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둔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예의상 ‘괜찮아요’라고 할 법도 한데 반우희는 눈을 반짝이며 바로 차에 올랐다.‘공짜 차! 완전 땡큐지!’“감사합니다! 변호사님!”반우희는 가방을 뒷좌석에 두고 빠르게 좌수석에 올라탔다.이건 송민재 변호사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상사의 차를 탈 때에는 뒷좌석에 앉는 게 실례라는 것 말이다.반우희는 차에 올라 조심스레 문을 닫고 또 부승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휘 저었다.그렇게 차량은 정인 그룹을 빠져나갔다.부승원은 자꾸 백미러를 통해 반우희를 힐끔거렸는데 반우희는 아주 태연하게 각도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등을 기대앉았다.평소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면 아주 차 안을 샅샅이 훑어봤을지도 몰랐다.부승원은 이미 반우희네 집을 여러 번 다녀왔었고 내비게이션도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반우희도 차에 올라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았다.‘정말 다시 봐도 멍청해.’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반우희는 여러 번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려 했으나 부승원의 얼굴이 너무 차가워 보여 하려던 농담을 몇 번이고 삼켰다.그래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반우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부승원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이제 차 안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른기침했다.“아, 죄송해요. 갑자기 웃긴 얘기가 떠올라서 못 참았어요.”그리고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물었다.“변호사님한테 들려드릴까요?”“그럴 필요 없어.”“넵.”‘쳇. 차갑긴.’반우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몸을 좌석에 말아 넣고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차가 멈춰서자 반우희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도, 도착한 거예요?”“그래.”반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저도 모르게 입구에 어린아이들이 있지는 않을까 찾았다
반우희는 부승원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그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뭐지. 이 상황은?’승주는 반우희가 품에 든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서며 물었다.“누나가 말했던 케이크는 다 가져왔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아까는 ‘그냥 받은 음식은 안 먹는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승주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건 질투 나서 그런 것을 못 알아들었어요? 지식인은 원래 질투가 많거든요. 질투할수록 더 교양 있어 보이는 거라고요.”반우희는 어이가 없었다.“...”부승원은 뒤에서 걸으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 희주와 동준은 양옆에 붙어 얌전히 말을 걸었고 승주뿐만 아니라 이 두 아이도 수다스러운 타입이라 대화의 주제가 끊기지 않았다.내내 조용할 틈이 없었고 위층에서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열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승주, 지금 몇 시인데! 좀 조용히 해라!”승주는 고개를 들고 즉시 외쳤다.“알았어요. 귀가 정말 밝으시네요.”부승원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는데 말한 사람은 한 노인인 것을 보고 부승원은 침묵했다.“...”노인은 승주의 태도에 익숙한 듯 창문을 덜컥 닫아버렸다.승주는 부승원에게 약간 미안한 듯 웃으며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노인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암시하듯 눈짓을 보냈고 부승원은 별말 없이 끄덕이며 그의 행동에 동조했다.앞쪽에서 반우희는 이상하게 생각했다.‘부승원 씨가 왜 이렇게 승주에게 친절하지? 승주가 사랑스러운가?’그들은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반우희는 부승원을 대체 어떤 걸로 대접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천 원짜리 레몬 토닉워터가 한 잔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부 삼촌, 편하게 앉으세요.”승주는 부승원을 맞이하며 레몬워터를 들고 탁자 근처로 갔고 승주는 전혀 거리낌 없이 레몬워터를 즉석에서 뜯어 주전자에 전부 부어버렸다.부승원은 침묵했다.“...”그 주전자는 아마 차를 끓이는 주전자였던 것
부승원은 바로 확답하지 않았고 승주와 희주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어색한 기운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결국 부승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길이 많이 안 겹쳐.”희주가 재빠르게 물었다.“부 삼촌은 어디에 사세요?”부승원이 간략히 주소를 말하자 희주는 곧바로 대꾸했다.“결국 경인에 사시는 거잖아요.”“응.”“그럼 같은 경인인데 같은 방향 맞잖아요!”승주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고 부승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들에게는 ‘같은 방향’이라는 개념이 참 신선한 해석이었다.그때 짐 정리를 끝낸 반우희가 셋이서 몰래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왔고 그녀는 두 꼬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그만해. 이미 늦었으니 부 변호사님 보내드려야지.”승주는 반우희를 보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누나는 옆에서 놀고 있어요. 우리는 부 삼촌과 이야기 좀 더 나눌 거니까.”부승원은 침묵했다.“...”‘이 집에서 누가 진짜 어른인지 모르겠군.’반우희는 부승원의 난처한 얼굴을 알아차렸고 시간도 너무 늦었기에 직접 승주와 희주를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다.“가서 자. 내일 토요일에 모임 있지 않아?”승주는 매우 초조해하며 반우희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려고 했다.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움직이며 그저 이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반우희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는 그들의 고집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먼저 부승원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차는 멀리 주차되어 있었고 만약 반우희가 배웅한다면 그녀는 다시 이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와야 했다. 그것을 생각하자 부승원은 뒤돌아 반우희를 한 번 보며 말했다.“여기 있어. 난 혼자 갈게.”하지만 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따라나설 기세였다. 부승원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도 급히 멈춰 서며 그의 등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문 닫고 얼른
연정훈은 양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끔은 양시연을 든든히 지원하며 그녀가 정인 관리에 빠르게 익숙해지도록 도왔다. 부부는 바쁘지만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겨울이 들어선 뒤 양시연은 바쁜 일정을 보내며 반 달 동안이나 양씨 가문에 들르지 못했다.어느 날 저녁 그녀는 평소처럼 강남시티로 돌아와 남편 연정훈과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여 아주머니에게서 양홍두가 집에서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현재 양씨 가문에는 양홍두와 양지원만 함께 살고 있었고 양시연이 기억하기로 양홍두는 양지원에게 심하게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양시연은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몇 마디를 속삭였고 그 말을 듣고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혼인 신고요?”집사는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아예 저녁도 안 드셨어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그럼 우리 엄마는요?”집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이다가 말했다.“짐작이 가시죠?”“분명 저녁은 드셨겠죠.”집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장님께서 화를 내셔서 안 드시니까 큰아가씨가 음식을 자기 방으로 몽땅 가져가서 영화 보면서 다 드셨답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정말 양지원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집사에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양홍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이 돌아온 목적은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양시연은 음식을 들고 양홍두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양홍두는 대나무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었고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양홍두는 눈을 뜨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왔구나.”양시연은 음식을 내려놓으며 서둘러 양홍두를 부축했다.“여 아주머니가 말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양홍두는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양시연이 양홍두의 서재에서 나올 때 가지고 들어갔던 그릇은 이미 모두 비어 있었고 양지원의 방 앞을 지나자 양지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음식 뚜껑을 열어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정말로 음식을 안 먹는 줄 알았는데.’양시연은 양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진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양시연은 음식을 가정부에게 맡기고는 양지원과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때 웨딩드레스를 남겨둔 게 다행이에요.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그들은 문을 닫고 이야기하며 분위기가 한층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양지원은 숄을 걸치고 소파 옆에 앉아 차를 마시며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었고 양시연은 다가가서 물었다.“아빠가 어떻게 프러포즈 했어요?”양지원은 잠시 말없이 웃고 손을 들어 양시연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냈다.“프러포즈? 우리가 너희들처럼 어린애들인 줄 알아?”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결혼해 달라는 말이 없었어요?”양지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없었어. 석진 씨가 결혼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괜찮겠다고 했어.”양시연은 놀라며 대답했다.“정말요? 나는 엄마가 결혼식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름다운 얼굴에 시간이 쌓아온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어떤 말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양지원은 다소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석진의 흰머리 한 올이 그녀의 모든 망설임을 씻어버렸고 반생을 자제해온 양지원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죠.”그녀는 소파에 기대며 턱을 괴고 말했다.“저는 그런 엄청난 남자에게 몇십 년 동안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양지원은 양시연을 한 번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양시연은 대답했다.“그건 다르죠. 정훈 씨는 아빠처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 자리에 오른
“만약 그분들이 둘째를 낳으면 네가 사랑을 덜 받게 되면 어떡해?”양시연은 어이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양시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연정훈의 느슨해진 표정과 눈가에 번지는 웃음을 보고서야 그의 속뜻을 깨달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참지 못하고 연정훈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정훈 씨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곁눈질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너무 예민하구나?”양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그에게 몸을 기울여 말했다.“당신 연기가 너무 좋아서 그렇죠. 당신이 반대한다고 생각해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빠의 행동이 정훈 씨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했어요.”연정훈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속 좁네.”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말했다.“알겠어요. 내가 오해했네요. 사과할게요.”연정훈은 콧방귀를 뀌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됐어. 이제 얘기하지 마. 기분이 안 좋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석으로 가서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삐지지 말고 둘째 얘기를 해볼까요?”연정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둘째 얘기를 왜 해? 첫째도 없잖아.”“아이고.”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전부 저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요?”연정훈은 의자를 조금 눕히며 한 손을 머리 뒤에 놓고 말했다.“내가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했어.”“힘쓴다고 다 잘한 거는 아니죠. 밭에서 곡식이 자라지 않으면 씨앗이 잘못된 걸 수도 있잖아요.”양시연은 그를 응수하며 말하자 연정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말투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에 살짝 민망해지며 방금 자신이 한 말이 꽤 세게 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연정훈의 품에 엎드리며 말했다.“어쨌든 밭에는 문제가 없어요.”
양원 그룹 작은 회의실에서 고위층의 작은 회의가 막 끝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연정훈은 양시연의 전화를 받았다.“검진을 하자고?”“네.”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진지하게 말했다.“우리는 지금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멈추고 투덜거렸다.“우리 꽤 오랫동안 피임을 안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연정훈은 이 일에 대해 사실 운에 맡기는 편이었다. 결혼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고 큰 문제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임신을 못 하고 있다면 땅과 씨앗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아이에 대해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연정훈은 매우 기뻤다.그녀와 함께 아이를 갖는 것은 상상만 해도 좋은 일이었다.“알았어. 언제 갈 거야?”“모레요. 마침 토요일이에요.”“좋아. 그날로 하자.”검사받는 일에 대해 상의를 마친 후 양시연은 그에게 바쁘지는 않은 지 방금 전에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정훈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모두 양시연에게 보고했다.서로 감정이 깊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도 얘기하고 싶어진다.휴식 시간이 다가오자 양시연은 책상에 몸을 기대고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연정훈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부승원 씨는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네가 데려온 사람인데 뒤에서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연정훈은 반박했다.“당신 친구 정말 내 체면을 조금도 안 챙겨줘요. 아니. 당신 체면을 안 챙겨주는 거죠.”연정훈이 말했다.“어제 퇴근할 때 나한테 너를 잘 가르치라고 하던데.”“네? 뭐라고요?”양시연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부승원이 말하길...”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갑자기 질문했다.“너 자꾸 내 생각을 하는 거 아니야? 고의로 부승원에게 들키고 말이야.”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놀라서 대답했다.“아니에요.”“네가 자꾸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만 보고 있다고 하던데?”양시연은 손을 털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작은 일까지 말해요?”‘진짜 초등학교 때 담
“부 변호사께서 원래 우희 씨와 함께 병원에 가려고 했어요?”양시연이 시험 삼아 물었다.반우희는 ‘아이구’하며 한숨을 쉬고 답했다.“승주가 어떻게 부 변호사랑... 아니 부 대표님과 친해는지 모르겠어요. 승주가 꼭 대표님을 자신의 축구 경기 보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경기는 오후에 있고 저는 동준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승주가 부 대표님을 일찍 오시라고 고집을 부려서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승주는 날씨가 추워서 부대표님이 우희 씨랑 동준이를 병원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처뜨리며 한숨을 쉬었고 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반우희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부 대표님이 응답했어요?”이 말이 나오자 반우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께서 승주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그건 아닐 거야.’“제가 부 대표님한테 말해 볼게요.”반우희는 준비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양시연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왜 그래요?”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갑자기 생각났는데 토요일에 일이 생겨서 병원에 갈 수 없겠어요. 우희 씨는 부승원 씨과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네?”반우희는 실망한 듯 말했다.“알겠어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다녀와요. 힘내요.”반우희는 팔을 늘어뜨리며 마치 좀비처럼 걸어갔고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야 큰일 날 뻔했다.’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부승원은 아이에게는 친절한데 반우희에게만 까칠한 성격이 이상하다고 불평했다.‘쳇. 이러고도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다니.’...토요일 오전 연정훈은 갑자기 일이 생겨 병원에 먼저 가기로 했지만 양시연은 그에게 나중에 오라고 말했다.양시연이 선택한 병원은 경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개인 병원으로 정인의 기업에 속한 곳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비서만 예약을 맡기고 원장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이미 병원의 서비스가 뛰어나
양홍두가 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양지원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우희를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라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거액을 선물했다.조용히 지켜보던 표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반우희를 양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어떤 방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실 건가요?”“길일을 정해 정식으로 연회를 열 생각이야.”연정훈이 말했다.‘그렇다면 꽤 정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군.’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당신 어머니께서는 연회를 여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반우희 씨가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벌써 부승원의 부모님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계셔.”‘푸.’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얼마 전 부승원의 어머니가 반우희를 만나러 갔을 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반우희의 배경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연씨 가문에는 딸이 없었고 표세연 역시 특별히 아끼는 후배가 많지 않았다. 만약 반우희가 그녀의 양녀가 된다면 신분이 단숨에 상승할 것이고 이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당신 어머니랑 부승원 씨 어머님이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그래도 꽤 가까운 친구 사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왜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죠?”연정훈은 정곡을 찔렀다.“자신이 비를 맞아봤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비를 맞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예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하는 걸 경험했으니 이제는 그 일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친구란 함께 비를 맞으며 나아가는 거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네요. 보니까 부승원 씨는 반우희 씨에게 진심이던데 당신 어머니 덕분에 둘의 관계가 더 순탄해질 수도 있겠어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와의 인연도 더 단단해질 테고요.”감정적으로 보면 양
별장 거실에 모여 반우희는 가족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주제는 졸부라고 해도 초심을 변하지 말자, 였다.“우린 그래도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해. 지금 너희 너무 사치 부리는 거라고!”그리고 반우희는 동주의 접시에서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뺏어갔다.‘어머. 너무 맛있다.’‘역시 비싼 건 다르네!’반우희가 쩝쩝거리다가 또 한 입 먹으려는데 동준은 아예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아이고. 너무 천박해.’희주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온몸에 각종 액세서리를 걸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벌써 겉멋이 들어버렸다.승주는 계산기를 척 꺼내더니 반우희에게 총재산을 알려줬다.“이 별장의 집값은 456억이고 160억의 현찰과 600억가량의 지분과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반우희가 손을 들어 승주의 말을 잘랐다.“너 지분이 뭔지 알아?”“다 전문가한테 맡기면 돼요.”승주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제 말을 계속 들어주세요.”“그래...”“그 외에도 차고에 세워진 두 차량과 비싼 인테리어, 그리고 창고에 있는 장식품과 식량, 그리고 집사 할아버지의 리스트를 확인했을 때 적어도 200억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반우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 계산했다.그때 희주가 대신 대답을 했다.“1416억이요.”반우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승주는 동준을 바라보다가 검은색 뿔테를 자신이 고쳐 쓰며 분위기를 잡았다.“1400억가량이 있다고 했을 때, 은행의 가장 낮은 이율로 보아도 매해 20억 이자를 받을 수 있어요.”반우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돈이!’승주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이게 뭘 의미할까요? 우린 눈만 뜨면 600만이 통장에 찍힐 테고 돈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기만 할 거예요!”승주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가식적으로 말했다.“너무 큰 액수라 부담인걸요?”“...”‘정말 말이라도 못하면.’그러나 반우희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지원이 이번엔 너무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부승원은 갑자기 반우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흥분에 겨운 반우희는 횡설수설하다가 이 말 한마디만을 반복했다.“변호사님, 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뭐가? 대단해?’“정말 너무 믿기지 않아서 미치겠어요.”핸드폰 넘어 반우희는 크고 넓은 별장 창고에 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현찰을 마주하고 있었다.네 사람은 집사의 옆으로 서서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입을 떡 벌렸다.얼마 뒤 핸드폰을 내려 둔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집사의 팔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집사님, 여기 현찰은 총 얼마예요?”“얼마 안 됩니다. 아마 160억쯤 될 겁니다.”반우희는 눈이 텅 비었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얼마 안 되는데... 160억이라고요?”반우희는 지금 자신이 외계어를 듣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고 또다시 물었다.집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이 외에도 600억가량의 자산과 지분이 있으며 잠시 전문가가 직접 방문해 반우희 씨를 위한 양도 계약서를 진행할 겁니다. 양 대표님께서 반우희 씨가 현찰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일부분만 뽑은 겁니다.”“...”‘정말 외계어인가 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네.’반우희는 산더미처럼 현찰을 보다가 그대로 집사를 향해 쓰러졌다.방금 힘이 풀린 승주는 반우희의 몸 위로 쓰러져 있었고 견디지 못한 희주도 승주의 위로 몸을 기댔다.오직 동준만이 침착하게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더니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일부 현찰을 꺼내 찬찬히 살폈다.현찰인 게 확실해지자 동준은 또 빠른 걸음으로 무리로 돌아가 희주의 몸으로 몸을 기댔다.“...”‘꽤 신중한 아이네.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엔 놀라지도 않네.’세 시간 뒤.반우희는 거실 큼지막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위층의 승주가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들려?”동준이 대답했다.“안 들려...”“...”‘안 들리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정말 미쳤어. 말도 안 돼!’반우희는 말도 안 되게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양지원과 양석진이 양시연을 보러 왔다. 그리고 모녀는 어떻게 반우희에게 보답을 할지 상의했다.“그 아가씨 돈을 좋아한다고 들었어.”그건 사실이었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연정훈과 다른 얘기를 하던 양석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돈을 덥석 쥐여 주는 건 너무 정 없지 않겠어?”양지원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건 그래요.”양시연은 양지원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반우희를 위해 기회를 잡았다.“아니에요! 돈이 최고죠. 돈 주면 제일 좋아할걸요.”양지원과 양석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또 얼마나 주는 게 적당할지 고민했다.그러자 양시연이 말했다.“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좋았어. 그건 쉽지.’양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양혁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양시연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지원은 양혁수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다. 이튿날에 전하긴 했으나 변백호와 오테라에서 급한 볼일을 처리하느라 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그리고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양시연은 양혁수가 경인으로 돌아온 줄만 알았다.그러나 양혁수는 양시연의 안부를 묻다가 바로 이런 질문을 했다.“지금 다들 양민아 찾고 있는 거지?”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반우희와 세 동생은 낮잠을 자고 있다가 데리러 온 카니발을 타게 되었다.승주는 좌석에 편히 기대앉아 좌수석의 사람에게 물었다.“집사 할아버지, 저희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집사는 양지원을 도와 부동산 관리를 했었고 양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다. 그리고 이젠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어졌다.반우희의 말에 따르면 척 보아도 친근한 집사 할아버지로 보였다고 한다.“승주 도련님,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승주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도련님? 흐... 소름’승주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두 동생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어깨를 쓸어내렸다.얼마 뒤, 차량은 물 좋고 산 좋은 위치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반우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