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오늘 아침 연정훈이 골라준 샴페인 색의 나시 치마를 입어서 우아했다.그러나 김세연의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수치심을 느꼈다.김세연은 마치 물건의 값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는데 마치 벌거벗겨진 채 공개 처형당하는 기분이었다.“이름이 뭐니?”김세연이 물었다.안시연은 목이 타는 기분을 참으면서 작게 대답했다.“안시연이라고 합니다.”“몇 살?”“스물넷입니다.”김세연은 싱긋 웃더니 평온하게 말했다.“꽤 어리네.”그러고는 안시연을 힐끗 보고 말했다.“고개 들어봐.”안시연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김세연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꽤 예쁘네. 정훈이랑은 어떻게 안 거니?”안시연이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수님께서…”“교수님?”김세연의 눈살이 찌푸려지자 안시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역시나 김세연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너 성진대 다녀?”“…네.”“정훈이가 널 가르쳤었고?”안시연은 잠깐 침묵했다. 사생 관계라는 걸 밝히자 김세연은 무척 화가 난 듯 보였다.“너희 성진대 여대생들은 하나같이 영리하구나. 언제 너희 성진대 교장을 만나면 한마디 해야겠어.”안시연은 당황스러워 고개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김세연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여리고 청초하며 눈동자도 맑은 것이 보기 드문 미녀였고 그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김세연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녀는 연정훈이 여자를 여럿 만나고 다니는 것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에 그 학생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시연도 똑같은 요물이었다.김세연이 단호히 말했다.“넌 여기서 지낼 수 없다.”안시연은 이미 예상한 일이라 반박하지 않았다.“정훈이가 너에게 카드를 줬지?”김세연은 갑자기 강경한 태도로 명령을 내렸다.“지금 당장 여기서 떠나. 호텔도 괜찮고 월세방도 괜찮으니 네가 살 곳은 네가 알아서 찾아. 이 집은 정훈이가 성인이 됐을 때 걔 할아버지가 선물로 준 거야. 이 집에
안시연은 부랴부랴 떠난 뒤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마음이 복잡한 탓에 가는 길에 누군가 계속 사진을 찍었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길가 구석 자리에서 남자가 카메라를 꺼내며 빠르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임유정 씨, 사진 찍었습니다. 보내드렸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택시를 탄 안시연은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김세연의 말에 난처함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 호화로운 집에서 나오는 것엔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연정훈과 앞으로 어떤 사이로 지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잘 자지 못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있어 럭셔리 브랜드 매장에서 가장 비싼 보석처럼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그의 곁에 남는다면 안시연은 뭘 하든 항상 촉박하게 해야 했고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머리를 몇 번이나 굴려야 할 정도였다.연정훈에게 고맙고 또 그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동시에 그가 두려웠다.그런 생각을 하던 안시연은 결국 연정훈에게 똑똑히 의사를 전달하려고 마음먹었다.택시는 아파트에 도착했고 안시연은 돈을 지불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안시연은 문 앞에 서 있는 집주인을 마주쳤다.“성하 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김성하는 안시연을 보자 연신 눈을 흘겼다.“무슨 일이냐고요?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나한테 그걸 묻는 건지.”안시연은 의아했다.김성하는 몸이 뚱뚱한 편이지만 목소리가 얇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방언을 구사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안시연 씨, 전에 나한테 회계라고 하지 않았어요? 설마 날 속인 건 아니죠? 어젯밤에 글쎄 어떤 남자가 시연 씨 집 문 앞에서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시연 씨를 꼭 만나겠다고. 그래서 이웃집에서 신고했다니까요.”남자라는 말에 안시연은 곧바로 주지혁을 떠올렸다.그녀는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해 해명하려 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물었다.“성하 언니, 왜 저한테 연락하지 않으셨어요?”김성하는
집주인은 안시연의 상황을 꿰고 있었다. 부모도 없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만만했을 것이다.“계약금은 반 돌려줄게요. 그리고 이 집에 있는 가구 여기 두고 가면 200만 원 더 얹어줄게요. 어떻게 할래요?”김성하는 안시연에게서 돈을 떼어먹을 생각이 분명했지만 안시연은 그녀와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계약금 액수가 꽤 크다는 점이다. 지금 안시연은 급히 돈이 필요했고 돈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래도 마음 편히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집주인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다. 얼마 전 사건 때문에 이웃들이 그녀에게 불만을 품었었고 어제 주지혁이 찾아와서 난동까지 부렸으니 정말로 고소까지 가게 된다면 꼭 승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게다가 재판이라는 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가구는 두고 갈게요. 대신 400만 원 주세요. 현금으로요.”김성하가 눈을 부라렸다.“안...”안시연이 말했다.“싫으면 신고하시든가요.”김성하는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김성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 400만 원 줄 테니까 오늘 당장 짐 빼요!”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떠나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주지혁이 함께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철저히 벗어나는 셈이니 말이다.가구를 남겼다 보니 옷과 생필품 같은 것들만 챙기면 돼서 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집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안시연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가격이 싼 것뿐이었다.중개인은 안시연이 원하는 가격을 듣더니 그녀에게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결국 중개인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고 한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지하 차고를 개조한 곳인데 1년에 240만 원이었다.안시연은 가격을 조금 더 낮추고 싶었으나 집주인이 단호히 말했다.“싫으면 말고요. 여기는 경인이에요. 그쪽이 살던 시골이 아니라고요.”안시연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그녀 역시 경인 사람이었으나
협소한 공간 속에서 안시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누군가를 넘본 적 없어.”주지혁이 계속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지혁은 무척 후회했다. 안시연을 지나치게 압박한 탓에 남 좋은 일만 했으니 말이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주지혁은 그녀를 부르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저번에는 내가 심했어. 내가 사과할게.”안시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주지혁은 계속해 말했다.“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3년간 만난 정이 있잖아. 난 예전부터 시연 씨를 내 아내로 생각했었어. 난 정말로 시연 씨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이 안 가져도 괜찮아. 나도 더는 부담 주지 않을게. 그리고 외할머니를 데리고 경인을 떠나도 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아. 내가 준비해 줄게.”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를 보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숨을 내쉬며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유럽은?”“당연히 되지!”주지혁이 기쁜 목소리로 단숨에 승낙했다.안시연은 눈을 감은 뒤 코웃음치면서 일침을 가했다.“주지혁 씨, 쓸데없이 힘 빼지 마.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해외로 보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라니,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경인을 떠난다면 주지혁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시연 씨, 그...”“자꾸 시연 씨라고 부르지 마. 지혁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역겨워서 토 나올 정도니까.”안시연은 원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는데 최근 들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더욱더 원통해서 말투가 사나워졌다.“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통화 녹음본 조이현 씨한테 보낼 거니까. 조이현 씨 임신했다면서? 재벌 집 딸이랑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혁 씨 꿈이 부서질까 봐 두렵지 않아?”주지혁은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
안시연은 이틀 동안 편히 지냈다. 연정훈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잡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물론 이런 편안한 생활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자신은 멋대로 서로가 정해놓은 관계를 벗어났으니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연아?”외할머니의 부름에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잘라놓은 사과를 그녀에게 건넸다.최미란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서 시연에게 먹였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아닌데요? 저 살쪘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애교스럽게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최미란은 웃었다.옆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했다.“어르신,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효도하는 손녀가 있으니 말이에요.”최미란은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었고 그 바람에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도 자기 손녀를 칭찬했다.그 아주머니는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정말 얼굴도 예쁘고 복도 많네요. 재벌 집 딸처럼 보여요.”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그... 양지원 씨 같아요!”양지원은 이 나라 최고의 갑부였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칭찬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최미란의 눈빛을 보았다.그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줄로 알고 서둘러 물었다.“외할머니, 왜 그러세요?”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최미란이 또 발작한 줄로 알고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괜찮아, 괜찮아.”최미란은 정신을 차린 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어디 아프세요?”안시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최미란은 고개를 저었다.“어젯밤에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상황을 보더니 말을 아꼈다.안시연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류를 넣어도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는 앉을만한 의자조차 없었다. 연정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안으로 들어왔고, 안시연은 잠깐이지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안시연은 빠르게 침대맡의 조명을 켰다. 차고 안의 조명이 망가졌는데 미처 새 걸로 바꾸질 못했다.키가 큰 연정훈이 협소한 방 안에 서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 좁아 보였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안시연의 침대 위에 앉지 않고 말했다.“옷 입고 나랑 같이 돌아가.”안시연은 주먹을 쥐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교수님, 저 안 돌아갈래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싼 렌즈 뒤로 평온한 눈빛이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뜻밖이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물 마시세요.”연정훈은 컵을 건네받았다.“오늘 너무 늦었는데요.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오신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화를 내지 않고 물을 마신 뒤 덤덤히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안시연이 말했다.“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한숨을 쉬더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았다.그는 안경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안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손을 몸 앞에 놓았다. 마치 선생님과 면담하는 학생 같았다.안시연이 말했다.“그곳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연정훈은 시선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뭐가 어울리지 않는데?”“교수님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곳은 교
연정훈은 안시연을 똑똑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시연은 몸으로 보답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그렇게 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걸까?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과감한 단어를 선택해서 말했다.“나랑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이를 유지하는 건 싫다, 이 뜻이야?”안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연정훈이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그러면 넌 우리가 몇 번이나 관계를 맺어야 나한테 진 신세를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한 번? 두 번? 시간으로 계산할래? 아니면 지금 당장 누워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하게 한 뒤 완전히 빚을 청산할 거야?”안시연은 마지막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여기 남으실래요? 안에서 씻으시면 돼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목적이 뚜렷한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훈은 안시연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오늘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서 갑자기 말을 바꾸고 너한테 매달리려 한다면 어쩔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교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요.”“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부드럽게,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교수님은 절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교수님이 주지혁 그 미친놈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웠다.이렇게 밀당하면 남자의 정복욕을 불타오르게 한다는 걸 안시연은 모르는 걸까?만약 안시연을 조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연정훈은 안시연이 일부러 밀당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안시연은 그를 힐끔 보더니 안쪽 작은 칸막이로 가서 말했다.“제가 뜨거운 물 나오게 해드릴게요.”안시연이 발을 움직이자마자 연정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강압적으로, 하지만
새벽.침대에 누운 안시연은 천장의 밝은 조명을 바라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연정훈의 양보에 그녀의 미안함이 짙어졌다.분명 언짢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떠나기 전 그녀의 자물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안시연은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했고 꿈속에서조차 연정훈에게 미안했다.길가.우아하면서도 귀티 나는 링컨 타운카가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비서 진수빈은 일을 마친 뒤 차로 돌아갔다.연정훈이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눈꺼풀을 들어 확인해 보니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평소와 다르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내일 연산호 쪽에 있는 저택에 한 번 갔다 와. 가서 사모님에게 증조할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그곳으로 가서 효도를 다 하라고 세운시에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진수빈은 마음속으로 김세연을 위해 기도했다.진수빈 집안은 3대째 연씨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에 연씨 가문 이전 세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연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장수했고 두 어르신도 살아 계셨다. 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90세가 넘었는데도 정정했고 세운시에서 손꼽힐 정도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연정훈의 증조할머니는 아주 엄격한 분이었고 손아랫사람들에게 냉혹했다. 김세연이 줄곧 세운시에 가는 걸 두려워했던 이유가 야단맞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데 연정훈은 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하며 그녀를 세운시로 보내려 했다. 그것은 김세연을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진수빈은 조금 전 안시연의 집 자물쇠를 바꾸어줄 때 그녀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그러나 진수빈의 생각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위해 화풀이하려는 것보다도 견제가 싫어서 그런 것이었다.김세연은 요즘 들어 그의 일에 있어 몇 번이나 선을 넘었다.그리고 안시연은...눈을 뜬 연정훈의 눈동자는 아주 어둡고 깊었다.그는 오랫동안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이번에 한 마리 기르면서 어르고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부승희는 ‘으악’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무서워. 진짜 무서워.”부승희는 팔을 내밀어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요. 소름 돋는 거 봐요. 완전 실시간 소름 돋았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심코 던진 고백 같은 말에 이미 당황해 심장이 두근거리던 참이었다.부승희의 말에 더해 머리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승희의 팔을 잡고 살짝 움켜쥐었다.부승희는 침묵했다.“...”‘정말 어이없네.’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승우가 젊은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훈남 훈녀 조합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부승희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관심을 보였다.양시연은 이 틈을 타 어색함을 벗어나려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가요?”연정훈은 힐끔 그쪽을 보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별 얘기 없었는데.”대화하는 동안 이승우와 그 여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부승희는 의자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이승우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가벼운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윤린아 씨, 내 친구야.”부승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친구라고?”이승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친구가 뭔지 몰라?”“다른 사람 친구는 아는데 넌 잘 모르겠네.”“...”윤린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정확히 말하면 이승우 도련님은 제 클라이언트예요.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밝게 웃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윤린아가 떠나자 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여자친구야?”이승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너는 생각이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라고 했잖아.”부승희는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바
주변은 다시 한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술잔에 과일 주스를 채우려 했다. 이승우의 주책을 떠드는 입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연정훈은 술잔을 살짝 옮겨 부승희의 손길을 피했다.다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부승원은 차분한 얼굴로 부승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됐어. 앉아. 연정훈의 작전 방해하지 마. 인생에서 한 번뿐인 대사건이라고.”부승희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시연 씨, 내가 도우려 했는데 소용없네요. 오늘 밤 스스로 조심해야겠어요.”양시연은 침묵했다.“...”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들고 일어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 양시연의 손을 잡고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술잔을 올리는 틈을 타서 연정훈은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가리고 낮게 말했다.“술 좀 적게 마셔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았다.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연정훈은 입술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그 후에는 못 피할 거야.”양시연은 당황했다.???아직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주변에서 누군가 빠르게 외쳤다.“다들 들었어요? 신랑이 신부를 협박했어요! 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못 피한다네요!” “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을 꺼낸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단숨에 비웠다.그 사람도 금방 눈치를 채고 한 잔을 비우며 웃었다.“형, 신혼여행 가서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이 사람들 정말...’양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술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기 무섭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양지원은 계속해서 양시연 쪽 상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민수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기분이 상한 양지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양석진이 양지원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가서 시연을 좀 봐야겠어요.”“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시연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 없어.”양지원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테이블에 고정돼 있었다.연씨 가문의 테이블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민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그 안에 비난의 기류가 느껴졌다.‘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시길.’민수희는 침묵했다.“...”사실 민수희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분까지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민수희의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듯했다.“시연아,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은 술을 마시기 힘드신가 보다.”표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양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표세연은 직접 민수희의 잔에 주스를 따르며 다정하게 몇 마디를 건네려 했다.그러나 민수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녀를 바라봤다.표세연의 손이 멈췄고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연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수희의 얼굴이 굳어졌다.“할머니가 오늘 몸이 좀 불편하시니 이 잔은 할아버지가 대신할게. 너희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연호민은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잔을 두 사람을 향해 들어 올렸다.양시연과 연정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잔을 낮춰 깊이 예를 표했다.연호민이 자리에 앉자 민수희는 무언가 말하려다 연호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삼켰다.“세연아,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안으로 가서 쉬실 수 있도록 부축해 드리거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
“네. 맹세합니다.”양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객석에서는 이승우와 다른 하객들이 저마다 속삭이며 미소를 지었다.‘다행이다. 모든 게 완벽해.’단상 위에서 사회자가 말했다.“이제 양가의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반지 상자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상자 안에는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반지가 담겨 있었다.그 반지는 결혼식 며칠 전 연정훈이 직접 양시연에게 부탁해 받아 간 것이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셈이라 생각해.”양시연은 처음에는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반지를 내어주기 꺼렸지만, 결국 마음을 열었다.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순간이 단순히 계약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유산으로 증명되는 한 조각의 따스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들어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그 반지는 그녀의 손에 완벽히 맞았다.분명 그의 세심한 배려로 조정되었을 것이다.“이제 신부님 차례입니다.”부승희가 조용히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들어 올렸다.잠시 연정훈을 바라본 뒤 그의 손을 가만히 떠받치며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그 순간 그녀는 베일 너머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이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잠긴 무거운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감정은 한순간 억눌리며 불쾌함보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입술을 열었다.“그럴 일 없을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반지를 끝까지 밀어서 끼워줬다.현장에는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사회자가 위쪽에서 말했다.“신랑님, 이제 신부에게 입맞춤하셔도 됩니다.”이때 관객석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승우 등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장난스럽게 외쳤다.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시끄럽게 굴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희를 힐끗 보
결혼식 입구 모퉁이에 서서 바깥 햇빛이 발끝에 딱 맞게 드리워졌다.양시연은 결혼행진곡 멜로디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잠시 후 발을 잘못 내딛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양석진이 부드럽게 말했다.“긴장하지 마. 설령 실수하더라도 괜찮아.”양시연은 베일 너머로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봤다.“긴장되세요?”양석진은 잠시 멈칫했다.오늘에 이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양석진은 오랜 세월 동안 충분히 단련되었기에 긴장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말에 맞춰 양석진은 이렇게 말했다.“긴장되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마침내 잔디 쪽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석진의 팔을 잡았다.그녀가 첫발을 내딛자 뒤따르던 두 명의 브라이드 메이드가 양시연의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야외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에는 냉방 장치가 있어 온도는 적당했으며 햇살은 길 전체에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잔디 구역 모퉁이를 돌며 걸을 때까지는 양시연도 비교적 평온했지만, 연정훈을 향해 곧바로 이어지는 하얀 실크 러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 양시연은 자기 심장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주변의 시선은 모두 차단되었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정훈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그 순간마다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첫 만남은 대학교에서였다.그 당시 그는 교양 강의를 맡은 교수였고 멀리서 보았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이 젊고 준수하며 뛰어난 기품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그렇게 쉽게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연정훈을 부러워했었다.그 후로 이어진 만남은 하나하나 양시연에게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었다.심지어 황당했던 재회조차 양시연은 연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 후로는 더 황당한 관계가 지속되었다.연정훈과의 만남과 사랑은 마치 꿈과 같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은 깨어났고 남은 것은 참담한 기억과 되돌아보기 힘든 고통뿐이었다.양
“다행히 따로 준비한 웨딩드레스가 있어서요. 게다가 지금 메이크업이랑도 딱 어울리네요.”직원이 말했다.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여러분, 정말 죄송해요.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모두에게 작은 감사 선물을 준비할게요.”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힘들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다들 최선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크게 지연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자 연정훈의 답장은 단 한 글자였다.[응.]‘응?’양시연은 의아했다.연정훈을 하루 이틀 아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엔 그가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무슨 일이지?’아까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던 양시연은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맙소사. 정훈 씨, 혹시 내가 도망치려고 한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그런 게 아니었고 양시연은 양지원을 찾으러 간 거였다!양시연은 황급히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 아까 엄마를 찾으러 간 거예요.]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연정훈의 답장은 짧았다.[알았어.]연정훈은 이모티콘 하나 없이 대답했지만, 양시연은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괜히 긴장되었다.얼굴을 한 번 비비며 다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저 정말로...]도망가려던 게 아니라는 말이 채 쓰이기도 전에 연정훈의 답장이 먼저 왔다.[괜찮아. 어머니 찾는 거 도와줄까? 아까 우연히 뵀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한 글자씩 천천히 해독하듯 읽어보았다.‘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어 보이는데?’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결혼식 끝나고 말할게요. 여기 거의 다 준비됐어요.][알았어. 기다릴게.]마지막 메시지를 보자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다. 다행이야.’그녀는 다시 한번 연정훈은 이렇게 예민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
양지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히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코너를 돌자마자 연정훈을 마주쳤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다급한 표정과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모습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가는 거야?”“저...”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양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였고 그것이 양혁수였다!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여보세요?”“응...”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과 눈을 마주친 후 옆으로 밀고는 물었다.“괜찮아? 부하가 너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이어갔다.연정훈은 옆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양혁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 친구가 좀 과장했나 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약간 흔들렸는데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어서 허리를 살짝 부딪혔어.”“정말 괜찮은 거지?”“응. 멀쩡해. 그냥 검진받고 이따가 협력사랑 식사 약속도 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이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끊을게. 검진받아야 하거든.”“그래. 검사 다 끝나고 아무 이상 없으면 나랑 어머니한테 안부 꼭 전해.”“알았어.”양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연정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방금 양혁수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대요.”‘다행히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방금 일이 있었으면 양시연은 결혼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려 했던 걸까?’연정훈은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돌아서려다 갑자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