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소한 공간 속에서 안시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누군가를 넘본 적 없어.”주지혁이 계속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지혁은 무척 후회했다. 안시연을 지나치게 압박한 탓에 남 좋은 일만 했으니 말이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주지혁은 그녀를 부르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저번에는 내가 심했어. 내가 사과할게.”안시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주지혁은 계속해 말했다.“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3년간 만난 정이 있잖아. 난 예전부터 시연 씨를 내 아내로 생각했었어. 난 정말로 시연 씨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이 안 가져도 괜찮아. 나도 더는 부담 주지 않을게. 그리고 외할머니를 데리고 경인을 떠나도 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아. 내가 준비해 줄게.”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를 보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숨을 내쉬며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유럽은?”“당연히 되지!”주지혁이 기쁜 목소리로 단숨에 승낙했다.안시연은 눈을 감은 뒤 코웃음치면서 일침을 가했다.“주지혁 씨, 쓸데없이 힘 빼지 마.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해외로 보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라니,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경인을 떠난다면 주지혁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시연 씨, 그...”“자꾸 시연 씨라고 부르지 마. 지혁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역겨워서 토 나올 정도니까.”안시연은 원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는데 최근 들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더욱더 원통해서 말투가 사나워졌다.“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통화 녹음본 조이현 씨한테 보낼 거니까. 조이현 씨 임신했다면서? 재벌 집 딸이랑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혁 씨 꿈이 부서질까 봐 두렵지 않아?”주지혁은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
안시연은 이틀 동안 편히 지냈다. 연정훈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잡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물론 이런 편안한 생활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자신은 멋대로 서로가 정해놓은 관계를 벗어났으니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연아?”외할머니의 부름에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잘라놓은 사과를 그녀에게 건넸다.최미란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서 시연에게 먹였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아닌데요? 저 살쪘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애교스럽게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최미란은 웃었다.옆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했다.“어르신,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효도하는 손녀가 있으니 말이에요.”최미란은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었고 그 바람에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도 자기 손녀를 칭찬했다.그 아주머니는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정말 얼굴도 예쁘고 복도 많네요. 재벌 집 딸처럼 보여요.”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그... 양지원 씨 같아요!”양지원은 이 나라 최고의 갑부였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칭찬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최미란의 눈빛을 보았다.그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줄로 알고 서둘러 물었다.“외할머니, 왜 그러세요?”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최미란이 또 발작한 줄로 알고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괜찮아, 괜찮아.”최미란은 정신을 차린 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어디 아프세요?”안시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최미란은 고개를 저었다.“어젯밤에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상황을 보더니 말을 아꼈다.안시연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류를 넣어도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는 앉을만한 의자조차 없었다. 연정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안으로 들어왔고, 안시연은 잠깐이지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안시연은 빠르게 침대맡의 조명을 켰다. 차고 안의 조명이 망가졌는데 미처 새 걸로 바꾸질 못했다.키가 큰 연정훈이 협소한 방 안에 서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 좁아 보였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안시연의 침대 위에 앉지 않고 말했다.“옷 입고 나랑 같이 돌아가.”안시연은 주먹을 쥐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교수님, 저 안 돌아갈래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싼 렌즈 뒤로 평온한 눈빛이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뜻밖이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물 마시세요.”연정훈은 컵을 건네받았다.“오늘 너무 늦었는데요.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오신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화를 내지 않고 물을 마신 뒤 덤덤히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안시연이 말했다.“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한숨을 쉬더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았다.그는 안경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안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손을 몸 앞에 놓았다. 마치 선생님과 면담하는 학생 같았다.안시연이 말했다.“그곳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연정훈은 시선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뭐가 어울리지 않는데?”“교수님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곳은 교
연정훈은 안시연을 똑똑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시연은 몸으로 보답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그렇게 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걸까?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과감한 단어를 선택해서 말했다.“나랑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이를 유지하는 건 싫다, 이 뜻이야?”안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연정훈이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그러면 넌 우리가 몇 번이나 관계를 맺어야 나한테 진 신세를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한 번? 두 번? 시간으로 계산할래? 아니면 지금 당장 누워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하게 한 뒤 완전히 빚을 청산할 거야?”안시연은 마지막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여기 남으실래요? 안에서 씻으시면 돼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목적이 뚜렷한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훈은 안시연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오늘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서 갑자기 말을 바꾸고 너한테 매달리려 한다면 어쩔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교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요.”“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부드럽게,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교수님은 절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교수님이 주지혁 그 미친놈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웠다.이렇게 밀당하면 남자의 정복욕을 불타오르게 한다는 걸 안시연은 모르는 걸까?만약 안시연을 조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밀당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안시연은 그를 힐끔 보더니 안쪽 작은 칸막이로 가서 말했다.“제가 뜨거운 물 나오게 해드릴게요.”안시연이 발을 움직이자마자 연정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강압적으로, 하지만
새벽.침대에 누운 안시연은 천장의 밝은 조명을 바라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연정훈의 양보에 그녀의 미안함이 짙어졌다.분명 언짢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떠나기 전 그녀의 자물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안시연은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했고 꿈속에서조차 연정훈에게 미안했다.길가.우아하면서도 귀티 나는 링컨 타운카가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비서 진수빈은 일을 마친 뒤 차로 돌아갔다.연정훈이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눈꺼풀을 들어 확인해 보니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평소와 다르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내일 연산호 쪽에 있는 저택에 한 번 갔다 와. 가서 사모님에게 증조할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그곳으로 가서 효도를 다 하라고 세운시에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진수빈은 마음속으로 김세연을 위해 기도했다.진수빈 집안은 3대째 연씨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에 연씨 가문 이전 세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연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장수했고 두 어르신도 살아 계셨다. 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90세가 넘었는데도 정정했고 세운시에서 손꼽힐 정도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아주 엄격한 분이었고 손아랫사람들에게 냉혹했다. 김세연이 줄곧 세운시에 가는 걸 두려워했던 이유가 야단맞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데 연정훈은 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하며 그녀를 세운시로 보내려 했다. 그것은 김세연을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진수빈은 조금 전 안시연의 집 자물쇠를 바꾸어줄 때 그녀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그러나 진수빈의 생각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위해 화풀이하려는 것보다도 견제가 싫어서 그런 것이었다.김세연은 요즘 들어 그의 일에 있어 몇 번이나 선을 넘었다.그리고 안시연은...눈을 뜬 연정훈의 눈동자는 아주 어둡고 깊었다.그는 오랫동안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이번에 한 마리 기르면서 어르고
정인 그룹 본사 빌딩.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이현은 임유정에게 팔짱을 낀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정말 고마워, 유정 언니. 언니가 아니었으면 이번에 정인 그룹과 협력하기가 어려웠을 거야. 연 대표님이 그렇게 쉽게 승낙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임유정은 턱을 살짝 쳐들면서 미소를 지었다.“주 대표님이 능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난 그냥 살짝 도와줬을 뿐인데, 뭘.”주지혁은 인사치레를 하면서 조금 전 연정훈과 만났을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그들은 안시연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거만함이 느껴졌고 주지혁은 마치 그에게 뺨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출신이든 성과든 주지혁이 8배속으로 산다고 해도 절대 연정훈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주지혁은 절대 안시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원들 전용 엘리베이터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조이현은 임유정과 대화를 나누다가 멀지 않은 곳을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저 사람 안시연 씨 아냐?”임유정과 주지혁이 동시에 그곳을 바라보았다.직원용 엘리베이터에서 작업복을 입은 안시연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서류를 안은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주지혁은 믿을 수 없었고 임유정은 황당했다.그녀는 부승원의 법률 사무소에서 안시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이현과 연락할 때 연정훈이랑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김세연을 부추겨서 연정훈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세연은 겉으로 임유정의 말을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문 쪽에 사람을 심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김세연이 그 여자를 해결했을 줄 알았는데 안시연은 정인 그룹까지 들어왔다.조이현은 옆에서 오버하면서 혀를 찼다.“제가 저 여자를 얕봤나 봐요.”임유정은 말을 아꼈다. 가방을 든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손톱이
인턴들이 자리에 앉았고 안시연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쭉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 이 부장은 간단히 프로젝트 상황을 설명했다.이번 프로젝트는 장인 과학기술과 주지혁의 비산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고 LK은행에서 제3의 투자자로 참여했다.주효진은 이제 막 입사한 정인 과학기술의 직원이었다.아마 조이현의 체면을 봐서 이 부장이 주효진을 대리로 승진시켜 다른 직원들을 관리하게 했을 것이다.“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꼭 열심히 해서 이 부장님과 임 대표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주효진은 그런 말을 하면서 일부러 안시연의 얼굴을 쓱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의기양양함과 경멸이 느껴졌다.안시연은 못 본 척했다.회의가 끝나자 안시연 등 인턴들은 3층 기획팀에 남아서 임무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주효진은 대리로 승리하자마자 곧바로 임무를 분배했다.가장 귀찮은 일인 데이터 수집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안시연의 일이 되었다.주효진은 공적인 태도로 말했다.“이틀 내로 제출하세요.”그 말에 기획팀에서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이 있는 경험 있는 자들이 안시연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하필 앙숙과 일하게 되다니. 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맞붙을 수는 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퇴근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는데도 아주 작은 부분만 끝냈다.식당에서 나오니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다.안시연은 화장실에 갔다가 문 앞에서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주지혁과 마주쳤다.주지혁은 창백한 안색의 그녀를 보고 마음먹은 얼굴로 말했다.“효진이가 시연 씨를 난처하게 했어?”안시연은 손을 닦던 티슈를 버리고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내가 얘기했어. 그러지 말라고.”‘하,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주지혁은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시연 씨, 시연 씨는 프로젝트를 맡는 것에는 어울리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정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온화하게 웃었다.“전에 본 적 있어요. 오전에도 봤고요. 인연인가 보네요. 정인 그룹에 입사한 거예요?”“네.”“지금은 야근이에요?”임유정이 물었다.안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수고가 많데요.”임유정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안시연 손의 비닐봉투를 보더니 앞으로 걸어가 봉투를 확인했다. “정훈 씨, 아까 포장한 디저트 안에 있지?”임유정이 앞으로 가면 안시연은 뒤로 갔다. 그녀의 각도에서는 연정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 안에서 디저트를 꺼낸 팔이 차창에 걸쳐져 있는 것만 보였다.임유정은 그 디저트를 받아 들고 웃으면서 안시연에게 넘겼다.“이건 우리가 아까 먹고 남은 걸 포장해 온 거예요. 맛이 괜찮으니까 가져가서 먹어요. 일하느라고 힘들 텐데 인스턴트만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임유정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말투는 다정했다. 누가 봐도 착한 상사였다.하지만 안시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시연이 살짝 흠칫했다.그러자 임유정이 말을 이었다.“가져가요. 어색해하지 말아요. 이건 엄청 맛있거든요, 다른 곳에서는 사지도 못해요.”안시연은 입을 열고 거절하려고 했다.차 안의 연정훈은 눈을 감고 담담하게 얘기했다.“시간이 늦었어.”임유정은 차 옆에 서서 안시연을 보고 얘기했다.“얼른 가져가요. 그렇지 않으면 연 대표님이 화를 낼 거예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감사합니다, 임 대표님.”“괜찮아요.”말을 마친 임유정은 차의 다른 편에 와서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안시연은 뒷좌석을 쳐다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뒷좌석의 창문은 천천히 닫혔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사라진 후였다.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안시연은 한 손에 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디저트를 들고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음속에 찬 바람이
배여진의 충고를 부승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승우에 대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배여진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배여진과 선기현이 결혼식에 부승희는 신부 들러리로 참석했고 배여진은 부승희더러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이승우가 진심으로 다가올 거라며 충고해 줬었다.그런데 배여진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말을 바꿔 새로운 충고를 하지 않는가?부승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언니 괜한 충고는 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하세요.’날이 어두워지고 배여진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눈가가 빨개진 걸 보아 선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라 추측이 되었다.부승희는 배여진을 호텔로 바래다주고 본인은 돼지 농장으로 돌아왔다.요즘 농장은 시설이 많이 바뀌어 이제 건물에서도 돼지를 키울 수 있었다. 부승희가 평소 지내는 곳이 바로 돼지 농장의 옆 건물이었다.부승희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게 보였다.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승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집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나 보네?”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였다.“왜 왔어?”“왜라니.”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 보였다.“농장에 돼지 사료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나 챙겨 먹어. 난 됐어.”그리고 이승우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을 보며 질문을 이었다.“그건 뭔데?”이승우는 짐을 집안으로 옮기며 말했다.“흰죽.”부승희는 또 쯧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아침에 막 도착한 간장게장이야.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이승우는 부승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그 말에 부승희는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피곤해진 부승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지시를 내렸다.“냉장고에 스팸 있으니 구워줘. 샤워만 하고 올 테니 같이 먹자.”이승우는 곧장 주방으로
배여진과 선기현은 결혼 4년 차였지만 결혼 생활에 금이 생겼다.선기현 쪽에서 남은 감정이 없다며 평화 이별을 요구했다.배여진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옆을 지켜온 소꿉친구였고 가문끼리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짝사랑하다가 포기했고 부모님이 찾아준 남편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선기현이 결혼을 뒤엎고 배여진을 설득해 결국 결혼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남은 감정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이혼이라니, 이건 배여진더러 죽으라는 소리였다.부승희와 배여진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배여진이 전주로 찾아왔다는 소식에 부승희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배여진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이승우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승희는 배여진과 또 몇 명의 부잣집 자녀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배여진은 여전히 기분이 저기압이었고 사람들은 배여진더러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며 다독였다.부승희는 말없이 배여진을 살폈다.“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나? 지금 보드게임 하고 있는데.”“너 왜 그렇게 안일해? 오늘 피키 아기 낳을 것 같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부승희는 멜론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낳으면 낳는 거지. 피키 오빠가 키우고 있잖아. 이따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잔소리하긴.’한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피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에 말없이 귀를 쫑긋거렸다.배여진이 고개를 돌려 먼저 입을 열었다.“승우 오빠?”부승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너 지금 안 오면 후회할지도 몰라. 네가 내기에서 지게 내가 조작할 수도 있어.”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아 짜증 나.’부승희와 이승우는 전주에서 농장을 차린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 최근 돼지 농장까지 확장했는데 부승희와 이승우는 각각 몇 마리를 배정해 누가 더 많이 아기 돼지를 받을 수 있는
정인 그룹.도시의 네온 불빛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작게 숨을 헐떡였고 연정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양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졌고 고개를 들어 천장의 크리스털 전등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양시연은 자신이 파도가 되어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양시연에게 다가갔고 양시연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그러다가 양시연을 제품에 기대게 한 연정훈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다정하게 닦아줬다.불빛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자신을 향한 연정훈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양시연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가 아직 수술 자국이 남아있는 배로 향했다.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흉터를 가렸고 목소리는 이미 낮게 잠겨 있었다.“보지 마요... 못생겼잖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 또 흉터에도 입맞춤했다.뜨거운 연정훈의 온도가 흉터에서 전해지고 그 온기는 빠르게 심장까지 타고 올라갔다.양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아니.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연정훈은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양시연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양시연은 진심 어린 연정훈의 말을 들으며 연정훈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연정훈은 두 팔로 지탱한 채로 양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귓가에 뜨거운 숨이 전해지자 양시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연정훈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온몸을 맡겼다.사무실엔 달빛조차 비춰들지 않았다. 오직 침대 헤드 불빛 하나만 존재했는데 연정훈은 오직 자기 눈에만 이 광경을 담고 싶었다.양시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시연이 잠이 든 뒤로 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품에 안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색색 숨소리를 내는 양시연은 잠결에도 미소를 지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하얀 피부가 드러났으며 하얀 피부는 연정훈의 단단하고
금발이라는 말에 양시연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나도 금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경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훈 씨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헤어 디자이너 쌤이 추천해 주는 금발로 한 거예요. 금발 하면 이목구비도 더 살고 카리스마도 넘칠 거라고 해서요.”“나한테 카리스마 넘치게 보이고 싶었어?”양시연은 앞장을 서서 걸었고 양손을 등 뒤로 모은 채로 말했다.“뭐 그런 것보다 절대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연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은 정말 그렇게 해냈으니 말이다.그날 밤, 연정훈은 양시연의 변화에 깜짝 놀랐었다. 파격 변신한 외관과 한껏 여유로워진 모습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에 더 놀랐었다.“그때 날 처음 보고 어떤 생각을 했어요?”양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취재하듯 물었다.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널 만나기 전에 승원이가 보내온 사진으로 확인했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너무 예뻤어.”“정말요?”양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예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시연의 손을 잡았다.“항상 날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너였다고 생각하는데?”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럼 그 뒤로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연정훈은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이 대신 기억을 불러왔다.“그날 정훈 씨 엄청 차가웠는데 혹시 날 보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던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사실 차가운 척을 했던 거였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당장 양시연을 잡아 제 곁에 두고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토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 말이다.연정훈은 입을 달싹이다 다시 양시연의 옆자리에 섰다. 그때 길 한복판에 즉석 복권 가게가 보였다.“즉석 복권 사줄까?”“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에도 나한테 즉석 복권 사줬던 거 기억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시작되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샴페인을 연거푸 비우고 양시연은 몰래 내용물을 주스로 바꿨다. 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와인으로 채웠다.양시연이 몰래 연정훈에 말했다.“연 대표님 오늘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그러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왠지 오늘이 우리 결혼식보다 더 결혼식 같은 느낌이 들어.”양시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연정훈은 양시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고 양시연은 결혼식 당일 양혁수의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연정훈이 그걸 지금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시연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식 그날 나도 열심히 했잖아요.”연정훈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왼쪽 방향 가르마, 누구인지 알아?”양시연이 힐끔 보다가 대답했다.“정훈 씨 외숙부요.”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 결혼식에서 인사를 건넨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저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가르마를 한 사람이 외숙부야.”양시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살폈다.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양시연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아, 그쵸. 저는 정훈 씨가 저 사람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거예요. 같은 방향에 가르마 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정훈 씨 질문이 잘못됐네요.”연정훈이 차가운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사실 뻥이야. 첫 번째 그 사람 외숙부 맞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몰래 연정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까 결혼식 당일 넌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내 외숙부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아니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훈 씨가 장난한 거잖아요.”“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꾀에 속았을까?”양시연
“그래서 결국 얼마나 있는지 알아냈어요?”그 뒤로 며칠 뒤,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에게 물었다.반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변호사님은 그렇게 해서 제 관심을 끄려는 거예요. 돈으로 유인해서 옆에 묶어두려고!”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반우희는 자신이 아주 넘쳐 보였다.“실은 변호사님 저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 굴리는 거예요.”양시연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그래요. 우희 씨 말이 맞아요. 승원 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그렇죠? 히히.”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벌써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벌써 반우희도 결혼을 한다니.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오늘 아침 기획팀에서 연말 행사 계획안을 반우희에게 제출했었다. 거액의 기획 금액 옆으로 반우희의 사인을 보며 반우희도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신혼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했어?]양시연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애교를 가득 담아 답장했다.[이렇게 바쁜데 언제 여행을 간다고 그래요.][부승원 시켜.]양시연은 빵 하고 터졌다.‘역시 못 말린다니까.’양시연은 사실 몇 가지 여행지를 찾아두긴 했으나 자세한 일정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 연정훈과 상의를 하고 결정할 생각이었다.행사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었고 이건 양시연이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복귀하는 행사였기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연정훈은 미리 시간을 비워두어 양시연의 옆자리를 지켰다.넓고 화려한 강당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양시연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빼곡하게 앉은 사람들을 쭉 훑다가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반우희는 한참 조잘거렸으나 부승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원은 두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그러자 반우희는 서운한 듯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때, 부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하자.”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결혼이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박!’반우희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며 부승원은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반우희의 귓불을 매만지며 말했다.“나랑 사법 고시 넘기기로 약속한 거 기억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이번 해는 안 될 것 같은데요...”“다음 해는?”“다음 해는 꼭 넘을 게요!”“그래도 못 넘기면 어떻게 할 거야?”“그러면... 변호사님 닮은 아기 안 낳을 거예요.”“...”“어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깜빡였다.“이 정도 벌칙이면 되겠죠?”부승원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래. 뭐 심한 벌칙이긴 하네.”‘히히.’반우희는 바로 입꼬리를 올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퐁퐁 뛰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우희야.”부승원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반우희는 얌전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평소에 늘 성까지 붙여 반우희라고 깐깐하게 부르던 부승원이 다정하게 부른 게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부승원의 이마를 매만지며 아픈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승원의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부승원은 반우희의 손을 잡고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사실 부승원은 늘 반우희 혼자 들떠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과음을 한 탓이라 생각해 앞으로 다가가 빤히 쳐다봤다.“삼촌?”그 호칭에 부승원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리고 반우희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부승원은 침을 꿀꺽 넘겼고 다시 두 눈을 뜨니 눈가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반우희는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채애정에게 건넸다.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반우희는 겉으로 덜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분별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씨 가문을 배경으로 삼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가 준비한 선물만 건넸고 식사 후 모두가 흩어진 뒤에야 차분하게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어머님, 이 선물은 저희 엄마께서 드리는 거예요.’채애정은 원래 기분이 좋았지만 선물을 받고 부승원이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반우희의 손을 잡고 문밖까지 배웅했다.그녀는 돌아와 선물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담긴 것에 놀랐다.그것은 비취 구슬로 엮인 목걸이였으며 색상과 품질 모두 뛰어났다.그녀는 표세연과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표세연이 이렇게 진심으로 반우희에게 대해줄 줄은 몰랐다. 첫 번째 만남인데도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주다니 진짜 딸이 있는 집안은 다르구나 싶었다.‘쯧.’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원은 반우희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고 전화를 받고 몇 번 응답했다.“주는 거면 그냥 받으세요. 그냥 며느리의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세요. 그 외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반우희는 말의 끝에 귀를 기울였다.부승원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가 살짝 웃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은근히 올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부승원은 술을 많이 마셔서 입에서 술 냄새가 섞인 숨이 나왔다. 반우희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얼굴을 비비며 다가갔다.부승원은 반우희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오늘 저녁 맛있었어?”“맛있었어요. 당신 집에 요리사 정말 요리를 잘하시네요.”부승원은 그녀의 코끝에 입술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앞으로 여기서 살면 매일 너에게 요리해 줄 거야.”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왜 내가 그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