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손잡이가 돌아가는 그 1초 동안, 안시연은 혼이 날아갈 것 같았다.연정훈도 그녀의 몸에 누워 잠시 동작을 멈췄다.그러나 문은 예상과 달리 열리지 않았고 안시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이미 자물쇠를 바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마치 영혼이 본체에 돌아온 것처럼,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연정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일어서기를 바랐다.그러나 연정훈은 서두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의 입술을 깨물더니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오늘 저녁에 손님 온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안시연은 난감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연 씨, 문 열어요.”안시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움켜잡은 채 당황하지 않고 움직임을 이어갔다.안시연은 다리를 조이며 그의 움직임을 거절했다.문밖의 인기척이 커질수록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안시연과는 달리 연정훈은 더욱 여유가 넘쳤다.그녀는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왜 자신이 주지혁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연정훈이 계속해서 찾아오는지.연정훈은 주로 그녀의 몸만을 사랑하는 것이지 순애보 같은 스타일이 아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현재의 안시연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얼마쯤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고 거실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자 연정훈은 더이상 안시연을 놀리지 않고 본격적인 주제를 향해 달려갔다.안시연은 미칠 지경이었다.그렇게 얼마 뒤, 남자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자 안시연은 흐느끼며 엉겁결에 자신을 꼭 안았다.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니 안시연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연정훈은 눈을 감더니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고, 다시 무력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을 보여주었다.뼈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손가락 앞부분에는 검붉은 색이 묻어있었다.안시연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너무 긴장해서 아랫배 통증조차 못 느끼고 있었어...’그렇다, 생리
방음이 되지 않는 복도에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을 꼭 끌어당긴 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지혁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둥지둥하다가 연정훈을 끌고 아래층으로 뛰어갈 뻔하기도 했다.‘아 참, 나 핸드폰 집에 두고 왔지.’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든 그녀는 연정훈의 아련한 눈동자와 마주쳤고 그 바람에 귀가 뜨거워졌다.밖에서 주지혁은 아직도 전화를 걸고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정훈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그가 자신과 함께 조심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를 바랐다.하지만 벽에 기대어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는 연정훈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안시연은 다시 한번 그의 악랄함을 목격했다.그녀는 한때 그가 이전에 이런 무자비한 일을 자주 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주지혁은 언제든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쿵쾅대는 심장을 뒤로 한 채 애원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오늘 저녁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연정훈은 행동이 더욱 자유롭지 못했다.애원 가득한 안시연의 눈빛은 연정훈의 욕구를 더 불러일으켰다. 만약 주지혁이 갑자기 나타나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안시연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걸 했을 것이다.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정훈에게 반항하지도 못한 채 불쌍한 눈빛을 하며 말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주지혁이 있는 방향을 흘겨보다가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안시연도 바보는 아니었다.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두 팔을 들어 연정훈의 목을 잡고 힘껏 까치발을 들며 키스를 했다.작은 남자의 입술은 한없이 차가웠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했다.“교수님, 제발 내려가세요.”연정훈은 기쁜 나머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입을 꼭 맞췄다.키스보다는 연정훈의 일방적인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떨어질 때, 안시연의 눈에는
“왜 왔어요?”안시연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비닐 주머니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마구 캐물으려던 주지혁은 그녀의 보수적인 옷차림과 손에 든 생리대를 보고 약간 망설였다.“어디 갔었어요?”그러자 안시연은 천천히 다가와 문을 열며 말했다.“생리가 와서 생리대 사러 갔었어요.”“내 전화는 왜 안 받아요?”“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거실에 두고 충전 중이예요. 현금으로 결제했어요.”그녀는 시종일관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며 방에 들어가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아무런 내색 없이 차를 내왔다.집안을 빙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뒤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나서야 주지혁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물었다.“현관문 열쇠 바꿨어요?”안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 이후로 바꿨습니다.”지난번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다툼이 떠오르자 주지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았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주지혁은 기쁜 마음에 안시연의 얼굴에 뽀뽀했다.“아직도 화내는 거예요?”“화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곧 조이현 씨랑 결혼할 건데.”주지혁은 그녀가 질투하는 줄 알고 더욱 기뻐하며 안시연을 달랬다.“할머니 봐서라도 다른 사람 때문에 나한테 성질부리지 마요, 네?”‘곧 결혼해서 아내 될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니...’안시연의 마음속에 있던 혐오감은 극에 달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이 끓는 틈을 타서 그녀는 차를 들고 나가 주지혁과 어느 정도 거리를 고는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물었다.“사건은 언제 해결되는데요?”주지혁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영악한 눈빛을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다 됐어요, 이틀만 있으면 되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사건이 해결되기만 하면 그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사건 사고는 모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다가 주지혁의 권세가 아직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른
“시연 씨가 임신하면 내가 시연 씨를 해외로 보내줄게요. 시연 씨 혼자 외국에 있으면 많이 그리울 거니까 몇 년 안에 반드시 이혼하고 시연 씨랑 결혼할겁니다.”...정말 끔찍한 사랑이었다.두피마저 얼얼해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주지혁은 이 말을 마치고 침묵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며칠만 기다려요, 시연 씨 몸이 편해지면 같이 새로 산 집 보러 가요. 아, 우리 기념일 때 보러 갈까요?! 그럼 그날은 우리 신혼 밤을 보내는 셈이 되는거죠.”“시연 씨가 임신하면 사건 해결서랑 부동산 서류 그리고 20억 상당의 주식을 같이 줄게요.”앞의 말이 뻔뻔하다면 마지막의 말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그는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주지혁은 공포스러운 통제욕을 여실히 드러내며 안시연이 자신에게 단념할까 봐 기어코 그녀의 몸을 차지하려 했다.그 수단은 바로 임신으로써 그녀를 완전히 결박하는 것이었다....법률 사무소 로비에 앉아있던 안시연은 지난밤 주지혁과의 얽히고설킨 일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토할것 같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 도착하셨습니다.”“네.”안시연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현재로서 그녀는 주지혁에게 반항할 수 없기에 최악의 계획을 세우고 적어도 변호사를 잘 찾아야 했다. JX 법률 사무소는 부씨 가문 산하의 산업으로 현재 부승원이 관리하고 있으며 명성이나 실력 모두 경인 시에서 으뜸이었다.장 변호사가 매우 바쁜 탓에 면담 시간은 딱 15분으로 정해졌다.얼마 뒤, 사무실에서 나오는 안시연은 상대방의 모호한 말을 곱씹으며 불안에 떨었다.그때, 고개를 들어 보니 양복을 입은 한 무리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연정훈과 부승원이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곁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이 따라다녔다.안시연은 그 여자가 지난번 백화점에서 조이현과 이야기한, LK은행의 딸 임유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은 시간이 별로 없으십니다. 혹시 문수철, 문 변호사님과
안시연이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주지혁은 받지 않았다.그녀는 현재 불안에 떨고 있어 병원에 가 외할머니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를 걱정시킬까 봐서 말이다.안시연은 주지혁이 다시 전화할 틈을 기다려 법률 사무소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한편, 연정훈과 부승원은 일을 마치고 근처 빌딩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1층 유리창을 지날 때, 한 여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아득한 눈길로 바깥의 차들이 늘어선 것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안시연과 몇번 만나보며, 연정훈은 그녀가 좋지 않은 형편에서 완강히 버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도 그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담담하고 쓸쓸한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일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이런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또 괴롭힘을 당한 건가?’몇 초 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었고 그렇게 천천히 안시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차에 올라탔지만, 그 불쌍한 작은 얼굴은 연정훈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부승원에게 물었다.“시연이가 너희 법률 사무소는 왜 찾아온 거야?”그 말을 듣자 부승원의 싸늘한 눈빛이 갑자기 흥미로운 듯 번뜩였다.“몰라.”“모른다고?”“법률 사무소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걸 다 일일이 알아야 해?”부승원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알고 싶어? 그럼 내가 가서 물어볼게.”말을 끝내고 그는 조용히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연정훈은 곧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가로 갖다 댔다.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 없도록, 가볍게 피식 웃었다.‘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거군.’이윽고 부승원이 조롱하듯 말했다.“안시연 씨 꽤 예쁘더라.”“시연이는 예전에 내 제자였어.”“내 기억으로는 소현주 씨도 네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가라앉더니 이내 입술을 앙다
주지혁이 유 대표 얘기를 꺼내자 주효진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 그년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시연 씨가 나에게 얘기했다고? 유 대표 일은 내가 직접 본 거야.”“직접 봤다고?”주효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남매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주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난 지금 내가 안시연에게 약을 탔던 일을 말하는 거야.”“뭘 탔다고?”주지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몰랐어? 그럼 유 대표는 또 뭔데?”주효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주지혁은 이 일이 이미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 같아 싸늘한 얼굴로 주효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호통쳤다. 친오빠의 표정이 확 달라진 걸 본 주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잠시 후, 주효진은 주지혁에게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는 손뼉을 탁 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오빠, 유 대표는 안시연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주지혁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주효진은 이틀 전에 유 대표와 호텔에 갔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유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안시연 얘기를 꺼내더라고. 태도가 아주 안 좋았어. 안시연이 제 주제도 모르고 넘본다는지, 아무튼 엄청 언짢아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효진은 그의 옆에 앉아 계속 부채질했다.“유 대표가 안시연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날 밤 대체 어디 간 걸까? 무조건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에도 다른 남자와 잤어. 남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 걔는 오빠를 가지고 논 거라고.”주지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날 안시연의 몸에서 봤던 흔적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분명 다른 남자가 남긴 것이었지만 안시연은 주지혁이 그런 것이라고 속였다.유 대표에게 더럽혀진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주지혁은 안시연네 집에 여벌 옷을 두고 있었다. 그가 샤워하러 들어간 후 안시연은 그의 옷을 꺼내주었다.안시연이 옷장 앞에 서 있던 그때 시선이 옆에 놓인 가방과 목걸이에 향했다.연정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이었는데 그때 당시 버렸었다. 그런데 이튿날 이웃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돌려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지금 두 물건이 한데 놓여있으니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 꼭꼭 숨긴 죄가 언제든지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안시연은 가방을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주지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안시연은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예전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던 두 사람이 이젠 서로 얼굴을 봐도 아무 말이 없었다.주지혁은 그녀의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옆에 쾅 던졌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시연이 뒤를 돌아보았다.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헤어드라이기를 거두려고 주지혁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주지혁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옷 속을 마구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화들짝 놀란 안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생리 중이란 말이에요.”하지만 주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시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입술을 훔쳤다.“다른 걸 하면 되지. 아, 그리고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는 말 놓자.”“말을 놓자고요? 갑자기요?”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단둘이 있을 때 말 놓으면 편하잖아.”그러고는 계속하여 그녀의 몸을 더듬거렸다.“그럼 다른 걸 계속해볼까?”그의 뜻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할 줄 몰라.”예전이었더라면 쑥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고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점점 사라져 이제 남은 거라곤 미움밖에 없었다.안시연의 무뚝뚝한 표정을 본 주지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할 줄 모르는 거야, 해주기 싫은 거야?”주지혁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점점 억
확신에 찬 주지혁의 태도와 눈앞의 가방과 목걸이를 보며 안시연은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그런데 이상한 건 내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얼굴만 봐도 역겨운 주지혁 앞에서 다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나 보다.안시연은 눈을 잠깐 감았다가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인정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주지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팔을 꽉 잡고 이를 깨물었다.“예전에 나에게 했던 그 얘기는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졌지만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당신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뭘 또 물어?”주지혁은 화가 나다 못해 핏대까지 세웠다. 그녀에게 손찌검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말했다.“시연 씨, 당신 예전에는 이렇게 쌍스러운 여자가 아니었잖아.”안시연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쌍스럽다는 소리에 안시연의 표정이 창백해지더니 마음속에 오랫동안 꾹 참아왔던 답답함과 원망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그녀는 주지혁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내가 쌍스럽다고? 주지혁,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해? 난 당신과 3년을 만났어. 나 몰래 먼저 재벌 집 딸과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애인인 척하라면서 날 해외로 내쫓았잖아. 그리고 당신 여동생이 나에게 약을 타서 먹인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몹쓸 짓을 당했어.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는데? 전화를 받기나 했어? 그날 주차장에서 날 봤지? 내가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했었는데 날 도와주기나 했어?”연거푸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도 주지혁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억지를 부렸다.“난 우리 미래를 위하여...”안시연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우는 얼굴보다도 더 슬픈 웃음이었다.“우리 미래를 위한 거라고? 그래,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리고 싶네. 날 위한다면서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만들어? 뻔뻔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니 온몸이 막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
변백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옆에 꼭 잡아 두고 계속 타자를 했다.[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 없지.]“...”변백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빼앗아 들더니 토독토독 타자를 했다.[대단한 실력자이신 네가 그럼 우리 가문 유전자 개량에 힘 좀 써보지 그래?][그러니까 내 매부가 되어줘.]그리고 서늘한 미소를 짓는 이모티콘까지 덧붙였다.양혁수는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되찾아왔고 아래층에서 여전히 소녀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난 엄마가 하도 눈치를 줘서 도운 것뿐이에요.”“엄마가 그러는데 오빠가 지혜 씨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더러 오빠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라고 했단 말이에요.”양혁수는 옆에 앉아 있는 변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눈빛엔 장난기가 스쳤다.변백호는 무표정하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지혜는 집요하게 변여름을 부추겼다.“바로 그거야! 어쩌면 혁수 씨도 그런 구실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 대로 먼저 혁수 씨 마음을 잡고 다시 내 방법대로 해.”“거절할게요.”“왜?”“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니까요.”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며 그냥 사실을 말하는 듯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난 오빠가 정말 좋아요.”변여름이 한 번 더 강조하자 노지혜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재미없어.”“좋아하면 그냥 덮쳐야지.”“싫어요. 혁수 오빠가 싫어할 거예요.”“너 진짜 재미없다.”노지혜의 한숨 섞인 투정과 함께 순간 침묵이 흘렀다.조금 전까지 변백호를 놀리던 양혁수는, 예상치 못한 변여름의 고백에 바짝 굳어버려 변백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변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양혁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았는지 변백호는 다시 양혁수의 폰을 빼앗았으며 잠금 해제를 하고 재
변여름은 정말 집에 없었고 양혁수는 도착한 지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변씨 가문에는 가족 인수가 많아 평소에는 모이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양혁수는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 변씨 가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성격이 잘 맞아 변백호의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여겼고 양혁수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고 변씨 가문에 오면 자유롭게 행동했다.이번에는 달랐다. 변여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양혁수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가장 한적한 방을 요구했고 결혼식 전까지는 운동하고 식사하는 것 외에는 혼자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변씨 가문 사람들을 최대한 피했다.결혼식 전날 저녁 양혁수는 야외 수영을 마친 뒤 식당을 지나가다가 가까운 가정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오는 길에 마침 변여름과 마주쳤다.그는 흰색 긴 잠옷을 입고 간단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변여름은 긴팔 옷과 긴 바지를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는 변백호의 말을 듣지 말고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고 후회했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른다운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그런데 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 후 빠르게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양혁수는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떨어지는 두 장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달했다.‘칙.’불쾌한 표정을 짓고 그는 병뚜껑을 열어 물을 반 컵 마시며 얼굴을 찌푸린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변백호가 그를 술자리에 초대했다.양혁수는 짜증이 났지만 두 잔 정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변씨 가문의 와인 저장고는 엄청나게 컸다. 안팎으로 세 겹으로 되어 있었고 마치 도서관 같았다.두 사람은 직접 내려가 와인을 고른 뒤 양혁수는 가장 비싼 와인만 골랐다.와인을 들고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
양혁수는 결국 변씨 가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양지원의 역지사지 전략 때문도 아니었고 변여름 때문도 아니었으며 변백호 때문이었다.그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변백호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10년 넘게 쌓아온 우정이 변여름의 장난 때문에 틀어질 이유는 없었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지 않으면 아마 변여름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뿐이었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적당해졌다.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변백호가 직접 그를 마중 나왔다.변백호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양혁수는 짐 가방을 변백호에게 던지고 마치 대장처럼 앞장서서 걸어갔다.변백호는 이미 익숙했다. 예전에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참아냈고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고를 쳐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짐을 들어주는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공항을 나서자 양혁수는 뒷좌석으로 향했다.그때 두 명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양혁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하며 차에 탄 변백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변백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꼭 따라와야 한다고 해서 달래도 소용없었어.”양혁수는 말이 없었다.노지혜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지금은 여섯 살이지만 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알록달록한 큰 거미를 들고 변백호의 베개 밑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변백호 거의 기절할 뻔했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내내 졸면서도 신경은 예민했다.이상하게도 이 두 아이는 내내 조용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변백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아이는 각자 카메라를 들고 양혁수를 계속 찍고 있었다.“너희 뭐 하는 거야?”작은 여자아이 하니가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는 달콤하고 순수하며 설탕을 입힌 사과 같았다.“마크가 영상을 찍으면 고모랑 뭐든 바꿔줄 수 있다고 했어요.”작은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혁수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그의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