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뭐예요? 내가 여기 참석한 거로 부족하대요?”부승희의 말에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무료해진 부승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지 벌써 얼굴 못 본 지도 며칠 됐어요.”한참 열애 중인 젊은 커플이 한 도시에서 지내면서 며칠 동안 만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양시연은 입을 열려다가 연정훈 옆자리의 이승우를 슬쩍 훑었다.“승우 씨랑 같이 온 거예요?”양시연은 가볍게 물었고 부승희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네. 우리 오빠랑 약속이 있더라고요.”대화하는 사이 반우희는 벌써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더 먹을래요?”양시연의 질문에 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국수가 입맛에 맞네요.”그 뜻인즉 한 그릇 더 원한다는 의미였다.그러자 양시연과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부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우희의 배를 쓰다듬었다.“배에 거지가 들었나? 분명히 비행기 기내식을 먹었을 텐데 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부승희는 배를 조물딱거리다가 또 허리를 쓰다듬었다.간지러워진 반우희는 부승희의 손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승희 씨, 날 건드리지 마요. 간지러워요. 아!”반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양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부승희는 손을 거두더니 반우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우리 우희 씨 속이 꽉 찬 여자네요.”반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가 되어버렸다.‘뭐라는 거예요!’소란에 부승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외침이 반우희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아차린 부승원이 차갑게 말했다.“바로 앞이 장례식장인데 이렇게 떠들썩하게 굴면 어떡해!”그러자 반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부승원을 무시한 채로 몰래 부승희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승희에게 꼭 붙은 반우희는 부승원을 등진 채로 낮게 속삭였다.“변호사님은 하나도 승희 씨 오빠 같지 않아요.”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어디가 다른데요?”“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
양시연은 민지연 같은 철없는 아이에게 더 이상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민수희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연호민의 아내였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평범한 이들의 장례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정이 마련되자마자 조문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가 제사를 마치자 곧이어 양지원도 도착했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해 뒤쪽 휴게실로 안내했다.두 사람 모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고 양석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에 집중해.”연정훈은 떠났고 양시연은 남아 부모님께 차를 따라주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양지원은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그만하고 가서 연정훈 도와줘. 지금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잖아.”양시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뛰어나갔다.그녀가 떠난 뒤 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급히 시선을 피하자 양석진은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결혼한 것뿐인데 양씨 아가씨를 놀라게 해서 본가로 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체면이 있는가 봐.”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누가 놀랐다는 거예요?”“그러면 왜 도망쳤어?”양석진이 되물었는데 양지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무서워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을 뿐이었다. 양석진의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해서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아이고.”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잖아요. 석진 씨는 뭐 하러 온 거에요? 여기서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양석진은 침묵했다.“...”...연씨 가문은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기로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둘째 날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애도의
민수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양시연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항공편 문제로 그들은 바로 갈 수 없었고 연정훈은 오전 비행기를 예약하고 먼저 가서 양시연은 쉬게 하려고 했다.“괜찮아요. 나도 같이 갈 거예요.”양시연은 민수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때때로 밖에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체면을 차려야 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면 며느리가 장례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은 듣기에도 좋지 않다.게다가 만약 장례가 치러지면 양시연은 연정훈과 함께 안팎으로 도와야 한다.연정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가 밝기 전에 평소처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아침이 되어 두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결국 세운행 비행기에 올랐다.점심 전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고 연재혁 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민씨 가문 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병원 복도에 가득 서 있었다.연정훈이 병실에 들어가 상황을 확인하고 나오자 의사는 말했다.“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모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연재혁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민씨 가문 사람 중 몇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양시연과 표세연은 한쪽에 서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오후에 민수희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고 집 안에서는 간간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었다.양시연은 민수희의 병세가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아 의심스러웠고 표세연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이가 많아서 사실 넘어졌다가 겨우 회복되었는데 또 밤새 잠을 안 자고 연정훈 삼촌을 생각하며 정인의 일까지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힘든 걸 못 견디고 있는 거야.”연정훈 삼촌에 대해 양시연은 잘 알지 못했지만 민수희가 고령에 아들을 낳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의 죽음을 겪는 것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시연 두 사람
“나를 조사한다고?”“네. 못하게 하려고요?”연정훈은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했다.“마음대로 조사해.”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사실 양시연은 그렇게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정훈이 자신과 채팅하려고 다른 계정을 만들었다는 고도의 계산과 엉뚱한 발상이 놀라웠을 뿐이었다.양시연이 진지하게 조사하려 하자 연정훈은 개인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모든 계정과 관련된 정보를 솔직히 공개했다. “이메일! 이메일은요?”“세 개 있고 비밀번호는 다 똑같아.”연정훈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자 양시연은 그의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무릎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연정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양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고 더 붙잡으려 할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이건 개인용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이 마우스를 잡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며 직접 가이드를 해줬다.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하지만 반쯤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물었다.“그러면 전에 정훈 씨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이랑 소현주 씨가 관계를 확정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던 거.”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메일 아직 있어요?”“그 이메일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양시연은 실망한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정말 사랑했나 봐요. 그래서 그때의 편지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이메일까지 지운 거겠죠.”연정훈은 양시연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걸로 놀리지 마. 그냥 귀찮아서 정리한 거야.”양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정훈은 그녀가 진심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용히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를 건네며 말했다.“마음대로 해.”“쳇. 누가 궁금하다고 했어요.”양시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연정훈은 그녀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관심 없으면 됐어.
“다시 아니라고 해봐요.”서재에서 양시연은 책상을 향해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정훈 씨, 바로 당신이 엔이잖아요.”연정훈의 손은 아직 책상의 전원 버튼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고 양시연은 다시 켜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난 상태였다.연정훈이 또 변명을 꺼내려는 순간 양시연은 단호한 손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면 오늘 밤 침실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맞아. 나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아!’양시연은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정훈 씨, 정말 뻔뻔하네요.”연정훈은 등을 곧게 세운 채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단지 다른 방식으로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야.”“거짓말하지 마세요.”“...”“결혼 전 당신이 말했던 인생철학이나 도리는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핑계였잖아요. 이건 거의 사기 결혼 수준이죠.”‘정말 나쁜 놈. 다른 계정을 만들어서 결혼하자고 설득하다니.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연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논리와는 상관없이 기세를 세우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위급한 상황에는 위급한 방법이 필요한 법이야. 그때 넌 날 너무 밀어냈잖아. 선택지가 없었다고.”“듣기 싫어요.”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맞은편으로 돌아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냉전 중일 때도 당신 나랑 채팅했잖아요.”“...네가 너무 힘들까 봐.”양시연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를 비꼬았다.“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내가 외롭고 지쳐서 당신한테 개인 사진까지 보낸 거였나요?”연정훈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대답했다.“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양시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찾아 들었다. 마치 벽돌처럼 묵직해 보이는 책을 들어 올린 그녀는 연정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