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 씨가 임신하면 내가 시연 씨를 해외로 보내줄게요. 시연 씨 혼자 외국에 있으면 많이 그리울 거니까 몇 년 안에 반드시 이혼하고 시연 씨랑 결혼할겁니다.”...정말 끔찍한 사랑이었다.두피마저 얼얼해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주지혁은 이 말을 마치고 침묵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며칠만 기다려요, 시연 씨 몸이 편해지면 같이 새로 산 집 보러 가요. 아, 우리 기념일 때 보러 갈까요?! 그럼 그날은 우리 신혼 밤을 보내는 셈이 되는거죠.”“시연 씨가 임신하면 사건 해결서랑 부동산 서류 그리고 20억 상당의 주식을 같이 줄게요.”앞의 말이 뻔뻔하다면 마지막의 말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그는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주지혁은 공포스러운 통제욕을 여실히 드러내며 안시연이 자신에게 단념할까 봐 기어코 그녀의 몸을 차지하려 했다.그 수단은 바로 임신으로써 그녀를 완전히 결박하는 것이었다....법률 사무소 로비에 앉아있던 안시연은 지난밤 주지혁과의 얽히고설킨 일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토할것 같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 도착하셨습니다.”“네.”안시연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현재로서 그녀는 주지혁에게 반항할 수 없기에 최악의 계획을 세우고 적어도 변호사를 잘 찾아야 했다. JX 법률 사무소는 부씨 가문 산하의 산업으로 현재 부승원이 관리하고 있으며 명성이나 실력 모두 경인 시에서 으뜸이었다.장 변호사가 매우 바쁜 탓에 면담 시간은 딱 15분으로 정해졌다.얼마 뒤, 사무실에서 나오는 안시연은 상대방의 모호한 말을 곱씹으며 불안에 떨었다.그때, 고개를 들어 보니 양복을 입은 한 무리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연정훈과 부승원이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곁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이 따라다녔다.안시연은 그 여자가 지난번 백화점에서 조이현과 이야기한, LK은행의 딸 임유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안시연 씨, 장 변호사님은 시간이 별로 없으십니다. 혹시 문수철, 문 변호사님과
안시연이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주지혁은 받지 않았다.그녀는 현재 불안에 떨고 있어 병원에 가 외할머니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를 걱정시킬까 봐서 말이다.안시연은 주지혁이 다시 전화할 틈을 기다려 법률 사무소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한편, 연정훈과 부승원은 일을 마치고 근처 빌딩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1층 유리창을 지날 때, 한 여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아득한 눈길로 바깥의 차들이 늘어선 것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안시연과 몇번 만나보며, 연정훈은 그녀가 좋지 않은 형편에서 완강히 버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도 그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담담하고 쓸쓸한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일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이런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또 괴롭힘을 당한 건가?’몇 초 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었고 그렇게 천천히 안시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차에 올라탔지만, 그 불쌍한 작은 얼굴은 연정훈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부승원에게 물었다.“시연이가 너희 법률 사무소는 왜 찾아온 거야?”그 말을 듣자 부승원의 싸늘한 눈빛이 갑자기 흥미로운 듯 번뜩였다.“몰라.”“모른다고?”“법률 사무소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걸 다 일일이 알아야 해?”부승원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알고 싶어? 그럼 내가 가서 물어볼게.”말을 끝내고 그는 조용히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연정훈은 곧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가로 갖다 댔다.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 없도록, 가볍게 피식 웃었다.‘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거군.’이윽고 부승원이 조롱하듯 말했다.“안시연 씨 꽤 예쁘더라.”“시연이는 예전에 내 제자였어.”“내 기억으로는 소현주 씨도 네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가라앉더니 이내 입술을 앙다
주지혁이 유 대표 얘기를 꺼내자 주효진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시연 그년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시연 씨가 나에게 얘기했다고? 유 대표 일은 내가 직접 본 거야.”“직접 봤다고?”주효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남매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주효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난 지금 내가 안시연에게 약을 탔던 일을 말하는 거야.”“뭘 탔다고?”주지혁이 두 눈을 부릅떴다.“몰랐어? 그럼 유 대표는 또 뭔데?”주효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주지혁은 이 일이 이미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 같아 싸늘한 얼굴로 주효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호통쳤다. 친오빠의 표정이 확 달라진 걸 본 주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잠시 후, 주효진은 주지혁에게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는 손뼉을 탁 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오빠, 유 대표는 안시연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주지혁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주효진은 이틀 전에 유 대표와 호텔에 갔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유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안시연 얘기를 꺼내더라고. 태도가 아주 안 좋았어. 안시연이 제 주제도 모르고 넘본다는지, 아무튼 엄청 언짢아했어.”그녀의 말에 주지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효진은 그의 옆에 앉아 계속 부채질했다.“유 대표가 안시연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날 밤 대체 어디 간 걸까? 무조건 다른 남자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날 밤에도 다른 남자와 잤어. 남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 걔는 오빠를 가지고 논 거라고.”주지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날 안시연의 몸에서 봤던 흔적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분명 다른 남자가 남긴 것이었지만 안시연은 주지혁이 그런 것이라고 속였다.유 대표에게 더럽혀진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주지혁은 안시연네 집에 여벌 옷을 두고 있었다. 그가 샤워하러 들어간 후 안시연은 그의 옷을 꺼내주었다.안시연이 옷장 앞에 서 있던 그때 시선이 옆에 놓인 가방과 목걸이에 향했다.연정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이었는데 그때 당시 버렸었다. 그런데 이튿날 이웃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돌려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지금 두 물건이 한데 놓여있으니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 꼭꼭 숨긴 죄가 언제든지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안시연은 가방을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주지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안시연은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예전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던 두 사람이 이젠 서로 얼굴을 봐도 아무 말이 없었다.주지혁은 그녀의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옆에 쾅 던졌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시연이 뒤를 돌아보았다.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헤어드라이기를 거두려고 주지혁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주지혁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옷 속을 마구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화들짝 놀란 안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생리 중이란 말이에요.”하지만 주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시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입술을 훔쳤다.“다른 걸 하면 되지. 아, 그리고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는 말 놓자.”“말을 놓자고요? 갑자기요?”안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단둘이 있을 때 말 놓으면 편하잖아.”그러고는 계속하여 그녀의 몸을 더듬거렸다.“그럼 다른 걸 계속해볼까?”그의 뜻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할 줄 몰라.”예전이었더라면 쑥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고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점점 사라져 이제 남은 거라곤 미움밖에 없었다.안시연의 무뚝뚝한 표정을 본 주지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할 줄 모르는 거야, 해주기 싫은 거야?”주지혁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점점 억
확신에 찬 주지혁의 태도와 눈앞의 가방과 목걸이를 보며 안시연은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그런데 이상한 건 내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얼굴만 봐도 역겨운 주지혁 앞에서 다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나 보다.안시연은 눈을 잠깐 감았다가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인정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주지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팔을 꽉 잡고 이를 깨물었다.“예전에 나에게 했던 그 얘기는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졌지만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당신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뭘 또 물어?”주지혁은 화가 나다 못해 핏대까지 세웠다. 그녀에게 손찌검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말했다.“시연 씨, 당신 예전에는 이렇게 쌍스러운 여자가 아니었잖아.”안시연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쌍스럽다는 소리에 안시연의 표정이 창백해지더니 마음속에 오랫동안 꾹 참아왔던 답답함과 원망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그녀는 주지혁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내가 쌍스럽다고? 주지혁,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해? 난 당신과 3년을 만났어. 나 몰래 먼저 재벌 집 딸과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애인인 척하라면서 날 해외로 내쫓았잖아. 그리고 당신 여동생이 나에게 약을 타서 먹인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몹쓸 짓을 당했어.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는데? 전화를 받기나 했어? 그날 주차장에서 날 봤지? 내가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했었는데 날 도와주기나 했어?”연거푸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도 주지혁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억지를 부렸다.“난 우리 미래를 위하여...”안시연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우는 얼굴보다도 더 슬픈 웃음이었다.“우리 미래를 위한 거라고? 그래,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리고 싶네. 날 위한다면서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만들어? 뻔뻔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니 온몸이 막
주지혁의 계획은 그렇게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지금 안시연의 가장 큰 걱정은 외할머니였다. 하여 이튿날 아침 바로 외할머니의 간병인을 바꾸고 새 간병인에게 그녀 말고는 아무도 외할머니와 만나게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리고 연정훈이 그녀에게 선물한 가방과 목걸이도 전부 팔아버린 후 문 변호사에게 잘 좀 신경 써달라고 선입금했다.여러 일을 마쳤는데도 주지혁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마치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안시연은 매일 불안에 떨었다.아니나 다를까 이틀 뒤에 주지혁이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연 씨, 예전 일은 더는 따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위브로 와. 우리가 전에 눈여겨봤던 신혼집에서 기다릴게. 나중에 당신이 임신하면 해외로도 보내줄게.”안시연은 역겨운 나머지 주지혁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혁이 낯선 번호로 전화했는데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시연 씨, 내 한계를 시험하지 마.”안시연은 이미 다 같이 죽을 준비까지 마쳤다.“마음대로 해. 할 수 있으면 날 감옥에 처넣어보든가.”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지혁이 살벌하게 웃었다. 안시연은 전화를 끊고 다시 번호를 차단했다.그녀는 책상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긴 했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외할머니가 혼자 남겨지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전화를 끊은 주지혁은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때 가느다란 팔뚝이 주지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조이현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주지혁의 귓불에 키스하며 유혹했다.이틀 전 주지혁은 그녀를 불러와 밤낮으로 아주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이현은 주지혁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왜? 일이 잘 안 풀려?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할까?”주지혁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조이현을 품에 끌어안았다. 조이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안시연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조이현
한 시간 후, 법률 사무소.“때가 어느 때인데 소환을 거절하고 도망쳐? M국에서 블록버스터를 찍는 줄 아나.”한 젊은 여자 변호사가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부승원이 그 소리를 들었다.부승원은 법률 사무소의 파트너로서 다가가 상황을 물어보았다. 변호사 문나경이 한숨을 내쉬면서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했다. 부승원은 중점을 단번에 캐치했다.“안시연 씨?”“네, 그 여자예요.”문나경이 분노를 터트렸다.“그 여자도 참 재수가 없어요. 어떻게 된 건지 자기 사장을 건드린 바람에 그 사장이 지금 괴롭히려고 난리도 아니에요.”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문나경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후 옆으로 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출장 다녀온 연정훈이 비행기에서 내린 지 고작 두 시간 남짓 되었다. 부승원이 전화했을 때 그는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무슨 일이야?”부승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연 씨에게 일이 생겼어.”연정훈은 무덤덤하게 계속 물을 마셨다.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 이젠 안시연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샤워한 탓인지 몸의 에너지가 막 끓어올라 안시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살짝 구미가 당겼다.그는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물었다.“무슨 일이 생겼는데?”“지금 경찰서에 있는데 주지혁이 아주 괴롭히려고 작정했나 봐.”그 소리에 연정훈은 두 눈을 떴고 부승원이 계속하여 말했다.“시연 씨도 참 재미있는 여자야. 외할머니가 위독하셔서 병원에 급히 가야 한다면서 경찰 앞에서 대놓고 도망쳤대.”연정훈은 실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그날 밤 병원에서 안시연이 초조하게 설명하던 가여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주지혁이 외할머니의 수술비를 가로챈 바람에 억울해도 참고 양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위독한 지금 그녀는 감옥에 가게 생겼다.분명 안시연을 본 것도 아닌데 연정훈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전화
안시연은 곤경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연정훈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지난번에도 연정훈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지옥 속에 사는 그녀를 인간 세상에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안시연은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훈은 벌겋게 부어오른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언제든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단 여기서 나가자.”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한여름이라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밖으로 나와보니 석양의 잔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안시연은 마치 오랜 시간 실명했던 사람처럼 갑자기 햇볕을 쬐어 그런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여러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할 때마다 연정훈이 부축해주었다.안시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도 모르게 연정훈의 양복 옷자락을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교수님...”연정훈은 괜찮다고 무덤덤하게 대답한 후 그녀를 부축하여 차에 올라탔다.멀지 않은 나무 밑에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가는 모습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문득 클럽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제야 다 알게 되었다.‘안시연과 붙어먹은 남자가 연정훈이었구나!’주지혁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검은색 벤틀리를 보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어쩐지 날 배신하더라니. 더 높은 나무에 올라탄 거였어!’휴대 전화가 울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조이현의 전화였다.“지혁 씨, 나 배 아파. 병원에 데려다주면 안 돼?”엄살을 부리는 조이현의 목소리에 주지혁은 짜증이 확 밀려왔다. 특히 점점 멀어져가는 연정훈의 차를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이현의 말에 무뚝뚝하게 대답
양시연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양시연의 얼굴로 향했다.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양시연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손을 뻗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빨리 안아줘요.”연정훈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휠체어에서 양시연을 안아 올렸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로맨틱하게 꾸며진 식탁을 보며 연정훈에게 뽀뽀했다.“언제 이렇게 꾸밀 생각을 다 했어요? 너무 예뻐요.”“누가 어젯밤 아들만 보고 있을 때 꿈에서 계획한 거야.”양시연은 뾰로통해진 연정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양시연이 식탁 앞에 자리를 잡자 연정훈이 준비한 요리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 나비와 영준이가 고개를 뿅 하고 내밀었다.‘어머!’양시연은 알파카 두 녀석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너희 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아까부터 있었는데 네가 못 본 거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씨만 보느라 알파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양시연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고 연정훈이 건네 온 스테이크를 한입 먹으며 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리액션을 했다.‘너무 맛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뽀뽀로 답사하려 했다.그런데 스테이크를 먹게 좋게 썰어주고 이제 비빔밥을 비비던 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기분이 나빠서 뽀뽀 서비스는 거절할 거야.”양시연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왜 자꾸 아들한테 질투하고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논리정연하게 말했다.“아들이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해하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다가, 이제 커서 아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건 완전 손해잖아.”그 말에 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내 생기면 난 아예 뒷전일까요?”“그건 모르지.”“그러니까 정훈 씨 말 안 믿을래요.”“나도 아들 노릇 해봐서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잘 알지 않
퇴원 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에는 다들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홍두와 연호민은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연이 가장 활짝 미소를 지었다. 표세연은 두 사람이 양씨 저택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반포기 상태였는데 강남 시티로 간다는 말에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씨 저택보다는 강남 시티가 드나들기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좋았어.’양시연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다가 몸에 곰팡이라도 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에 드디어 병원을 떠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양시연은 집안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었다.태양은 벌써 안방에 안전하게 이송했고 연정훈은 양시연은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했다.본인 침대에 누운 양시연은 몸을 돌려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으로 양시연의 손가락을 겨우 쥐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졌다.“태양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기분이 어때?”“아빠가 너에게 엄청 푹신한 침대로 준비해 줬어.”양시연의 말을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양시연의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발을 버둥거렸다.양시연은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아기가 뭘 해도 귀엽고, 착하고, 천재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그때, 연정훈이 밖에서 양시연의 짐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연정훈이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듣지 못했고 참다못한 연정훈이 불만을 담아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그러자 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잔뜩 삐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양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의 기분을 눈치채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많이 힘들죠? 자, 여기로 와서 좀 쉬어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을 따랐고, 물을 반 컵이나 비우고 다시 짐을 옮겼다.묵묵히 일하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