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껏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낯선 곳에 혼자 버려지니 두려움이 덜컥 밀려와 저도 모르게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잡은 것이었다.연정훈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 이 행동이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다시 손을 놓았다. 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시연이 이 어색함을 깨뜨리려고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연정훈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내가 널 구하러 가기 전에 연속 몇 시간이나 일했는지 알아?”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막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새벽 다섯 시부터 쉬지를 못했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네 소식을 들었거든.”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미안해졌다. 안시연이 뭐라 얘기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가로채면서 농담하듯 말했다.“너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뭐. 연속 세 번이나 말로만 고맙다고 했잖아.”안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장난을 눈치챈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교수님의 은혜를 그냥 받으려는 뜻은 아니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맙다고만 했을 뿐인데...’연정훈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손을 내밀어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교활하고 능숙한 남자였다.“가서 샤워해. 그리고 마음도 좀 진정하고.”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안시연의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연정훈이 곧바로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 보탰다.“진정되고 나서 잘 생각해 봐.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욕실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연정훈의 농담 반 진담 반인 말 때문에 안시연은 계속 시무룩해 있었다.연정훈은 벌써 안시연을 세 번이나 구해주었다. 처음에 ‘보답’한 것 말고 나머지 두 번은
금방 회의를 마친 연정훈이 안경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이 집안의 도우미는 규정을 알고 있어 절대 서재 문을 두드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안시연뿐이다.그는 안경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샤워를 마친 여자의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안시연이 쟁반을 든 채 힘겹게 서 있었다. 연정훈이 문을 열자 쭈뼛쭈뼛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설명했다.“아주머니가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쟁반에 꽤 많은 음식이 담겨있었다. 연정훈은 덤덤하게 대답한 후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내주었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옆을 스쳤다.서재가 안방보다 더 컸고 높이도 훨씬 더 높았다. 커다란 책장이 벽면 한쪽에 놓여있었는데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안시연은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방안의 비싼 물건을 어지럽혔다간 큰일이니까.쟁반을 상 위에 내려놓고 나서야 긴장했던 어깨를 풀었다.연정훈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안시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시연이 허리를 굽혀 그릇을 정리했다. 그녀의 반쯤 마른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고 그의 잠옷 가운을 입은 모습이 왠지 모르게 유혹적이었다.안시연이 허리를 곧게 펴자 연정훈도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연정훈은 계속 노트북만 들여다보았다. 안시연은 막연한 얼굴로 책상 옆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그에게로 다가갔다.“교수님, 식사 안 하세요?”연정훈이 아무 대답 없자 안시연은 멋쩍어하며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차를 다 마신 걸 본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제가 차 한잔 따라드릴게요.”그러고는 차를 가지려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연정훈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당겨 자기 다리에 앉혔다.갑자기 그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말문이 막혀버렸다.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차
잠옷 가운이 벗겨지면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연정훈의 뜨거운 시선에 안시연은 마치 사과처럼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몇 초 후 안시연은 몸을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옷장 안에 있었다고요.”맛을 봤으니 당연히 놓아줘야지.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아, 생각났다. 있긴 있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내가 도우미에게 가져다 놓으라고 했지, 정말. 깜빡했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나?’그녀는 화가 났지만 찍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으로 째려보기만 하며 하소연했다.안시연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충분히 매혹적인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하여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일어나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옆에 책상이 있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이미 예상한 듯 또 예상하지 못한 듯한 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은 순간 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읍...”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혀와 입술이 마구 뒤섞였다. 몸이 나른해진 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연정훈의 어깨를 잡고 그의 호흡에 따라 움직여야만 충분한 산소를 흡입할 수 있었다.연정훈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점점 아래로 향하다가 그녀의 가운을 벗겼다.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발끝으로 나무 책상의 한쪽을 디뎠다.머릿속이 뒤죽박죽된 그녀는 그의 키스를 피해 목을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다른 데서 해요...”흥분한 연정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볼에 입맞춤했다.“여기서 안 할게.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고개를 어깨에 깊숙이 파묻었다.연정훈의 코끝에 샴푸 냄새가 스쳤다. 분명 평소에 자주 쓰는 샴푸지만 오늘따라 더 색다르고 유혹적이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에 눕혔다. 하지만 바로 덮친 게 아니라 소파 옆에 서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을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을 보고 있자니 호텔에서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두 볼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남자를 즐겁게 해준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눈 딱 감고 먼저 그의 벨트를 풀었다.눈치 보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구부리더니 턱을 살짝 올리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격렬한 키스에 안시연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옅은 신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안시연은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보려 했다. 연정훈은 상이라도 내리듯 잠깐 풀어주고는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에게 소리 없는 위안으로 다가왔다.안시연은 정신이 해롱해롱해져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휙 돌렸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소파 등에 기대 엎드리라고 했다.연정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안시연은 살짝 당황했다. 등 뒤에서 벨트 금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움찔한 안시연은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교수님...”그녀의 부름에 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 입맞춤하더니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오늘은 그날처럼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볼이 점점 농염하게 변해갔다.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긴장감이 밀려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다른 걸 할 줄 몰라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정훈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시 한번 잠옷 가운을 벗겼다. 연정훈이 다정하게 말했다.“모르면 배우면 되지.”연정훈이 무엇을 할지 몰라 안시연은 점점 더 떨렸다.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허벅지 안쪽의 짜릿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옷 가운을 걸친 채로 돌아섰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놓아주었다.조금 전까지 한데 뒤엉킨 채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안시연은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에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처음에는 차 안에서 갈 데까지 갔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스킨십에도 저렇게 쑥스러워하다니.안시연은 꽤 오랜 시간 화장실에 있었다. 사실 딱히 씻을 것도 없었지만 얼굴이 너무 빨개서 연정훈을 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서 홍조가 거의 내려갈 때쯤 화장실에서 나왔다.진작 정리를 마친 연정훈은 서재의 책상 옆에 서서 냉수 한잔을 들고 있었다. 표정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조금 전의 방탕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물을 마시자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안시연은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까 하여 바로 시선을 옮겼다.연정훈이 컵을 내려놓고 부르자 그녀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나가다가 소파를 봤는데 이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연정훈은 다가온 그녀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었다.“고마워요.”그녀의 예의 바른 모습은 썸의 기운이 가득한 이 방에서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연정훈은 몸을 뒤로 젖히고 대리석 책상에 기댄 채 유리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살짝 차가운 물인데다가 양도 많아 안시연은 절반 정도 마시고 더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그윽한 눈빛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저도 모르게 계속 마셨다.다행히 먼저 이상함을 눈치챈 연정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컵을 빼앗았다. 안시연은 그제야 컵을 내려놓고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연정훈은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기더니 바짝 붙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다정하게 말했다.“물 한 잔만 줬기에
안시연은 고분고분 밥부터 입에 넣었다. 하지만 대충 한두 입 먹더니 또 몰래 디저트를 먹으려 했다.연정훈은 밥을 먹지 않고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뜬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뜬 후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연정훈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제 발 저린 안시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연정훈은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 덤덤하게 말했다.“이리 와 봐.”그가 뭘 하려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더니 고기 한 점을 집어서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달달하니 안시연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라 입을 벌려 조심스럽게 먹었다.옆에 끌어안고 계속 열심히 먹여주나 했는데 가끔 한두 젓가락 먹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첫입만 고기였지, 나머지는 전부 채소였다.안시연은 먹다가 점점 느리게 씹었다. 연정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먹여주었다. 결국 참다못한 안시연이 그에게 말했다.“교수님...”“왜?”연정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제가 먹는 양은 한계가 있어요. 계속 채소만 먹었다간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한다고요.”“괜찮아. 내가 먹으면 되지.”“아까 아주머니가 교수님은 단 걸 싫어한다고 하셨는데...”“오늘은 좋아해.”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연정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잠시 후 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아이스크림을 그녀에게 주었다. 안시연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연정훈의 옆에 앉아 작은 숟가락으로 한입 한입 파먹었다. 식사를 마친 연정훈은 의자에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음식을 먹여주는 버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고 살짝 장난기가 발동하여 옆에 두고 괴롭혔던 것이었다.그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연정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물끄러미 보았다.허리를 쭉 펴고 앉아 비싼 만년필로 서류에 끄적이면서 전화로 분부를 내리는 모습은 조금 전과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한 뒤 침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가 텅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이건 마치 긴 마라톤을 달려서 종점에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나 겨우 생수 한 병만 달랑 있는 느낌이었다.연정훈은 입술을 깨물며 침실에서 나왔다.그리고 예상대로 서재 안의 작은 소파 위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연정훈은 휘적휘적 걸어가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안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감히 안방 침대 위에서는 자지 못했다.너무도 피곤해서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심지어 악몽까지 꿨다.몸 주위가 싸늘해지더니 갑자기 뜨거운 것이 닿았고, 곧이어 숨을 빼앗겼다. 안시연은 가볍게 콧소리를 냈고 찌릿한 느낌과 함께 큰 손이 몸을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안시연은 안달이 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비몽사몽인 와중에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의 어둡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교수님...”“계속 자.”‘뭐라고요?’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다시금 입술이 막혔다.남자의 건장한 몸이 겹쳐지자 안시연은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그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해서 서재에서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많은 걸 알고 있었기에 침대 위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창의적이었다. 끝까지는 못 해도 부족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안시연은 그에게 한참을 시달려서 끝났을 때는 이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쑥스러워서 온몸에서 열이 났다.딸깍 소리와 함께 연정훈이 침대맡의 조명을 켰고, 그 순간 안시연은 빠르게 눈을 감았다.연정훈은 끝난 뒤에 항상 다정했다. 그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 대신 깨끗이 처리까지 해놓은 뒤에야 조명을 끄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희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직 안 피곤해?”연정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연정훈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신을 욕망한다는 걸 똑똑히 알았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깊이 엮이는 걸 당연히 신경 쓸 것이다.안시연은 문자를 전부 삭제한 뒤 그 번호를 차단했다.당분간은 일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연정훈이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불쾌해할까 봐 걱정되어 결국엔 오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연정훈이 돌아왔을 때 안시연은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식탁 옆에 서서 저녁에 먹을 음식들을 내려놓고 있었다.인기척을 들은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돌아왔네요.”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누군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 아주 기묘했다.연정훈은 기분 좋게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안시연은 당황하면서 그다지 능숙하지 않게 받아 들었다.연정훈은 내친김에 안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뭘 했어?”도우미 아주머니가 언제든 나올 수 있었기에 안시연은 불편해서 나직하게 말했다.“그냥 집에서 자주 먹는 거요.”연정훈은 식탁을 힐끗 보았다.“내가 맛볼게.”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어색하게 그에게 식기를 건넸다.“연근조림은 내가 한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근을 한 입 먹었다.“맛있네.”안시연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녀가 조심스러워하자 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식탁 옆의 버튼을 눌렀다.그는 안시연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 일은 다 처리했어.”안시연은 기뻤다.그녀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그 일 때문에 한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꼼짝하지 않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너무 기뻐서 그래?”안시연이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한참 뒤에야 겨우 말했다.“감사합니다, 교수님...”또 이 말이라니. 안시연 본인조차 질릴 정도였다.연정훈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얼굴이 살짝
갑자기 변여름에게 안겨진 양혁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노골적인 변여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이 손 놔.”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손을 풀었다. 그리고 마주 향해 서서 양혁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바로 변여름의 곁을 지나쳐 떠나려 했다.“우리 사이 대화할 게 뭐가 더 있어? 한강시에서 이미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끝났잖아.”‘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변여름도 별 수 있겠어?’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지?’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오빠 지금 그렇게 강하게 나오면 아침에 있었던 일이 없었던 걸로 될 것 같아요?”“...”‘정말 미치겠네.’“오빠가 지금 떠나지 않고 남아준다면 앞으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게요.”양혁수는 다친 눈 때문에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변여름에게 전해졌을 것이다.양혁수는 애써 덤덤한 척하며 변여름을 지나치려 했다.“아침엔 아무 일도 없었어. 굳이 꼽자면 자꾸 선을 넘는 너 때문에 참다 참다 떠나려는 것뿐이니까.”그러나 변여름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한숨을 내뱉었다.‘오빠는 계속 이런 말투로 나랑 대화하려는 걸까? 나도 이젠 조금 화가 나는데, 어떡하지?’변여름은 이를 꽉 깨물고 협박하듯 말했다.“오빠 잊으셨나 본데 여긴 제 집이에요.”“...”“이런 식으로 저한테 굴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변여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양혁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그 날 지혜 씨가 나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오빠도 들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정말 그렇게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양혁수는 어느 날인가 이성을 잃은 변여름이 정말 무슨 사달이라도 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양혁수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지혜 씨가 어떤 얘기를 해줬는지 어디 한 번 말해보든가.”“어떤 게 듣고 싶은데요?”“네 마
붕대를 갈아주는 내내 변여름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양혁수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넘어가면 이 아침의 헤프닝도 그냥 없던 일처럼 흘러갈 수 있었다. 게다가 변여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 보면 아마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렇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오후가 되자 담당 의사가 찾아와 눈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고정되어 있던 장치들을 모두 제거하고 당분간 붕대만 감으면 되었다. 비록 외출할 때는 보호안경을 착용해야 했지만 적어도 눈을 뜨고 앞을 볼 수는 있었다.붕대 아래 빈틈으로 시야가 확보되자 양혁수는 가장 먼저 주변을 훑어보았다.‘다행히 별문제 없군.’그러면 이제 도망칠 일만 남았다.‘오늘 밤, 무조건 떠나야 해.’드디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만큼 더 이상 미련 가질 이유가 없었다.이렇게 결정을 내린 후, 변여름이 혹시라도 방에 들이닥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변여름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양혁수는 곧장 연락을 돌려 출발 시간을 조율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짐을 간단하게 정리했다.그리고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짐을 꺼내려는데...‘뭐지?’서랍 안을 가득 채운 수상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 ‘홀로 달랠 때’ 사용하는 그런 도구들이었다.‘뭐야, 이거?’비록 그 전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고 있었고 이건 분명 이전에는 없던 물건이었다.그리고 생각해 보니 붕대를 풀기 전 변여름이 방을 여러 번 들락거렸고 서랍에도 손을 댔던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뱉으며 서랍을 조용히 닫았다.‘변여름은 이미 눈치채고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정말 미친 거 아니야?’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시간이 촉박해 다시 서랍을 열어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들을 챙겼다.그렇게 짐을 다 싸고 마지막으로 코트까지 집어 들려던 순간.“딸깍.”너무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딱 맞춰서 방문이 열렸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쓴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좁은 시야안으로 변여름
쿵!양혁수는 혼자 바닥에 나가떨어졌다.급하게 침대를 벗어나려다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너무 서둘렀고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변여름은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 벌떡 앉았고, 양혁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놀란 변여름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오빠! 괜찮아요?”양혁수는 단 1초도 더 변여름 옆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최대한 평온한 척하며 변여름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썼다.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양혁수는 변여름이 뭐라 묻기도 전에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다행히 화장실로 가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화장실 문이 닫히고 변여름은 그 앞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상황을 되짚어 보니 방금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게 후회됐다.‘설마 나 안겼던 거야? 에이. 그냥 꿈이겠지.’변여름은 말없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다음 계획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그런 생각 하고 있는데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변여름은 움찔했다가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오빠, 샤워하는 거예요?”‘설마 샤워기 소리인 건가? 눈 다친 사람이 무리하면 안 되는데!’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물소리는 계속됐다.양혁수가 진짜 화가 났다면 변여름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람을 시켜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물소리가 멈췄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양혁수가 걸어 나왔다.변여름을 스치듯 지나칠 때 양혁수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변여름은 아무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 무슨 상황인지 확인해 봤다.예상과는 달리 화장실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양혁수는 따뜻한 물을 전혀 쓰지 않은 것 같았다.‘지금 11월인데? 찬물 샤워를 했다고?’변여름은 양혁수가 너무 화가 나 풀 곳이 없어 이렇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양혁수에게 다시 이런 식으로 다가가지 않겠
변여름은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가 눈을 다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분명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훈계를 늘어놓았을 것이다.그 생각만 하면 변여름은 미소가 새어 나왔고 잠기운에 반쯤 잠긴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오빠, 저한테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차라리 죄를 더 지으면 지었지, 억울하게 뒤집어쓰는 건 못 참아요.”양혁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더니 슬쩍 양혁수의 손을 잡았다.“저 오빠한테 키스한 적도 없고, 안아본 적도 없어요.”변여름은 아주 태연하게 한숨까지 쉬면서 말하는데,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분명했다.‘그러니까 괜히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이럴 거면 차라리 지금 제가 오빠한테 키스라도 해버릴까요?’이제는 아예 돌려 말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다른 여자였으면 양혁수가 욕이라도 내뱉었겠지만 변여름한테는 뭐라 하기도 참 애매했다.‘이걸 정말 때릴 수도 없고, 함부로 욕도 못 하니 원 참...’하지만 양혁수는 눈이 안 보이니 그저 소파에 기대앉아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그러자 변여름은 더 들이대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저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도 않고 거실에서만 잤어요.”“난 노지혜 같은 사람 아니에요. 괜히 어설픈 짓 해서 오빠한테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주무세요, 네?”본인도 어린애면서, 꼭 어린애를 달래듯 한 말투였다.양혁수는 그 말에 설득당하게 아니라 너무 피곤해 더 따질 기운이 없어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떠날 거고, 잠깐 변여름에게 져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그날 밤에도 거실에서 잤고, 양혁수는 방으로 들어갔다.그렇게 또 한 번, 양혁수가 본인의 원칙을 하나 내려놓았다.그다음 날, 낮잠을 자다가 몸을 살짝 돌리
양혁수는 보지 않아도 현재 변여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 무구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양혁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없지 않잖아.”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그럼 내 걱정이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지 않아?”“네. 맞아요.”이번에도 변여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수비 대신 공격을 하면 뻔뻔한 변여름을 제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변여름은 생각보다도 더 강적이었다.“걱정도 참.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여기 카메라라도 달아놓으면 그만이잖아요.”양혁수는 경악을 했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농담이에요.”“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그렇게 변태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 욕실에 정말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때,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셔츠 가장 윗단추를 건드렸다.깜짝 놀란 양혁수는 서둘러 뒷걸음치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변여름.”그러나 변여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다시 천천히 걸어와 계속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을 잡았고 변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빠,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놓으면 오빠 목욕할 때 나 몰래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잠 들었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올 거예요.”이어 변여름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셋...”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렸다.변여름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긴장에 숨을 헐떡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을 웃음을 꾹 참고 남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다.그리고 양혁수가 셔츠를 벗는 동안 뒤를 돌아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몇 초 뒤, 변여름은 양혁수의 셔츠를 받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오빠 나 정말 나가요. 도움 필요하면 남자 도우미 부를 테니 말해요.”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