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짜증 나!’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놓고 멍청하다고 말하자 반우희는 잠이 확 깨었다. 그래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 반격을 시도했다.“그래요. 난 멍청해요! 그래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부승원은 일말의 타격도 없었다.“네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의무는 없어.”“나도 내가 똑똑한 건 아니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변호사님 팀에도 자주 실수하는 인턴 직원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한 식구로 인정해 주셨으면서!”“그 애들은 인서울 법대 출신이야.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데 넌 내세울 게 뭐가 있어?”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그러나 부승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네가 양시연 씨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내가 편의를 봐줘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를 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거지?”반우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승원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인맥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 혼자도 아닌데 왜 나만 뭐라 해요?”“그리고 나도 내 실력으로 쌓은 인맥이지. 아무렇게나 얻은 게 아니라고요!”반우희가 꽤 진심으로 나오자 부승원은 그날 사무실에서 반우희가 뱉았던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얼굴을 더 굳히며 말했다.“넌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 내 팀은 쓸모없는 사람 필요 없으니 정인 그룹 들어가고 싶으면 양시연 씨한테 직접 부탁해!”그리고 몸을 휙 돌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반우희는 살살 눈치를 살폈는데 이번만큼은 부승원이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문고리가 돌려지고 반우희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당황한 나머지 반우희는 한 손으로 외투를 쥐고 있던 부승원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 앞자락에 손을 올렸다.“변호사님!”자기 행동이 너무 빨랐다는 걸 인지한 부승원은 방금 부딪혔던 걸 떠올리며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고개를 숙이니 자기 셔츠 자락을 잡은 반우희가 고
부승원은 새 방으로 잡고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치니 더위가 가셨지만, 짜증 나는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방금 샤워하는 내내 반우희 생각만 해 오히려 더 짜증이 치솟았다.그리고 몇 년 전 어이가 없던 그 사건이 떠올랐다.그때의 반우희는 고작 19살이었는데 승주 사건으로 처음 반우희와 엮기게 되었다. 그 일을 뒤로 하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또 반우희를 만나게 되었다.지금 생각해도 막 스무 살이 되던 녀석이 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승원은 미니 바 앞으로 걸어가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때 그 일을 다시 차근차근 떠올렸다.그날 부승원은 약물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처음 몇 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아주 고분고분 말을 따랐던 것만 기억이 났다.그렇게 새벽이 되고 부승원의 이성은 차차 돌아왔지만 품 안의 사람을 확인하고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뭐가 쓰인 것처럼 그 사람을 탐하고 또 탐했으며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핑계로 밤새 멈추지 않았다.상대는 온밤 시달리다가 지쳐 반항을 멈췄다. 그러다가 힘을 주어 부승원의 어깨를 밀어내며 힘들다고 칭얼거리고 점점 소리를 높였다.부승원은 바로 그 입술에 키스하며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고 품 안으로 가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저돌적으로 몰아붙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과정도, 결말도 참 어이가 없었다.반우희가 약을 먹는 걸 확인하지 않아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갈 뻔했다.그리고 더 말이 되지 않는 건 부승원이 이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쾅.부승원은 컵을 세게 내려놓고 굳은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설마 자신도 연정훈처럼 저급 취미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불쌍한 처지에 놓인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동해 구해준다는 허울로 탐하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방안은 아주 조용했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이런저런 생각으로 자기합리화하려고 했으나 자
이튿날.새벽 종소리가 울리고 민수희의 발인 시간이 되었다.연정훈은 밤새 바삐 움직였고 양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발인 전 양시연이 위층으로 올라가 연호민의 아침을 차려주려는데 집사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옆자리에 같이 있던 표세연이 물었다.“무슨 일이죠?”집사가 대답했다.“양원 그룹 조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러자 표세연이 갑자기 얼굴을 팍 찌푸리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왜 온 거래요?”“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 대표님의 정체를 몰래 추측했다.연정훈의 삼촌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건 두 세력의 다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재민의 가문은 바로 그해 연씨 가문의 경쟁 상대였고 조재민의 형이 사고의 주도자였다. 이 사건으로 바로 사형에 처하고 조씨 가문도 뿌리째 뽑혀 버렸으나 조재민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 다른 친척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지금껏 양원 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며칠 뒤 연정훈도 양원 그룹에서 일을 시작할 걸 떠올리며 양시연은 조금 고민하다가 표세연을 다독이며 말했다.“제가 내려가 볼 게요.”양시연이 곁에 있으니 표세연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그래. 네가 정훈이 좀 말려줘.”“네. 알겠어요.”양시연은 대답하고 홀로 향했다.조재민은 아주 미묘한 시간대에 방문했다. 발인 당일 추모하러 오다니 추모가 목적이 아니라 딴짓을 거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양시연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으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재민은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고 검은 정장을 입은 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에 다가가 섰다.조재민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와 말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조재민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로 끝말을 마쳤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뒤뜰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조재민은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작은 헤프닝이 끝나고
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주지혁이요?”연정훈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본인이 직접 셔츠 자락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휙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양시연의 표정을 살폈다.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왜 이래요!”그러자 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이 몸을 돌려서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뒤로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양혁수한테 질투한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겠어.”양시연이 째려보며 말했다.“그걸 지금 안 거예요?”“양혁수는 그래도 명의상 네 오빠니까 너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시연이 약혼자였던 사람이라고.”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반쯤 돌려 연정훈의 두 볼을 쭉 잡아당겼다.“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봐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이젠 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으니 나도 안심이야.”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도 웃음이 터졌다.농담을 마치고 양시연은 두 손을 연정훈의 목에 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이 정훈 씨 아래 직원이에요?”“그래. 내가 직속 상사야.”“그럼 꼭 조심해요.”양시연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주지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정훈 씨가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주지혁이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곁에 소인배를 둘 필요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려요. 괜히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요.”본인을 걱정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입술에 뽀뽀했다.“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돼?”연정훈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투에서 주지혁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여전히 연정훈의 목에 손을 건 채로 말했다.“정훈 씨가 주지혁을 대처하는 건 아주 간
저녁 7시 30분.그러나 건물은 대낮처럼 환했다. 연정훈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고 양시연은 자꾸 걱정되었다.그렇게 잠시 딴청을 하는데 갑자기 문서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왔다.“이 몇몇 사람은 해고해요. 일하는 데 방해가 돼요.”“...”부승원의 말에 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사람이니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읽었다.“자꾸 연정훈만 생각할 거면 회사 때려치우고 집이나 가요. 그리고 평생 내조만 하면서 살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요.”그때 양시연이 문서를 내려놓고 꽤 진지한 얼굴로 부승원에게 물었다.“양원 그룹 내부 사정이 많이 복잡하나요? 연씨 가문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연정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러나 무표정의 부승원이 비꼬듯 이런 말을 했다.“지금 연정훈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정인 그룹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고 딴청이라니.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양시연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리고 드디어 양시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에 집중했다.저녁 8시. 모두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양시연은 야식을 주문했다.반우희는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양시연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양시연은 반우희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았고 냉큼 과일 주소도 건넸다.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양시연은 반우희에게 오늘 첫날 소감을 물어보려 했으나 부승원이 옆에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어휴. 그래 내 앞길이나 걱정하자고.’반우희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양시연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웃음이 빵 터졌다.그리고 부승원을 향해 이렇게 속닥였다.“시연 언니 옆에 있는 변호사님은 마치...”부승원이 고개를 들었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반우희가 바로 말을 이었다.“왕을 조종하는 섭정 대신 같아요!”“...”‘그래. 내시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승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말하는 본새가 애 어른 같았다.“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지금 퇴근해도 막차예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온다고 해도 한참 걸리는데 제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아세요?”양시연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다가 승주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럼 내가 변호사님 연락처 넘겨줄게. 이따가 승주가 전화해 보는 게 어때? 승주가 전화하면 변호사님도 말을 듣지 않겠어?”화면 속 승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좋아요! 내가 해볼게요!”양시연은 부승원의 연락처를 전송하고 통화를 종료했다.그리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그러나 술자리가 있다던 연정훈이 아직도 연락이 없자 양시연은 또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참. 나도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양시연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내려치고 빠르게 탕비실을 나섰다.시간이 늦은 만큼 사무실은 아주 조용했고 공기 중에도 피곤하다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부승원은 늘 그랬듯 아직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바른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승원은 정말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양시연은 왠지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어졌다.그때.부승원의 핸드폰이 울렸다.양시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부승원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양시연이 건넨 번호는 부승원의 개인 연락처였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번호였다.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에 부승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안시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여보세요!”승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원은 깜짝 놀라 펜을 내려두고 물었다.“누구시죠?”진지한 부승원의 목소리에 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그리고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이어졌다.“나 승주예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승주?’“삼촌. 나예요. 나. 승주요!”상대는 서슴지 않고 신분을 밝혔다.“...”핸드폰을 잠시 내려두고 번호를 다시 확인한 부승원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정인 그룹 대표로 있을 때도 연정훈은 이렇게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양시연은 너무 걱정되어 아예 운전해 그곳으로 향했다.양원 그룹 대표들은 눈에 띄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부분 회원제로 운영되는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가졌다.양시연은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내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런데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나란히 나오는 게 보였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연정훈이었고 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진수빈은 양시연을 발견하고 눈치껏 빠져줬다.“사모님이 마중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연정훈은 술을 꽤 많이 마신 건지 두 볼이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양시연을 빤히 바라보던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주변에는 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고 꽤 숨겨진 곳에 있었던 레스토랑이라 양시연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 연정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연정훈의 몸에서 알코올 향이 물씬 나자 양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괜찮아. 많이 마신 거 아니야.”연정훈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목 주변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양시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빨리 차에 타요. 돌아가서 해장국 해줄 테니 먹고 자요.”연정훈은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양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부승원이 직원들 착취하며 퇴근시키지 않았다며?”양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연정훈은 포인트를 정확히 캐치했다.“그럼 출소하자마자 날 데리러 온 거네?”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당연하죠. 정훈 씨가 어디 가서 당하진 않을지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연정훈은 더 활짝 웃어 보이더니 참지 못하고 키스를 하려고 다가왔다.그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연정훈의 입을 가로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지금 밖이에요!”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앞으로 이미지를 위해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양지원이 집에 있는 탓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화서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워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그녀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양지원에게 밥그릇을 건넸다.변여름은 젓가락을 가만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식탁에 앉은 양혁수는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양지원이 눈빛으로 놀려대지 않도록 일부러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양지원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일부러 찾아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오성호 문제로 힘들어할 아들이 걱정돼서였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오랜 세월 동안 양혁수는 한강시에 홀로 있었고 양지원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를 소개해 줬지만 단 한 번도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그녀에게 소중한 딸이었고 양혁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만약 연정훈이 없었다면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하늘의 장난일 뿐이었다.그러던 중 나타난 변여름은 친한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양혁수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는 기뻤지만 양혁수가 또다시 그 기회를 흘려보낼까 걱정스러웠다.두 사람 사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혁수야.”“네?”양혁수가 고개를 들었다.“게살 좀 발라줘.”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갑자기?’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부탁들을 곧잘 들어주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살을 발라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집에서 식사할 때면 새우나 게 같은 음식은 늘 손질된 상태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고 도구를 들었다.변여름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능숙했고 그의 손끝에서 게 껍데기는 깔끔
사실 양혁수는 변여름이 허예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차 안에서 심심했던 그는 무심코 몇 마디 물었고 변여름은 처음에는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질문이 계속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오빠 혹시 허예나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어떤 스타일?”“착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양혁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렸다.변여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여름이보다 더 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변여름은 순간 멍해졌다.자신이 착하거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혁수는 그녀를 ‘우리 여름이’라 불렀다. 그 순간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변여름이 얼굴을 숙여 식어가는 열기를 숨기자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질투쟁이.”그는 혀를 찼다.“내가 허예나랑 같이 지낸 적도 없는데 걔가 착하고 여성스럽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착하긴...너랑 붙어 다니며 사기나 치고 말 몇 마디로 사람 현혹해서 네 돈까지 빼갔잖아.”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허예나 씨는 사람을 말로 속이거나 현혹하지 않아요. 언제나 진실만 말해요.”허예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기분 좋게 집에 도착한 그는 마치 익숙한 일인 양 가정부 앞에서 자연스럽게 변여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쪽에서 일부러 낸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양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장난기 어린 양지원의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양지원은 그들의 손을 흘긋 본 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돌아왔구나?”양혁수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거기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신발 끈 풀렸네.’변여름은 빨대를 문 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는 양혁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양혁수가 한쪽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려 하자 변여름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이쪽도 풀렸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신발 끈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이젠 완전히 맛 들였나? 나 부려 먹는 재미라도 붙였나 보지?’그는 다른 쪽 신발 끈도 풀어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그가 일어서자 변여름은 곧바로 그에게 레몬티를 건네며 말했다.“오빠, 날씨 추워요. 오빠도 좀 마셔요.”양혁수는 빨대를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기대어 담담히 말했다.“너희 집에 전화했어. 설날에 안 간다고.”변여름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양혁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어차피 너희 집은 설날 크게 챙기지도 않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어.”그는 늘 핵심을 돌려 말했고 변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걸 싫어했다.그녀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왜?”변여름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오빠, 나를 한강시에 데려가 줄 거예요?”양혁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고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나와 같이 한강시에 가서 설 보내고 싶어?”“...”변여름은 드물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끝내 표정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손을 들어 그녀의 두 볼을 잡고 좌우로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강시에 안 데려가면 널 여기 두고 가야 하잖아. 근데 너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데. 또 한강시까지 쫓아와서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변여름은 예전에도 세 번 미래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첫 번째는 그가 진실을 알기 전날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고 두 번째는 그가 멕하든을 떠나던 날 비행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