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짜증 나!’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놓고 멍청하다고 말하자 반우희는 잠이 확 깨었다. 그래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 반격을 시도했다.“그래요. 난 멍청해요! 그래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부승원은 일말의 타격도 없었다.“네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의무는 없어.”“나도 내가 똑똑한 건 아니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변호사님 팀에도 자주 실수하는 인턴 직원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한 식구로 인정해 주셨으면서!”“그 애들은 인서울 법대 출신이야.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데 넌 내세울 게 뭐가 있어?”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그러나 부승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네가 양시연 씨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내가 편의를 봐줘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를 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거지?”반우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승원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인맥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 혼자도 아닌데 왜 나만 뭐라 해요?”“그리고 나도 내 실력으로 쌓은 인맥이지. 아무렇게나 얻은 게 아니라고요!”반우희가 꽤 진심으로 나오자 부승원은 그날 사무실에서 반우희가 뱉았던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얼굴을 더 굳히며 말했다.“넌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 내 팀은 쓸모없는 사람 필요 없으니 정인 그룹 들어가고 싶으면 양시연 씨한테 직접 부탁해!”그리고 몸을 휙 돌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반우희는 살살 눈치를 살폈는데 이번만큼은 부승원이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문고리가 돌려지고 반우희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당황한 나머지 반우희는 한 손으로 외투를 쥐고 있던 부승원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 앞자락에 손을 올렸다.“변호사님!”자기 행동이 너무 빨랐다는 걸 인지한 부승원은 방금 부딪혔던 걸 떠올리며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고개를 숙이니 자기 셔츠 자락을 잡은 반우희가 고
부승원은 새 방으로 잡고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치니 더위가 가셨지만, 짜증 나는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방금 샤워하는 내내 반우희 생각만 해 오히려 더 짜증이 치솟았다.그리고 몇 년 전 어이가 없던 그 사건이 떠올랐다.그때의 반우희는 고작 19살이었는데 승주 사건으로 처음 반우희와 엮기게 되었다. 그 일을 뒤로 하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또 반우희를 만나게 되었다.지금 생각해도 막 스무 살이 되던 녀석이 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승원은 미니 바 앞으로 걸어가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때 그 일을 다시 차근차근 떠올렸다.그날 부승원은 약물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처음 몇 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아주 고분고분 말을 따랐던 것만 기억이 났다.그렇게 새벽이 되고 부승원의 이성은 차차 돌아왔지만 품 안의 사람을 확인하고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뭐가 쓰인 것처럼 그 사람을 탐하고 또 탐했으며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핑계로 밤새 멈추지 않았다.상대는 온밤 시달리다가 지쳐 반항을 멈췄다. 그러다가 힘을 주어 부승원의 어깨를 밀어내며 힘들다고 칭얼거리고 점점 소리를 높였다.부승원은 바로 그 입술에 키스하며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고 품 안으로 가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저돌적으로 몰아붙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과정도, 결말도 참 어이가 없었다.반우희가 약을 먹는 걸 확인하지 않아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갈 뻔했다.그리고 더 말이 되지 않는 건 부승원이 이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쾅.부승원은 컵을 세게 내려놓고 굳은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설마 자신도 연정훈처럼 저급 취미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불쌍한 처지에 놓인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동해 구해준다는 허울로 탐하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방안은 아주 조용했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이런저런 생각으로 자기합리화하려고 했으나 자
이튿날.새벽 종소리가 울리고 민수희의 발인 시간이 되었다.연정훈은 밤새 바삐 움직였고 양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발인 전 양시연이 위층으로 올라가 연호민의 아침을 차려주려는데 집사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옆자리에 같이 있던 표세연이 물었다.“무슨 일이죠?”집사가 대답했다.“양원 그룹 조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러자 표세연이 갑자기 얼굴을 팍 찌푸리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왜 온 거래요?”“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 대표님의 정체를 몰래 추측했다.연정훈의 삼촌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건 두 세력의 다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재민의 가문은 바로 그해 연씨 가문의 경쟁 상대였고 조재민의 형이 사고의 주도자였다. 이 사건으로 바로 사형에 처하고 조씨 가문도 뿌리째 뽑혀 버렸으나 조재민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 다른 친척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지금껏 양원 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며칠 뒤 연정훈도 양원 그룹에서 일을 시작할 걸 떠올리며 양시연은 조금 고민하다가 표세연을 다독이며 말했다.“제가 내려가 볼 게요.”양시연이 곁에 있으니 표세연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그래. 네가 정훈이 좀 말려줘.”“네. 알겠어요.”양시연은 대답하고 홀로 향했다.조재민은 아주 미묘한 시간대에 방문했다. 발인 당일 추모하러 오다니 추모가 목적이 아니라 딴짓을 거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양시연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으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재민은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고 검은 정장을 입은 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에 다가가 섰다.조재민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와 말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조재민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로 끝말을 마쳤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뒤뜰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조재민은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작은 헤프닝이 끝나고
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주지혁이요?”연정훈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본인이 직접 셔츠 자락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휙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양시연의 표정을 살폈다.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왜 이래요!”그러자 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이 몸을 돌려서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뒤로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양혁수한테 질투한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겠어.”양시연이 째려보며 말했다.“그걸 지금 안 거예요?”“양혁수는 그래도 명의상 네 오빠니까 너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시연이 약혼자였던 사람이라고.”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반쯤 돌려 연정훈의 두 볼을 쭉 잡아당겼다.“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봐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이젠 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으니 나도 안심이야.”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도 웃음이 터졌다.농담을 마치고 양시연은 두 손을 연정훈의 목에 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이 정훈 씨 아래 직원이에요?”“그래. 내가 직속 상사야.”“그럼 꼭 조심해요.”양시연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주지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정훈 씨가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주지혁이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곁에 소인배를 둘 필요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려요. 괜히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요.”본인을 걱정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입술에 뽀뽀했다.“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돼?”연정훈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투에서 주지혁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여전히 연정훈의 목에 손을 건 채로 말했다.“정훈 씨가 주지혁을 대처하는 건 아주 간
저녁 7시 30분.그러나 건물은 대낮처럼 환했다. 연정훈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고 양시연은 자꾸 걱정되었다.그렇게 잠시 딴청을 하는데 갑자기 문서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왔다.“이 몇몇 사람은 해고해요. 일하는 데 방해가 돼요.”“...”부승원의 말에 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사람이니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읽었다.“자꾸 연정훈만 생각할 거면 회사 때려치우고 집이나 가요. 그리고 평생 내조만 하면서 살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요.”그때 양시연이 문서를 내려놓고 꽤 진지한 얼굴로 부승원에게 물었다.“양원 그룹 내부 사정이 많이 복잡하나요? 연씨 가문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연정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러나 무표정의 부승원이 비꼬듯 이런 말을 했다.“지금 연정훈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정인 그룹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고 딴청이라니.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양시연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리고 드디어 양시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에 집중했다.저녁 8시. 모두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양시연은 야식을 주문했다.반우희는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양시연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양시연은 반우희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았고 냉큼 과일 주소도 건넸다.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양시연은 반우희에게 오늘 첫날 소감을 물어보려 했으나 부승원이 옆에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어휴. 그래 내 앞길이나 걱정하자고.’반우희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양시연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웃음이 빵 터졌다.그리고 부승원을 향해 이렇게 속닥였다.“시연 언니 옆에 있는 변호사님은 마치...”부승원이 고개를 들었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반우희가 바로 말을 이었다.“왕을 조종하는 섭정 대신 같아요!”“...”‘그래. 내시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양홍두가 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양지원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우희를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라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거액을 선물했다.조용히 지켜보던 표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반우희를 양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어떤 방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실 건가요?”“길일을 정해 정식으로 연회를 열 생각이야.”연정훈이 말했다.‘그렇다면 꽤 정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군.’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당신 어머니께서는 연회를 여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반우희 씨가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벌써 부승원의 부모님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계셔.”‘푸.’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얼마 전 부승원의 어머니가 반우희를 만나러 갔을 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반우희의 배경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연씨 가문에는 딸이 없었고 표세연 역시 특별히 아끼는 후배가 많지 않았다. 만약 반우희가 그녀의 양녀가 된다면 신분이 단숨에 상승할 것이고 이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당신 어머니랑 부승원 씨 어머님이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그래도 꽤 가까운 친구 사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왜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죠?”연정훈은 정곡을 찔렀다.“자신이 비를 맞아봤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비를 맞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예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하는 걸 경험했으니 이제는 그 일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친구란 함께 비를 맞으며 나아가는 거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네요. 보니까 부승원 씨는 반우희 씨에게 진심이던데 당신 어머니 덕분에 둘의 관계가 더 순탄해질 수도 있겠어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와의 인연도 더 단단해질 테고요.”감정적으로 보면 양
별장 거실에 모여 반우희는 가족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주제는 졸부라고 해도 초심을 변하지 말자, 였다.“우린 그래도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해. 지금 너희 너무 사치 부리는 거라고!”그리고 반우희는 동주의 접시에서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뺏어갔다.‘어머. 너무 맛있다.’‘역시 비싼 건 다르네!’반우희가 쩝쩝거리다가 또 한 입 먹으려는데 동준은 아예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아이고. 너무 천박해.’희주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온몸에 각종 액세서리를 걸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벌써 겉멋이 들어버렸다.승주는 계산기를 척 꺼내더니 반우희에게 총재산을 알려줬다.“이 별장의 집값은 456억이고 160억의 현찰과 600억가량의 지분과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반우희가 손을 들어 승주의 말을 잘랐다.“너 지분이 뭔지 알아?”“다 전문가한테 맡기면 돼요.”승주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제 말을 계속 들어주세요.”“그래...”“그 외에도 차고에 세워진 두 차량과 비싼 인테리어, 그리고 창고에 있는 장식품과 식량, 그리고 집사 할아버지의 리스트를 확인했을 때 적어도 200억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반우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 계산했다.그때 희주가 대신 대답을 했다.“1416억이요.”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승주는 동준을 바라보다가 검은색 뿔테를 자신이 고쳐 쓰며 분위기를 잡았다.“1400억가량이 있다고 했을 때, 은행의 가장 낮은 이율로 보아도 매해 20억 이자를 받을 수 있어요.”반우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돈이!’승주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이게 뭘 의미할까요? 우린 눈만 뜨면 600만이 통장에 찍힐 테고 돈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기만 할 거예요!”승주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가식적으로 말했다.“너무 큰 액수라 부담인걸요?”“...”‘정말 말이라도 못하면.’그러나 반우희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지원이 이번엔 너무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부승원은 갑자기 반우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분에 겨운 반우희는 횡설수설하다가 이 말 한마디만을 반복했다.“변호사님, 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뭐가? 대단해?’“정말 너무 믿기지 않아서 미치겠어요.”핸드폰 넘어 반우희는 크고 넓은 별장 창고에 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현찰을 마주하고 있었다.네 사람은 집사의 옆으로 서서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입을 떡 벌렸다.얼마 뒤 핸드폰을 내려 둔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집사의 팔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집사님, 여기 현찰은 총 얼마예요?”“얼마 안 됩니다. 아마 160억쯤 될 겁니다.”반우희는 눈이 텅 비었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얼마 안 되는데... 160억이라고요?”반우희는 지금 자신이 외계어를 듣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고 또다시 물었다.집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이 외에도 600억가량의 자산과 지분이 있으며 잠시 전문가가 직접 방문해 반우희 씨를 위한 양도 계약서를 진행할 겁니다. 양 대표님께서 반우희 씨가 현찰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일부분만 뽑은 겁니다.”“...”‘정말 외계어인가 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네.’반우희는 산더미처럼 현찰을 보다가 그대로 집사를 향해 쓰러졌다.방금 힘이 풀린 승주는 반우희의 몸 위로 쓰러져 있었고 견디지 못한 희주도 승주의 위로 몸을 기댔다.오직 동준만이 침착하게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더니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일부 현찰을 꺼내 찬찬히 살폈다.현찰인 게 확실해지자 동준은 또 빠른 걸음으로 무리로 돌아가 희주의 몸으로 몸을 기댔다.“...”‘꽤 신중한 아이네.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엔 놀라지도 않네.’세 시간 뒤.반우희는 거실 큼지막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위층의 승주가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들려?”동준이 대답했다.“안 들려...”“...”‘안 들리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정말 미쳤어. 말도 안 돼!’반우희는 말도 안 되게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양지원과 양석진이 양시연을 보러 왔다. 그리고 모녀는 어떻게 반우희에게 보답을 할지 상의했다.“그 아가씨 돈을 좋아한다고 들었어.”그건 사실이었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연정훈과 다른 얘기를 하던 양석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돈을 덥석 쥐여 주는 건 너무 정 없지 않겠어?”양지원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건 그래요.”양시연은 양지원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반우희를 위해 기회를 잡았다.“아니에요! 돈이 최고죠. 돈 주면 제일 좋아할걸요.”양지원과 양석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또 얼마나 주는 게 적당할지 고민했다.그러자 양시연이 말했다.“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좋았어. 그건 쉽지.’양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양혁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양시연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지원은 양혁수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다. 이튿날에 전하긴 했으나 변백호와 오테라에서 급한 볼일을 처리하느라 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그리고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양시연은 양혁수가 경인으로 돌아온 줄만 알았다.그러나 양혁수는 양시연의 안부를 묻다가 바로 이런 질문을 했다.“지금 다들 양민아 찾고 있는 거지?”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반우희와 세 동생은 낮잠을 자고 있다가 데리러 온 카니발을 타게 되었다.승주는 좌석에 편히 기대앉아 좌수석의 사람에게 물었다.“집사 할아버지, 저희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집사는 양지원을 도와 부동산 관리를 했었고 양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다. 그리고 이젠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어졌다.반우희의 말에 따르면 척 보아도 친근한 집사 할아버지로 보였다고 한다.“승주 도련님,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승주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도련님? 흐... 소름’승주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두 동생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어깨를 쓸어내렸다.얼마 뒤, 차량은 물 좋고 산 좋은 위치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반우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