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날이 어두워졌는데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했던 남자는 없었어요.”‘그러니까 유혹하는 게 맞지!’부승원이 말을 이었다.“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래.”“그런 사람이 나한테 키스해요?”“그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쳇.”반우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비아냥거렸다.“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요?”“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키스한 건데요?”“...”반우희는 말을 계속이었다.“그리고 나한테 키스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요!”‘흥. 어디 한번 변명해 보시지?’부승원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말없이 가스레인지를 켜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반우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왜요? 왜 말이 없어요?”부승원이 몸을 돌려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요리해 주는 건...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로 치자.”유혹이라는 단어는 너무 속 보여 단어를 바꿨다.그러자 반우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건 모르죠.”“내가 그동안 밥도 해주고 간식 몰래 먹는 것도 모르는 척해줬는데 왜 내가 호감 표시하는 걸 몰랐어?”“...”“그때부터 알아차렸으면 미리 피해 다니지, 그래.”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그게...”부승원은 덤덤하게 한 방을 먹이고 면을 휘저었다.“그럼,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린 걸까?”부승원은 이 질문으로 반우희가 잠시 잠잠해질 거로 생각했지만 반우희는 거침이 없었다.“흔들렸으면 왜요?”부승원이 행동을 뚝 멈췄다.반우희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외모가 제 취향이라 좀 흔들렸다면 어쩌시려고요?”‘이젠 어떻게 나오실 건가?’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차가운 성격을 가졌지만 잘생긴 외모와 좋은 가문, 그리고 공부도 곧 잘해 고백을 셀 수 없이 받았었다. 요즘 들어 뜸하긴 했으나 없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반우희처럼 직접적인 사람은 드물었다.부승원은 재차 말문이 막혔고 귓불부터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인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지금 누가 누굴 꼬시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수박 주스를 컵에 담아 건네며 말했다.“자, 마셔.”“네.”반우희는 가까이 다가와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부승원은 손을 뻗어 컵에 빨대도 꽂아주었다.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빤히 쳐다보자 부승원이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마셔.”그러자 반우희가 고개를 숙여 빨대를 입에 물었다.어느새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부승원은 반우희를 등지고 면과 소스를 끓였다.뾰로통하던 반우희는 수박 주스에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그래서 그 옆에 서서 얌전히 기다렸다.얼마 뒤, 요리를 완성한 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런데 완성된 스파게티는 1인분이었다.반우희는 포크를 쥐고 몰래 힐끔거렸다.“변호사님은 안 드세요?”“난 이미 먹었어.”‘그럼. 거절하지 않겠어.’반우희는 폭풍 흡입을 했고 부승원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왜 날 빤히 보는 거예요?”여전히 센 척하는 반우희에 부승원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계속 그런 태도면 너 해고한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그러다가 포크를 쥐고 잠시 고민하던 반우희가 말했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절대 해고 못해요!”“대표인 내가 말만 하면 시연 씨가 안 된다고 한 적 있어?”“그래도 시연 언니는 날 해고하지 않을 거예요!”“네가 회사에서 대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부승원이 비꼬았다.“...”반우희는 바로 입맛이 떨어졌고 불만을 담아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이런 이유로 날 해고한다면 변호사님을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부승원은 팔짱을 척 끼고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증거 있어?”“증거...”‘아... 없네.’반우희는 김이 빠졌으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믿어줄 거예요!”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말끝마다 시연 언니, 시연 언니. 시연 씨가 널 평생 책임져
책임?반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나?’‘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반우희는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책임이요?”“내가 응당 져야 할 책임.”“법률에는 키스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적지 않았어요.”“너 스스로 생각해 봐.”반우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내가 말하면 들어는 줄 거예요?”“생각은 해볼게.”“20억! 20억 주세요!”“...”돈! 돈! 돈!반우희 머릿속엔 돈밖에 없는 것 같았다.“돈은 포기해. 키스를 돈 주고 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니까.”‘쳇.’‘이럴 때면 아주 꽉 막힌 사람이라니까.’‘멋대로 키스할 때는 언제고.’반우희는 고개를 점점 숙였다.사실 반우희도 부승원이 보낸 신호를 알아차렸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전에는 곁에 붙는 것도 싫어하더니 요즘 들어 자꾸 묘하게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게다가 부승원이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면 이런 기회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렇긴 하지만...’반우희가 슬쩍 부승원을 살폈다.‘정말 날 좋아하는 거라면...’‘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부승원은 잘생기고 돈도 많고 똑똑하니...’사실 맞은편에 앉은 부승원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나이 서른이 되도록 처음 누군가에게 추파를 보냈지만 반우희는 멍청하게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려는데 반우희가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장가와요!”부승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러자 반우희는 바로 기세가 꺾였다. 키스 한 번에 결혼까지는 너무 많이 가버렸다.‘하지만...’“변호사님이 저더러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요!”‘생각은 자유니까!’부승원은 깜짝 놀란 마음을 다독였고 어쩐지 기쁜 마음도 들었다.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욕심이 과하네.”반우희는 멋쩍어졌고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변호사로서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 몰라요? 자꾸 말을 바꾸면 안 되죠.”부
난 네 것이고 넌 내 것.반우희는 그 말을 한참 되새겼으나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질문하기엔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 남은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모두 비우고 나니 마침 승주가 전화를 걸어와 재촉했다.“알겠어. 알겠어.”‘지금 얼마나 중요한 얘기 중인데 재촉하는 거야?’반우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 했으나 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가자. 데려다줄게.”“네...”‘쯧. 왜 이렇게 덤덤해 보여?’‘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잘못 이해한 거면 어떡해.’반우희가 한참 삽을 파는 동안 부승원은 이미 외투까지 챙겨 입고 기다렸고 반우희도 서둘러 겉옷을 챙겼다.그렇게 불과 30분 안으로 반우희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반우희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옆자리 사람을 힐끔거렸다.사실 부승원은 반우희의 생각처럼 덤덤한 게 아니라 그런 척 연기할 뿐이었다.어느새 조용해진 반우희는 방금 했던 말을 곱씹었다.부승원은 이제 앞으로 반우희와 어떻게 지낼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반우희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훔쳐보다가 들킨 반우희는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리고 반우희의 토끼 모자를 정리했다.“앞으로 저녁에 우리 집 놀러 오면 지하철 타지 말고 내가 바래다줄게.”부승원의 말에 반우희는 눈만 깜빡거렸다.그 시선에 부승원은 어색한 마음에 마른기침하다가 자연스레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반우희는 속으로 꺅꺅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내 착각이 아니야! 방금 네 것 내 것하고, 서로 간섭한다는 말은 연애하자는 말이 맞나봐! 날 매번 데려다준대!’반우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가방을 꽉 쥐었고 구름 위로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돈도 챙기고 부승원도 손에 넣고!’‘세상에! 반우희 너 출세했어!’‘아, 잠깐만.’반우희는 또 한 번 확인받고 싶었다.“내가 변호사님 일에 간섭해도 된다는 거 맞죠?”“그래...”“그
첫 번째 간식은 부승희가 주문한 것으로 회원 마트에서 정기적으로 배송되었고 그 기간이 끝난 후에도 부승원은 특별히 취소하지 않았다.그때는 어차피 먹을 사람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사실 그는 반우희가 먹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취소하지 않았다.부승원은 깊은 설명 없이 그저 이렇게 말하며 해명했다.“앞으로 집에 있는 간식 중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가져가.”반우희는 마음속으로 기쁨이 차오르며 조금씩 연애하는 기분을 실감했다.그녀는 두 손을 움켜잡은 채 부승원을 은근히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희미한 설렘이 가라앉고 나자 머릿속이 잠시 맑아지며 반우희는 부승원을 깊이 바라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변호사님께서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을까? 혹시...나를 좋아하는 걸까?’그 생각에 그녀는 얼굴을 긁적이며 불안해졌고 어쩐지 이 상황이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다.입을 열어 물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집 근처에 다가가자 승주가 눈치가 빠르므로 들킬까 봐 걱정된 반우희는 부승원에게 집 앞까지 차를 몰고 가는 게 민망했다.“여기서 내려도 괜찮아요. 걸어서 갈게요.”부승원은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너희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반우희는 급히 자세를 고쳐잡고 손을 흔들었다.부승원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다가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자 반우희의 의도를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아파트 입구에 차를 멈췄다.반우희는 다소 통통한 몸매여서 차에서 내리는 게 힘들어 보였다.그녀는 뒷좌석에서 가방을 챙긴 뒤 부승원은 차 앞에 돌아서서 반우희를 먼저 앞으로 내보내며 집까지 바래다주려 했지만 반우희는 움직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듯한 기색이 보이자 한참을 생각한 후 물었다.“왜 그래?”말이 떨어지자마자 반우희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코트 단추를 움켜잡으며 모자와 목도리 사이로 눈빛을 드러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혹시 나 좋아해요? 나랑 사귀려고 그러는 거지 맞죠?”부승원
‘이제 확실히 알겠어? 확실히 알겠냐고?’반우희는 머릿속에서 부승원의 말을 계속 곱씹으며 무한 반복 재생 중이었다.‘히히. 말로 하면 되지. 왜 막 키스하고 그래.’반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꽉 물고 겨우 참았지만 얼굴에 번지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빛만큼은 감추지 못했다.부승원은 꽤 오랫동안 반우희를 안고 있다가 조심스레 놓아주었다.반우희는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자신도 부승원에게 한 번 키스해 볼까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부승원은 그녀의 모자를 살짝 내려주며 말했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반우희는 속으로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그래. 가면 되지.’반우희는 부승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신경 쓰지 않을 때 살짝 그의 손을 잡았고 부승원은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었다.‘헤헤.’반우희의 발걸음마저 경쾌해졌고 목도리를 꽁꽁 두른 데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탓에 가는 길 내내 숨이 가빴다.집 근처에 다다르자 반우희는 승주와 다른 사람들이 볼지 걱정되어 부승원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다.부승원도 상황을 알아챘는지 반우희를 앞서 가게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반우희는 문득 아쉬움이 밀려왔다.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같은 기분이었지만 혹시 집에 올라가 잠들었다가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까 봐 두려웠다.몇 걸음 걷던 반우희는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안 돼. 그냥 이렇게 올라갈 순 없어. 변호사님이 오늘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내일 정신 차려버리면 어떡하지?’그녀는 지금 부승원이 왠지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이득을 봐야 한다고 결심했다.반우희는 머릿속으로 진지하게 계획을 정리한 뒤 결심한 듯 다시 부승원을 향해 달려갔다.부승원은 반우희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우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목도리를 급히 내리며 까치발을 들어 부승원의 입술 쪽으로 키스했다.그 키스가 그의 입술에 내려졌고 부승원은
부승원은 어이없게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침 일찍 사무실에 앉아 대량의 물을 마셨지만 여전히 반우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뒤늦게 자신이 조금 흥분한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부승원은 그 상황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빠르게 인식하고 조정하려 했다.다행히도 모든 것이 부승원의 계획 안에 있었고 그는 업무에 집중하면서 그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루나는 어제 미친 듯이 부승원을 쫓아다녔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태도로 다가와 어제의 깊은 감정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사무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고 그 소문은 점차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하면서 퍼졌다.한편 반우희는 일을 시작하기 전 양시연의 사무실로 가 아침을 얻어먹으러 갔다.양시연은 최근 회사에 호화로운 아침을 많이 준비했으며 몇 명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양이 많았고 반우희가 그 음식을 다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반우희는 평소라면 이미 남김없이 다 먹었을 텐데 오늘은 숟가락을 들고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했다.양시연은 반우희가 그런 모습을 보자 재미있어하며 점점 더 행복한 표정을 짓는 반우희를 보면서 기침을 했다.“응?”반우희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양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으며 만두를 반우희의 입에 넣어주었다.“왜 그러는지는 내가 물어봐야죠. 아침부터 얼굴에 사랑에 빠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잖아요.”반우희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웃으면서 다시 숟가락을 들고 죽을 마셨다.‘너무 달아.’양시연은 반우희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우희 씨, 저희가 이렇게 친한데 비밀은 있으면 안 되겠죠?”반우희는 잠시 생각한 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언니한테만 말할게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제 입은 정말 무거워요.”반우희는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급히 삼켰다.‘양시연 언니는 입이 꽤 가벼운 사람이잖아. 절대 비밀을 지키지 못할 거야.’반우희는
부승원은 반우희가 갑자기 나타나자 속으로는 기뻤다.눈이 마주쳤을 때 부승원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밖에 아무도 없어요. 저 몰래 온 거에요.”반우희는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고 부승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점심은 먹었어?”그 말을 듣자 반우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아직 안 먹었어요.”그러더니 뒤에 숨겨 둔 디저트를 꺼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변호사님과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왔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깃털로 간질이는 듯 따뜻했지만 목젖을 가볍게 움직이며 평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난 낮에 바쁘니까 너 스스로 잘 챙겨 먹어야지. 굳이 나 기다릴 필요 없어.”반우희는 그의 태도에 살짝 불만스러웠다. 특유의 솔직한 성격답게 디저트를 든 채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먹으려고 온 게 아니라 변호사님을 보러 온 거에요. 아침에 말도 못 해서 조금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변호사님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반우희는 커다란 눈으로 부승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심을 전했다.부승원도 그녀가 보고 싶었고 어젯밤 내내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전까지 반우희를 그렇게 깊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아침 내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고 조금씩 자제력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반우희가 직접 찾아와 보고 싶다고 말하자 모든 노력이 무너져 내렸다.부승원은 겉으로는 무심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보고 싶었어.”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다소 평온해서 진정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다른 여자라면 금세 서운해할 만한 순간이었지만 반우희는 달랐다. 부승원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 그 자체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을 잡아 소파 쪽으로 끌고 가 앉히더니 그의 옆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