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은 안시연의 상황을 꿰고 있었다. 부모도 없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만만했을 것이다.“계약금은 반 돌려줄게요. 그리고 이 집에 있는 가구 여기 두고 가면 200만 원 더 얹어줄게요. 어떻게 할래요?”김성하는 안시연에게서 돈을 떼어먹을 생각이 분명했지만 안시연은 그녀와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계약금 액수가 꽤 크다는 점이다. 지금 안시연은 급히 돈이 필요했고 돈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래도 마음 편히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집주인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다. 얼마 전 사건 때문에 이웃들이 그녀에게 불만을 품었었고 어제 주지혁이 찾아와서 난동까지 부렸으니 정말로 고소까지 가게 된다면 꼭 승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게다가 재판이라는 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가구는 두고 갈게요. 대신 400만 원 주세요. 현금으로요.”김성하가 눈을 부라렸다.“안...”안시연이 말했다.“싫으면 신고하시든가요.”김성하는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김성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 400만 원 줄 테니까 오늘 당장 짐 빼요!”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떠나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주지혁이 함께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철저히 벗어나는 셈이니 말이다.가구를 남겼다 보니 옷과 생필품 같은 것들만 챙기면 돼서 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집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안시연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가격이 싼 것뿐이었다.중개인은 안시연이 원하는 가격을 듣더니 그녀에게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결국 중개인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고 한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지하 차고를 개조한 곳인데 1년에 240만 원이었다.안시연은 가격을 조금 더 낮추고 싶었으나 집주인이 단호히 말했다.“싫으면 말고요. 여기는 경인이에요. 그쪽이 살던 시골이 아니라고요.”안시연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그녀 역시 경인 사람이었으나
협소한 공간 속에서 안시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누군가를 넘본 적 없어.”주지혁이 계속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지혁은 무척 후회했다. 안시연을 지나치게 압박한 탓에 남 좋은 일만 했으니 말이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주지혁은 그녀를 부르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저번에는 내가 심했어. 내가 사과할게.”안시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주지혁은 계속해 말했다.“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3년간 만난 정이 있잖아. 난 예전부터 시연 씨를 내 아내로 생각했었어. 난 정말로 시연 씨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이 안 가져도 괜찮아. 나도 더는 부담 주지 않을게. 그리고 외할머니를 데리고 경인을 떠나도 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아. 내가 준비해 줄게.”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를 보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숨을 내쉬며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유럽은?”“당연히 되지!”주지혁이 기쁜 목소리로 단숨에 승낙했다.안시연은 눈을 감은 뒤 코웃음치면서 일침을 가했다.“주지혁 씨, 쓸데없이 힘 빼지 마.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해외로 보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라니,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경인을 떠난다면 주지혁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시연 씨, 그...”“자꾸 시연 씨라고 부르지 마. 지혁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역겨워서 토 나올 정도니까.”안시연은 원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는데 최근 들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더욱더 원통해서 말투가 사나워졌다.“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통화 녹음본 조이현 씨한테 보낼 거니까. 조이현 씨 임신했다면서? 재벌 집 딸이랑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혁 씨 꿈이 부서질까 봐 두렵지 않아?”주지혁은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
안시연은 이틀 동안 편히 지냈다. 연정훈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잡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물론 이런 편안한 생활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자신은 멋대로 서로가 정해놓은 관계를 벗어났으니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연아?”외할머니의 부름에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잘라놓은 사과를 그녀에게 건넸다.최미란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서 시연에게 먹였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아닌데요? 저 살쪘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애교스럽게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최미란은 웃었다.옆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했다.“어르신,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효도하는 손녀가 있으니 말이에요.”최미란은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었고 그 바람에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도 자기 손녀를 칭찬했다.그 아주머니는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정말 얼굴도 예쁘고 복도 많네요. 재벌 집 딸처럼 보여요.”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그... 양지원 씨 같아요!”양지원은 이 나라 최고의 갑부였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칭찬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최미란의 눈빛을 보았다.그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줄로 알고 서둘러 물었다.“외할머니, 왜 그러세요?”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최미란이 또 발작한 줄로 알고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괜찮아, 괜찮아.”최미란은 정신을 차린 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어디 아프세요?”안시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최미란은 고개를 저었다.“어젯밤에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상황을 보더니 말을 아꼈다.안시연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류를 넣어도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는 앉을만한 의자조차 없었다. 연정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안으로 들어왔고, 안시연은 잠깐이지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안시연은 빠르게 침대맡의 조명을 켰다. 차고 안의 조명이 망가졌는데 미처 새 걸로 바꾸질 못했다.키가 큰 연정훈이 협소한 방 안에 서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 좁아 보였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안시연의 침대 위에 앉지 않고 말했다.“옷 입고 나랑 같이 돌아가.”안시연은 주먹을 쥐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교수님, 저 안 돌아갈래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싼 렌즈 뒤로 평온한 눈빛이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뜻밖이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물 마시세요.”연정훈은 컵을 건네받았다.“오늘 너무 늦었는데요.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오신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화를 내지 않고 물을 마신 뒤 덤덤히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안시연이 말했다.“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한숨을 쉬더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았다.그는 안경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안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손을 몸 앞에 놓았다. 마치 선생님과 면담하는 학생 같았다.안시연이 말했다.“그곳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연정훈은 시선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뭐가 어울리지 않는데?”“교수님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곳은 교
연정훈은 안시연을 똑똑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시연은 몸으로 보답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그렇게 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걸까?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과감한 단어를 선택해서 말했다.“나랑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이를 유지하는 건 싫다, 이 뜻이야?”안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연정훈이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그러면 넌 우리가 몇 번이나 관계를 맺어야 나한테 진 신세를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한 번? 두 번? 시간으로 계산할래? 아니면 지금 당장 누워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하게 한 뒤 완전히 빚을 청산할 거야?”안시연은 마지막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여기 남으실래요? 안에서 씻으시면 돼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목적이 뚜렷한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훈은 안시연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오늘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서 갑자기 말을 바꾸고 너한테 매달리려 한다면 어쩔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교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요.”“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부드럽게,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교수님은 절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교수님이 주지혁 그 미친놈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웠다.이렇게 밀당하면 남자의 정복욕을 불타오르게 한다는 걸 안시연은 모르는 걸까?만약 안시연을 조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밀당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안시연은 그를 힐끔 보더니 안쪽 작은 칸막이로 가서 말했다.“제가 뜨거운 물 나오게 해드릴게요.”안시연이 발을 움직이자마자 연정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강압적으로, 하지만
새벽.침대에 누운 안시연은 천장의 밝은 조명을 바라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연정훈의 양보에 그녀의 미안함이 짙어졌다.분명 언짢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떠나기 전 그녀의 자물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안시연은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했고 꿈속에서조차 연정훈에게 미안했다.길가.우아하면서도 귀티 나는 링컨 타운카가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비서 진수빈은 일을 마친 뒤 차로 돌아갔다.연정훈이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눈꺼풀을 들어 확인해 보니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평소와 다르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내일 연산호 쪽에 있는 저택에 한 번 갔다 와. 가서 사모님에게 증조할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그곳으로 가서 효도를 다 하라고 세운시에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진수빈은 마음속으로 김세연을 위해 기도했다.진수빈 집안은 3대째 연씨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에 연씨 가문 이전 세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연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장수했고 두 어르신도 살아 계셨다. 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90세가 넘었는데도 정정했고 세운시에서 손꼽힐 정도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아주 엄격한 분이었고 손아랫사람들에게 냉혹했다. 김세연이 줄곧 세운시에 가는 걸 두려워했던 이유가 야단맞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데 연정훈은 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하며 그녀를 세운시로 보내려 했다. 그것은 김세연을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진수빈은 조금 전 안시연의 집 자물쇠를 바꾸어줄 때 그녀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그러나 진수빈의 생각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위해 화풀이하려는 것보다도 견제가 싫어서 그런 것이었다.김세연은 요즘 들어 그의 일에 있어 몇 번이나 선을 넘었다.그리고 안시연은...눈을 뜬 연정훈의 눈동자는 아주 어둡고 깊었다.그는 오랫동안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이번에 한 마리 기르면서 어르고
정인 그룹 본사 빌딩.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이현은 임유정에게 팔짱을 낀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정말 고마워, 유정 언니. 언니가 아니었으면 이번에 정인 그룹과 협력하기가 어려웠을 거야. 연 대표님이 그렇게 쉽게 승낙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임유정은 턱을 살짝 쳐들면서 미소를 지었다.“주 대표님이 능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난 그냥 살짝 도와줬을 뿐인데, 뭘.”주지혁은 인사치레를 하면서 조금 전 연정훈과 만났을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그들은 안시연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거만함이 느껴졌고 주지혁은 마치 그에게 뺨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출신이든 성과든 주지혁이 8배속으로 산다고 해도 절대 연정훈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주지혁은 절대 안시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원들 전용 엘리베이터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조이현은 임유정과 대화를 나누다가 멀지 않은 곳을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저 사람 안시연 씨 아냐?”임유정과 주지혁이 동시에 그곳을 바라보았다.직원용 엘리베이터에서 작업복을 입은 안시연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서류를 안은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주지혁은 믿을 수 없었고 임유정은 황당했다.그녀는 부승원의 법률 사무소에서 안시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이현과 연락할 때 연정훈이랑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김세연을 부추겨서 연정훈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세연은 겉으로 임유정의 말을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문 쪽에 사람을 심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김세연이 그 여자를 해결했을 줄 알았는데 안시연은 정인 그룹까지 들어왔다.조이현은 옆에서 오버하면서 혀를 찼다.“제가 저 여자를 얕봤나 봐요.”임유정은 말을 아꼈다. 가방을 든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손톱이
인턴들이 자리에 앉았고 안시연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쭉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 이 부장은 간단히 프로젝트 상황을 설명했다.이번 프로젝트는 장인 과학기술과 주지혁의 비산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고 LK은행에서 제3의 투자자로 참여했다.주효진은 이제 막 입사한 정인 과학기술의 직원이었다.아마 조이현의 체면을 봐서 이 부장이 주효진을 대리로 승진시켜 다른 직원들을 관리하게 했을 것이다.“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꼭 열심히 해서 이 부장님과 임 대표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주효진은 그런 말을 하면서 일부러 안시연의 얼굴을 쓱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의기양양함과 경멸이 느껴졌다.안시연은 못 본 척했다.회의가 끝나자 안시연 등 인턴들은 3층 기획팀에 남아서 임무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주효진은 대리로 승리하자마자 곧바로 임무를 분배했다.가장 귀찮은 일인 데이터 수집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안시연의 일이 되었다.주효진은 공적인 태도로 말했다.“이틀 내로 제출하세요.”그 말에 기획팀에서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이 있는 경험 있는 자들이 안시연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하필 앙숙과 일하게 되다니. 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맞붙을 수는 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퇴근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는데도 아주 작은 부분만 끝냈다.식당에서 나오니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다.안시연은 화장실에 갔다가 문 앞에서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주지혁과 마주쳤다.주지혁은 창백한 안색의 그녀를 보고 마음먹은 얼굴로 말했다.“효진이가 시연 씨를 난처하게 했어?”안시연은 손을 닦던 티슈를 버리고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내가 얘기했어. 그러지 말라고.”‘하,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주지혁은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시연 씨, 시연 씨는 프로젝트를 맡는 것에는 어울리
부승희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왜 갑자기 웃어?”부승희가 고개를 돌려 이승우를 향해 말했다.“오빠는 다른 사람들이랑 좀 달랐어.”“뭐가 달랐는데?”이승우는 바로 구미가 당겨 자세를 고쳐 앉았다.“오빠는 좀 발랑 까졌잖아.”“뭐라고?”당황해하는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그 단어는 좀 아니다.”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좀 날티 났어.”“...”‘그게 뭔 차이가 있다고.’“난 또 착하고 바른 내 성심에 반한 건 줄 알았네.”“말이 되는 소리를 해.”“그때 우리 오빠 알지? 반듯하고 단정함의 표본이었잖아. 그런데 오빠는 연애도 실컷 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걸 보며 오빠가 좀 멋있다고 생각했어.”부승희는 이승우가 자신의 짝사랑을 몰랐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짝사랑은 다 티가 나는데 말이다.이승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후회가 찾아왔다.“혹시 내가 예전처럼 멋있지 않아서 날 안 좋아하는 거야?”부승희는 웃음이 터졌고 이승우를 힐끔 바라봤다.“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떠나기 전에 찐 사랑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그 사람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데 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 꺼내는 거야?”“쯧쯧. 그 여자분이 오빠 찬 거지?”“찬 건 아니고, 감정이 식어서 평화 이별한 거지.”“오빠는 참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어.”부승희가 비꼬았다.“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은 고쳤어.”부승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걸 퍽이나 믿겠어.’“그럴 필요 없어. 오빠는 그냥 신선한 사람이 좋은 거야. 다음 사람이 영원히 오빠의 찐 사랑인 거지.”이승우는 술기운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승우는 한참 부승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부승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사실 우린 같은 부류 사람이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오빠 뒤 쫓아다니는 게 아니었어.”이승우는 입꼬리를 내린 채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뭐가 같
밤하늘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자 부승희는 깜짝 놀라다가 감탄을 이었다.“정말 오빠도 인생 원 없이 사는 것 같아.”“글쎄. 누가 와서 이걸 봐주길 내내 기다렸는걸.”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사랑 감정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은 오랜 시절 함께 한 우정이 있었다.부승희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소파에 기대며 별밤을 바라봤다.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이승우에게 물었다.“초지현 나랑 동갑이지 않아?”“그렇지 않을까?”“그런데 결혼이라니.”“너 아직도 어리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젠장, 나 아직 28살밖에 안 됐다고.”“말 좀 이쁘게 해.”“젠장, 오빠나 닥쳐!”“...”이승우는 에그타르트를 집어 부승희의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노려보다가 우걱우걱 씹었다.‘젠장. 젠장. 젠장.’단 음식만 먹었더니 속이 조금 부대낀 부승희는 와인 셀러에서 예쁘게 생긴 과일 와인을 골라 따랐다. 그리고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러자 이승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휙 뺏어갔다.“뭐 하는 거야?”부승희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담배 피우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너희 부모님 앞에서 피워.”“오빠 정말 싸우려고 작정했어?”그러나 이승우는 담배를 빠르게 주머니에 숨기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차라리 나 때려.”“...”부승희는 담배가 많이 당겼지만 어쩔 수 없어 입을 삐죽였다.이승우는 한참 생각하다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초지현이 누구랑 결혼하는지 알아?”“이름은 익숙한데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진여울, 축구팀 주장.”“뭐라고?”부승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 오빠가 얼마나 잘생겼는데! 왜 하필이면 초지현이랑 결혼하는 거야?”이승우는 부승희가 이렇게 말할 거라 예상했다.“진여울 그때도 초지현 좋아했어. 네가 둔해서 몰랐던 거지.”“그럴 리가 없어.”부승희가 고개를 저었다.앙숙이 그렇게 잘생긴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잘생긴 선배가 눈이 삐었네.”“그걸 우린 사랑의 콩깍지라고 하
이른 새벽, 두 사람은 연씨 저택을 빠져나왔다.이승우는 자꾸 부승희를 졸랐고 부승희는 이승우의 차량이 더 넓고 편한 걸 이유 삼아 그 차에 올랐다.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부승희는 꾸벅꾸벅 졸았고 눈을 뜨니 어느새 이승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그래서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이승우를 바라봤다.이승우는 헤헤 웃어 보였고 부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멍청한 이승우는 그런 일을 벌일 용기도 없었다.그래서 길게 기지개를 켜며 턱을 세운 채로 말했다.“먹을 것 좀 내와. 단 걸로.”“왜 단 걸 찾아? 살찔까 봐 걱정도 안 돼?”부승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러게. 왜 갑자기 단 게 당기지?’“내오라면 내오라고. 잔소리하지 말고.”이승우는 말괄량이 같은 부승희에 적응이 되었기에 고분고분 행동에 옮겼다.“네네. 바로 내오겠습니다.”부승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배달시킬 생각은 버려. 오빠가 만든 게 아니면 안 먹을 거니까.”“아 너 진짜 너무해. 몰래 시키고 내가 만든 것처럼 연기하려고 했는데 네가 벌써 그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이 별장은 평소 이승우 홀로 지내는 별장이었다. 이씨 가문은 가족이 많았고 부모님 또한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기에 자식들은 성인이 되면 빠르게 집을 구해 본가를 떠났다. 그리고 주말마다 본가에서 모이기로 했다.부승희는 예전에는 자주 이 집을 찾았지만 해외로 나간 뒤로는 처음이었다.사실 집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부승희는 익숙하게 게임기 앞에 자리를 잡고 좋아하는 게임을 작동했으며, 이승우는 그 옆에 앉아 패드로 음식을 주문했다.그리고 배달 음식이 도착하기 전에 간단하게 게임을 시작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승우와 부승희는 게임 메이트로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의 게임 취향은 거의 일치했다.“2층에 몬스터 있어. 네가 해치워.”“나 총알 부족해.”“쯧. 쓸모없긴. 내 뒤로 숨어. 내가 해치울게!”펑!부승희가 마지막 보스까지 처리하고 게임은 끝났다.어느새 잠이 깬 부승희는 나른
부승희는 이승우를 잡아당기는 척하다가 또 슬쩍 손을 놓는 장난을 하려 했었다.그런데 진지하게 손을 닦는 이승우를 보며 그 마음을 버렸다.‘이승우 뒤로 꽃이 얼마나 많은데. 또 넘어지면 그 꽃들까지 상할 거야.’‘그러니까 꽃을 봐서 이번만 봐줄게.’이승우는 부승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반동을 이용해 부승희와의 거리를 좁혔다.푹 젖어버린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질겁하며 뒷걸음질했다.“정말 똥강아지 같아.”그리고 이승우 몸에 묻은 진흙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 정말 똥강아지 맞잖아.”이승우는 화도 내지 않았다.“네 방으로 데려다줘. 옷만 갈아입을게.”“내 방엔 강아지 옷 없는데?”“네 옷이라도 좋아.”“말이 되는 소리를 해!”부승희는 몸을 돌렸다.“혼자 정훈이 오빠 찾아가서 새 옷 달라고 해.”“지금 이 시간에 정훈이 문을 두드리면 퍽이나 열어주겠어.”‘하긴.’부승희는 고민하다가 말을 바꿨다.“그럼 도우미나 경호원 찾아가. 아무나 도와줄 사람 한 명쯤은 있지 않겠어?”“내가 싫어.”다른 사람이 입었던 옷은 입기 싫었다.“네 방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사람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할게.”부승희는 입을 삐죽였다.‘까다롭긴.’“그럼 오빠나 방으로 돌아가. 방문 안 잠갔고 난 이만 가볼게.”부승희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대문으로 향했다.그러자 이승우가 따라왔고 부승희는 불만이라는 듯 몸을 휙 돌렸다.“왜 따라와!”“술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운전하지 마. 사람 찾아줄게.”“오빠만 기사 있는 줄 알아? 웃기시네.”“...”부승희가 정말 떠나려고 하자 이승우는 미소를 지은 채로 다시 손목을 잡았다.“왜 자꾸 가시처럼 톡톡 쏴? 조금만 기다려줘. 옷만 갈아입으면 우리 야식도 먹고 새로 나온 게임도 밤새 하자.”“싫어. 오빠네 가서 야식 먹는 건 내가 아예 사람이길 포기한 거라고.”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그건 말이 너무 심하다.”“내가 아무리 한심한 녀석이라고 해도 너한테 무슨 짓 하겠어? 너한테 무
11월의 겨울 새벽은 원래 쌀쌀하기 마련인데 이미 푹 젖은 이승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부승희가 속 시원하게 복수를 하도록 내버려둔 이승우는 여전히 얼굴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를 혀를 차며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아래층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다음에 또 그럴 거야?”이승우는 고개를 숙여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도 또 그럴 거라고 말한다면 부승희는 화가 나서 펄쩍 뛸 것이다.그래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안 그럴게.”부승희는 이승우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 또 입을 삐죽였다.그래서 또 어떻게 제대로 한 방 먹일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승우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그 호스 들고 있는 손 안 시려?”“...”‘그게 뭐람. 본인은 이미 온몸이 젖었는데 무슨 생뚱 같은 소리를.’‘멍청하긴.’부승희는 호스를 바닥에 던지고 달빛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했다.이어 이승우가 물었다.“술은 깼어?”“왜?”“안 깼으면 우리 야식 먹으러 가지 않을래? 먹고 푹 자는 거야.”“정말 왜 그렇게 멍청해? 이젠 잠을 잘 시간이잖아. 벌써 몇 신데.”부승희는 이승우를 노려보며 말했다.“무슨 잠을 잔다고 그래. 우린 아직 젊으니까 밤새 놀 수 있어.”“놀긴 뭘 놀아! 오빠도 벌써 서른이야. 급사하고 싶지 않으면 몸 사려.”“절대 네 탓 하지 않을 게. 죽으면 내 재산 너 줄게.”“...”‘누가 재산 달라고 했나? 웃겨.’부승희는 이승우를 무시한 채로 방으로 돌아가려 등을 돌려 섰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앞문을 지나쳐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갑자기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부승희는 다시 등을 돌려 아래층을 살폈다.‘뭐야? 어디 간 거야?’‘귀신이 잡아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고마운 귀신이 다 있어?’부승희는 베란다 끝에서 서서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오빠! 이승우!”그러나 대답이 없었다.이어 휘파람을 불며 또 외쳤다.“멍청이?”그러나 주변은 온통 조용했고 바람에 나
태양이 분유를 모두 비웠으나 양시연은 다시 표세연에게 넘겨주기 아쉬웠다. 비록 하룻밤뿐이었으나 태어난 뒤로 한 번도 떨어져서 지내지 않았기에 마음이 불안했다.“잠이 들었으니 아기 침대로 눕혀요.”양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그리고 얼마 뒤, 두 사람은 다시 아까 끝내지 못한 거사를 이어가려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가 두 눈을 꼭 감았다.양시연은 두 볼이 붉어진 채로 말했다.“정, 정훈 씨 빨리 아기부터 데리고 와요. 내가 달래줄게요.”“우리 태양이 낮과 밤이 바뀌어서 한번 달래면 계속 달래줘야 해.”“그래도 어떻게 모르는 척 내버려둬요...”양시연이 연정훈의 볼에 뽀뽀를 하며 말했다.‘저 어린 녀석이 눈치도 없이.’‘낮엔 쿨쿨 잘 자던 녀석이 밤만 되면 자꾸 좋은 일을 망치네.’연정훈은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내려갔다.불만이 가득한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이 잠옷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양시연이 말을 이었다.“이번만 달래주고 어머님께 아이 보내요.”양시연이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하자 연정훈은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고 다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연정훈은 빠르게 양시연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금방 올게.”‘뭐지?’양시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연정훈은 외투를 챙겨 입고 태양을 품에 안은 채로 밖으로 향했다.태양은 울먹이다가 왜 달래주지 않는지 의아해했다.양시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내가 달래주기로 했잖아요.”연정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아이 할머니가 잘 달래줄 거야.”“...”‘정말. 무슨 아빠가 이래?’하지만 양시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양손으로 무릎을 꼭 껴안은 채로 연정훈을 기다렸다.새벽이 되고 마지막 손님들도 파티를 끝냈다. 그 사람들은 연정훈 무리와 술을 마시다가 또 다른 사람들과 2차를 했고 새벽까지 끝내주는 파티를 즐겼다.이승우는 부승희에게 쫓겨 도망
양시연이 신음을 흘리자 연정훈이 손으로 입을 막았고 거친 호흡을 내쉬며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조용히 해. 우리 잠자리 가진다고 광고할래?”‘쳇, 방음이 뭐 그렇게 나쁘겠어?’‘지레 겁을 먹고... 음...’익숙한 기분이 찾아오고 양시연은 발가락 끝까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겨우 연정훈의 품에 안겨 숨을 돌리는데 연정훈이 또 키스를 해왔다.그러자 마치 드넓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작은 쪽배가 파도에 치여 이리저리 휘청이는 기분이 들었다.얼굴이 창백해진 양시연이 참지 못하고 칭얼거리며 연정훈더러 조금만 더 천천히 해달라고 말했다.연정훈은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그러다가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시연아, 너 전보다 더 음탕해진 것 같아.”양시연은 머리가 펑 터지는 기분이 들었고 연정훈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변태!’11시가 넘어서고 저택은 평화를 되찾았다.양시연은 땀을 흠뻑 흘렸고 연정훈의 품에 기대 작게 숨을 헐떡였다.연정훈은 입으로 양시연에게 물을 먹이고 또 짧게 키스했다.다시 호흡을 빼앗긴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연정훈은 또 스멀스멀 침대 안으로 손을 움직였고 양시연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무기력해진 팔을 들어 살짝 밀었다.“그만해요. 조금만 쉬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볼에 얼굴을 비비고 허리를 꾹꾹 눌러 마사지하며 말했다.“겨우 한 번만 했잖아.”양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고 목에 팔을 걸었다.“이제 아기 보러 가야죠. 걱정도 안 돼요?”“아기 봐주는 사람 있잖아.”“그래도 우리가 데리고 와야죠...”“오늘은 괜찮아. 어머니가 자기 방에 따로 아기 침대도 마련했으니 오늘 밤만 봐달라고 부탁하자.”연정훈은 말을 하는 내내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양시연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더 이상 말로 설득이 되지 않자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그럼 보고만 올래? 아기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그다음엔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연정훈은 그 말을 하고도 한참 양
큰 공간에는 소파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이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부승희와 이승우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점점 민망해졌다.양시연은 귓불을 붉힌 채로 연정훈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그러다가 참다못한 연정훈이 양시연을 끌어당기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우린 아이 보러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볼 게.”그리고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남은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눈치를 챘다.아이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이 만들러 가는 것임을.그리고 그 뒤를 따라나선 건 한우빈과 한우빈의 파트너였다. 그 여자는 다정하게 한우빈에게 물었다.“우빈 씨 아까 먹던 감자칩 아직도 매워요?”‘당연히 맵지. 매워 죽겠어.’한우빈을 술을 입에 털어 넣더니 여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머리가 아파서 먼저 올라가서 쉴게.”“...”그리고 양혁수는 그 상황에 관심이 없었기에 어린 친구나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여름의 헤드셋을 똑똑 두드리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그러자 변여름은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그다음으로는 변백호였다. 변백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노지혜는 꼬리처럼 그 뒤를 졸졸 따랐다.부승원은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았으며 친오빠로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잔을 세게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그 소리에 소파의 움직임이 조금 멈췄다.“승희야.”“오빠,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봐!”부승희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정말 어이가 없네.’부승원은 숨을 길게 내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우희를 잡아당겼다.“이만 가자.”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불과 1분 안으로 방은 비워졌다.부승희는 제 위를 올라탄 이승우를 보며 너무 화가 나 머리를 세게 내리칠까 했다.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먼저 예상 한 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희도 소파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이승우는 빠르게 도망갔고 부승희는 놓치지 않고 뒤를 쫓았다.
“생각해 봤는데 고작 야식은 조금 억울한 것 같아.”“이 손 놓고 말해!”“대화는 여기까지. 말로는 내가 너한테 상대도 되지 못하잖아.”“오빠 정말... 읍!”부승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소파 뒤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모두 조용해졌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고양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는 변여름을 바라봤다.그리고 몰래 혀를 쯧쯧 하며 말했다.“여름아?”변여름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의미를 알아차린 변여름은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헤드셋을 움켜쥐었다.‘아무것도 안 들린다... 아무것도 안 들려...”“...”이어서 또 찰싹 손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 너무 아프겠다.’부승원은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이승우.”소파에서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은 드디어 행동을 멈췄다. 부승희는 이승우의 품에 안겨 꼼짝도 하지 못했고 두 손도 잡혀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부승원의 경고에 이승우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두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부승희는 시선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이승우를 노려보았다.이승우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술을 매만졌다.지금 쿵쿵 뛰는 심장 소리만 들려왔고 입술 끝엔 옅은 알코올 향이 남아 있었다. 이승우는 평소에 위스키도 단맛만 골라 마셨고 부승희는 그 단 향이 사라지지 않아 여러 번 침을 삼켜도 여운이 남았다.‘젠장! 감히 어떻게 나한테!’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버둥거리자 이승우는 아예 부승희를 소파에 눕혀 버렸다.부승희는 깜짝 놀라 손을 빼내 이승우의 가슴을 밀쳤다.‘정말 미친 거 아니야?’이승우는 양손으로 지탱한 채로 부승희를 내려다보았고 턱을 살짝 세우더니 부승희더러 제 입술을 보라고 시늉했다.“네가 물어뜯었나 봐 너무 아파.”부승희는 두 눈을 꼭 감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오빠가 자초한 거잖아.”이승우는 술기운이 확 올라왔고 방금 상황을 떠올리며 점점 더 용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