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돈 주세요!”반우희의 말에 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해고하는 거면 배상해 주셔야죠. 세 배 금액으로!”“...”“빨리요!”반우희는 굳은 얼굴로 루나를 재촉했다.‘그래. 돈은 주면 그만이지. 빨리 우희 씨 자극해 두 사람 관계에 불이 붙게 하는 게 우선이야.’루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가방에서 한 묶음의 현찰을 꺼냈다. 그 금액이 족히 200만 원은 되어 보였다.“가져가요.”루나는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건넸고 정말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반우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어때? 화나지? 빨리 날 욕하고 부승원한테도 퍼부어!’“지금 그 금액으로 날 거지 취급해요? 시급이 20만 원이고 한 달에 8번 근무였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2,000만 원은 주셔야죠!”‘뭐야? 이게 아닌데?’반우희는 화를 내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의자 위로 휙 벗어 두었다.“현금이 없으면 수표라도 주세요! 빨리요!”루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래도 이번 연기에 누군가 모두 책임질 거라 했기에 불을 더 붙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자, 여기 2,000만 원. 됐죠?”방금보다 더 과한 연기와 액션이었다.하지만 반우희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가방을 챙겨와 루나가 보는 앞에서 현찰과 남은 간식을 챙겼다.‘그만두라고 하면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변태 사장, 나도 싫어!’‘퉤.’반우희는 간식을 쓸어 담으며 또 루나를 흘겨보았다.‘정말 끼리끼리 잘 만났어.’루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이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반우희가 먼저 부승원에게 찾아가는 계획에 실패했다면 부승원이 먼저 다가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루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참, 쓰레기도 가지고 내려가세요.”반우희는 가방을 척 메고 표독스럽게 루나를 노려보며 문으로 향했다.‘그래. 간다. 가!’루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반우희를 몰래 살폈다. 다른
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달려갔으나 반우희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큰 소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197만 원... 198만 원...”“2만 원이나 부족하잖아!”“나쁜 사람. 어떻게 이 돈도 떼먹냐!”반우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돈을 움켜쥐고 표정을 구겼다.공돈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반우희는 몇 년 전 부승원이 했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부승원은 자신의 신분으로 부승원을 넘보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 했었다.하지만 반우희는 단 한 번도 부승원을 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을 가끔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매일 독설만 날리는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지 않은가?‘그런데 부승원은 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고 키스도 마음대로 하는 걸까?’‘술이 면죄부야?’‘변태!’이런 생각을 하며 반우희는 고개를 숙여 움켜쥔 돈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짜증 나.’‘어떻게 돈으로 사람을 내칠 수 있냐?’“그래. 돈 많아서 참 좋겠네... 짜증 나!”눈물이 추위에 빨개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고,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 남성 구두가 보였다.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부승원은 소나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토끼 모자가 보였고 작게 몸을 웅크린 토끼가 돈을 한 장 한 장세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녀석이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엔 곧이곧대로 듣고 무턱대고 집을 박차고 나가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반우희의 코며 손등이며 빨갛게 부어오른 게 보였고 눈시울까지 붉어진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반우희가 먼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든 돈을 가방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하고 반우희의 옆으로
반우희가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는 말에 부승원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래서 빠르게 다시 손목을 잡고 말했다.“루나는 내 학교 후배이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런데 왜 루나 씨는 변호사님 약혼녀라고 한 거죠?”“오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너한테 자꾸 농담하는 거야.”반우희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농담?’‘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어린 애인 줄 아나? 이런 일로 농담하게?’“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이제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배상금도 받았으니 다시 나오지 않을 거예요!”그리고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러나 부승원이 또 한 번 반우희를 붙잡았다.자꾸 반복되는 상황에 반우희는 정말 화가 났다.“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왜 자꾸 저를 잡는 건데요?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에요?”“변호사님은 남자, 저는 여자인데 우리 선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반우희가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쏟아붓자 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그러나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고 반우희는 아예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약혼이든 아니든 저랑 아무 상관 없고 다시 저 유혹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남남이고 다시 만나지 않는 거예요!”“지금 뭐라고 했어?”반우희는 아주 당당했다.“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그날 스파게티도 해주고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또 키스도 했잖아요!”마지막 키워드에는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러자 부승원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천하의 변호사 부승원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러나 반우희는 한번 시작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키스 말이 나와서 그러는 건데요. 제 허락은 받으셨어요?”“그때 변호사님이 저한테 그랬잖아요. 거리 유지하고 절대 변호사님 넘보지 말라고!”부승원은 바로 허점을 찾아 말을 끊었다.“내가 너한테 넘보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네! 그게 그 뜻이죠. 뭐!”반우희는 오히려 더 다가와 거의 한 대 칠 기세로 말했다.“몇 년 전 시연 언니가 떠나기 전, 우리 집 계단에서 저한
반우희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변호사님도 돈 주시게요?”“...”“키스하고 돈을 받으려고? 정말 날 뭐로 보고?”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변태요.”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했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반우희의 양 볼을 꼬집으려는데 반우희가 한발 빠르게 목을 뒤로 움츠려 얼굴을 목도리 안으로 숨기고 동그란 두 눈만 드러나게 했다.그렇게 두 눈이 마주치고 부승원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무의식적으로 보인 반우희가 너무 귀엽게 보여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부승원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손을 거두었다.“올라가서 천천히 얘기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래요.”‘내가 뭐 무서워할 줄 알고?’부승원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으나 다시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앞으로 걸으며 자연스레 반우희의 손을 잡았다.반우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잡힌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부승원을 따라 걸고 있었다.그렇게 오피스텔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루나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화가 났고 루나한테 직접 따지려 했다.그러자 부승원은 손에 힘을 주어 반우희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루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유롭게 걸어왔다.“선배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너랑 뭔 상관인데!’반우희는 하마터면 바로 말을 뱉을 뻔했으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나의 호칭이 이상했다.‘선배님?’반우희는 부승원에게 잡힌 손과 루나를 번갈아 바라봤다.‘두 사람 연인이라며?’‘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데 화도 안 나?’부승원은 다시 반우희를 등 뒤로 숨기며 루나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연정훈 부부가 너한테 얼마나 큰 딜을 했기에 이러는 거야?”루나는 웃음이 터졌다.“선배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부승원이 헛웃음을 내쉬었다.루나는 등 뒤의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저는 미션 완수했으니 어린 친구에게 제대로 사과할게요. 방금은 죄송했어요. 돈은 첫 만남 선물로 해두죠.
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날이 어두워졌는데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했던 남자는 없었어요.”‘그러니까 유혹하는 게 맞지!’부승원이 말을 이었다.“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래.”“그런 사람이 나한테 키스해요?”“그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쳇.”반우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비아냥거렸다.“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요?”“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키스한 건데요?”“...”반우희는 말을 계속이었다.“그리고 나한테 키스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요!”‘흥. 어디 한번 변명해 보시지?’부승원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말없이 가스레인지를 켜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반우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왜요? 왜 말이 없어요?”부승원이 몸을 돌려 반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요리해 주는 건...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로 치자.”유혹이라는 단어는 너무 속 보여 단어를 바꿨다.그러자 반우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건 모르죠.”“내가 그동안 밥도 해주고 간식 몰래 먹는 것도 모르는 척해줬는데 왜 내가 호감 표시하는 걸 몰랐어?”“...”“그때부터 알아차렸으면 미리 피해 다니지, 그래.”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그게...”부승원은 덤덤하게 한 방을 먹이고 면을 휘저었다.“그럼,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린 걸까?”부승원은 이 질문으로 반우희가 잠시 잠잠해질 거로 생각했지만 반우희는 거침이 없었다.“흔들렸으면 왜요?”부승원이 행동을 뚝 멈췄다.반우희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외모가 제 취향이라 좀 흔들렸다면 어쩌시려고요?”‘이젠 어떻게 나오실 건가?’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차가운 성격을 가졌지만 잘생긴 외모와 좋은 가문, 그리고 공부도 곧 잘해 고백을 셀 수 없이 받았었다. 요즘 들어 뜸하긴 했으나 없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반우희처럼 직접적인 사람은 드물었다.부승원은 재차 말문이 막혔고 귓불부터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인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반우희에 부승원은 지금 누가 누굴 꼬시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수박 주스를 컵에 담아 건네며 말했다.“자, 마셔.”“네.”반우희는 가까이 다가와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부승원은 손을 뻗어 컵에 빨대도 꽂아주었다.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빤히 쳐다보자 부승원이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마셔.”그러자 반우희가 고개를 숙여 빨대를 입에 물었다.어느새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부승원은 반우희를 등지고 면과 소스를 끓였다.뾰로통하던 반우희는 수박 주스에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그래서 그 옆에 서서 얌전히 기다렸다.얼마 뒤, 요리를 완성한 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런데 완성된 스파게티는 1인분이었다.반우희는 포크를 쥐고 몰래 힐끔거렸다.“변호사님은 안 드세요?”“난 이미 먹었어.”‘그럼. 거절하지 않겠어.’반우희는 폭풍 흡입을 했고 부승원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왜 날 빤히 보는 거예요?”여전히 센 척하는 반우희에 부승원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계속 그런 태도면 너 해고한다?”반우희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그러다가 포크를 쥐고 잠시 고민하던 반우희가 말했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절대 해고 못해요!”“대표인 내가 말만 하면 시연 씨가 안 된다고 한 적 있어?”“그래도 시연 언니는 날 해고하지 않을 거예요!”“네가 회사에서 대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부승원이 비꼬았다.“...”반우희는 바로 입맛이 떨어졌고 불만을 담아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이런 이유로 날 해고한다면 변호사님을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부승원은 팔짱을 척 끼고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증거 있어?”“증거...”‘아... 없네.’반우희는 김이 빠졌으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시연 언니한테 말하면 믿어줄 거예요!”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말끝마다 시연 언니, 시연 언니. 시연 씨가 널 평생 책임져
부승희는 사업 이야기를 하러 부승원을 찾았고 대화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함께 저녁을 먹었다.반우희는 대화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않았다.“승희 씨, 전주에 가서 돼지를 키우게 되는 거예요?”부승희는 반우희의 말을 정정했다.“축산업 회사를 설립하는 거예요.”“어떤 가축을 기르려고요?”“돼지.”“그럼 결국 승희 씨가 돼지를 기르는 거네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반우희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다른 것도 키워요.”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네...”반우희는 생각에 잠겼다.부승희는 장난기 가득한 성격이지만 돈 버는 일에는 진지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부승원은 부승희가 가져온 사업 계획서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 말했다.“지금 네 자본 규모가 너무 작아.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좀 투자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투자를 받는 건 어려울 것 같아.”“얼마나 투자할 수 있어?”“600억에서 천억 정도. 시험 삼아 해보자.”“그럼 충분하네. 이전에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6천억 정도 되겠어.”반우희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실례지만 '억'이라는 단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부승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만'은 아니겠죠.”반우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세상에 그러니까 억이라는 거야?’반우희는 자신이 꽤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재벌가의 창업은 억 단위로 시작하는 건가?’부승희는 부승원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사이 반우희는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부승희와 부승원은 반우희를 바라보았고 반우희는 히히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기 혹시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요?”부승원은 놀랐다.부승희는 재미있어하며 반우희를 놀렸다.“우희 씨는 얼마나 투자할 거예요?”반우희는 손가락 하나를 펴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200억 정도 어때요?”부승희는 반우희를 보며 웃었다.“우희 씨 현금
어른들은 큰 사업을 하고 아이들은 작은 일을 한다.반우희는 요즘 너무나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자선사업까지 시작했다. 주변의 친구들을 돕고 이곳저곳에 기부하며 필요한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능력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맞지.’어느 날 점심시간 반우희는 수업을 마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부승원을 찾았다. 조용히 문을 열어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지만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건 예상치 못한 여자 목소리였다.‘응?’반우희는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탐색 레이더를 가동했다.“이승우, 너 우리 둘이 몇 번 키스했다고 무슨 관계라도 있는 줄 알아? 쓸데없는 전화 좀 그만해. 귀찮아 죽겠어.”반우희는 눈을 깜빡였다.‘아하. 부승희 씨구나.’그는 흥미롭게 눈을 굴리며 뒷담화를 엿듣기로 하고 문틈을 살짝 열어둔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안에서는 이승우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그저 운 좋게 너한테 키스를 받은 것뿐인데 감히 건방질 수가 있겠어?”부승희는 소파에 기대앉아 방금 한 네일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알았어. 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끊어.”“부승희, 끊지 마.”“빨리 말해!”“생각해 보니까 정육점이랑 수산 양식업 이 두 사업이 꽤 괜찮아 보이더라.”부승희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흥미를 보였다.“나랑 같이하겠다는 거야?”“내가 진심을 담아서 열 개 정도 투자할게. 어때?”부승희는 시험 삼아 사업을 시작했지만 함께할 만큼 용기를 내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하지만...“내가 너 돈 벌게 해 줄 거라고 보장은 못 해.”이승우는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나도 말할게. 난 돈 보고 온 게 아니야. 너 때문에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마음 놓고 같이 하게 해줘.”부승희는 피식 웃었다.“내가 너 투자 안 받으면 겁먹었다고 생각할 거지?”“눈앞에 돈이 있는데 안 받으면 그게 겁먹은 게 아니고 뭐야?”부승희는 입술을 삐죽이
잠시 후 세 명에서 네 명의 지인들이 다가왔다.양시연을 아는 사람들은 부부 사이가 좋다며 농담을 던졌고 모르는 사람들은 연정훈이 직접 소개하며 그들의 애정을 부러워했다.한참 동안 음식은 손도 대지 못했다. 양시연은 연정훈이 만든 자랑스러운 ‘사랑꾼' 이미지에 이미 마음이 가득 찬 상태였다.마지막으로 온 고위 임원이 떠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당신은 오글거리지는 않아요? 내일 출근하면 여전히 차가운 이미지 유지할 수 있을까요?연정훈은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냥 물어보길래 대답한 거야.”양시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특별한 곳이라고 해서 데려왔더니 결국은 무료 구내식당에서 먹게 하다니 정훈 씨 정말 계산적이네요.”연정훈은 그녀 앞에 국그릇을 놓으며 말했다.“먹어 봐.”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냄새를 맡았다.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왜 이렇게 모든 걸 다 냄새 맡아? 태양이도 냄새 맡고 나도 냄새 맡고 국도 냄새 맡고 강아지 같아.”“당신이야말로 강아지예요.”양시연은 숟가락을 들어 한입 떠먹었다.‘음?’그녀는 눈이 번쩍 뜨였고 다시 한입 떠먹고는 연정훈을 올려다봤다.‘맙소사. 세상에 이런 맛있는 국이 있다니.’연정훈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버섯 조각을 집어 양시연에게 먹였다.“식당에 새로 온 주방장이 수성 출신인데 국을 정말 잘해. 우리 집 국보다 더 맛있어. 이틀 전에 내가 먹어봤는데 너도 꼭 먹여주고 싶었어.”이 국물은 정말 맛있었다. 특히 양시연이 요즘 국을 좋아해서 연정훈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양시연이 말했다.“그럼 포장해서 집에서 먹으면 되잖아요?”“바로 만들어서 바로 먹는 게 제일 맛있어.”“거짓말하지 말아요. 정훈 씨는 나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양시연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그들이 선택한 자리는 창가 쪽이었고 바깥으로는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역시 연정훈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태양을 가정부에게 맡기고 혼자 연정훈을 데리러 갔다.차 안에서 연정훈에게 전화가 왔고 그의 말투에는 질투가 묻어 있었다.“오후에 양혁수가 집에 왔었어?”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묘한 신맛이 묻어났다.“네.”“무슨 일이 있었어?”“양혁수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보고 싶어서 왔겠죠. 당신 보러 왔는데 안타깝게도 당신은 집에 없었잖아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질투하는 것을 알아채고 자리에 가깝게 다가가서 장난스럽게 말했다.“퇴근했어요? 오늘 일 많았어요? 힘들었어요?”“내 사무실로 와. 저녁 먹고 같이 가자.”양시연은 턱을 살짝 들고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에요? 나랑 데이트하려고?”“응. 양 대표, 시간 있어?”“그건 정훈 씨가 어떤 장소를 예약했는지에 달렸어요. 특별한 곳이면 제가 기꺼이 얼굴을 비춰주죠.”“그럼 와. 아주 특별한 곳이야.”양시연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물었다.“진짜 밖에서 먹는 거예요?”“널 놀려서 뭐 하겠어.”“태양이는 집에 있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집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태양 잘 보고 있을 거야.”‘알았어. 또 질투하는 거네.’양시연은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약간 기대했다.“그럼 내가 올라가서 당신 찾으러 갈게요. 사무실 앞에서 기다려요.”“응. 의자 옮겨 놓고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양시연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마치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연정훈의 모습이 떠올랐다.양시연은 양원 건물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더욱 공손하게 대했다.역시 임금이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고 연정훈의 사무실이 바뀐 것은 모두에게 분명한 메시지였다.양시연이 도착하자 연정훈은 정말로 사무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사무실 밖 작은 휴
그들은 마당에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태양이 시끄럽다며 투정을 부리자 양시연은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하고 연정훈을 배웅했다.양시연은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 태양을 달랜 뒤 작은 침대에 눕혔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일어나려다 밖에서 들어오는 양혁수를 보았다.양혁수는 정장을 차려입어 마치 공식 행사를 막 마치고 나온 듯 보였다.양시연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큰 행사라도 있었어? 양씨 도련님께서 정장을 입고 오다니.”“말도 마.”“양혁수는 손을 휘저으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는 그녀 뒤에 앉아 가까운 곳에서 자리에 앉았고 곧 가정부들이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양시연은 말했다.“방금 양씨 그룹에서 회의했지?”“몇몇 임원들을 만나서 말이 많아서 짜증 났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단련해야 해.”“됐어. 난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적응 못 하면 안 돼. 나도 그렇게 능력이 크지 않고 정인 일로도 이미 골치 아파. 엄마도 지금 버거워서 엄마를 도와줘야 해.”양혁수는 대꾸했다.“엄마 연애하기 전엔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았어?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항상 활기 넘쳤지.”양시연은 양혁수의 원망을 듣고 결혼 후의 양지원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어쨌든 지금은 우리 집에서 중요한 사람이니까. 너도 좀 더 힘을 내야 해 우리 다 너한테 의지하고 있어.”양시연이 그를 칭찬하며 아부하자 양혁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솔로여서 일만 해야 한다는 건가?”“그럼 빨리 여자친구를 찾아서 짐을 나눠.”양혁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아기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말을 마치고 다시 조심스럽게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희고 깨끗한 볼에는 약간의 분홍빛이 돌았고 안색이 매우 좋아 보였다. 출산 후 관리를 잘 받은 덕분인지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 보였다.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찾고
양시연이 경인으로 돌아온 후 한 번 혼자 외할머니의 묘지를 찾아갔었다. 양시연이 떠나 있었던 그 몇 년 동안 연정훈도 몇 번 묘지를 찾아 참배를 올렸다.아이러니하게도 부부가 함께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일이 한결 정리된 뒤 양시연은 맑은 날을 골라 연정훈과 아들 태양과 함께 묘지를 찾았다.묘지 근처는 언제나 싱그러우면서도 쓸쓸한 초록빛에 잠겨 있었다.차에서 내리기 전 태양은 귀찮은 듯 투덜거렸다.차에서 내린 후 아빠 품에 안겨 있던 태양은 넓은 챙의 모자를 쓴 채 까만 포도알 같은 눈을 굴리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햇볕이 눈을 자극할까 봐 양시연은 살짝 모자를 내려주고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오는 길 내내 양시연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고 연정훈은 그 변화를 눈치채고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나 괜찮아요.”그녀는 그저 외할머니가 그리울 뿐이었다.교통사고가 났을 때 가장 위급한 순간 그녀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 꿈속에선 외할머니만 나타났다.기억 저편에서 양시연은 여전히 외할머니와 함께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외할머니는 양시연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평생의 사랑을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묘지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태양을 안고 옆에 서 있었고 양시연은 제물을 올리고 묘비를 닦았다.묘비에는 생전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양시연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외할머니, 지난번에 왔을 때 말씀드렸죠? 저 결혼했어요. 이번엔 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기가 생겼어요. 외할머니께서 계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거예요. 우리 아기 정말 착해요.”그녀가 묘비를 닦는 동안 연정훈은 태양을 안은 채 묵묵히 그녀 옆에 앉아 돕고 있었다.그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양시연과 아이를 잘 돌보
조재민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째 연정훈은 소현주와 양곡 창고 사건을 다시 꺼내 들었고 그동안 그와 대립하던 이들 조재민의 측근들은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이 화장님은 연정훈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명확히 하려 했다.한때 양원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빠졌다.이 모든 일의 이면에서 양민아가 감옥에 갇힌 소식은 양시연의 관심을 끌었다. 그날 밤 연정훈은 이를 양지원에게 전하며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양지원은 단 한 마디로 답했다.“양민아 부모님께 받은 은혜는 이미 다 갚았어. 이제 양민아가 죽든 살든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모든 것이 끝났다.양시연은 여 아주머니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여 아주머니는 평생 양씨 가문을 위해 헌신하며 양지원을 키우고 돌보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손자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양민아 뱃속의 아이가 탁승호의 아이라면 내가 키울 생각이에요.”여 아주머니가 말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물어보았고 그 아이가 탁승호의 아이일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고 대신 탁호연과 양민아를 만나게 해주기로 했다.양민아는 조재민을 팔아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했고 가장 큰 카드인 양지원의 연민을 기대했지만 일주일을 기다려도 양지원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점점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이성을 잃었고 여러 번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으나 끝내 모두 삼켰다.그녀는 헛된 말을 하면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다행히 탁호연이 찾아왔고 그녀는 다시 희망을 느꼈다.탁호연은 양민아를 극도로 혐오했고 특히 그녀의 낯선 얼굴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양민아는 미친 여자였고 잡혀서 다행이지만 만약 그녀가 풀려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손에 죽을 것이다.“저희 어머니께서 당신을 보내신 건가요?”양민아는 급하게 물었다.탁호연은 비웃으며 대답했다.“당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다시 살아나서 양민아 씨를 보러 오겠어요?”‘웃기네. 양지원 씨는 너를
조재민의 사망 소식은 곧 업계 내에서 크게 퍼졌다.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뿐만 아니라 사망 원인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그는 과도한 흥분제를 주입받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더 충격적인 것은 조재민이 사망 당시 임신한 여성과 함께 있었다.그 여성은 체포되었고 신원도 빠르게 확인되었으며 무국적이었다.그녀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조재민은 오랫동안 이러한 약물을 주입해 왔고 이번엔 실수였다고 말했다.모두가 그 여성이 단순히 조재민이 데리고 놀던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한때 명성이 자자했던 양씨 가문의 딸이었다.이 소식을 들은 변백호와 양혁수는 자택 펜싱장에서 대결 중이었다.두 사람의 실력은 비슷했고 경기는 한동안 팽팽했다.옆에서는 노지혜와 변여름이 경기를 지켜보며 가끔 응원했다.“변백호 씨, 파이팅.”“오빠, 파이팅.”변여름이 응원을 마친 순간 변백호는 미세한 차이로 양혁수에게 패했다.두 사람이 보호 장비를 벗는 모습을 본 노지혜는 참지 못하고 변여름에게 물었다.“여름아, 오빠라고 말한 거 어떤 오빠 말하는 거야?”변여름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오빠예요.”“분명히 변백호 씨에게 응원한 게 아닐까? 여름이가 응원하자마자 졌잖아.”“저희 오빠랑 같이 살고 나서 언니가 좀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노지혜는 변여름의 평가에 조금 당황했다.???노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변여름이 다시 말했다.“응원은 그냥 응원일 뿐이지. 마법이 아니에요.”노지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쳇. 넌 결국 변백호 씨에게 응원한 거 아니잖아.’두 어른과 아이들이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사이 변백호와 양혁수는 물을 마시며 조재민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연정훈 씨는 참 재미있는 사람 같아.”변백호가 평가했다.양혁수는 혀를 차며 말했다.“그 집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우물쭈물하고 맘에 안 들어.”변백호는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연정훈 씨는 일
예전이라면 조재민은 당연히 양민아의 말을 의심했겠지만 몇 달간의 고문 끝에 정신이 흐려져 생각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그때 그의 시선이 양민아의 배로 향했다.“아이는 괜찮아요?”양민아는 조재민을 의자에 앉히고 그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건강해요.”조재민은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비록 그가 죽는다 해도 조재민의 아들은 남을 것이다.양민아는 독사처럼 치명적이지만 그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엄마가 곁에 있는 한 아이는 반드시 살아남을 터였다.“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양민아가 묻자 조재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냥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요. 아니면...그냥 죽으면 되는 거고.”그는 양민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앞으로 다시 오지 마요.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까지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죠.”양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섬세한 화장 속에서 비웃음이 스며든 눈빛을 보였다.“위층에서 좀 쉬세요. 뭐 좀 가져다드릴게요. 다 드시고 나면 저는 떠날 거예요. 여기 정말 안전하지 않아요.”조재민은 잠시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잠시 후 양민아는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식은 죽을 저어 건넸다.조재민은 죽을 받지 않고 대신 손을 뻗어 양민아의 배를 만지려 했다.“검사했어요. 아들이에요.”그녀가 말했다.조재민의 흐릿한 눈에 희미한 빛이 스치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피곤한 듯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잠결에 팔에 스치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양민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양민아는 주사기를 손에 쥔 채 그의 서늘한 눈빛과 맞섰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