하지 않을 거예요!”“네가 회사에서 대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부승원이 비꼬았다.“...”반우희는 바로 입맛이 떨어졌고 불만을 담아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이런 이유로 날 해고한다면 변호사님을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부승원은 팔짱을 척 끼고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증거 있어?”“증거...”‘아... 없네.’반우희는 김이 빠졌으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믿어줄 거예요!”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말끝마다 시연 언니, 시연 언니. 시연 씨가 널 평생 책임져
책임?반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나?’‘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반우희는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책임이요?”“내가 응당 져야 할 책임.”“법률에는 키스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적지 않았어요.”“너 스스로 생각해 봐.”반우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내가 말하면 들어는 줄 거예요?”“생각은 해볼게.”“20억! 20억 주세요!”“...”돈! 돈! 돈!반우희 머릿속엔 돈밖에 없는 것 같았다.“돈은 포기해. 키스를 돈 주고 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니까.”‘쳇.’‘이럴 때면 아주 꽉 막힌 사람이라니까.’‘멋대로 키스할 때는 언제고.’반우희는 고개를 점점 숙였다.사실 반우희도 부승원이 보낸 신호를 알아차렸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전에는 곁에 붙는 것도 싫어하더니 요즘 들어 자꾸 묘하게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게다가 부승원이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면 이런 기회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렇긴 하지만...’반우희가 슬쩍 부승원을 살폈다.‘정말 날 좋아하는 거라면...’‘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부승원은 잘생기고 돈도 많고 똑똑하니...’사실 맞은편에 앉은 부승원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나이 서른이 되도록 처음 누군가에게 추파를 보냈지만 반우희는 멍청하게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려는데 반우희가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장가와요!”부승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러자 반우희는 바로 기세가 꺾였다. 키스 한 번에 결혼까지는 너무 많이 가버렸다.‘하지만...’“변호사님이 저더러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요!”‘생각은 자유니까!’부승원은 깜짝 놀란 마음을 다독였고 어쩐지 기쁜 마음도 들었다.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욕심이 과하네.”반우희는 멋쩍어졌고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변호사로서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 몰라요? 자꾸 말을 바꾸면 안 되죠.”부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
이승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확인했고 따라 내린 부승희는 이러한 상황에도 아주 덤덤해 보였다. 부승희는 트렁크에 비상 타이어가 없다는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정범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하라고 지시했다.“오빠, 견인 부르고 오 사장한테 차량 새로 부탁해.”이승우는 오정범이 액운을 불러온 거라 투덜거렸다.그러나 사건은 꽤 빨리 해결되었다.이승우가 전화를 걸고 있는데 부승희가 핸드폰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했다.“오빠, 여기 콜택시 잡혀.”그러자 이승우는 오정범에게 걸고 있던 통화를 바로 종료하고 부승희의 핸드폰을 바라봤다.“너 콜택시 별로 안 좋아하잖아.”“돼지 농장도 운영하는 내가 그런 걸 따질 것 같아?”‘내가 언제 그렇게 까다로웠다고.’부승희는 고개를 숙이며 핸드폰을 조작했다.“일단 이 차량 길가에 가져다 대고 견인 차량이 오면 맡기고 택시 타자. 더 질질 끌다가는 해가 떨어지겠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 타서 여기 근처 왔다가 차량 구해서 다시 전주로 돌아가는 거야.”“그래.”두 사람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5억이 넘는 차량을 아무렇게나 길가에 세워두고 콜택시를 부르기 시작했다.가백산은 해발이 높지는 않았지만 풍경이 좋았고 등반하고 하산까지 소요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초여름이고 산이다 보니 온도는 아주 낮았다. 게다가 이름 모를 벌레들도 많았다.등산 전, 이승우는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찾아 부승희의 팔과 다리에 분사했다.부승희는 큼지막한 돌멩이에 앉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고 이승우가 이렇게 세심한 건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다.그때,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이승우를 불렀다.“저기, 혹시 스프레이 좀 빌릴 수 있을까요?”이승우가 물었다.“몇 명인데요?”여자는 더 쑥스러워하며 멀지 않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웬걸, 척 보아도 여덟명이나 되어 보였고 모두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었다.이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그쪽 한 명에게 빌려주는 건 몰라도 저렇게
아침 아홉 시.부승희는 창가에 앉아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었다. 그리고 옆에서 무서운 속도로 비빔밥을 해치우는 이승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정말 멍청하기도 하지. 또 이승우의 말에 홀랑 넘어가 버렸으니.저녁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긴 개뿔, 이승우는 다크써클 하나 없었고 비빔밥을 바닥까지 싹싹 비웠다.부승희는 너무 졸려 차에 올라 주먹밥을 몇 입 먹다가 바로 잠에 들었다.눈을 뜨니 차량은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백미러로 뒤를 살펴보니 다섯 대 트럭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트럭에는 모두 건강한 돼지들이 타고 있었다.돼지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큰 귀를 펄럭이는 모습이 꽤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부승희는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오정범 사장네 양계장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이승우가 바로 대답했다.“초기에만 140억 투자가 필요한데 별로 내키지는 않아.”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돼지 농사도 제대로 손에 익지 않았는데 닭까지 넓힐 생각은 없었다.“그럼 투자는 조금만 하자. 오 사장이 그동안 우리 많이 도와줬잖아.”이승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먼저 돼지들을 2번 농장으로 보냈고 직원에게 사인을 받은 뒤 새로운 기지를 둘러봤다. 그리고 풍경 좋은 길을 따라 오정범이 산속에 만든 양계장으로 향했다.오정범도 경인 출신이었고 이승우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오정범은 가정 환경은 평범했지만 성격이 좋아 여전히 이승우 무리와 잘 어울려 지냈다.부승희는 양계장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오정범네 농장을 둘러보다가 신선한 닭으로 튀긴 닭 다리를 건네받고 드디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또한 오정범은 말을 참 재밌게 하는 편이었고 오정범이 입만 열면 부승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날 오후, 오정범이 떠나려는 두 사람에게 며칠 더 지내다가 가도 된다며 잡았다.부승희가 말했다.“저희 등산가기로 해서 이만 가볼게요.”“등산이요?”오정범이 바로 말을 붙였다.“설마 가백산 말하는 거예요?
“바람둥이는 언제가 되었든 또 떠날 사람이라고 했어.”부승희가 말을 이었다.“바람둥이가 왜 괜히 바람둥이겠어? 바람처럼 떠나고 사라지니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지.”“사람은 변해.”이승우의 말에 부승희가 대답했다.“그래도 타고난 본성 같은 건 있는 거잖아. 본성은 쉽게 안 바뀌어.”“네가 사람의 본성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래?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에 동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이승우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러자 부승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세상에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잖아.”그리고 한 손가락으로 이승우의 턱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어떤 사람인데?”“난 좋은 사람이지. 본인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부승희는 헛웃음을 내쉬었다.이게 최근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연인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그쪽으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여진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괜히 네가 옆에서 지내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내일엔 나랑 원주 다녀오자. 여기에서 키운 돼지도 그쪽에 배송해 주고.”“우리가 직접 돼지 배송도 해?”“할 일도 없는데 원주나 다녀오지 뭐.”“오빠 지금 여진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여진이가 전주로 온 뒤로 계속 귀가 간지러운데 너라면 안 무섭겠어?”“귀 간지러우면 귀나 파.”“...”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그래. 내일 다녀오지 뭐. 마침 가백산 등산하고 싶었는데.”“볼일 마치면 같이 가자.”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를 마치고 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선기현이 오빠한테 연락은 했어? 두 사람 정말 이혼한대? 여진 언니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그래도 소용없어. 이미 마음 떠난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이승우는 다 먹은 밥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부승희는 소파에
배여진의 충고를 부승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승우에 대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배여진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배여진과 선기현이 결혼식에 부승희는 신부 들러리로 참석했고 배여진은 부승희더러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이승우가 진심으로 다가올 거라며 충고해 줬었다.그런데 배여진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말을 바꿔 새로운 충고를 하지 않는가?부승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언니 괜한 충고는 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하세요.’날이 어두워지고 배여진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눈가가 빨개진 걸 보아 선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라 추측이 되었다.부승희는 배여진을 호텔로 바래다주고 본인은 돼지 농장으로 돌아왔다.요즘 농장은 시설이 많이 바뀌어 이제 건물에서도 돼지를 키울 수 있었다. 부승희가 평소 지내는 곳이 바로 돼지 농장의 옆 건물이었다.부승희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게 보였다.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승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집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나 보네?”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였다.“왜 왔어?”“왜라니.”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 보였다.“농장에 돼지 사료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나 챙겨 먹어. 난 됐어.”그리고 이승우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을 보며 질문을 이었다.“그건 뭔데?”이승우는 짐을 집안으로 옮기며 말했다.“흰죽.”부승희는 또 쯧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아침에 막 도착한 간장게장이야.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이승우는 부승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그 말에 부승희는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피곤해진 부승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지시를 내렸다.“냉장고에 스팸 있으니 구워줘. 샤워만 하고 올 테니 같이 먹자.”이승우는 곧장 주방으로
배여진과 선기현은 결혼 4년 차였지만 결혼 생활에 금이 생겼다.선기현 쪽에서 남은 감정이 없다며 평화 이별을 요구했다.배여진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옆을 지켜온 소꿉친구였고 가문끼리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짝사랑하다가 포기했고 부모님이 찾아준 남편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선기현이 결혼을 뒤엎고 배여진을 설득해 결국 결혼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남은 감정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이혼이라니, 이건 배여진더러 죽으라는 소리였다.부승희와 배여진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배여진이 전주로 찾아왔다는 소식에 부승희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배여진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이승우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승희는 배여진과 또 몇 명의 부잣집 자녀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배여진은 여전히 기분이 저기압이었고 사람들은 배여진더러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며 다독였다.부승희는 말없이 배여진을 살폈다.“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나? 지금 보드게임 하고 있는데.”“너 왜 그렇게 안일해? 오늘 피키 아기 낳을 것 같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부승희는 멜론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낳으면 낳는 거지. 피키 오빠가 키우고 있잖아. 이따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잔소리하긴.’한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피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에 말없이 귀를 쫑긋거렸다.배여진이 고개를 돌려 먼저 입을 열었다.“승우 오빠?”부승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너 지금 안 오면 후회할지도 몰라. 네가 내기에서 지게 내가 조작할 수도 있어.”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아 짜증 나.’부승희와 이승우는 전주에서 농장을 차린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 최근 돼지 농장까지 확장했는데 부승희와 이승우는 각각 몇 마리를 배정해 누가 더 많이 아기 돼지를 받을 수 있는
정인 그룹.도시의 네온 불빛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작게 숨을 헐떡였고 연정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양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졌고 고개를 들어 천장의 크리스털 전등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양시연은 자신이 파도가 되어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양시연에게 다가갔고 양시연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그러다가 양시연을 제품에 기대게 한 연정훈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다정하게 닦아줬다.불빛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자신을 향한 연정훈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양시연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가 아직 수술 자국이 남아있는 배로 향했다.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흉터를 가렸고 목소리는 이미 낮게 잠겨 있었다.“보지 마요... 못생겼잖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 또 흉터에도 입맞춤했다.뜨거운 연정훈의 온도가 흉터에서 전해지고 그 온기는 빠르게 심장까지 타고 올라갔다.양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아니.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연정훈은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양시연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양시연은 진심 어린 연정훈의 말을 들으며 연정훈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연정훈은 두 팔로 지탱한 채로 양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귓가에 뜨거운 숨이 전해지자 양시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연정훈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온몸을 맡겼다.사무실엔 달빛조차 비춰들지 않았다. 오직 침대 헤드 불빛 하나만 존재했는데 연정훈은 오직 자기 눈에만 이 광경을 담고 싶었다.양시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시연이 잠이 든 뒤로 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품에 안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색색 숨소리를 내는 양시연은 잠결에도 미소를 지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하얀 피부가 드러났으며 하얀 피부는 연정훈의 단단하고
금발이라는 말에 양시연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나도 금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경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훈 씨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헤어 디자이너 쌤이 추천해 주는 금발로 한 거예요. 금발 하면 이목구비도 더 살고 카리스마도 넘칠 거라고 해서요.”“나한테 카리스마 넘치게 보이고 싶었어?”양시연은 앞장을 서서 걸었고 양손을 등 뒤로 모은 채로 말했다.“뭐 그런 것보다 절대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연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은 정말 그렇게 해냈으니 말이다.그날 밤, 연정훈은 양시연의 변화에 깜짝 놀랐었다. 파격 변신한 외관과 한껏 여유로워진 모습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에 더 놀랐었다.“그때 날 처음 보고 어떤 생각을 했어요?”양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취재하듯 물었다.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널 만나기 전에 승원이가 보내온 사진으로 확인했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너무 예뻤어.”“정말요?”양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예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시연의 손을 잡았다.“항상 날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너였다고 생각하는데?”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럼 그 뒤로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연정훈은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이 대신 기억을 불러왔다.“그날 정훈 씨 엄청 차가웠는데 혹시 날 보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던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사실 차가운 척을 했던 거였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당장 양시연을 잡아 제 곁에 두고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토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 말이다.연정훈은 입을 달싹이다 다시 양시연의 옆자리에 섰다. 그때 길 한복판에 즉석 복권 가게가 보였다.“즉석 복권 사줄까?”“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에도 나한테 즉석 복권 사줬던 거 기억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