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껏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낯선 곳에 혼자 버려지니 두려움이 덜컥 밀려와 저도 모르게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잡은 것이었다.연정훈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 이 행동이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다시 손을 놓았다. 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시연이 이 어색함을 깨뜨리려고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연정훈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내가 널 구하러 가기 전에 연속 몇 시간이나 일했는지 알아?”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막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새벽 다섯 시부터 쉬지를 못했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네 소식을 들었거든.”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미안해졌다. 안시연이 뭐라 얘기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가로채면서 농담하듯 말했다.“너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뭐. 연속 세 번이나 말로만 고맙다고 했잖아.”안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장난을 눈치챈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교수님의 은혜를 그냥 받으려는 뜻은 아니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맙다고만 했을 뿐인데...’연정훈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손을 내밀어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교활하고 능숙한 남자였다.“가서 샤워해. 그리고 마음도 좀 진정하고.”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안시연의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연정훈이 곧바로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 보탰다.“진정되고 나서 잘 생각해 봐.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욕실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연정훈의 농담 반 진담 반인 말 때문에 안시연은 계속 시무룩해 있었다.연정훈은 벌써 안시연을 세 번이나 구해주었다. 처음에 ‘보답’한 것 말고 나머지 두 번은
금방 회의를 마친 연정훈이 안경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이 집안의 도우미는 규정을 알고 있어 절대 서재 문을 두드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안시연뿐이다.그는 안경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샤워를 마친 여자의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안시연이 쟁반을 든 채 힘겹게 서 있었다. 연정훈이 문을 열자 쭈뼛쭈뼛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설명했다.“아주머니가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쟁반에 꽤 많은 음식이 담겨있었다. 연정훈은 덤덤하게 대답한 후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내주었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옆을 스쳤다.서재가 안방보다 더 컸고 높이도 훨씬 더 높았다. 커다란 책장이 벽면 한쪽에 놓여있었는데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안시연은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방안의 비싼 물건을 어지럽혔다간 큰일이니까.쟁반을 상 위에 내려놓고 나서야 긴장했던 어깨를 풀었다.연정훈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안시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시연이 허리를 굽혀 그릇을 정리했다. 그녀의 반쯤 마른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고 그의 잠옷 가운을 입은 모습이 왠지 모르게 유혹적이었다.안시연이 허리를 곧게 펴자 연정훈도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연정훈은 계속 노트북만 들여다보았다. 안시연은 막연한 얼굴로 책상 옆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그에게로 다가갔다.“교수님, 식사 안 하세요?”연정훈이 아무 대답 없자 안시연은 멋쩍어하며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차를 다 마신 걸 본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제가 차 한잔 따라드릴게요.”그러고는 차를 가지려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연정훈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당겨 자기 다리에 앉혔다.갑자기 그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말문이 막혀버렸다.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차
잠옷 가운이 벗겨지면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연정훈의 뜨거운 시선에 안시연은 마치 사과처럼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몇 초 후 안시연은 몸을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옷장 안에 있었다고요.”맛을 봤으니 당연히 놓아줘야지.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아, 생각났다. 있긴 있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내가 도우미에게 가져다 놓으라고 했지, 정말. 깜빡했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나?’그녀는 화가 났지만 찍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으로 째려보기만 하며 하소연했다.안시연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충분히 매혹적인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하여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일어나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옆에 책상이 있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이미 예상한 듯 또 예상하지 못한 듯한 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은 순간 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읍...”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혀와 입술이 마구 뒤섞였다. 몸이 나른해진 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연정훈의 어깨를 잡고 그의 호흡에 따라 움직여야만 충분한 산소를 흡입할 수 있었다.연정훈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점점 아래로 향하다가 그녀의 가운을 벗겼다.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발끝으로 나무 책상의 한쪽을 디뎠다.머릿속이 뒤죽박죽된 그녀는 그의 키스를 피해 목을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다른 데서 해요...”흥분한 연정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볼에 입맞춤했다.“여기서 안 할게.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고개를 어깨에 깊숙이 파묻었다.연정훈의 코끝에 샴푸 냄새가 스쳤다. 분명 평소에 자주 쓰는 샴푸지만 오늘따라 더 색다르고 유혹적이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에 눕혔다. 하지만 바로 덮친 게 아니라 소파 옆에 서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을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을 보고 있자니 호텔에서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두 볼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남자를 즐겁게 해준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눈 딱 감고 먼저 그의 벨트를 풀었다.눈치 보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구부리더니 턱을 살짝 올리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격렬한 키스에 안시연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옅은 신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안시연은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보려 했다. 연정훈은 상이라도 내리듯 잠깐 풀어주고는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에게 소리 없는 위안으로 다가왔다.안시연은 정신이 해롱해롱해져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휙 돌렸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소파 등에 기대 엎드리라고 했다.연정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안시연은 살짝 당황했다. 등 뒤에서 벨트 금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움찔한 안시연은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교수님...”그녀의 부름에 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 입맞춤하더니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오늘은 그날처럼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볼이 점점 농염하게 변해갔다.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긴장감이 밀려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다른 걸 할 줄 몰라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정훈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시 한번 잠옷 가운을 벗겼다. 연정훈이 다정하게 말했다.“모르면 배우면 되지.”연정훈이 무엇을 할지 몰라 안시연은 점점 더 떨렸다.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허벅지 안쪽의 짜릿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옷 가운을 걸친 채로 돌아섰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놓아주었다.조금 전까지 한데 뒤엉킨 채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안시연은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에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처음에는 차 안에서 갈 데까지 갔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스킨십에도 저렇게 쑥스러워하다니.안시연은 꽤 오랜 시간 화장실에 있었다. 사실 딱히 씻을 것도 없었지만 얼굴이 너무 빨개서 연정훈을 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서 홍조가 거의 내려갈 때쯤 화장실에서 나왔다.진작 정리를 마친 연정훈은 서재의 책상 옆에 서서 냉수 한잔을 들고 있었다. 표정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조금 전의 방탕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물을 마시자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안시연은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까 하여 바로 시선을 옮겼다.연정훈이 컵을 내려놓고 부르자 그녀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나가다가 소파를 봤는데 이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연정훈은 다가온 그녀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었다.“고마워요.”그녀의 예의 바른 모습은 썸의 기운이 가득한 이 방에서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연정훈은 몸을 뒤로 젖히고 대리석 책상에 기댄 채 유리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살짝 차가운 물인데다가 양도 많아 안시연은 절반 정도 마시고 더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그윽한 눈빛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저도 모르게 계속 마셨다.다행히 먼저 이상함을 눈치챈 연정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컵을 빼앗았다. 안시연은 그제야 컵을 내려놓고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연정훈은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기더니 바짝 붙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다정하게 말했다.“물 한 잔만 줬기에
안시연은 고분고분 밥부터 입에 넣었다. 하지만 대충 한두 입 먹더니 또 몰래 디저트를 먹으려 했다.연정훈은 밥을 먹지 않고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뜬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뜬 후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연정훈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제 발 저린 안시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연정훈은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 덤덤하게 말했다.“이리 와 봐.”그가 뭘 하려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더니 고기 한 점을 집어서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달달하니 안시연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라 입을 벌려 조심스럽게 먹었다.옆에 끌어안고 계속 열심히 먹여주나 했는데 가끔 한두 젓가락 먹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첫입만 고기였지, 나머지는 전부 채소였다.안시연은 먹다가 점점 느리게 씹었다. 연정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먹여주었다. 결국 참다못한 안시연이 그에게 말했다.“교수님...”“왜?”연정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제가 먹는 양은 한계가 있어요. 계속 채소만 먹었다간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한다고요.”“괜찮아. 내가 먹으면 되지.”“아까 아주머니가 교수님은 단 걸 싫어한다고 하셨는데...”“오늘은 좋아해.”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연정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잠시 후 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아이스크림을 그녀에게 주었다. 안시연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연정훈의 옆에 앉아 작은 숟가락으로 한입 한입 파먹었다. 식사를 마친 연정훈은 의자에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음식을 먹여주는 버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고 살짝 장난기가 발동하여 옆에 두고 괴롭혔던 것이었다.그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연정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물끄러미 보았다.허리를 쭉 펴고 앉아 비싼 만년필로 서류에 끄적이면서 전화로 분부를 내리는 모습은 조금 전과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한 뒤 침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가 텅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이건 마치 긴 마라톤을 달려서 종점에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나 겨우 생수 한 병만 달랑 있는 느낌이었다.연정훈은 입술을 깨물며 침실에서 나왔다.그리고 예상대로 서재 안의 작은 소파 위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연정훈은 휘적휘적 걸어가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안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감히 안방 침대 위에서는 자지 못했다.너무도 피곤해서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심지어 악몽까지 꿨다.몸 주위가 싸늘해지더니 갑자기 뜨거운 것이 닿았고, 곧이어 숨을 빼앗겼다. 안시연은 가볍게 콧소리를 냈고 찌릿한 느낌과 함께 큰 손이 몸을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안시연은 안달이 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비몽사몽인 와중에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의 어둡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교수님...”“계속 자.”‘뭐라고요?’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다시금 입술이 막혔다.남자의 건장한 몸이 겹쳐지자 안시연은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그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해서 서재에서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많은 걸 알고 있었기에 침대 위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창의적이었다. 끝까지는 못 해도 부족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안시연은 그에게 한참을 시달려서 끝났을 때는 이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쑥스러워서 온몸에서 열이 났다.딸깍 소리와 함께 연정훈이 침대맡의 조명을 켰고, 그 순간 안시연은 빠르게 눈을 감았다.연정훈은 끝난 뒤에 항상 다정했다. 그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 대신 깨끗이 처리까지 해놓은 뒤에야 조명을 끄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희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직 안 피곤해?”연정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연정훈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신을 욕망한다는 걸 똑똑히 알았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깊이 엮이는 걸 당연히 신경 쓸 것이다.안시연은 문자를 전부 삭제한 뒤 그 번호를 차단했다.당분간은 일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연정훈이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불쾌해할까 봐 걱정되어 결국엔 오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연정훈이 돌아왔을 때 안시연은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식탁 옆에 서서 저녁에 먹을 음식들을 내려놓고 있었다.인기척을 들은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돌아왔네요.”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누군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 아주 기묘했다.연정훈은 기분 좋게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안시연은 당황하면서 그다지 능숙하지 않게 받아 들었다.연정훈은 내친김에 안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뭘 했어?”도우미 아주머니가 언제든 나올 수 있었기에 안시연은 불편해서 나직하게 말했다.“그냥 집에서 자주 먹는 거요.”연정훈은 식탁을 힐끗 보았다.“내가 맛볼게.”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어색하게 그에게 식기를 건넸다.“연근조림은 내가 한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근을 한 입 먹었다.“맛있네.”안시연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녀가 조심스러워하자 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식탁 옆의 버튼을 눌렀다.그는 안시연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 일은 다 처리했어.”안시연은 기뻤다.그녀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그 일 때문에 한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꼼짝하지 않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너무 기뻐서 그래?”안시연이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한참 뒤에야 겨우 말했다.“감사합니다, 교수님...”또 이 말이라니. 안시연 본인조차 질릴 정도였다.연정훈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얼굴이 살짝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
“네. 맹세합니다.”양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객석에서는 이승우와 다른 하객들이 저마다 속삭이며 미소를 지었다.‘다행이다. 모든 게 완벽해.’단상 위에서 사회자가 말했다.“이제 양가의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반지 상자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상자 안에는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반지가 담겨 있었다.그 반지는 결혼식 며칠 전 연정훈이 직접 양시연에게 부탁해 받아 간 것이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셈이라 생각해.”양시연은 처음에는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반지를 내어주기 꺼렸지만, 결국 마음을 열었다.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순간이 단순히 계약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유산으로 증명되는 한 조각의 따스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들어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그 반지는 그녀의 손에 완벽히 맞았다.분명 그의 세심한 배려로 조정되었을 것이다.“이제 신부님 차례입니다.”부승희가 조용히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들어 올렸다.잠시 연정훈을 바라본 뒤 그의 손을 가만히 떠받치며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그 순간 그녀는 베일 너머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이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잠긴 무거운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감정은 한순간 억눌리며 불쾌함보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입술을 열었다.“그럴 일 없을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반지를 끝까지 밀어서 끼워줬다.현장에는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사회자가 위쪽에서 말했다.“신랑님, 이제 신부에게 입맞춤하셔도 됩니다.”이때 관객석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승우 등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장난스럽게 외쳤다.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시끄럽게 굴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희를 힐끗 보
결혼식 입구 모퉁이에 서서 바깥 햇빛이 발끝에 딱 맞게 드리워졌다.양시연은 결혼행진곡 멜로디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잠시 후 발을 잘못 내딛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양석진이 부드럽게 말했다.“긴장하지 마. 설령 실수하더라도 괜찮아.”양시연은 베일 너머로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봤다.“긴장되세요?”양석진은 잠시 멈칫했다.오늘에 이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양석진은 오랜 세월 동안 충분히 단련되었기에 긴장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말에 맞춰 양석진은 이렇게 말했다.“긴장되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마침내 잔디 쪽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석진의 팔을 잡았다.그녀가 첫발을 내딛자 뒤따르던 두 명의 브라이드 메이드가 양시연의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야외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에는 냉방 장치가 있어 온도는 적당했으며 햇살은 길 전체에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잔디 구역 모퉁이를 돌며 걸을 때까지는 양시연도 비교적 평온했지만, 연정훈을 향해 곧바로 이어지는 하얀 실크 러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 양시연은 자기 심장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주변의 시선은 모두 차단되었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정훈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그 순간마다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첫 만남은 대학교에서였다.그 당시 그는 교양 강의를 맡은 교수였고 멀리서 보았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이 젊고 준수하며 뛰어난 기품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그렇게 쉽게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연정훈을 부러워했었다.그 후로 이어진 만남은 하나하나 양시연에게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었다.심지어 황당했던 재회조차 양시연은 연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 후로는 더 황당한 관계가 지속되었다.연정훈과의 만남과 사랑은 마치 꿈과 같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은 깨어났고 남은 것은 참담한 기억과 되돌아보기 힘든 고통뿐이었다.양
“다행히 따로 준비한 웨딩드레스가 있어서요. 게다가 지금 메이크업이랑도 딱 어울리네요.”직원이 말했다.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여러분, 정말 죄송해요.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모두에게 작은 감사 선물을 준비할게요.”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힘들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다들 최선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크게 지연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자 연정훈의 답장은 단 한 글자였다.[응.]‘응?’양시연은 의아했다.연정훈을 하루 이틀 아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엔 그가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무슨 일이지?’아까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던 양시연은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맙소사. 정훈 씨, 혹시 내가 도망치려고 한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그런 게 아니었고 양시연은 양지원을 찾으러 간 거였다!양시연은 황급히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 아까 엄마를 찾으러 간 거예요.]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연정훈의 답장은 짧았다.[알았어.]연정훈은 이모티콘 하나 없이 대답했지만, 양시연은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괜히 긴장되었다.얼굴을 한 번 비비며 다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저 정말로...]도망가려던 게 아니라는 말이 채 쓰이기도 전에 연정훈의 답장이 먼저 왔다.[괜찮아. 어머니 찾는 거 도와줄까? 아까 우연히 뵀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한 글자씩 천천히 해독하듯 읽어보았다.‘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어 보이는데?’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결혼식 끝나고 말할게요. 여기 거의 다 준비됐어요.][알았어. 기다릴게.]마지막 메시지를 보자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다. 다행이야.’그녀는 다시 한번 연정훈은 이렇게 예민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
양지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히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코너를 돌자마자 연정훈을 마주쳤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다급한 표정과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모습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가는 거야?”“저...”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양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였고 그것이 양혁수였다!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여보세요?”“응...”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과 눈을 마주친 후 옆으로 밀고는 물었다.“괜찮아? 부하가 너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이어갔다.연정훈은 옆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양혁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 친구가 좀 과장했나 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약간 흔들렸는데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어서 허리를 살짝 부딪혔어.”“정말 괜찮은 거지?”“응. 멀쩡해. 그냥 검진받고 이따가 협력사랑 식사 약속도 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이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끊을게. 검진받아야 하거든.”“그래. 검사 다 끝나고 아무 이상 없으면 나랑 어머니한테 안부 꼭 전해.”“알았어.”양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연정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방금 양혁수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대요.”‘다행히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방금 일이 있었으면 양시연은 결혼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려 했던 걸까?’연정훈은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돌아서려다 갑자기 물었다.
“세상에!”조용해진 대기실에서 이승우가 또 갑자기 작지 않은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왔다.참다못한 부승원이 화를 내려는데 이승우가 부승원을 막아서고 핸드폰을 연정훈에게 내밀었다.“정훈아, 네 형님한테 사고가 생겼다는데?”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이승우가 보여준 건 누군가가 보내온 사진이었는데 아마 양혁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사진에는 한 사람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게 찍혀 있었다.문자 내용은 비행기가 뜨자마자 추락했다는 것이었다.이승우가 그다음으로 보낸 문자는 사진 속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었고 상대는 양혁수라 답했다.다른 사람들이 당황해할 때 이승우가 연정훈에게 물었다.“사람을 시켜 양시연 씨한테 물어볼까? 양시연 씨가 알면 오늘 결혼식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어?”연정훈이 표정을 구겼다. 잠시 고민하던 연정훈이 핸드폰을 이승우에게 돌려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진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연 대표님, 방금 신부 측에서 웨딩드레스에 문제가 생겨 결혼식을 두 시간 미루고 싶다고 합니다.”대기실은 조용해졌다.이상한 점을 눈치챈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봤다.이승우는 속으로 큰일이 났음을 외치고 있었다.‘어떡하지! 정말 큰 일이야!’연정훈은 그 자리에 멈춰서 침착하게 진수빈에게 말했다.“시연이 말대로 결혼식 시간을 미뤄.”그리고 모든 사람을 뒤로하고 빠르게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보는 사람이 없자 연정훈은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신부 대기실에서.양시연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움직이다가 실수로 밟아 올이 나가버렸다.“너무 급해 마세요. 빨리 해결할 수 있어요.”스태프의 말에 양시연이 말했다.“정말 감사해요.”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쿵대는 것이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뭐예요?”문이 열리고 여 아주머니가 들어와 사과했다.“제가 실수로 컵을 깨버렸
양석진의 평생에 누구에게 가장 미안하냐 묻는다면, 그 답은 의심할 필요 없이 양시연이었다.양석진의 보배 딸 양시연.양석진과 양지원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이였다.그래서 과거에 좀 더 신중할걸, 양지원이랑 좀 더 많이 대화해 볼 걸, 미리 양시연의 존재를 알아차릴걸, 하는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봤더라도 양시연이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하지만 양시연은 너무 착하고 순했다.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고, 양지원과 양석진에게 늘 감동과 따뜻함을 안겨줬다.양석진은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창가의 작은 머리가 보였다.양시연은 모르겠지만 양석진이 피곤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건 양지원뿐만이 아니라, 창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양시연이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마음이 척척 맞는 부녀는 말 몇 마디에 사이가 퍽 가까워졌다.눈앞에 보이는 여러 웨딩드레스에 양석진이 물었다.“어느 드레스로 했어?”양시연이 손으로 가리켰다.양석진의 시선이 그 드레스로 한참 머물렀다.“사실 여기 있는 드레스를 모두 샀어요!”양석진이 의아해하자 양시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이제 엄마랑 아빠랑 결혼할 때 여기에서 골라서 입으시면 돼요.”양석진이 조금 얼어붙었다.“엄마랑 결혼하실 건가요?”양시연의 질문에 문 앞까지 걸어가던 양석진이 자리에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어느 날 엄마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면 연락을 해줘. 그럼 빨리 돌아와 설득해 볼게. 그러면 성공할지도 모르잖아.”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양손을 등 뒤로 배배 꼬며 말했다.“좋아요! 제가 꼭 연락드릴게요.”양석진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만 믿는다.”“당연하죠. 저만 믿으세요.”양시연은 과거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12시가 지나고 있었다.결혼식은 2시로 예정되어 있었고 드디어 조금씩 긴장한 마음이 들었다.여러 스태프가 양시연을 둘러싸고 메이크업과 웨딩드레스를 체크했
양지원은 양시연의 앞에서 양석진을 ‘아버지’라 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고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았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였다.결혼 이틀 전은 양시연이 양씨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잠이 든 시간까지도 창가에서 양석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양석진은 새벽 늦게 돌아왔는데 손에는 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하나는 두리안 케이크고, 다른 하나는 과일 케이크였다.두리안 케이크는 당연히 양지원의 것이었다.양시연은 모둠 과일 케이크를 받아쥐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내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저것 다 들어있는 거 사신 거죠?”양석진은 양지원의 맞은편에 앉아 그 농담을 받았다.“이걸로 만족해. 원래 네 엄마 입맛대로 둘 다 두리안 케이크로 사려고 했어. 그런데 창수 삼촌이 네가 이틀 뒤 결혼한다고 잘 챙겨주라고 하더라고.”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자. 내가 잘라줄게.”양석진이 살짝 몸을 기울여 양시연의 손에서 케이크 나이프를 뺏어갔다.양시연은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네 엄마는 이 가게 케이크를 참 좋아해.”“오래된 가게잖아요.”양석진은 큼지막하게 케이크를 잘랐고 모든 딸기를 양시연 몫의 위로 올렸다.양시연은 두 손으로 케이크를 받았다. 마치 어린 시절 높은 시험 점수를 받고 외할머니에게 칭찬을 바라는 기분과 같았다.양석진은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몸을 기대고 편히 앉아 양시연을 바라봤다.“천천히 먹어.”양시연은 한 입 크게 입에 넣다가 머쓱해졌다.양석진이 다정하게 물었다.“저녁 적게 먹은 거야?”“엄마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요.”“너도 같이하게?”양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너무 열심히 다이어트해서 옆에 있는 나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부녀는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세운시에서 경인시까지 거리도 먼데 매일 이렇게 오가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겠어요?
이목구비로 보았을 때 모연준의 시원시원한 인상은 유럽 쪽의 혈통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부승희는 모연준에 팔짱을 끼고 방 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도 모르게 모연준과 이승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외모와 가문을 놓고 보면 모연준은 이승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그러나 양시연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하는 모연준은 아주 차가웠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그러자 방 안의 온도마저 내려갔다.직전에 방을 찾은 이승우는 선물도 주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내내 옆자리의 직원들까지 하하호호 웃게 만들었다.부승희의 취향 변화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난 먼저 나가 있을게요.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스태프는 부승희와 안면이 있는지 농담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승희 씨는 성격이 활발하고 남자 친구분은 진중한 성격이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겠네요.”부승희는 스태프를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런 셈이죠. 연준 씨랑 있으면 이상하게 침착해지더라고요.”옆자리의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당연하지. 네 나이를 생각해 봐. 다행히 연준 씨를 만나고 드디어 좀 차분해졌네.”“그렇네요.”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에서도 부승희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결국 결말은 똑같다.양시연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준비는 다 되어가?][네.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요.][사람을 시켜 먹을 것 좀 보냈어.]양시연이 빠르게 문자를 했다.[여기에도 음식 많아요. 따로 보낼 필요 없어요.][네가 긴장할까 봐 그래. 뭐라도 먹으면 긴장이 덜 되지 않겠어?]양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정훈 씨 집에서 직접 만든 블루베리 시럽이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우리 엄마가 계속 말하던데.][보내줄게.][그럼 있다가 먹어볼게요.][그래.]연정훈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배고프면 꼭 먹어. 화장실 다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