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은 안시연의 상황을 꿰고 있었다. 부모도 없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만만했을 것이다.“계약금은 반 돌려줄게요. 그리고 이 집에 있는 가구 여기 두고 가면 200만 원 더 얹어줄게요. 어떻게 할래요?”김성하는 안시연에게서 돈을 떼어먹을 생각이 분명했지만 안시연은 그녀와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계약금 액수가 꽤 크다는 점이다. 지금 안시연은 급히 돈이 필요했고 돈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래도 마음 편히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집주인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다. 얼마 전 사건 때문에 이웃들이 그녀에게 불만을 품었었고 어제 주지혁이 찾아와서 난동까지 부렸으니 정말로 고소까지 가게 된다면 꼭 승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게다가 재판이라는 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가구는 두고 갈게요. 대신 400만 원 주세요. 현금으로요.”김성하가 눈을 부라렸다.“안...”안시연이 말했다.“싫으면 신고하시든가요.”김성하는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김성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 400만 원 줄 테니까 오늘 당장 짐 빼요!”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떠나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주지혁이 함께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철저히 벗어나는 셈이니 말이다.가구를 남겼다 보니 옷과 생필품 같은 것들만 챙기면 돼서 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집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안시연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가격이 싼 것뿐이었다.중개인은 안시연이 원하는 가격을 듣더니 그녀에게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결국 중개인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고 한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지하 차고를 개조한 곳인데 1년에 240만 원이었다.안시연은 가격을 조금 더 낮추고 싶었으나 집주인이 단호히 말했다.“싫으면 말고요. 여기는 경인이에요. 그쪽이 살던 시골이 아니라고요.”안시연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그녀 역시 경인 사람이었으나
협소한 공간 속에서 안시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누군가를 넘본 적 없어.”주지혁이 계속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지혁은 무척 후회했다. 안시연을 지나치게 압박한 탓에 남 좋은 일만 했으니 말이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주지혁은 그녀를 부르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저번에는 내가 심했어. 내가 사과할게.”안시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주지혁은 계속해 말했다.“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3년간 만난 정이 있잖아. 난 예전부터 시연 씨를 내 아내로 생각했었어. 난 정말로 시연 씨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이 안 가져도 괜찮아. 나도 더는 부담 주지 않을게. 그리고 외할머니를 데리고 경인을 떠나도 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아. 내가 준비해 줄게.”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를 보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숨을 내쉬며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유럽은?”“당연히 되지!”주지혁이 기쁜 목소리로 단숨에 승낙했다.안시연은 눈을 감은 뒤 코웃음치면서 일침을 가했다.“주지혁 씨, 쓸데없이 힘 빼지 마.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해외로 보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라니,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경인을 떠난다면 주지혁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시연 씨, 그...”“자꾸 시연 씨라고 부르지 마. 지혁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역겨워서 토 나올 정도니까.”안시연은 원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는데 최근 들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더욱더 원통해서 말투가 사나워졌다.“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통화 녹음본 조이현 씨한테 보낼 거니까. 조이현 씨 임신했다면서? 재벌 집 딸이랑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혁 씨 꿈이 부서질까 봐 두렵지 않아?”주지혁은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
안시연은 이틀 동안 편히 지냈다. 연정훈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잡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물론 이런 편안한 생활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자신은 멋대로 서로가 정해놓은 관계를 벗어났으니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연아?”외할머니의 부름에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잘라놓은 사과를 그녀에게 건넸다.최미란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서 시연에게 먹였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아닌데요? 저 살쪘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애교스럽게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최미란은 웃었다.옆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했다.“어르신,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효도하는 손녀가 있으니 말이에요.”최미란은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었고 그 바람에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도 자기 손녀를 칭찬했다.그 아주머니는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정말 얼굴도 예쁘고 복도 많네요. 재벌 집 딸처럼 보여요.”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그... 양지원 씨 같아요!”양지원은 이 나라 최고의 갑부였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칭찬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최미란의 눈빛을 보았다.그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줄로 알고 서둘러 물었다.“외할머니, 왜 그러세요?”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최미란이 또 발작한 줄로 알고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괜찮아, 괜찮아.”최미란은 정신을 차린 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어디 아프세요?”안시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최미란은 고개를 저었다.“어젯밤에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상황을 보더니 말을 아꼈다.안시연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류를 넣어도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는 앉을만한 의자조차 없었다. 연정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안으로 들어왔고, 안시연은 잠깐이지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안시연은 빠르게 침대맡의 조명을 켰다. 차고 안의 조명이 망가졌는데 미처 새 걸로 바꾸질 못했다.키가 큰 연정훈이 협소한 방 안에 서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 좁아 보였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안시연의 침대 위에 앉지 않고 말했다.“옷 입고 나랑 같이 돌아가.”안시연은 주먹을 쥐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교수님, 저 안 돌아갈래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싼 렌즈 뒤로 평온한 눈빛이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뜻밖이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물 마시세요.”연정훈은 컵을 건네받았다.“오늘 너무 늦었는데요.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오신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화를 내지 않고 물을 마신 뒤 덤덤히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안시연이 말했다.“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한숨을 쉬더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았다.그는 안경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안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손을 몸 앞에 놓았다. 마치 선생님과 면담하는 학생 같았다.안시연이 말했다.“그곳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연정훈은 시선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뭐가 어울리지 않는데?”“교수님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곳은 교
연정훈은 안시연을 똑똑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시연은 몸으로 보답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그렇게 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걸까?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과감한 단어를 선택해서 말했다.“나랑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이를 유지하는 건 싫다, 이 뜻이야?”안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연정훈이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그러면 넌 우리가 몇 번이나 관계를 맺어야 나한테 진 신세를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한 번? 두 번? 시간으로 계산할래? 아니면 지금 당장 누워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하게 한 뒤 완전히 빚을 청산할 거야?”안시연은 마지막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여기 남으실래요? 안에서 씻으시면 돼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목적이 뚜렷한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훈은 안시연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오늘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서 갑자기 말을 바꾸고 너한테 매달리려 한다면 어쩔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교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요.”“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부드럽게,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교수님은 절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교수님이 주지혁 그 미친놈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웠다.이렇게 밀당하면 남자의 정복욕을 불타오르게 한다는 걸 안시연은 모르는 걸까?만약 안시연을 조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밀당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안시연은 그를 힐끔 보더니 안쪽 작은 칸막이로 가서 말했다.“제가 뜨거운 물 나오게 해드릴게요.”안시연이 발을 움직이자마자 연정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강압적으로, 하지만
새벽.침대에 누운 안시연은 천장의 밝은 조명을 바라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연정훈의 양보에 그녀의 미안함이 짙어졌다.분명 언짢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떠나기 전 그녀의 자물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안시연은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했고 꿈속에서조차 연정훈에게 미안했다.길가.우아하면서도 귀티 나는 링컨 타운카가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비서 진수빈은 일을 마친 뒤 차로 돌아갔다.연정훈이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눈꺼풀을 들어 확인해 보니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평소와 다르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내일 연산호 쪽에 있는 저택에 한 번 갔다 와. 가서 사모님에게 증조할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그곳으로 가서 효도를 다 하라고 세운시에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진수빈은 마음속으로 김세연을 위해 기도했다.진수빈 집안은 3대째 연씨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에 연씨 가문 이전 세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연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장수했고 두 어르신도 살아 계셨다. 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90세가 넘었는데도 정정했고 세운시에서 손꼽힐 정도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아주 엄격한 분이었고 손아랫사람들에게 냉혹했다. 김세연이 줄곧 세운시에 가는 걸 두려워했던 이유가 야단맞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데 연정훈은 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하며 그녀를 세운시로 보내려 했다. 그것은 김세연을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진수빈은 조금 전 안시연의 집 자물쇠를 바꾸어줄 때 그녀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그러나 진수빈의 생각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위해 화풀이하려는 것보다도 견제가 싫어서 그런 것이었다.김세연은 요즘 들어 그의 일에 있어 몇 번이나 선을 넘었다.그리고 안시연은...눈을 뜬 연정훈의 눈동자는 아주 어둡고 깊었다.그는 오랫동안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이번에 한 마리 기르면서 어르고
정인 그룹 본사 빌딩.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이현은 임유정에게 팔짱을 낀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정말 고마워, 유정 언니. 언니가 아니었으면 이번에 정인 그룹과 협력하기가 어려웠을 거야. 연 대표님이 그렇게 쉽게 승낙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임유정은 턱을 살짝 쳐들면서 미소를 지었다.“주 대표님이 능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난 그냥 살짝 도와줬을 뿐인데, 뭘.”주지혁은 인사치레를 하면서 조금 전 연정훈과 만났을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그들은 안시연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거만함이 느껴졌고 주지혁은 마치 그에게 뺨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출신이든 성과든 주지혁이 8배속으로 산다고 해도 절대 연정훈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주지혁은 절대 안시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원들 전용 엘리베이터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조이현은 임유정과 대화를 나누다가 멀지 않은 곳을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저 사람 안시연 씨 아냐?”임유정과 주지혁이 동시에 그곳을 바라보았다.직원용 엘리베이터에서 작업복을 입은 안시연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서류를 안은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주지혁은 믿을 수 없었고 임유정은 황당했다.그녀는 부승원의 법률 사무소에서 안시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이현과 연락할 때 연정훈이랑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김세연을 부추겨서 연정훈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세연은 겉으로 임유정의 말을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문 쪽에 사람을 심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김세연이 그 여자를 해결했을 줄 알았는데 안시연은 정인 그룹까지 들어왔다.조이현은 옆에서 오버하면서 혀를 찼다.“제가 저 여자를 얕봤나 봐요.”임유정은 말을 아꼈다. 가방을 든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손톱이
인턴들이 자리에 앉았고 안시연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쭉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 이 부장은 간단히 프로젝트 상황을 설명했다.이번 프로젝트는 장인 과학기술과 주지혁의 비산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고 LK은행에서 제3의 투자자로 참여했다.주효진은 이제 막 입사한 정인 과학기술의 직원이었다.아마 조이현의 체면을 봐서 이 부장이 주효진을 대리로 승진시켜 다른 직원들을 관리하게 했을 것이다.“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꼭 열심히 해서 이 부장님과 임 대표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주효진은 그런 말을 하면서 일부러 안시연의 얼굴을 쓱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의기양양함과 경멸이 느껴졌다.안시연은 못 본 척했다.회의가 끝나자 안시연 등 인턴들은 3층 기획팀에 남아서 임무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주효진은 대리로 승리하자마자 곧바로 임무를 분배했다.가장 귀찮은 일인 데이터 수집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안시연의 일이 되었다.주효진은 공적인 태도로 말했다.“이틀 내로 제출하세요.”그 말에 기획팀에서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이 있는 경험 있는 자들이 안시연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하필 앙숙과 일하게 되다니. 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맞붙을 수는 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퇴근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는데도 아주 작은 부분만 끝냈다.식당에서 나오니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다.안시연은 화장실에 갔다가 문 앞에서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주지혁과 마주쳤다.주지혁은 창백한 안색의 그녀를 보고 마음먹은 얼굴로 말했다.“효진이가 시연 씨를 난처하게 했어?”안시연은 손을 닦던 티슈를 버리고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내가 얘기했어. 그러지 말라고.”‘하,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주지혁은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시연 씨, 시연 씨는 프로젝트를 맡는 것에는 어울리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
양시연은 미리 손님이 올 예정이라 회사에 알렸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게다가 연정훈은 진수빈과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어찌 보면 사적인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양시연을 발견한 진수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시연 씨, 오랜만이에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굳이 이름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연정훈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진수빈은 눈치껏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양시연의 비서가 차를 따라주러 들어가려 하자 빠르게 막아섰다.“연 대표님이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 죄송하지만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진수빈의 말에 비서는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훈의 취향을 물었다.“다 괜찮습니다.”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고, 차라리 아침 식사를 하고 탈이 난다면 연정훈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직접 차를 따랐다.주변은 온통 조용하고 연정훈은 바삐 움직이는 양시연을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겨우 몇십 평방 남짓한 사무실은 연정훈의 휴게실보다도 작았다.하지만 사무실 배치에 많은 신경을 쓴 건지 탁자 위에 편백 화분이 눈에 띄었다.편백 나무 향이 솔솔 나는 사무실 안에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시연이 있었다.아늑한 분위기에 잠긴 연정훈을 양시연이 불렀다.“대표님.”“맛이 좋네요.”연정훈은 뜨끔해 갑자기 칭찬을 날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차를 내리는 사람이 손맛이 없는 편이네요. 너무 오래 숙성해 좋은 차를 낭비했어요.”“...”‘내가 차를 내린 걸 봤어? 봤냐고?’그러나 양시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밑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아직 신인이라 이쪽으로는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학원을 끊어줘야겠군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본인 같은 사장 아래에서 직원들이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9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회의실은 난리가 났다.손지은은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감히 날 잘라요?”양시연이 말했다.“네. 아주 잘 들으셨네요.”“왜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유를 몰라서 물어요?”손지은이 말문이 막혔다.양시연은 손지은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훑었다.인터참은 과거 거의 무너져가는 의료 보험 회사였다. 지금 남겨진 직원들 절반 이상은 그 회사 직원들이었다.회사 업무에 익숙해 보여 양시연은 경력자를 골라 남겼다.인수하고 처음에는 다들 열심히 일을 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양시연이 ‘말 잘 듣는’ 대표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점점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특히 손지은이 제일 대표적이었는데 자꾸 양시연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새로 사람을 뽑아 책임자를 따로 만들었고 어린 친구들이 더 착실하게 일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그런데 손지은은 성과를 내는 신인들이 꼴사나웠는지 문제가 있는 땅을 구매하도록 함정을 팠다.“토지 인수 건은 려욱 씨가 마음이 급해 큰 실수를 한 건 맞지만 다들 참여를 했으니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가 사직을 당해 마땅한지는 잘 알겠지요. 보상금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 측에서 손해 배상도 신청할 겁니다!”“참여했던 사람들은 제 발로 이 회사를 나가던지 앞으로 숨죽이고 회사 생활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손해 배상 신청하면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빚이 생길 겁니다. 회사에 이렇게 큰 손해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요?”“내가 행여나 모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충분한 조사를 거쳐 모두 알아냈어요!”회의실은 정적이 흘렀다.다들 양시연에게 이렇게 강한 모습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손지은은 아예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러자 양시연은 비서를 시켜 경호원을 대동해 직접 치워버렸다.손지은의 난동이 겨우 잠잠해질 무렵,
“방금 말한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이렇게 해봐. 먼저 연정훈을 꼬셔보는 거야. 과거에 정훈이도 네 감정을 이용했다며? 너도 한번 갚아주는 거야!”“...”양지원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가장 아슬아슬해지는 순간에 연씨 가문을 찾아 오빠로 삼는 거지!”결국은 그 오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양시연은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왜 양지원의 연애 충고를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지원은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오늘 밤엔 흥분에 겨워 말을 멈추지 않았다.그러자 양시연이 제때 말을 끊었다.“엄마, 그만해요. 난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모녀는 야밤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소파로 옮겨 2차전을 이었다.이런 이벤트는 과거 몇 년 사이 종종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새벽 시간에 자주 방을 찾아왔었다.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일도 이렇게 천천히 양시연에게 알렸다.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양지원은 긴 소매와 긴 바지 차림이 불편했다. 그래도 갑자기 슬립으로 갈아입는 건 이상했으니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방을 나서려는데 양지원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요즘 혁수랑 연락하고 있어?”“네. 저번 주에 연락했었어요.”양지원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됐어.”진실을 알아차린 양혁수는 꼭 한번 오성호와 소현정을 만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모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양지원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양지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그리고 모든 상황이 조금 진정되고는 영국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양씨 사업을 조금 물려받은 뒤 창업한다더니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들었다.양시연이 양지원을 위로했다.“자꾸 슬쩍 엄마 상황을 물어봤어요.”그 말에 양지원이 눈을 반짝였다.“정말?”“네!”양시연은 통화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
양지원이 인상을 팍 썼다.“너한테 넘기지 않는다는 거야?”“네. 태클을 걸고 싶은 모양이에요.”양시연의 솔직한 말에 양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정훈이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런가 보죠.”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차였다고 생각해 체면을 구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양지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더니 좋은 수가 떠오른 것처럼 몸을 바짝 일으켰다.이에 양시연도 흥미를 보이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며칠 뒤 너에게 국내 인사들을 소개해 줄게. 그런데 가장 먼저 연씨 가문으로 가자. 정훈이 엄마와 내가 어떤 사이인데 바로 널 수양딸로 삼고 큰 잔치를 벌이게 하는 거지. 그럼 너와 정훈이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되는 거야.”“...”양시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자신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는지는 잘 몰라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의 표정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양지원은 흥이 난 듯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정훈이 엄마가 널 괴롭혔다고 했지? 마침 잘됐네. 우리 한번 제대로 갚아주자.”모자를 한꺼번에 꼽 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사모님이랑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었어요?”양지원이 역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전해 들었어. 보아하니 빈부로 신분에 급을 메긴 것 같은데 그동안 연락을 아예 끊고 지냈어.”“절교예요?”“비슷하지.”양지원이 턱을 감싸며 말했다.“날 먼저 찾아와도 거들떠보지 않았지.”“정말요?”“그래. 그래도 네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먼저 연락해 식사 자리를 잡을게. 방심한 틈을 타 널 소개해 주는 거야.”벌써 구체적인 틀이 잡혔다.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양지원이 이런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니까 열심히 들어줘!’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임했다.그리고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지 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