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새벽 종소리가 울리고 민수희의 발인 시간이 되었다.연정훈은 밤새 바삐 움직였고 양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발인 전 양시연이 위층으로 올라가 연호민의 아침을 차려주려는데 집사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옆자리에 같이 있던 표세연이 물었다.“무슨 일이죠?”집사가 대답했다.“양원 그룹 조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러자 표세연이 갑자기 얼굴을 팍 찌푸리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왜 온 거래요?”“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 대표님의 정체를 몰래 추측했다.연정훈의 삼촌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건 두 세력의 다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재민의 가문은 바로 그해 연씨 가문의 경쟁 상대였고 조재민의 형이 사고의 주도자였다. 이 사건으로 바로 사형에 처하고 조씨 가문도 뿌리째 뽑혀 버렸으나 조재민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 다른 친척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지금껏 양원 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며칠 뒤 연정훈도 양원 그룹에서 일을 시작할 걸 떠올리며 양시연은 조금 고민하다가 표세연을 다독이며 말했다.“제가 내려가 볼 게요.”양시연이 곁에 있으니 표세연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그래. 네가 정훈이 좀 말려줘.”“네. 알겠어요.”양시연은 대답하고 홀로 향했다.조재민은 아주 미묘한 시간대에 방문했다. 발인 당일 추모하러 오다니 추모가 목적이 아니라 딴짓을 거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양시연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으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재민은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고 검은 정장을 입은 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에 다가가 섰다.조재민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와 말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조재민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로 끝말을 마쳤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뒤뜰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조재민은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작은 헤프닝이 끝나고
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주지혁이요?”연정훈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본인이 직접 셔츠 자락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휙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양시연의 표정을 살폈다.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왜 이래요!”그러자 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이 몸을 돌려서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뒤로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양혁수한테 질투한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겠어.”양시연이 째려보며 말했다.“그걸 지금 안 거예요?”“양혁수는 그래도 명의상 네 오빠니까 너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시연이 약혼자였던 사람이라고.”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반쯤 돌려 연정훈의 두 볼을 쭉 잡아당겼다.“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봐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이젠 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으니 나도 안심이야.”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도 웃음이 터졌다.농담을 마치고 양시연은 두 손을 연정훈의 목에 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이 정훈 씨 아래 직원이에요?”“그래. 내가 직속 상사야.”“그럼 꼭 조심해요.”양시연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주지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정훈 씨가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주지혁이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곁에 소인배를 둘 필요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려요. 괜히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요.”본인을 걱정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입술에 뽀뽀했다.“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돼?”연정훈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투에서 주지혁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여전히 연정훈의 목에 손을 건 채로 말했다.“정훈 씨가 주지혁을 대처하는 건 아주 간
저녁 7시 30분.그러나 건물은 대낮처럼 환했다. 연정훈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고 양시연은 자꾸 걱정되었다.그렇게 잠시 딴청을 하는데 갑자기 문서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왔다.“이 몇몇 사람은 해고해요. 일하는 데 방해가 돼요.”“...”부승원의 말에 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사람이니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읽었다.“자꾸 연정훈만 생각할 거면 회사 때려치우고 집이나 가요. 그리고 평생 내조만 하면서 살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요.”그때 양시연이 문서를 내려놓고 꽤 진지한 얼굴로 부승원에게 물었다.“양원 그룹 내부 사정이 많이 복잡하나요? 연씨 가문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연정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러나 무표정의 부승원이 비꼬듯 이런 말을 했다.“지금 연정훈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정인 그룹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고 딴청이라니.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양시연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리고 드디어 양시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에 집중했다.저녁 8시. 모두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양시연은 야식을 주문했다.반우희는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양시연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양시연은 반우희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았고 냉큼 과일 주소도 건넸다.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양시연은 반우희에게 오늘 첫날 소감을 물어보려 했으나 부승원이 옆에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어휴. 그래 내 앞길이나 걱정하자고.’반우희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양시연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웃음이 빵 터졌다.그리고 부승원을 향해 이렇게 속닥였다.“시연 언니 옆에 있는 변호사님은 마치...”부승원이 고개를 들었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반우희가 바로 말을 이었다.“왕을 조종하는 섭정 대신 같아요!”“...”‘그래. 내시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승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말하는 본새가 애 어른 같았다.“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지금 퇴근해도 막차예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온다고 해도 한참 걸리는데 제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아세요?”양시연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다가 승주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럼 내가 변호사님 연락처 넘겨줄게. 이따가 승주가 전화해 보는 게 어때? 승주가 전화하면 변호사님도 말을 듣지 않겠어?”화면 속 승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좋아요! 내가 해볼게요!”양시연은 부승원의 연락처를 전송하고 통화를 종료했다.그리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그러나 술자리가 있다던 연정훈이 아직도 연락이 없자 양시연은 또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참. 나도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양시연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내려치고 빠르게 탕비실을 나섰다.시간이 늦은 만큼 사무실은 아주 조용했고 공기 중에도 피곤하다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부승원은 늘 그랬듯 아직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바른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승원은 정말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양시연은 왠지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어졌다.그때.부승원의 핸드폰이 울렸다.양시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부승원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양시연이 건넨 번호는 부승원의 개인 연락처였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번호였다.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에 부승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안시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여보세요!”승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원은 깜짝 놀라 펜을 내려두고 물었다.“누구시죠?”진지한 부승원의 목소리에 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그리고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이어졌다.“나 승주예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승주?’“삼촌. 나예요. 나. 승주요!”상대는 서슴지 않고 신분을 밝혔다.“...”핸드폰을 잠시 내려두고 번호를 다시 확인한 부승원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정인 그룹 대표로 있을 때도 연정훈은 이렇게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양시연은 너무 걱정되어 아예 운전해 그곳으로 향했다.양원 그룹 대표들은 눈에 띄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부분 회원제로 운영되는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가졌다.양시연은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내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런데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나란히 나오는 게 보였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연정훈이었고 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진수빈은 양시연을 발견하고 눈치껏 빠져줬다.“사모님이 마중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연정훈은 술을 꽤 많이 마신 건지 두 볼이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양시연을 빤히 바라보던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주변에는 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고 꽤 숨겨진 곳에 있었던 레스토랑이라 양시연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 연정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연정훈의 몸에서 알코올 향이 물씬 나자 양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괜찮아. 많이 마신 거 아니야.”연정훈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목 주변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양시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빨리 차에 타요. 돌아가서 해장국 해줄 테니 먹고 자요.”연정훈은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양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부승원이 직원들 착취하며 퇴근시키지 않았다며?”양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연정훈은 포인트를 정확히 캐치했다.“그럼 출소하자마자 날 데리러 온 거네?”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당연하죠. 정훈 씨가 어디 가서 당하진 않을지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연정훈은 더 활짝 웃어 보이더니 참지 못하고 키스를 하려고 다가왔다.그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연정훈의 입을 가로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지금 밖이에요!”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앞으로 이미지를 위해
양시연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정호덕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연 대표 잡아먹을까 봐 걱정 한 거예요? 아니면 연 대표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까 걱정 한 거예요?”양시연은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방금 회장님께서 우리 남편 인기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그건 방금 양시연 씨를 만나기 전 제 생각이지요. 양시연 씨가 이렇게 미모의 여성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연 대표가 아무리 능력이 좋고 인기가 많다고 해도 집에 미모의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겠습니까?”정호덕의 말에 양시연은 살풋 미소를 터뜨렸다.‘참.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네.’정호덕 회장님은 연정훈의 상사로 연정훈과 호형호제를 한다고 해도 연정훈에게 깎듯이 예의를 차리지는 않았다.그러나 양시연에게는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그리고 양시연은 그 이유가 양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기회가 되면 우리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꼭 오시길 바랍니다.”양시연의 말에 정호덕이 바로 대답했다.“시간만 된다면 얼마든지요.”연정훈은 그제야 입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양시연의 손을 잡고 떠났다.차에 오른 뒤 양시연은 연정훈의 기분이 꽤 좋은 걸 눈치챘다.‘쯧. 유치하긴.’‘어쩐지 아까 차에 오르지 않고 꾸물거리더니. 시간 맞춰 주지혁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구나.’두 사람의 뒤로 정호덕 무리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소를 지운 정호덕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시작했다.“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타고난 팔자는 다 다르지요. 예전에는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가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편히 산다던데 우리 남자들도 다 똑같아요. 연 대표 능력도 좋지만 좋은 처가를 만난 것도 능력이에요.”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조재민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양시연이 시선을 돌리자 주지혁은 바로 헤드 라이터를 꺼버렸다.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주지혁은 운전석에 앉아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았는데 양시연은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차량은 다른 방향에 세워졌고 현재는 각도가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양시연은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빠르게 차를 빼내 검은색 벤츠와 스치듯 지나쳤다.이제 레스토랑 골목을 벗어나자 뒷자리에서 연정훈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양시연은 그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뭐해요?”“양 대표님 운전 실력이 깔끔하네요.”연정훈의 말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운전을 이어갔다.“영광인 줄 알아요. 정훈 씨도 예전처럼 굴었으면 주지혁 씨랑 똑같은 결말이었을 거예요. 언감생심 나랑 결혼할 수 있었겠어요?”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마. 나 술 마셔서 지금 예민하단 말이야.”“예민하면 눈 감고 잠이나 자요.”굳이 말을 걸다니 연정훈도 참 웃겼다.연정훈은 잠이 오지 않았고 계속 꾸역꾸역 양시연에게 주지혁을 만난 기분이 어떤지 인터뷰했다.양시연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있는 동안 대답을 이었다.“기분이요? 보면 짜증 나긴 한데 원망까지는 아니에요.”몇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어 과거의 사소한 일은 이제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하지만...양시연이 다시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다.“그 사람들 한 패거리죠?”“똑똑하네.”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 해도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동하면 한 패거리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정호덕 회장님은 부이사장님이고, 이 회장님은 함께 자리하지 않은 걸 보아 다른 패거리인가 보죠?”“이 회장님은 우리 아버지 대학교 시절 룸메이트야.”‘아, 그렇군.’양시연은 드디어 안심되었다.열심히 분석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다시 주지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제 양시연에게 주지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강남
연정훈이 추파를 던지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두 볼을 꾹꾹 찔렀다.“앞으로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돼요.”양시연이 명령하듯 말하자 연정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마실 수는 있지만 너무 정직하게 주는 대로 받아먹지 말고 가끔은 힘든 척 쉬기도 하란 말이에요.”연정훈은 자세를 바로 세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해봤다.“그럼, 무슨 핑계로 마시지 말까?”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때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임신 준비 중이라고 할까?”“...”양시연은 당황하다가 바로 얼굴을 붉히고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장난하지 말고요!”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술을 마셔 불그스름하진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나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다른 직원이 나한테 이런 이유를 대면 나도 술을 권하기는 어렵거든.”양시연이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언제 동의했어요?”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두 사람은 침대에 풀썩 누웠고 양시연은 숨을 몰아쉬다가 연정훈의 턱을 치켰다.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연정훈의 마음이 읽혔다. 그래서 먼저 연정훈에게 키스했다.입술이 맞닿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잡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양시연과 함께 샤워실로 향했다.정인 그룹.부승원은 가장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섰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회의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그곳으로 걸어가서 보니 다름 아닌 반우희였다.반우희는 큰 박스에 양시연이 저녁에 사준 야식과 간식을 담고 있었다. 허겁지겁 박스에 담으며 또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었다.“내일 친구들이랑 소풍 간다며? 누나가 간식 가지고 갈게. 사람들이 거의 먹지도 않았어.”“먹다 남긴 거 아니야. 그리고 너 2만 원짜리 케이크 먹어본 적 있어? 먹어보고나 말해.”“...”통화
양홍두가 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양지원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우희를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라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거액을 선물했다.조용히 지켜보던 표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반우희를 양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어떤 방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실 건가요?”“길일을 정해 정식으로 연회를 열 생각이야.”연정훈이 말했다.‘그렇다면 꽤 정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군.’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당신 어머니께서는 연회를 여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반우희 씨가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벌써 부승원의 부모님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계셔.”‘푸.’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얼마 전 부승원의 어머니가 반우희를 만나러 갔을 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반우희의 배경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연씨 가문에는 딸이 없었고 표세연 역시 특별히 아끼는 후배가 많지 않았다. 만약 반우희가 그녀의 양녀가 된다면 신분이 단숨에 상승할 것이고 이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당신 어머니랑 부승원 씨 어머님이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그래도 꽤 가까운 친구 사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왜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죠?”연정훈은 정곡을 찔렀다.“자신이 비를 맞아봤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비를 맞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예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하는 걸 경험했으니 이제는 그 일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친구란 함께 비를 맞으며 나아가는 거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네요. 보니까 부승원 씨는 반우희 씨에게 진심이던데 당신 어머니 덕분에 둘의 관계가 더 순탄해질 수도 있겠어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와의 인연도 더 단단해질 테고요.”감정적으로 보면 양
별장 거실에 모여 반우희는 가족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주제는 졸부라고 해도 초심을 변하지 말자, 였다.“우린 그래도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해. 지금 너희 너무 사치 부리는 거라고!”그리고 반우희는 동주의 접시에서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뺏어갔다.‘어머. 너무 맛있다.’‘역시 비싼 건 다르네!’반우희가 쩝쩝거리다가 또 한 입 먹으려는데 동준은 아예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아이고. 너무 천박해.’희주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온몸에 각종 액세서리를 걸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벌써 겉멋이 들어버렸다.승주는 계산기를 척 꺼내더니 반우희에게 총재산을 알려줬다.“이 별장의 집값은 456억이고 160억의 현찰과 600억가량의 지분과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반우희가 손을 들어 승주의 말을 잘랐다.“너 지분이 뭔지 알아?”“다 전문가한테 맡기면 돼요.”승주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제 말을 계속 들어주세요.”“그래...”“그 외에도 차고에 세워진 두 차량과 비싼 인테리어, 그리고 창고에 있는 장식품과 식량, 그리고 집사 할아버지의 리스트를 확인했을 때 적어도 200억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반우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 계산했다.그때 희주가 대신 대답을 했다.“1416억이요.”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승주는 동준을 바라보다가 검은색 뿔테를 자신이 고쳐 쓰며 분위기를 잡았다.“1400억가량이 있다고 했을 때, 은행의 가장 낮은 이율로 보아도 매해 20억 이자를 받을 수 있어요.”반우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돈이!’승주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이게 뭘 의미할까요? 우린 눈만 뜨면 600만이 통장에 찍힐 테고 돈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기만 할 거예요!”승주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가식적으로 말했다.“너무 큰 액수라 부담인걸요?”“...”‘정말 말이라도 못하면.’그러나 반우희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지원이 이번엔 너무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부승원은 갑자기 반우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분에 겨운 반우희는 횡설수설하다가 이 말 한마디만을 반복했다.“변호사님, 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뭐가? 대단해?’“정말 너무 믿기지 않아서 미치겠어요.”핸드폰 넘어 반우희는 크고 넓은 별장 창고에 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현찰을 마주하고 있었다.네 사람은 집사의 옆으로 서서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입을 떡 벌렸다.얼마 뒤 핸드폰을 내려 둔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집사의 팔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집사님, 여기 현찰은 총 얼마예요?”“얼마 안 됩니다. 아마 160억쯤 될 겁니다.”반우희는 눈이 텅 비었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얼마 안 되는데... 160억이라고요?”반우희는 지금 자신이 외계어를 듣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고 또다시 물었다.집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이 외에도 600억가량의 자산과 지분이 있으며 잠시 전문가가 직접 방문해 반우희 씨를 위한 양도 계약서를 진행할 겁니다. 양 대표님께서 반우희 씨가 현찰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일부분만 뽑은 겁니다.”“...”‘정말 외계어인가 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네.’반우희는 산더미처럼 현찰을 보다가 그대로 집사를 향해 쓰러졌다.방금 힘이 풀린 승주는 반우희의 몸 위로 쓰러져 있었고 견디지 못한 희주도 승주의 위로 몸을 기댔다.오직 동준만이 침착하게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더니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일부 현찰을 꺼내 찬찬히 살폈다.현찰인 게 확실해지자 동준은 또 빠른 걸음으로 무리로 돌아가 희주의 몸으로 몸을 기댔다.“...”‘꽤 신중한 아이네.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엔 놀라지도 않네.’세 시간 뒤.반우희는 거실 큼지막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위층의 승주가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들려?”동준이 대답했다.“안 들려...”“...”‘안 들리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정말 미쳤어. 말도 안 돼!’반우희는 말도 안 되게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양지원과 양석진이 양시연을 보러 왔다. 그리고 모녀는 어떻게 반우희에게 보답을 할지 상의했다.“그 아가씨 돈을 좋아한다고 들었어.”그건 사실이었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연정훈과 다른 얘기를 하던 양석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돈을 덥석 쥐여 주는 건 너무 정 없지 않겠어?”양지원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건 그래요.”양시연은 양지원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반우희를 위해 기회를 잡았다.“아니에요! 돈이 최고죠. 돈 주면 제일 좋아할걸요.”양지원과 양석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또 얼마나 주는 게 적당할지 고민했다.그러자 양시연이 말했다.“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좋았어. 그건 쉽지.’양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양혁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양시연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지원은 양혁수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다. 이튿날에 전하긴 했으나 변백호와 오테라에서 급한 볼일을 처리하느라 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그리고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양시연은 양혁수가 경인으로 돌아온 줄만 알았다.그러나 양혁수는 양시연의 안부를 묻다가 바로 이런 질문을 했다.“지금 다들 양민아 찾고 있는 거지?”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반우희와 세 동생은 낮잠을 자고 있다가 데리러 온 카니발을 타게 되었다.승주는 좌석에 편히 기대앉아 좌수석의 사람에게 물었다.“집사 할아버지, 저희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집사는 양지원을 도와 부동산 관리를 했었고 양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다. 그리고 이젠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어졌다.반우희의 말에 따르면 척 보아도 친근한 집사 할아버지로 보였다고 한다.“승주 도련님,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승주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도련님? 흐... 소름’승주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두 동생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어깨를 쓸어내렸다.얼마 뒤, 차량은 물 좋고 산 좋은 위치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반우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