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혁이 유 대표 얘기를 꺼내자 주효진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 그년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시연 씨가 나에게 얘기했다고? 유 대표 일은 내가 직접 본 거야.”“직접 봤다고?”주효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남매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주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난 지금 내가 안시연에게 약을 탔던 일을 말하는 거야.”“뭘 탔다고?”주지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몰랐어? 그럼 유 대표는 또 뭔데?”주효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주지혁은 이 일이 이미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 같아 싸늘한 얼굴로 주효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호통쳤다. 친오빠의 표정이 확 달라진 걸 본 주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잠시 후, 주효진은 주지혁에게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는 손뼉을 탁 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오빠, 유 대표는 안시연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주지혁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주효진은 이틀 전에 유 대표와 호텔에 갔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유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안시연 얘기를 꺼내더라고. 태도가 아주 안 좋았어. 안시연이 제 주제도 모르고 넘본다는지, 아무튼 엄청 언짢아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효진은 그의 옆에 앉아 계속 부채질했다.“유 대표가 안시연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날 밤 대체 어디 간 걸까? 무조건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에도 다른 남자와 잤어. 남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 걔는 오빠를 가지고 논 거라고.”주지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날 안시연의 몸에서 봤던 흔적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분명 다른 남자가 남긴 것이었지만 안시연은 주지혁이 그런 것이라고 속였다.유 대표에게 더럽혀진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주지혁은 안시연네 집에 여벌 옷을 두고 있었다. 그가 샤워하러 들어간 후 안시연은 그의 옷을 꺼내주었다.안시연이 옷장 앞에 서 있던 그때 시선이 옆에 놓인 가방과 목걸이에 향했다.연정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이었는데 그때 당시 버렸었다. 그런데 이튿날 이웃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돌려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지금 두 물건이 한데 놓여있으니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 꼭꼭 숨긴 죄가 언제든지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안시연은 가방을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주지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안시연은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예전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던 두 사람이 이젠 서로 얼굴을 봐도 아무 말이 없었다.주지혁은 그녀의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옆에 쾅 던졌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시연이 뒤를 돌아보았다.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헤어드라이기를 거두려고 주지혁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주지혁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옷 속을 마구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화들짝 놀란 안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생리 중이란 말이에요.”하지만 주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시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입술을 훔쳤다.“다른 걸 하면 되지. 아, 그리고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는 말 놓자.”“말을 놓자고요? 갑자기요?”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단둘이 있을 때 말 놓으면 편하잖아.”그러고는 계속하여 그녀의 몸을 더듬거렸다.“그럼 다른 걸 계속해볼까?”그의 뜻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할 줄 몰라.”예전이었더라면 쑥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고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점점 사라져 이제 남은 거라곤 미움밖에 없었다.안시연의 무뚝뚝한 표정을 본 주지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할 줄 모르는 거야, 해주기 싫은 거야?”주지혁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점점 억
확신에 찬 주지혁의 태도와 눈앞의 가방과 목걸이를 보며 안시연은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그런데 이상한 건 내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얼굴만 봐도 역겨운 주지혁 앞에서 다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나 보다.안시연은 눈을 잠깐 감았다가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인정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주지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팔을 꽉 잡고 이를 깨물었다.“예전에 나에게 했던 그 얘기는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졌지만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당신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뭘 또 물어?”주지혁은 화가 나다 못해 핏대까지 세웠다. 그녀에게 손찌검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말했다.“시연 씨, 당신 예전에는 이렇게 쌍스러운 여자가 아니었잖아.”안시연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쌍스럽다는 소리에 안시연의 표정이 창백해지더니 마음속에 오랫동안 꾹 참아왔던 답답함과 원망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그녀는 주지혁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내가 쌍스럽다고? 주지혁,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해? 난 당신과 3년을 만났어. 나 몰래 먼저 재벌 집 딸과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애인인 척하라면서 날 해외로 내쫓았잖아. 그리고 당신 여동생이 나에게 약을 타서 먹인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몹쓸 짓을 당했어.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는데? 전화를 받기나 했어? 그날 주차장에서 날 봤지? 내가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했었는데 날 도와주기나 했어?”연거푸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도 주지혁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억지를 부렸다.“난 우리 미래를 위하여...”안시연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우는 얼굴보다도 더 슬픈 웃음이었다.“우리 미래를 위한 거라고? 그래,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리고 싶네. 날 위한다면서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만들어? 뻔뻔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니 온몸이 막
주지혁의 계획은 그렇게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지금 안시연의 가장 큰 걱정은 외할머니였다. 하여 이튿날 아침 바로 외할머니의 간병인을 바꾸고 새 간병인에게 그녀 말고는 아무도 외할머니와 만나게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리고 연정훈이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과 목걸이도 전부 팔아버린 후 문 변호사에게 잘 좀 신경 써달라고 선입금했다.여러 일을 마쳤는데도 주지혁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마치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안시연은 매일 불안에 떨었다.아니나 다를까 이틀 뒤에 주지혁이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연 씨, 예전 일은 더는 따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위브로 와. 우리가 전에 눈여겨봤던 신혼집에서 기다릴게. 나중에 당신이 임신하면 해외로도 보내줄게.”안시연은 역겨운 나머지 주지혁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혁이 낯선 번호로 전화했는데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시연 씨,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안시연은 이미 다 같이 죽을 준비까지 마쳤다.“마음대로 해. 할 수 있으면 날 감옥에 처넣어보든가.”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지혁이 살벌하게 웃었다. 안시연은 전화를 끊고 다시 번호를 차단했다.그녀는 책상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긴 했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외할머니가 혼자 남겨지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전화를 끊은 주지혁은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때 가느다란 팔뚝이 주지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조이현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주지혁의 귓불에 키스하며 유혹했다.이틀 전 주지혁은 그녀를 불러와 밤낮으로 아주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이현은 주지혁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왜? 일이 잘 안 풀려?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할까?”주지혁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조이현을 품에 끌어안았다. 조이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안시연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조이현
한 시간 후, 법률 사무소.“때가 어느 때인데 소환을 거절하고 도망쳐? M국에서 블록버스터를 찍는 줄 아나.”한 젊은 여자 변호사가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부승원이 그 소리를 들었다.부승원은 법률 사무소의 파트너로서 다가가 상황을 물어보았다. 변호사 문나경이 한숨을 내쉬면서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했다. 부승원은 중점을 단번에 캐치했다.“안시연 씨?”“네, 그 여자예요.”문나경이 분노를 터트렸다.“그 여자도 참 재수가 없어요. 어떻게 된 건지 자기 사장을 건드린 바람에 그 사장이 지금 괴롭히려고 난리도 아니에요.”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문나경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후 옆으로 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출장 다녀온 연정훈이 비행기에서 내린 지 고작 두 시간 남짓 되었다. 부승원이 전화했을 때 그는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무슨 일이야?”부승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연 씨에게 일이 생겼어.”연정훈은 무덤덤하게 계속 물을 마셨다.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 이젠 안시연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샤워한 탓인지 몸의 에너지가 막 끓어올라 안시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살짝 구미가 당겼다.그는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물었다.“무슨 일이 생겼는데?”“지금 경찰서에 있는데 주지혁이 아주 괴롭히려고 작정했나 봐.”그 소리에 연정훈은 두 눈을 떴고 부승원이 계속하여 말했다.“시연 씨도 참 재미있는 여자야. 외할머니가 위독하셔서 병원에 급히 가야 한다면서 경찰 앞에서 대놓고 도망쳤대.”연정훈은 실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그날 밤 병원에서 안시연이 초조하게 설명하던 가여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주지혁이 외할머니의 수술비를 가로챈 바람에 억울해도 참고 양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위독한 지금 그녀는 감옥에 가게 생겼다.분명 안시연을 본 것도 아닌데 연정훈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전화
안시연은 곤경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연정훈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지난번에도 연정훈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지옥 속에 사는 그녀를 인간 세상에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안시연은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훈은 벌겋게 부어오른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언제든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단 여기서 나가자.”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한여름이라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밖으로 나와보니 석양의 잔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안시연은 마치 오랜 시간 실명했던 사람처럼 갑자기 햇볕을 쬐어 그런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여러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할 때마다 연정훈이 부축해주었다.안시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도 모르게 연정훈의 양복 옷자락을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교수님...”연정훈은 괜찮다고 무덤덤하게 대답한 후 그녀를 부축하여 차에 올라탔다.멀지 않은 나무 밑에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가는 모습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문득 클럽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제야 다 알게 되었다.‘안시연과 붙어먹은 남자가 연정훈이었구나!’주지혁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검은색 벤틀리를 보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어쩐지 날 배신하더라니. 더 높은 나무에 올라탄 거였어!’휴대 전화가 울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조이현의 전화였다.“지혁 씨, 나 배 아파. 병원에 데려다주면 안 돼?”엄살을 부리는 조이현의 목소리에 주지혁은 짜증이 확 밀려왔다. 특히 점점 멀어져가는 연정훈의 차를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이현의 말에 무뚝뚝하게 대답
안시연이 눈물을 쓱 닦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제가 갚아드릴게요...”“지난번에 돈을 빌려 갈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을 쳤다.“헛약속을 하는 버릇은 여전하네?”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그녀가 더는 울지 않자 연정훈도 장난을 멈췄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안시연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일단 할머니께 가봐. 배상은 나중에 진정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안시연은 연정훈이 장난삼아 한 얘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 이 순간 연정훈의 의도가 뭐든 안시연은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의사에게서 상황을 자세히 전해 들은 후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외할머니를 보고 나왔을 때 의사들도 이미 다 퇴근한 시간이었다.연정훈은 아직도 가지 않고 복도에 있었다. 안시연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교수님, 저녁 드셨어요?”연정훈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안시연도 쓸데없는 얘기인 걸 뻔히 알면서도 연정훈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었다.안시연이 또 한마디 했다.“안 드셨으면 제가 밥 살게요...”연정훈은 살짝 감동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밥 사줄 돈이 있어?”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무일푼이었다.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안시연은 2초 정도 망설이다가 결국 따라나섰다.엘리베이터가 크지 않은 데다가 또 둘 뿐이라 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행히 십여 초 만에 아래층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마주 향해 걸어오는 주지혁, 조이현과 딱 마주쳤다.“임신이라니, 정말 깜짝 놀랐어.”얼굴에 화색을 띠고 얘기하던 조이현은 안시연을 보자마자 순간 멈칫했다.안시연은 이젠 주지혁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았고 남은 거라곤
주지혁도 평소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하지만 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을 땐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연정훈이 주지혁에게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걸 알면서도 안시연은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려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주지혁과 조이현의 표정이 아주 변화무쌍하게 바뀌었고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화색을 띠던 조이현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제가 지혁 씨에게 빨리 처리하라고 다그칠게요.”“그래.”연정훈은 덤덤하게 대답한 후 더는 두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시연을 껴안고 자리를 떠났다.다른 남자의 품에서 고분고분한 안시연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른 주지혁은 왼손을 불끈 쥐었다. 그의 화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조이현이 원망을 쏟아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주지혁은 애써 화를 억눌렀다.“밑에 애들이 한 거라 나도 잘 몰라.”“어찌 됐든 일단 소송부터 취하해.”조이현은 결론부터 내렸다.“안시연이 공금을 횡령했든 안 했든 중요하지 않아. 걔가 당신 회사를 팔았더라도 고소 못 해. 연정훈을 건드리면 당신이 아니라 우리 아빠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그러고는 안시연과 연정훈이 떠난 방향을 보며 짜증을 냈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안시연이 그녀와 주지혁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조이현이 갑자기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주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려고?”“유정 언니에게 전화해서 알려줘야지.”주지혁은 순간 멈칫했다. 임유정의 수단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시연이 임유정을 만난다면 절대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조이현을 말리고 싶은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쳤지만 결국 참았다. 임유정이 나서는 것도 나쁠 게 없었다. 안시연이 현실을 직시하면 다시 주지혁의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주지혁은 연정훈이 약혼녀와 안시연 사이에서 절대 안시연을 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그가 자주 머무르는 강남시티로 왔다.오는 길 내내 안시연은 고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
양시연은 미리 손님이 올 예정이라 회사에 알렸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게다가 연정훈은 진수빈과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어찌 보면 사적인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양시연을 발견한 진수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시연 씨, 오랜만이에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굳이 이름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연정훈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진수빈은 눈치껏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양시연의 비서가 차를 따라주러 들어가려 하자 빠르게 막아섰다.“연 대표님이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 죄송하지만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진수빈의 말에 비서는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훈의 취향을 물었다.“다 괜찮습니다.”연정훈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고, 차라리 아침 식사를 하고 탈이 난다면 연정훈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직접 차를 따랐다.주변은 온통 조용하고 연정훈은 바삐 움직이는 양시연을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겨우 몇십 평방 남짓한 사무실은 연정훈의 휴게실보다도 작았다.하지만 사무실 배치에 많은 신경을 쓴 건지 탁자 위에 편백 화분이 눈에 띄었다.편백 나무 향이 솔솔 나는 사무실 안에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시연이 있었다.아늑한 분위기에 잠긴 연정훈을 양시연이 불렀다.“대표님.”“맛이 좋네요.”연정훈은 뜨끔해 갑자기 칭찬을 날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했다.그러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차를 내리는 사람이 손맛이 없는 편이네요. 너무 오래 숙성해 좋은 차를 낭비했어요.”“...”‘내가 차를 내린 걸 봤어? 봤냐고?’그러나 양시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밑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아직 신인이라 이쪽으로는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학원을 끊어줘야겠군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지금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본인 같은 사장 아래에서 직원들이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9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회의실은 난리가 났다.손지은은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감히 날 잘라요?”양시연이 말했다.“네. 아주 잘 들으셨네요.”“왜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유를 몰라서 물어요?”손지은이 말문이 막혔다.양시연은 손지은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훑었다.인터참은 과거 거의 무너져가는 의료 보험 회사였다. 지금 남겨진 직원들 절반 이상은 그 회사 직원들이었다.회사 업무에 익숙해 보여 양시연은 경력자를 골라 남겼다.인수하고 처음에는 다들 열심히 일을 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양시연이 ‘말 잘 듣는’ 대표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점점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특히 손지은이 제일 대표적이었는데 자꾸 양시연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새로 사람을 뽑아 책임자를 따로 만들었고 어린 친구들이 더 착실하게 일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그런데 손지은은 성과를 내는 신인들이 꼴사나웠는지 문제가 있는 땅을 구매하도록 함정을 팠다.“토지 인수 건은 려욱 씨가 마음이 급해 큰 실수를 한 건 맞지만 다들 참여를 했으니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가 사직을 당해 마땅한지는 잘 알겠지요. 보상금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 측에서 손해 배상도 신청할 겁니다!”“참여했던 사람들은 제 발로 이 회사를 나가던지 앞으로 숨죽이고 회사 생활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손해 배상 신청하면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빚이 생길 겁니다. 회사에 이렇게 큰 손해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요?”“내가 행여나 모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미 경찰에 신고했고 충분한 조사를 거쳐 모두 알아냈어요!”회의실은 정적이 흘렀다.다들 양시연에게 이렇게 강한 모습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손지은은 아예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러자 양시연은 비서를 시켜 경호원을 대동해 직접 치워버렸다.손지은의 난동이 겨우 잠잠해질 무렵,
“방금 말한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이렇게 해봐. 먼저 연정훈을 꼬셔보는 거야. 과거에 정훈이도 네 감정을 이용했다며? 너도 한번 갚아주는 거야!”“...”양지원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가장 아슬아슬해지는 순간에 연씨 가문을 찾아 오빠로 삼는 거지!”결국은 그 오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양시연은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왜 양지원의 연애 충고를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지원은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오늘 밤엔 흥분에 겨워 말을 멈추지 않았다.그러자 양시연이 제때 말을 끊었다.“엄마, 그만해요. 난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모녀는 야밤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소파로 옮겨 2차전을 이었다.이런 이벤트는 과거 몇 년 사이 종종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새벽 시간에 자주 방을 찾아왔었다.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의 일도 이렇게 천천히 양시연에게 알렸다.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양지원은 긴 소매와 긴 바지 차림이 불편했다. 그래도 갑자기 슬립으로 갈아입는 건 이상했으니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방을 나서려는데 양지원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요즘 혁수랑 연락하고 있어?”“네. 저번 주에 연락했었어요.”양지원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됐어.”진실을 알아차린 양혁수는 꼭 한번 오성호와 소현정을 만나고 싶다고 뜻을 밝혔고 모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양지원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양지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그리고 모든 상황이 조금 진정되고는 영국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양씨 사업을 조금 물려받은 뒤 창업한다더니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들었다.양시연이 양지원을 위로했다.“자꾸 슬쩍 엄마 상황을 물어봤어요.”그 말에 양지원이 눈을 반짝였다.“정말?”“네!”양시연은 통화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
양지원이 인상을 팍 썼다.“너한테 넘기지 않는다는 거야?”“네. 태클을 걸고 싶은 모양이에요.”양시연의 솔직한 말에 양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정훈이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런가 보죠.”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차였다고 생각해 체면을 구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양지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더니 좋은 수가 떠오른 것처럼 몸을 바짝 일으켰다.이에 양시연도 흥미를 보이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며칠 뒤 너에게 국내 인사들을 소개해 줄게. 그런데 가장 먼저 연씨 가문으로 가자. 정훈이 엄마와 내가 어떤 사이인데 바로 널 수양딸로 삼고 큰 잔치를 벌이게 하는 거지. 그럼 너와 정훈이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되는 거야.”“...”양시연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자신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는지는 잘 몰라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의 표정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양지원은 흥이 난 듯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정훈이 엄마가 널 괴롭혔다고 했지? 마침 잘됐네. 우리 한번 제대로 갚아주자.”모자를 한꺼번에 꼽 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사모님이랑 친한 친구 사이 아니었어요?”양지원이 역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전해 들었어. 보아하니 빈부로 신분에 급을 메긴 것 같은데 그동안 연락을 아예 끊고 지냈어.”“절교예요?”“비슷하지.”양지원이 턱을 감싸며 말했다.“날 먼저 찾아와도 거들떠보지 않았지.”“정말요?”“그래. 그래도 네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먼저 연락해 식사 자리를 잡을게. 방심한 틈을 타 널 소개해 주는 거야.”벌써 구체적인 틀이 잡혔다.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양지원이 이런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그러니까 열심히 들어줘!’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임했다.그리고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지 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