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가운이 벗겨지면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연정훈의 뜨거운 시선에 안시연은 마치 사과처럼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몇 초 후 안시연은 몸을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옷장 안에 있었다고요.”맛을 봤으니 당연히 놓아줘야지.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아, 생각났다. 있긴 있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내가 도우미에게 가져다 놓으라고 했지, 정말. 깜빡했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나?’그녀는 화가 났지만 찍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으로 째려보기만 하며 하소연했다.안시연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충분히 매혹적인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하여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를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일어나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옆에 책상이 있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이미 예상한 듯 또 예상하지 못한 듯한 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은 순간 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읍...”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혀와 입술이 마구 뒤섞였다. 몸이 나른해진 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연정훈의 어깨를 잡고 그의 호흡에 따라 움직여야만 충분한 산소를 흡입할 수 있었다.연정훈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점점 아래로 향하다가 그녀의 가운을 벗겼다.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발끝으로 나무 책상의 한쪽을 디뎠다.머릿속이 뒤죽박죽된 그녀는 그의 키스를 피해 목을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다른 데서 해요...”흥분한 연정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볼에 입맞춤했다.“여기서 안 할게.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고개를 어깨에 깊숙이 파묻었다.연정훈의 코끝에 샴푸 냄새가 스쳤다. 분명 평소에 자주 쓰는 샴푸지만 오늘따라 더 색다르고 유혹적이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에 눕혔다. 하지만 바로 덮친 게 아니라 소파 옆에 서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을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을 보고 있자니 호텔에서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두 볼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남자를 즐겁게 해준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눈 딱 감고 먼저 그의 벨트를 풀었다.눈치 보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구부리더니 턱을 살짝 올리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격렬한 키스에 안시연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옅은 신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안시연은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보려 했다. 연정훈은 상이라도 내리듯 잠깐 풀어주고는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에게 소리 없는 위안으로 다가왔다.안시연은 정신이 해롱해롱해져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휙 돌렸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소파 등에 기대 엎드리라고 했다.연정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안시연은 살짝 당황했다. 등 뒤에서 벨트 금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움찔한 안시연은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교수님...”그녀의 부름에 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 입맞춤하더니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오늘은 그날처럼 괴롭히지 않을게.”안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볼이 점점 농염하게 변해갔다.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긴장감이 밀려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다른 걸 할 줄 몰라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정훈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시 한번 잠옷 가운을 벗겼다. 연정훈이 다정하게 말했다.“모르면 배우면 되지.”연정훈이 무엇을 할지 몰라 안시연은 점점 더 떨렸다.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허벅지 안쪽의 짜릿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옷 가운을 걸친 채로 돌아섰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놓아주었다.조금 전까지 한데 뒤엉킨 채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안시연은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에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처음에는 차 안에서 갈 데까지 갔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스킨십에도 저렇게 쑥스러워하다니.안시연은 꽤 오랜 시간 화장실에 있었다. 사실 딱히 씻을 것도 없었지만 얼굴이 너무 빨개서 연정훈을 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서 홍조가 거의 내려갈 때쯤 화장실에서 나왔다.진작 정리를 마친 연정훈은 서재의 책상 옆에 서서 냉수 한잔을 들고 있었다. 표정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조금 전의 방탕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연정훈이 물을 마시자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안시연은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까 하여 바로 시선을 옮겼다.연정훈이 컵을 내려놓고 부르자 그녀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나가다가 소파를 봤는데 이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연정훈은 다가온 그녀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었다.“고마워요.”그녀의 예의 바른 모습은 썸의 기운이 가득한 이 방에서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연정훈은 몸을 뒤로 젖히고 대리석 책상에 기댄 채 유리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살짝 차가운 물인데다가 양도 많아 안시연은 절반 정도 마시고 더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정훈의 그윽한 눈빛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저도 모르게 계속 마셨다.다행히 먼저 이상함을 눈치챈 연정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컵을 빼앗았다. 안시연은 그제야 컵을 내려놓고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연정훈은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기더니 바짝 붙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다정하게 말했다.“물 한 잔만 줬기에
안시연은 고분고분 밥부터 입에 넣었다. 하지만 대충 한두 입 먹더니 또 몰래 디저트를 먹으려 했다.연정훈은 밥을 먹지 않고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뜬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뜬 후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연정훈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제 발 저린 안시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연정훈은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 덤덤하게 말했다.“이리 와 봐.”그가 뭘 하려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더니 고기 한 점을 집어서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달달하니 안시연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라 입을 벌려 조심스럽게 먹었다.옆에 끌어안고 계속 열심히 먹여주나 했는데 가끔 한두 젓가락 먹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첫입만 고기였지, 나머지는 전부 채소였다.안시연은 먹다가 점점 느리게 씹었다. 연정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먹여주었다. 결국 참다못한 안시연이 그에게 말했다.“교수님...”“왜?”연정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제가 먹는 양은 한계가 있어요. 계속 채소만 먹었다간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한다고요.”“괜찮아. 내가 먹으면 되지.”“아까 아주머니가 교수님은 단 걸 싫어한다고 하셨는데...”“오늘은 좋아해.”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연정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잠시 후 연정훈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아이스크림을 그녀에게 주었다. 안시연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연정훈의 옆에 앉아 작은 숟가락으로 한입 한입 파먹었다. 식사를 마친 연정훈은 의자에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음식을 먹여주는 버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고 살짝 장난기가 발동하여 옆에 두고 괴롭혔던 것이었다.그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연정훈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물끄러미 보았다.허리를 쭉 펴고 앉아 비싼 만년필로 서류에 끄적이면서 전화로 분부를 내리는 모습은 조금 전과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한 뒤 침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가 텅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이건 마치 긴 마라톤을 달려서 종점에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나 겨우 생수 한 병만 달랑 있는 느낌이었다.연정훈은 입술을 깨물며 침실에서 나왔다.그리고 예상대로 서재 안의 작은 소파 위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연정훈은 휘적휘적 걸어가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안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감히 안방 침대 위에서는 자지 못했다.너무도 피곤해서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심지어 악몽까지 꿨다.몸 주위가 싸늘해지더니 갑자기 뜨거운 것이 닿았고, 곧이어 숨을 빼앗겼다. 안시연은 가볍게 콧소리를 냈고 찌릿한 느낌과 함께 큰 손이 몸을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안시연은 안달이 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비몽사몽인 와중에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의 어둡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교수님...”“계속 자.”‘뭐라고요?’안시연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다시금 입술이 막혔다.남자의 건장한 몸이 겹쳐지자 안시연은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그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해서 서재에서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많은 걸 알고 있었기에 침대 위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창의적이었다. 끝까지는 못 해도 부족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안시연은 그에게 한참을 시달려서 끝났을 때는 이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쑥스러워서 온몸에서 열이 났다.딸깍 소리와 함께 연정훈이 침대맡의 조명을 켰고, 그 순간 안시연은 빠르게 눈을 감았다.연정훈은 끝난 뒤에 항상 다정했다. 그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 대신 깨끗이 처리까지 해놓은 뒤에야 조명을 끄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희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직 안 피곤해?”연정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연정훈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신을 욕망한다는 걸 똑똑히 알았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깊이 엮이는 걸 당연히 신경 쓸 것이다.안시연은 문자를 전부 삭제한 뒤 그 번호를 차단했다.당분간은 일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연정훈이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불쾌해할까 봐 걱정되어 결국엔 오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연정훈이 돌아왔을 때 안시연은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식탁 옆에 서서 저녁에 먹을 음식들을 내려놓고 있었다.인기척을 들은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돌아왔네요.”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누군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 아주 기묘했다.연정훈은 기분 좋게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안시연은 당황하면서 그다지 능숙하지 않게 받아 들었다.연정훈은 내친김에 안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뭘 했어?”도우미 아주머니가 언제든 나올 수 있었기에 안시연은 불편해서 나직하게 말했다.“그냥 집에서 자주 먹는 거요.”연정훈은 식탁을 힐끗 보았다.“내가 맛볼게.”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어색하게 그에게 식기를 건넸다.“연근조림은 내가 한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근을 한 입 먹었다.“맛있네.”안시연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녀가 조심스러워하자 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식탁 옆의 버튼을 눌렀다.그는 안시연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 일은 다 처리했어.”안시연은 기뻤다.그녀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그 일 때문에 한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꼼짝하지 않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너무 기뻐서 그래?”안시연이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한참 뒤에야 겨우 말했다.“감사합니다, 교수님...”또 이 말이라니. 안시연 본인조차 질릴 정도였다.연정훈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얼굴이 살짝
일이 끝나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내일 출장 계획을 설명했다.안시연은 그의 품에 기대어서 얌전히 대답했다.안시연은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몰랐기에 당연히 그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내가 집에 없어서 심심하면 나가서 쇼핑이라도 해. 침대맡 서랍에 카드 있으니까 그거 써. 내일 외할머니 보러 갈 때는 운전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고.”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마음이 복잡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의 태도를 본다면 안시연을 책임질 생각인 듯했다.그러나 안시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교수님.”안시연은 허리를 폈고 연정훈은 그녀를 놓아주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카드 줄 필요 없어요. 곧 일자리를 찾을 거니까요. 며칠만 지나면 돌아...”“일자리는 내가 돌아와서 찾아. 내가 찾아줄게.”연정훈이 말했다.그의 태도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말할 때 목소리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그에게서 거부하지 말라는 강경한 느낌을 받았다.연정훈은 조용해졌다.안시연도 조용해졌다.그녀의 언짢음을 눈치챈 연정훈은 화가 나지 않았다.고양이를 기른다면 고양이에게 할퀼 것을 감안해야 했다.게다가 그는 참을성도 좋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잡아당기며 설명했다.“사건을 해결하자마자 일자리를 찾는 건 너한테 불리해.”안시연은 시선을 내리뜨리고 조용히 있었다.“외할머니 건강도 안 좋으신데 지금 일자리까지 찾으면 외할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겠어?”연정훈이 일침을 놓았다.안시연은 조금 기운이 빠졌지만 몸도 편안해져서 아까처럼 거부감이 크지는 않은 듯했다.“그러면 시간이 좀 지나서 외할머니 좋아지시면 그때 알아서 찾을게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가타부타하지 않았다.방 안이 조용해지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안시연은 잠깐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먼저 연정훈의 목에 팔을 둘렀다.연정훈은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면서 그녀를 받아주었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침대에 누운 채로 오랫동안 잠들지
“사모님, 대표님 출장 가셔서 지금 집에 안 계세요.”도우미 아주머니가 정중하게 말했다.“금방 떠났죠? 식탁 위에 놓인 차가 아직 따뜻하네요.”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냉장고 앞에 서서 바짝 긴장했다.아주머니가 황급히 말했다.“제가 마신 겁니다.”김세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여기서 아주 편한가 봐요.”아주머니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임유정 씨,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안시연은 그 말을 들었고 곧이어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안시연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절대 나가시면 안 돼요. 임유정 씨는 사모님께서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이라 아마도 안시연 씨를 상대하려고 온 걸 거예요.”안시연의 표정이 굳었다.아주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임자 있는 남자를 빼앗은 나쁜 여자인 듯했다.비록 이곳에서 잔 것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찾아오면 마치 쥐새끼처럼 주방에만 숨어있어야 했다.아주머니는 그녀의 난감해하는 기색을 알아채고 한숨을 쉰 뒤 간식과 차를 준비하러 갔다.밖에서 김세연과 임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길 보니까 혼자 사는 것 같지는 않네요. 다른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임유정이 말했다.“정훈이 걔가 또 즐길 건 잘 즐기는 편이라서 집안이 그렇게 썰렁하지는 않아.”김세연은 덤덤히 대꾸한 뒤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그런데 걔가 워낙 바빠서 집안일에는 크게 신경을 못 써. 규칙이라고는 전혀 없어. 집안에 둔 도우미 아주머니도 그래. 감히 주인집 컵을 쓰고 주인이 식사하는 식탁에서 밥을 먹잖아. 참나, 어이가 없어.”임유정은 웃었다.“남자니까 집안일 같은 거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집안일 못하는 건 그렇다 쳐. 그래도 혹시 집에 도둑이라도 들면 어쩐다니? 오늘은 그냥 컵이었겠지만 다음에는 서재에 들어갈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안방 물건도 사라질 수 있는데 말이야.”주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양시연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실망스러운 표정을 억지로 정리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문을 열자마자 양지원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쁘면 굳이 안 와도 돼요.”‘응?’양시연은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양지원은 부드럽게 말했다.“나 화 안 났어요. 왜 화를 내겠어요. 석진 씨는 일에 집중하세요.”양시연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이건 누가 봐도 애교 섞인 말투였다.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대가 양석진이 분명했다.양지원은 거실 창가 쪽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양석진의 대답 때문인지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잠시 후 양석진이 말을 마친 것인지 그녀는 짧게 답했다.“마음대로 하세요.”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예상대로 양석진은 또다시 길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양시연은 양지원이 손을 바꿔 휴대폰을 바꾸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파 팔걸이에 있는 장식 진주를 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몇 초 후 양지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유지했다.“그래서...몇 시쯤 집에 올 거예요?”“...알겠어요.”분명히 기분이 좋아 보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리를 교차하며 상큼한 멜론 한 조각을 집어 여유롭게 입에 넣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고 조용히 헛기침했다.양지원은 놀라 고개를 돌리더니 양시연을 발견하고 약간 어색해졌다.“언제 들어왔어?”연정훈으로 인해 엉망이었던 양시연의 기분이 몇 분 사이에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녀는 두 손을 뒤로 하고 생각하는 척했다.“조...좀 전부터요.”양지원은 침묵했다.“...”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으로 불러 앉혔다.양시연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테이블 위 초대장을 슬쩍 보았다. 순간 떠올랐다.“엄마, 다음 주 수요일이 생신이죠?”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실 거예요?”양시연이 물
“카메라 영상을 가지고 나를 협박할 생각이야?”“저의 기분에 따라 달라요.”양시연은 한 글자씩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알았어.”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위층으로 같이 가자.”“싫어요!”양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증거를 주려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려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기서 기다려.”양시연은 속으로 연정훈을 비웃었다. 누군가 증거를 요구하는데도 그가 기다리라고 말하는 모습이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잠시 후 연정훈은 영상 복사본을 양시연에게 내밀었다.양시연은 물건을 받자마자 그대로 떠났다.연정훈은 술기운이 올라 머리가 아찔하고 시야가 흐려지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따라가며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줄지 고민했다.양시연이 계단 아래에 다다르자 연정훈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예요?”“사람을 보내서 집에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양시연은 퉁명스럽게 거절하며 위에서 아래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고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양시연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거실의 장식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응시했다.그 순간...연정훈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그때 나비가 다가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정훈에게 고개를 내밀고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미간을 찡그리며 나비를 노려봤다.“뭘 그렇게 봐?”나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쳇, 못생겼다!정원에서 양시연은 차를 몰고 빠르게 떠나갔다.속에서 불끈 화가 치솟아 운전이 거칠어졌고 강남시티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경찰서로 향했다.하하.‘내가 나중에 복수한다고 생각하겠지?’양씨 성을 가진 후 양지원이 가르쳐준 첫 번째 교훈은 바로 ‘복수는 망설이지 말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액셀을 다시 밟으며 목적지에 도달했다.경찰서에 도착한 양시연은 말없
양시연이 막 다리를 들려던 순간 연정훈이 무릎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아픈 듯한 소리를 내자 본능적으로 힘을 약간 풀었다.바로 그 순간 양시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연정훈의 얼굴을 내리쳤다.연정훈이 얼굴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양시연의 손톱이 연정훈의 반창고를 긁으며 상처가 나서 피가 났다.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시연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공격했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시연을 완전히 풀어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결국 탁자 근처까지 밀려났다.양시연은 재빨리 가방을 집어 들고 연정훈의 머리를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연정훈은 당황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붙잡으려다 스스로 억제하며 그저 가만히 서서 타격을 견뎠다.순간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양시연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연정훈을 탁자 위로 밀어붙이고 손톱이 다치든 말든 그의 얼굴을 다시 내리쳤다.연정훈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감고 양시연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양시연이 지쳐 멈추려 할 때 연정훈이 정확히 양시연의 두 손목을 붙잡고 미간을 찌푸렸다.양시연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의 잘생긴 얼굴에는 양시연이 남긴 상처 자국들이 남아 마치 고양이에게 할퀸 듯했다.양시연은 내심 후련해졌고 속에 쌓인 화도 어느 정도 풀렸다.“놔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화 다 풀렸어?”“놓으라고요!!”그녀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연정훈은 양시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은 한참 동안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때리고 싶으면 때려.’마음대로 하라는 듯하였다.양시연은 손을 들어 옷과 머리를 정리하려 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다시 때릴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다.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조금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표정을 유지하며 웃음을 참았다.‘흥.'“피할 줄도 아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